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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12장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서 있는 당신에게

LNCK 2025. 2. 2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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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서 있는 당신에게 2025.02.23 - YouTube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서 있는 당신에게          삼상12:1~13        2025.02.23

 

※성경에 모세의 은퇴, 세례요한의 퇴장 스토리가 나오듯이, 본문은 사무엘의 퇴장 스토리죠.

그의 고별사를 보면, 자신을 버리고 '왕'을 선택한 백성들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게 아니라 

 

사무엘이 자신을 변호하기보다는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이 걱정하시는 내용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무엘은 개인 감정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중심이 명확하죠.

 

우리도 직워에서 내려올 때도 있고, 자녀를 품에서 떠나보낼 때도 있습니다. *결혼, 입대, 유학

그때 개인 감정에 몰입되면 안 되고,

주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대의를 생각하고 고려해야 된다는 주제의 설교문.

 

.........................

◑삼상12:1~2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사울이 암몬에게 대승을 거둔 이후에, 사무엘이 길갈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어떤 분들이 질문하기를 '아니 이미 사울을 왕으로 선포를 했었잖느냐?  *10:24 
그런데 왜 또 왕으로 세우는 과정이 필요했느냐? 

왕으로 선포를 했을 때 저 사람이 왕으로 구실을 하겠나?' 
이렇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사울이 암몬과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증명해냈기 때문에, 
그를 공식적으로 세우는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오늘 우리가 삼상12장을 읽었는데, 11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래서 길갈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더니 사울과 온 백성이 기뻐하였더라'  11:15 

그러나 단 한 사람은 썩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누구였죠? 사무엘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일장연설을 하는 내용이 본문 12장에 나오는 겁니다. 

백성들이 다 즐거워하는 거예요. '드디어 우리에게도 왕이 생겼다' 
'이방 민족들에게 군사적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는 지도자가 생겼다' 
백성들이 다들 막 환호하고 있는데, 사무엘이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확한 시점이었어요. 
왜냐면 이 순간이야말로, 신정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터닝포인트, 
역사적인 전환점이었기 때문입니다. 

12:1~2절에 사무엘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너희가 요구한 대로 왕을 세웠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한다.' 
'너희 앞에 출입한다'는 말은, 지도자가 돼서 다스린다 라는 의미예요. 

'그리고 내 아들들도 너희 가운데 있다' 사무엘이 왜 이런 말을 했냐면, 
그들이 원래 왕을 요구했을 때,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삼상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처음에 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던 
표면적인 두 가지 이유였어요. 

여러분,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이제 사무엘도 내려올 때가 된 거예요. 나이가 들었다고요. 

하지만 그의 아들들의 비행은, 사무엘에게는 가장 뼈아픈 것이었어요. 
왜냐면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좋은 구실거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왕을 요구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 물 밑에 깔려 있었어요. 
이어지는 3절과 4절 같이 읽어볼까요? 

◑12:3~4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여기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사무엘이 평생을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다스리며 섬겼잖아요. *사사, 제사장, 선지자로서

그런데 여호와 앞과 백성들 앞에서, 일종의 법정에서 자신을 피고인으로 세우면서, 
백성들에게 '내가 무슨 문제가 있었으면 고소고발 해봐라' 
이렇게 굉장히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여러분을 다스렸는데, 
내가 누구의 재산을 탈취하거나, 아니면 권력을 남용하거나,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있느냐? 내 과거에 오점이 있었느냐? 
내 평생에 과실이 있었느냐?' 그런 거예요. 

늘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살았던 사무엘 입장에서는, 
저들이 자신의 때에 신정을 포기하고, 왕정을 선택했다는 것이 너무나 못마땅했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에 수많은 사사들이 있었잖아요. 
사사기를 보면 12명의 사사가 등장했습니다. 
꼭 12명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죠. 훨씬 더 있었을 수 있어요. 
왜냐면 사무엘도 사사에 포함이 되거든요. 그래서 12 플러스 알파인데, 

그 수많은 사사들 중에서, 사무엘은 단연 돋보이는 훌륭하고 모범적인 사사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에요. 

