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현상에 대하여 마7:16 10.10.03.설교일부녹취
‘성령의 외적 현상’이란.. 성령의 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강하게 임할 때,
신자에게 나타나는 평소와는 다른 떨림, 표적과 기사 등을 일컫는 말
◑1. 현상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현상이 동반됨에도 불구하고, 현상이 늘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부흥의 역사만 보더라도,
어떤 부흥 때는, (외적)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했고, *현상은 항상 외적인 것임
어떤 부흥 때는, 현상이 약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현상 그 자체는 성령이나 부흥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현상 그 자체는.. 너무 변화무쌍하게 나타나므로
그것을 꼭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의 제1차대각성운동 때는 ‘(외적)현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반면에 제2차대각성운동 때는 ‘(외적)현상’들이 덜 나타났다.
그러면 제2차대각성운동이, 1차대각성운동 때보다, 성령의 역사가 덜 나타났느냐?
아니다. 그렇지 않다.
결과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로 보면,
제2차대각성운동이, 1차보다 회개, 변화 등 놀라운 일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외적)현상은 더 적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실 때 현상이 많은 경우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상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나, 부흥의 역사의 척도는 아니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공식을 만들 수 없다.
▶몇 해 전에, 제가 <1907년 부흥을 재현하자>는 주제의 영상물을 보았는데,
오늘날 한국에 부흥이 다시 오려면,
‘1907년에 왔던 그런 식으로 와야 된다..’
이런 개념을, 그 영상물이 담고 있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다.
저는 그런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2천년 동안 지구상에 있었던 수많은 부흥을 보더라도,
항상 평양대부흥의 모습처럼 온 것은 아니다. 천편일률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부흥 때는 말씀이 강조되었고
어떤 부흥 때는 기도가 강조되었고
어떤 부흥 때는 간증이 강조되었고
어떤 부흥 때는 경배가 강조되었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제각기 시대마다, 장소마다 달랐다.
그 부흥의 열매(내적 변화, 새사람)는 모두가 다 비슷했지만,
그 부흥의 외적 현상은.. 시대마다, 장소마다 다 다양하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
1850년대에 (2차 대각성 운동때)
미국, 북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똑같이 동시에 부흥이 나타났는데,
북아일랜드에서는 현상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반면,
미국과 웨일즈에는 현상이 조금 나타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외적 현상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를 가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상은 너무 다양하고 다르게 나타나므로..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현상들이 부흥의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상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실 때, 혹은 부흥이 강력하게 임할 때
현상이 나타날 수도, 거의 안 나타날 수도 있다. (아멘)
그리고 악령의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개인이 자기에게 현상이 나타난 것처럼, 과장할 수도 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고의로 넘어지고, 울고, 발작을 연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상 그 자체만 보고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든지, 사단의 역사라든지,
현상 자체만 보고는 모른다. 현상 자체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현상 때문에 오히려 공격 받을 수도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 당시에 엄청난 공격을 받았는데,
따지고 보면, 그의 신학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고,
그의 인격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고,
(그가 원하지도 않았지만)
저절로 나타난 기이한 외적 현상 때문에.. 외부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에 우리는
성령의 역사 때 동반되는 어떤 (외적)현상을 보고서,
사람들을 좋게/나쁘게 판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뭘 가지고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까? ↙
◑2. 열매를 보고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한다.
▶성령의 역사는, 현상을 가지고 분별하는 게 아니다.
성경적 원리로 보면,
하나님은 열매를 가지고 분별하라고 하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6
저런 게 무슨 하나님의 역사냐?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에서 떼굴떼굴 구르는 것이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
그 구르는 현상을 보고서 성령역사다/아니다.. 라고 분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열매를 보고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떼굴떼굴 구른 사람이,
그 다음부터 자기 삶이 점점 변화되어,
이전의 악습을 끊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화되어가는 삶을 살면..
그 구른 현상은.. 참된 성령의 역사요,
교회에서 집회시간에 성령이 임했다고 떼굴떼굴 굴렀는데,
집에 가서, 또한 직장에서
이전의 악습이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면,
그가 구른 현상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자기 기분이요, 순간적 감정의 분출이었다.
▶외적 현상을 보고서, 외모를 보고서..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탈을 쓰고 온다고
외적으로 모양은 얼마든지 좋게 보여주고,
광명한 천사로 변장하고 온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외적 모양을 가지고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구분하면,
성경적 분별법이 아니다.
그러면 걸려 넘어지게 된다.
여러분, 외적 모양을 가지고 구분했더라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다 거짓선지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사야.. 벌거벗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 당시 사람들은, 그래서 그 선지자들을 거절했는지도 모른다.
모양과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니까..
그리고 대신에 거짓선지자들을 참 선지자로 받아들였다.
모양과 외모를 보니까 세련되고 매끈했다.. 그렇게 속게 된다.
예레미야는 멍에를 메고 다녔고,
에스겔도 진흙판에다 예루살렘 그려 넣고,
한쪽으로 누워서 390일, 다른 쪽으로 누워서 40일.. 이런 기행奇行을 했다. 겔4:1~
머리카락을 잘라서 바람에 날리는가 하면,
그리고 겔1장을 읽어보시면,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기록했는데
이게 성경이니까 지금 우리가 믿지,
만약 오늘날 누가 이렇게 설명하면.. 누가 봐도 명백한 이단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현상 그 차체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나타났던 열매를 보고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그들의 예언이 그대로 맞았고,
그들이 대언한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이 드러났으므로..
