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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심령의 매임을 받은 이유 2722

LNCK 2010. 11. 2. 19:07

◈바울이 심령의 매임을 받은 이유              행20:22~24               인터넷설교 스크랩/편집



▶생존의 몸부림의 기록?

사도행전을 겉으로만 보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성경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것을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도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이방인)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 차츰 살펴보겠습니다.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마친 시점에서, 뭔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작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황소고집 바울

사도행전13장부터, 사도바울의 1차선교여행이 나옵니다.

2차, 3차선교여행을 지나기까지, 사도바울(이하 바울)은

선교여행 중에는, 한 번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도 베드로와 합의가 있었는데,

베드로는 유대인에게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나누어 선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연 바울은, 행20장 3차선교여행의 막바지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심령의 매임을 받아 라고 설명합니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런데 그의 주변 교회(동역자들)는, 그의 예루살렘 행을 반대합니다.

특히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누가를 포함,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반대했습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21:12


그런데 바울은 거의 황소고집 수준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21:13~14


▶바울이 느낀 ‘심령의 매임’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이 설교문의 주제입니다.

‘심령의 매임’은 .. 자기 영혼에 엄청난 부담과 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저히 안 올라가면 안 되는 강력한 이유!


그것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 사도와의 합의를 어기면서까지도      갈2:9, 저는 할례자,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아가보 선지자와 누가와 일행의 반대를 무릅쓰고 까지도,

무리하리만큼 예루살렘 행을 결단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문 서두에서 사도행전은 ‘생존의 몸부림의 기록’이라 그랬는데,

한 마디로 바울은, ‘이방인 교회의 존폐 위기’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의 생존의 몸부림’이 강력하게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떠가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거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강력히 뭔가 설명해야 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 교회에 대한, 모교회의 인정' 문제였는데,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이 아니라서) 성전/선민/율법에 대해 너무 개념이 없었으므로,

유대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세운 이방교회들을.. 교회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설명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논리인데요...


▶골육친척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증거 해야 했던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설교하려다 보니까

자신의 골육 친척 예루살렘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져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미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믿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러,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즉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것입니다.   ↔"안 믿는"

모든 교회의 모교회, 복음의 시발점이 된 교회,

바로 그 예루살렘 교회로 복음을 증거 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한다’는 말은,

자세히 말하면.. ‘복음의 참된 의미를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에 의해서 기독교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바울이 전한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방 교회를 이상하게 본 것입니다.


저들을 보니 성전에도 전혀 안 오고, 성전을 향해서 기도도 안하고,

아브라함의 씨도 아니고, 율법의 ‘율’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고,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만히 지켜보니.. 저것은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 백성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가 감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복음을 전해서 세운 이방 교회인데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를 인정하지 않거나, 이단으로 정죄해 버리면

그 날로 바울 일행의 수고는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 교회는.. 보니까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 눈에는.. 이방인들은.. 보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서

이런 오해를 시정하기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모르지만, 설교자의 해석입니다. 상당히 일리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 20:24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복음을 증거 하러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교회로. 복음의 시발점이 된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치기 위해서’라는 점을 눈여겨 봅시다.


자기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하는데,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행20:24


바울이 지금,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가가는 이유는,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이 시점은, 3차선교여행이 마치는 시점입니다.


연이어 밀레도의 작별에서 교우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행20:25

라고 말합니다.

뭔가 ‘일단락 되었다’는 암시로 보입니다.

뭐가 끝났으니까, 당분간은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바울은 1, 2,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로마선교여행을 계획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뭘(선교여행을 다) 마치고, 정리하는 마음으로 올라갔습니다.


먼저 행15장에서,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소위 : so called

사도들을 중심으로 이방인 교회에 대해서 용납하는 결의가 있었지만,


바울은 다시 뭔가 강력한 확답, 확인이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와 이방인의 교회가,

달라도 서로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물과 기름처럼 달랐습니다. (이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너무나 다른 성전관


신명기12:13~14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심으면서

내가 택할 그 한 곳에서만 번제도 드리고, 기도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신명기가 정하는 바는 유일 성소/성전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한 번도 예루살렘에 와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인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성전뿐만 아니라, 할례, 율법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고, 성전에 와보지도 않고, 제사를 드린 적도 없고,

거기다가 율법에 율자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관점으로 볼 때,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이러한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조목조목 답변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이방인 교회의 생존의 몸부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도 있습니다.)


유일 성소聖所 문제에 대해서 행6:13-14절을 봅시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여러분, 순교자 스데반 잘 아시죠.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을 고소하는 두 가지 죄목입니다.


▶그래서 행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자신을 변호합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7:2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어디에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까.

예루살렘이 아니고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9~10


이번에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예루살렘이 아닌 애굽에서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에 있는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0~34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내려 오셨습니까. 예루살렘이 아니라 시내 산입니다.

7:44절에 보면, 광야에서도 장막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스데반은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7:48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니 유일 성소를 믿고 있는 유대인 앞에서, 스데반이 살아남겠습니까.

그는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진리의 말씀을, 스데반은 본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핍박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스데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교의 현장으로 간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를 통해서

유일 성소 개념이 깨지고,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에 오지 않아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자유를 누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방에 전한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방인은 유일 성소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2:19절에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니

유대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신 성전은,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 이미 성소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 주셨는데

교회는 유대교의 전통, 유대교의 영,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서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유일 성소(성전)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고요,

두 번째는 유일 선민의 문제에 대한 답변, (여기서부터 http://blog.daum.net/yhbg67/6906565 에 계속)

세 번째는 율법 문제에 대한 답변입니다.



▶마치는 말/ 결과는 이방인 교회의 승리였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인정하기 정말 어려운

이방인 교회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전통을 지닌 자기들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이방인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도바울의 1, 2, 3차선교활동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마음에 부담을 엄청나게 느낀 바울은

1,2,3차 선교활동을 마치는 시점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그가 변론하려고 했던 내용은, 주로 성전/선민/율법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까지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성전/선민/율법 문제로 변론한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없습니다.

올라가자마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정황을 꿰뚫고 있었던 누가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변론 내용을 정확히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소/성전’문제는..

누가는, 행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1천년 전통이 있는 곳이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민 문제, 세 번째 율법 문제는.. http://blog.daum.net/yhbg67/6906565에서 설명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의 승리였습니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자기가 선교한 이방인 교회가, 참 복음적인 교회임을 변론하고 인정받으러 올라갔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유대인 기독교 교회는 문을 닫아 버렸고,

이방인 기독교 교회가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 기독교 교회가 문을 닫아 버렸고,

유럽의 기독교 교회가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를 시작으로..


이것은 복음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적자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서자 이방인을 택하셨습니다.

첩의 자식 같은 이방인들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자, 서자 편이기 이전에,

복음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복음을 붙든 이방인 교회를 손들어 주셨습니다.

유대교 전통을 버리기 어려웠던, 예루살렘 교회는 이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성전/선민/율법 등 전통에 빠져서,

정확한 복음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결론 1~2줄을 쓰기 위해서, 지금까지 내용을 길게 썼습니다만

    소수자였던 이방인 교회가, 다수자인 유대인 교회를 이긴 것은,

    참된 복음을 붙들었던 승리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참된 복음을 붙드는 성도/교회를 세워 주십니다.

 

    참된 복음을 붙들지 않으면, 사도바울의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8

    (그만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안 된다는 강조법이지, 진짜 저주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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