사무엘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냐?' 그러니까, 
백성들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결백하십니다.' 
피고인과 원고인의 증언이 일치하잖아요. 법정 공방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사무엘의 대사를 보면서, 조금은 감정이입이 되더라고요. 
제가 사람들을 이끌어간다는 측면에서 (사무엘과) 비슷한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무엘이 이렇게까지 개인 감정을 개입시킬 문제였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하나님께는 큰 그림이 있었죠.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이렇게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따르는 백성들은 복을 받는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주변에 있는 민족들이 '와 진짜 저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걸 깨닫고 돌아오는...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에 축복(또는 전도)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사무엘의 시대에, 그거(신정)를 백성들이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무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꿈을 다 망쳐놓은 것 같은... 
그런 자책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12장의 그의 말투를 볼 때.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기가 잘못한 게 없거든요. 평생에. 
그러니까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감정적으로 굉장히 복받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비슷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이 성경에 더 있는데, 
여러분 세례 요한도 신구약 중간기 400년의 영적 암흑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 세례 요한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리스도시다'
이렇게 증언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이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혀서 
이제 헤롯에게 죽을 위기에 딱 처하게 되니까 
갑자기 영적인 우울과 의심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마11:3

성령 충만해서 목숨 걸고 예수님을 증언했던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의심으로 돌아섰을까요? 

여러분이 분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사명자로 살아갈지라도, 
내 인생을 뒤집어 놓는 재난과 격변이 일어나면,
사람이 순간 방향감각을 잃게 되어 있어요. 

사무엘처럼 '내가 일평생 한 일이 모두 실패인 것처럼 보이는...' 
내가 내 인생 전체를 질주하면서 최선을 다해왔는데, 갑자기 Dead end를 맞이하게 되면, 
한순간에 영적인 우울과 한기가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죠. 

 

'내가 지금까지 뭘 한 거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살아온 삶, 내가 헌신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다 거부되는 거 아니야?' 

마치 터널 속에 들어가면, 전파가 잡히지 않아서,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멈추는 것 같은 현상이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도 40년동안 광야에서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 동편 모압 들판에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합니다. *신1:3

제가 어제 본문을 묵상을 하면서, 
'모세의 고별설교인 신명기와, 사무엘의 고별설교인 12장이 너무 유사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신명기가 30여 장을 계속 잔소리의 연속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해라.. 쉽지 않을 거다... 만만치 않을 거다...' 
계속 그 얘기하느라고 한 달 사이에 설교하셨어요. 놀라운 노익장입니다. 
모세가 연세가 120세인데, 죽기 전에 한 달 사이에 설교한 걸 
30여 장으로 기록한 게 신명기예요. 

사무엘상 12장도 사무엘이 '나는 이제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니까 
여러분 잘하셔야 됩니다. 잘 하셔야 됩니다' 이 잔소리를 본문에서 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비슷한 것은, 사무엘의 개인 감정에 개입되잖아요. 
그런데 모세도 신명기 1장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신1:37 '여호와께서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모세는 '너희 때문에 내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거다' 이렇게 얘기해요. 
이게 맞는 얘기일까요? 

일부 맞는 얘기긴 한데, 저는 모세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모세 할아버지) 

왜냐하면 40년 광야 여정을 돌면서, 
그 시작점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약속의 땅에 올라가라' 

그런데 백성들이 다 거부하고 난리가 났어요. 
12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서, 백성들이 불순종을 하는 바람에 
40년을 광야에서 뺑뺑 돌게 된 거예요. 