시간이 지나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참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인정하게 되었다.
만약 외적 현상만 보고서, 그들을 판별했더라면,
아마 참 선지자들은.. 모조리 거짓선지자로,
반대로 거짓선지자들은.. 모두 참 선지자로 판별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외모만 보았을 때!
외적 현상이 아니라, 그들 사역의 열매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라고 기억하는데 (기억이 불분명하다.)
그의 집회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땅바닥에 쓰러져서
머리를 땅에다 한 시간 동안 연신 박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죽은 것처럼 몇 시간 동안 뻗어있고,
그런 일들(현상)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웨슬리의 사역을 비방했다.
물론 반대로 그것을 보고, 성령의 역사라고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열매를 보니,
과거에 그가 알코올중독에 기회만 되면 아내를 구타했는데,
그런 현상이 나타난 다음에 그 악습이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열매를 보니까, 그게 성령의 역사였다고 판별되는 것이다.
◑3. 성령의 외적 현상을 추구하지도 말고, 현상을 무시하지도 마시라.
▶1. 성령의 외적 현상을 추구하면 안 된다.
성령운동이 종종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현상을 의도적으로/고의적으로 추구할 때이다.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외적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지..
자꾸 우리 모임에
기적적인 병고침,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기를 고의로 바라면,
연출도 하게 되고,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엉망이 되고 만다.
▶2. 반대로 성령의 외적 현상을 깡그리 무시해도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을 소멸해 버리게 되고,
성령의 역사를 차단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치유를 대적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성령의 현상을 보고서 너무 칭송/너무 비방하지 마시라.
그 나타나는 현상들을
너무 우러러보고서 칭송할 필요도 없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된다.)
너무 무시해서 비방할 필요도 없다. (내가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다.)
부흥이 임할 때마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그 현상들은.. 부흥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다.
외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비방거리(구실)로 삼으니까 그렇다.
실제로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요, 신학자로 인정받는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요한 웨슬리도, 조지 휫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분들은, 당시에 엄청난 반대와 핍박을 받았는데,
그 주요 이유는, 주로 나타난 현상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오히려 비방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현상 때문에 공격 받는다.
그러므로 성령의 현상이 나타난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 것이다.
마냥 싫어할 일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날 때,
너무 칭송할 필요도, 너무 비방할 필요도 없다.
현상은 그저 현상이다. 현상보다는 열매에 주목해야 한다.
◑4. 성령의 외적 현상이 나타날 때는..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라
위에서, 모든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 현상은 너무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분별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현상을 의도적으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현상을 거부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놓치거나 소멸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현상은 그저 현상으로 인정하고, 성령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는 현상을 구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오시기를 구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만져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시기를 구한다.
우리는 현상을 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구한다.
그런데 현상이 동반될 때가 있다.
안 나타나도 상관없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현상이 나타나도/안 나타나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나타나면 어떻게 하느냐?
현상은 현상대로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된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내 삶을 조정해 나가는 와중에
나타나는 현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기적적 치료가 나타날 수도 있고,
소리(비명)을 지르며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냥 부정할 필요도 없이, 그런 것을 의도적으로 추구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놔 두면 된다.
개척 초기에
우리 화요모임 할 때, 좀 가관이었다.
어떤 사람은 울부짖어 우는 사람,
어떤 사람은 반대로 웃는 사람,
어떤 사람은 신음소리 비슷하게 내는 사람,
저는 앞에서 인도하는 목회자로서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저희 교회 성도는 숫자가 작았고,
대부분 외부에서 오신 성도님들이었는데,
그때 우리가 상가 3층에 있었는데,
소리/괴성/흐느낌이 옆 가게에 다 들렸다.
심한 경우에는 2층 상가에, 1층 상가에, 인근 아파트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우리교회가 눈총을 받는 것이었다.
‘저 교회는, 무슨 교회가 저러나? 이상하다...’
목회자인 제 입장에서는,
우리 교회 성도들도 아니고,
괜히 이상한 안 좋은 소문이 주위에 나가면,
개척교회 상황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나님처럼 현상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 그 말씀도 생각났다.
물론 교회 전체를 어지럽히거나 집회를 방해하면.. 제지해야 하지만,
그게 아닌 상황에서
저렇게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참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제 마음의 결정이 이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집회가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제 체면이 될 대로 되라는 것이었다.
제게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갔다.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내가 망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감수하기로 했다.
지금 그 때를 되돌아보니,
저는 확신한다.
제가 그 때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좋은 소문 나기 위해서,
그런 성령의 나타나는 현상들을 제지하고 중단시켰더라면,
그러면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교회 사역 중에서 나타난 성령의 모든 역사들이
대부분 다 중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성령사역을 통해서 치유되고, 변화되고 있는데,
그런 역사들도 모두
그때 다 중단 되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성령을 소멸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저는 그때 깨달았다.
현상을 일부러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은.. 현상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그냥 놔 두고),
하나님만을 추구하여 나가면서
사람에게 듣는 평가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내 명예, 내 평판, 내 머리를 드신 것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그렇게 주 앞에 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요, 믿음 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평가, 사람의 평판을 두려워하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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