근데 40년을 돌아서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해서 가데스, 40년 전과 똑같은 지역에서 
여전히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이러니까 
모세가 열받아서 반석을 두 번 내리쳤거든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가 성질을 냈다고,
'넌 약속의 땅에 못 들어온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은혜파들은, 모세가 너무 불쌍한 거예요. 
40년 순종하고 한 번 실수했는데, 그거 갖고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시다니 
너무 하신다... 

그런데 저는 모세처럼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모세가 딱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그걸 아셨던 거예요. 

왜냐면 모세가 원래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는데 
그 모세의 혈기를 빼시느라고 미디안 광야에 40 년을 집어넣으셨어요.
40년 모래바람 속에서 혈기가 다 빠져서, 나중에는 기운이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서서 얘기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사람이 됐어요. 출3장

여러분 그 모세가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더라... 
그 정도로 온유해졌다는 거예요. 그 온유한 모세가 
40년 동안 수많은 원망과 불평과 불순정을 경험하면서도 다 받아줬는데, 
어느 날 폭발한 거예요. 

하나님이 '딱 여기까지다. 너 이제 더 이상은 못한다' 이렇게 보신 거예요. 
선발 투수가 야구경기를 9회 말까지 노히트 노런으로 끌고 갔어요. 대단한 거잖아요. 
같은 팀 동료들이 볼 때도, 같은 팀 감독이 볼 때도, 이건 너무너무 훌륭한 투수예요.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9회 말에 마지막 이닝에 마운드에 섰는데 갑자기 흔들리잖아요. 
감독이 주저함 없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선발 투수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서리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감독의 투수 교체 타이밍을 신뢰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순간 '나를 교체하다니..' 이걸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요. 
왜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1회부터 9회까지 그렇게 헌신하고 수고한 것을 
'그거 다 무의미한 거야' 이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엄마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만큼 위대하고 숭고한 일은 없습니다. 
핏덩어리로 태어난 아기를 살려내겠다고... 
어떻게든 그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노심초사 걱정하며 밤을 새면서 아이를 돌보고, 
여차하면 둘러엎고 병원으로 달리는 거잖아요. 

'너 열심히 살아야 된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쓰임 받는 인생이 돼야 된다' 
근데 옆에서 남편은 초 치는 소리를 하거든요. 
'그냥 놔둬.. 지가 알아서 클 거야...' 뭐 이렇게 얘기하죠. 

근데 엄마는 그게 안 되거든요. '얘야, 지금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이건 하면 안 되고...' 

근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둥지를 떠나요. 떠나는 때가 오죠. 날아간다고요. 
그렇게 아이가 둥지를 떠나게 되면, 엄마는 '빈둥지 증후군'에 빠지는 거예요. 
empty nest syndrome 에 빠지는 겁니다. 

제가 여기까지 설교문을 써놓고, 옛날 생각이 났어요. 
벤쿠버에서 이민교회를 살려내겠다고, 정말 목숨 걸고 열심히 목회사역을 했거든요. 
아내는 철부지 아들 둘을 키우느라고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두 아들이 5살, 1살이었는데,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주일날 저는 일찍 교회로 출발하고, 아내는 아이들 챙겨서 1부예배 전에 오는데 
제가 그날 먼저 출발을 했어요. 그런데 1부예배가 다 끝날 때까지 
아내도 아이들도 안 오는 거예요. 그랬더니 아내한테 전화가 왔어요. 

무슨 얘기냐면, 아내가 아이들을 먹이고, 준비시켜 갖고 차에 태워서 와야 되는데 
큰 아들은 차에 태웠는데, 둘째가 안 보이는 거예요. 온 집을 다 뒤졌는데 애가 없어요. 
보니까 2층 난간에서 떨어진 거예요. 2층 난간에 레일이 이렇게 있으면 
그 틈새 사이에, 애가 작으니까 한 15~16개월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로 빠져나가서 애가 떨어졌는데, 밑에 가 돌이었거든요. 
돌에 머리를 부딪힌 거예요. 

근데 아내는 그때 심정을 이렇게 얘기하더라구요. 
'남편은 지금 예배 중이고 설교를 해야 되는데, 도와달라는 소리를 못 하겠다'는거에요. 
그래서 즉시 전화를 못한거에요.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거죠. 

그리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를, 애가 이제 의식이 막 사라져 가는데, 
애를 태워 갖고 병원으로 갈 때, '아들을 이렇게 잃게 되는구나' 
그런 심정이었다는 거죠. 벙어리 냉가슴이죠. 

지금은 너무나 놀랍게도, 감사하게 멀쩡하게 잘 회복이 됐어요. 
근데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 
내 부모가 나를 위해서 뭘 얼마나 가슴 졸이며 희생했는지 기억합니까? 

어느 날 둥지를 떠난다고요. 
그때 느끼는 엄마들의 이 심정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단순히 섭섭한 정도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그래도 잔소리를 더불어드리자면, 

아이를 키우실 때, 여러분이 자녀를 사랑하는 거는 중요하지만, 
너무 집착하지는 마세요. 

남편이 자꾸 초치는 소리 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런 소리가 필요해요. 왜요? 자녀에게 집착하지 말라는 거예요. 

애착과 집착은 다른 것입니다. 애착은 건강한 관계 형성입니다. 
그런데 집착은 건강하지 않아요. 이건 병리적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너는 내 아들, 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란다' 
이 얘기해 주셔야 돼요. 저를 따라해보세요. 
'너는 내 아들, 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란다' 

이걸 아이에게도 계속 얘기해 주시고, 자기 자신에게도 계속 선언해 줘야 돼요. 
왜냐면 아이가 전부인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아이가 사라지면... 전부가 없어지니까 나는 빈털터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공허해지고, 허무감이 밀려오고, 우울감이 생기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란다. 너는 평생의 내가 옆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거야' ... 이 얘기를 계속 해줘야만 
아이도 살고, 엄마도 살게 돼 있어요. 

아이가 어느 날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관계적으로 독립을 하게 됩니다.
마땅히 해야 될 때가 온다고요. 

그런데 오늘날은 자녀를 한둘만 낳아서, 그 아이에게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니까 
관계가 건강하게 분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마보이, 파파걸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평생을 건강하게 동행하기를 축복합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은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 십자를 지고서 힘겹게 올라가시잖아요.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바라보면서 
이제 십자가에 달릴 아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지만 
그냥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요. 

'한국 엄마들은 그러지 못했을 거다...' 
로마 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이놈들아 내 아들을 내놔라..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시다가 멈추셔서 '어머니 진정하세요' 막 이러겠죠. 
여러분 그러지 마시라는 거예요. 

이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주신 길이면. 
놔두셔야 돼요. 하나님이 선택하게 하신 길이면 놔두셔야 돼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의 길이면... 묵묵히 가는 거예요. 
그것이 인생의 결단인 것입니다. 

◑삼상12:5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왕)도 
오늘 증언하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증언하시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자신의 결백을 백성들이 대답하게 만들었고, 
'하나님도, 왕도, 증언하지 않느냐?'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성전에 바쳐진 인생이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어려서부터 평생을, 공생애와 같은 삶, 
개인의 삶이 아니라, public life 공생애를 계속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헌신을 했는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으니까 
배신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어요. 그 순간에 '자기 증명 욕구'가 올라온 겁니다. 

여러분, 인간의 자기 증명 욕구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어요. 
그것 때문에 열심히 살게 되니까!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많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터닝포인트에서 
자기 증명 욕구를 느끼는 분들에게, 세 가지를 권하고 싶어요. 

1) 첫 번째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세요. 
너무 그거를 해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2) 두 번째,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를 하든 간에,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장 정확하게 정직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맏아들이십시오.

여러분 100% 빛이고, 100% 다 잘하는 인생은 없잖아요. 명암이 다 있죠. 
그러니까 감사한 거는 감사하고, 회개할 거는 회개하면 돼요. 
정직하게 자기 인식을 가지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뭐 성격 유형상,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요즘 사람들이 '어려 보여요, 예뻐 보여요, 동안이예요' 
이런 말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듣기에는 좋지요. 근데 정직한 자기인식! 
'아, 내가 50대가 됐구나.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그냥 정직한 자기인식 ... 이게 좀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줄 알아야 된다는 거죠.

3) 세 번째, 여러분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너무 무리한 공언을 하지 마세요. 공약을 남발하지 마세요. 

또한 어떤 일을 마칠 때, 너무 구차한 변명을 하지 마세요. 초라해집니다. 
안 좋은 말로 구질구질해집니다. 그러지 마세요.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일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 리더의 자리에서 건강하게 내려오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모두가 하는 말이 '유종의 미를 거두셔야 됩니다.' 
이 얘기를 반복해서 하는 거예요. 

▲제가 성경 통독하면서 보니까, 모세도, 사무엘도, 세례요한도 
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개인 감정이 개입됐는데, 
그래도 가장 담담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사도바울이더라고요. 

'어떻게 이 분은 이렇게 낙심하지 않고, 자기 동역자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떠나고, 
자기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렇게 담담하게, 또한 당당하게 
그 길을 받아들였을까?' 

저를 따라해보세요. 오직 예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님 본받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도 생애를 생각해 보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려워하셨어요.
당신 마음도 어려워하셨어요. 사람들에게 표현을 안 하신 거죠.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렇게 헌신했던 제자들에게 또 버림을 당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는 순간이... 십자가의 순간이에요. 

왜냐면 아버지께서 그 아들이 외치는데 
'오, 그래 아들아, 내가 건져줄게!' 그러면 우리를 포기하셔야 되잖아요.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서, 친아들을 포기하신 자리가 십자가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를 앞두고 너무나 내면적으로, 감정적으로, 예수님도 힘드셨어요. 
하지만 어떻게 기도하셨는가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그리고는 사명을 받아들이신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왔을 때, 이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인생의 전환점,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신 분들, 
그거를 받아들이시면 좋겠어요. 

'내가 그만 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것이, 주변 사람들 때문인가, 
아니면 악재가 겹쳐서인가?'
 
'내 헌신과 희생이.. 그동안 이렇게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이게 다. 거부되는 것인가?'
그래서 억울하고, 섭섭하고, 화가 나고 못 참을 수 있겠죠.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 내려오게 되든,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셨다면... 겸허히 받아들이세요. 

제일 중요한 것은, '어찌 됐든 간에 하나님이 허용하셨다' 그러면 받아들이세요. 
하나님의 섭리의 차원이죠. 

제가 솔로몬의 인생을 생각해 보니까, 솔로몬은 최고의 지혜자였잖아요. 
그런 최고의 지혜자도, 유종의 미를 거두기 힘들어했어요. 끝이 안 좋았다고요. 

모세도 감정적으로 힘들어했어요. 사무엘도 감정적으로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 앞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딱 이 한 가지 고백이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성지순례 다녀오고 나서, 계속 일정을 달렸더니 
지난주 내내 사실 '얼굴이 뒤집어진다'고 표현하죠. 
얼굴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피부가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이 왜 이 지경이 됐지?' 
이거를 묵상을 좀 하다보니까 스스로 우울해지겠더라고요. 
그냥 세월이 가고 있더라고요. 저도 이제 늙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세월이 가고 있다, 이거를 빨리 인정해야겠다!'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 때, 스스로 괴로운 거거든요.

▲이번에 '목회사관학교'를 하면서 '설교론' 강의를 했는데 
여러 가지 얘기를 했지만, '삶의 메시지가 가장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 주제를 나누었어요.          ☞ <존재론적인 전도>
 
아무리 미사여구로 설득력 있게 설교를 해도 
결국에는 그 설교를 하고 나면 '너는 그렇게 살고 있니?' 

사탄도 '너 그렇게 살 수 있어?' 공격합니다. 
반드시 삶의 테스트가 오게 돼 있거든요. 

여러분 사무엘도 마찬가지고,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터닝포인트 가운데 들어갈 때, 또 나올 때, 
'저 친구가 뭘 잘 할 수 있겠어?' 이렇게 비관적으로 쳐다봐도 

그런 사람들 앞에서 너무 과도하게 자기를 부풀릴 필요도 없고, 자기 증명할 필요 없고,
그냥 삶으로 증명하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스텝다운 내려올 때, 
'저 사람이 한 게 뭐가 있어?'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 할지라도,

이제 내가 힘을 잃게 됐잖아요. 그래서 나를 무시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으로 증명하리라. 내 삶이 증명하리라'

그 외에는 굳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삼상12:6~7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가만히 서 있으라' :7 이렇게 얘기한 것은 
'꼼짝 마!' 이런 뉘앙스예요. 

왜냐면 사무엘은 자신의 정의로움을 1~5절까지 쭉 설명했잖아요. 
그렇게 빌드업 한 위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내신 분, 너희를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게 하신 분, 
너희를 모든 압제자들의 손에서 건지신 분이 누구시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냐?' 

그래서 9절에 보면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

여기서 3개 민족을 이야기하잖아요. 
지도상에 보면, 북쪽으로 하솔, 서쪽으로는 블레셋, 동쪽으로는 모압 
이렇게 딱 세 개만 들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주변의 모든 민족들하고 전쟁을 치렀어요. 
그렇지만 대표적으로 북쪽, 동쪽, 서쪽을 이야기한 것은 

'사방에서 너희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건져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너희가 그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얘기를 사무엘이 하는 거예요. 

◑삼상12:11~13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5대 사사인 여룹바알은, 기드온이죠. :11
'그리고 베단, 8대 사사 입다, 그리고 나 사무엘까지        주1) '베단'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쓰임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너희의 구원자, 너희의 왕 대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을 세우겠다고 고집해서, 결국 왕을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사무엘을 거부한 것인가요, 하나님을 거부한 것인가요? 
사무엘은 마음에 서운함은 있었지만 
자신이 권력을 내려놓아서 서운한 게 아니었어요.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 멀어질 것이 심히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터닝포인트(스텝 다운 지점)에서 
내 감정이 피폐해서 내가 섭섭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이걸 분별해야 됩니다.

▲제가 벤쿠버를 떠날 때 조금은 섭섭한 부분도 있었어요. 
제가 정말 생명을 쏟아부었던 곳이기 때문에... 

그러나 제 마음가운데 충만하고 자유했던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셨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제 기도 제목은 
'하나님, 벤쿠버에 남아있는 이 교회와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인가? 

그 태도에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이셨는지가 드러나는 거예요. 

인생의 중요한 그 변화의 시점에, 
내가 중요한가, 아니면 하나님이 중요한가? 

여러분, 인생의 전환점에서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를 따라해보세요. 
1)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2) 두 번째는 내가 나를 정직하게 알고 있고 

3) 세 번째 '이 일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여러분 건강한 재평가를 받고 싶다면, 시간이 걸려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조급하게 '그래도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평가하냐?'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그래서 사회에서도,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자기 얘기, 하소연의) 사연이 길어지는 사람은, 
내면의 치유가 아직 덜 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해요

뭘 얘기할 때, 자기 사연이 길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그는 회복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큐틴 나눔방의 방장들을 교육할 때 그런 얘기합니다. 
새로운 멤버가 들어와서 1시간, 2시간 동안 본인만 혼자 얘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몇 번은 그냥 놔두게 합니다. 
그런데 이게 습관적으로 계속 끌어간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몇 번 그렇게 쏟아놓고, 그래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면, 
구구절절히 사연 얘기하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아시니, 그것으로 그냥 평안할 수 있는 포인트가 오게 돼 있어요. 

여러분, 사무엘이 자신을 변호하기보다는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이 걱정하시는 내용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무엘은 개인 감정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중심이 명확하죠. 

반면에 백성들은 어떤가요? 
겉으로는 암몬이 저렇게 위협해 오니까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굉장히 애국심과 구국의 열의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표면적인 이유이고요. 
심층적인 이유가 있었죠. 

그것은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더 의지하는 마음들...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더 강력하게 갈망하는 그 마음이, 왕을 구한 근본 이유였어요. 
그래서 이런 거죠. '이거 아니면 우린 안 된다' 
'왕 제도가 아니면 안 된다. 왕이 있어야만 한다' 

여러분, 그런 것이 세상에 있는가요? 
'하나님, 제게 건강을 주세요. 제게 물질을 주세요. 
제 자녀가 성공할 수 있게 해주세요. 행복한 결혼생활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원하는 거 많잖아요. 

인생의 근간이라고 생각하는 거 많잖아요. '이거 아니면 안 됩니다!' 하는 것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아니시면 안 됩니다!' 이 고백으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솔로몬이 인생에 큰 두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죠. 
왕이 될 때, 그리고 왕위를 내려놓을 때. 

1) 왕이 될 때 
솔로몬은 서열상으로 그가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이 아니었는데, 왕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섭리로. 

그때 그가 정말 마음에 겸비하면서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제게 지혜만 주신다면, 
하나님만 제게 지혜의 근원이 되어주신다면... 저는 다 괜찮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 
부귀와 영화와 명예와 권력과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어요. 

2) 그런데 그가 인생이 끝나가고 왕위를 내려놓게 될 때 
하나님께서 '너 그거 내려놔라. 우상들을 너무 많이 섬기지 않았니?' 
'너가 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너무 많아지지 않았니? 그거 내려놔라!' 

못 내려놓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려놓잖아요. 
그리고 나서 나라가 엉망이 됩니다. 남북으로 두동강이 납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나는 이거 아니면 안 됩니다.' 
내가 붙잡고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일단 내려놔라!' 

'하나님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기도 제목이 바뀔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하나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겠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허락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하나님 계획 듣고 싶지 않고요. 제가 원하는 거 주세요'
'하나님과 멀어질지라도 제가 원하는 걸 주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태도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 시간에 기도하겠습니다.

...............................................

주1) 베단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로부터 구원한 이 사사 베단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이견이 있다. 
왜냐하면 '베단'이라는 이름은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1)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활약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 이름이 생략된 무명의 유명한 사람일 것이라는 견해, 

2)대상7:17에 베단이 마길의 후손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길르앗의 '야일'(삿 10:3)을 가리킨다는 견해, 

3) 베단이란 이름을 압돈의 압축형으로 보고, 
곧 사사 '압돈'(삿 12:13)을 가리킨다는 견해

4)'베단'을 '벤-단' (단 자파의 아들)에 대한 표기로 보고, 
곧 단 지파의 '삼손'(삿 13:2,24)을 가리킨다는 견해 

5)'베단'을 '바락'에 대한 필사자의 오기(誤記)로 보고, 
곧 이스라엘을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손으로부터 구원한 사사 '바락'(삿4:6)
으로 보는 견해(LXX, the Syriac, the Arabic)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사사들의 업적이나 전체 문맥, 그리고 문법적인 상황등을 고려하면, 
5)의 견해대로 '베단'은 곧 사사 '바락'을 가리키는 것같다(히11:32). 

즉 대부분의 학자들(Keil, Fay, Smith)은 사본 전승 과정상 필사자들이 
그 단어의 유사성 때문에 '바락'을 '베단'으로 잘못 베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p.117-118, Lange,Commentary)

한편 이 바락 사사는 여사사 드보라와 함께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였다(삿4: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