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어라! 막13:28~37 출처보기, 정리
깨어있음이란?
◑1. 주님께 대해서는 몰입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것
▲아인슈타인의 수표
1920년대 초 독일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이 독일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지인들이, 독일의 경제 상황을 전해 듣고
아인슈타인의 생계를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돈을 조금씩 모아서, 수표로 바꿔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 보내진 수표를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났는데도, 도대체 돈을 받은 사람이 잘 받았다는 전갈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보낸 지인들이 걱정에 사로잡혔어요,
‘이건 분명히 아인슈타인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아니고서야 돈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돈 받았다는 전갈을 보내지 않느냐?’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가 어떻게 수소문 끝에
아인슈타인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지인들이 이 사람에게 염려를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생계를 염려해서 돈을 보냈는데 잘 받았다는 응답이 없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설마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돈을 보내지는 않았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당연히 아인슈타인에게 직접 보냈지’
‘그러면 어떡하느냐, 빨리 아인슈타인의 부인에게 전보를 쳐라’
해서 이 사람들이 부랴부랴 아인슈타인의 부인에게 전보를 쳤더니,
부인이 깜짝 놀라서 아인슈타인의 서재에 들어와서 뒤지기 시작합니다.
서랍을 뒤지고 온통 다 뒤져도, 수표가 보이질 않습니다.
쓰레기통까지 다 뒤져 봤지만, 여전히 수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낙담을 하고, 책을 읽고 있는 아인슈타인을 원망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데,
아인슈타인이 책을 읽으면서, 그 수표를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온 나라 안이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사정이 어렵게 되고
아인슈타인의 집의 생계가 근근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수표를 돈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온 편지라서 뜯어보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편지를 읽기도 했겠지요.
그런데도 그 수표를 보면서,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미국으로 와서 살 때는, 록펠러 재단에서 1500불의 수표를 발행해 주었는데,
1940년대 1500불이면 엄청난 돈이지요,
그 수표도 역시 책갈피로 쓰고 있다가
책하고 수표를 같이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수표라고 하는 게, 군침이 흐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경제형편이 그럴 때…
그런데 그 수표의 효용가치에 대해서, 아예 의식 자체가 깨어있지를 않는 겁니다.
수표를 바꿔서 무엇도 살 수 있고, 무엇도 살 수 있고..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런데 수표의 맛, 돈의 가치 자체에 대해서.. 아예 의식이 죽어버린 상태인 겁니다.
그러니까 책갈피로 쓰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모든 방면에 대해서 다 잠자고 있은 게 아니에요.
물리학에 대해서 너무너무 깨어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깨어있다고 하는 것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겠습니까?
몰입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우리는 '깨어있다, 잠자고 있다'의 의미를 살피는 중입니다.
물리학 연구에 몰입되어 있고, 물리학 연구에 깨어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면에 대해서는 의식이 잠자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서 ‘깨어있으라’고 하실 때,
이 ‘깨어있다’는 말과, ‘잠잔다’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이 꼭 육체가 ‘잠잔다’ 또는 ‘깨어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래서 위의 아인슈타인의 예를 통해
‘잠잔다’ 또는 ‘깨어있다’는 의미를.. 좀 다른 각도로 해석해 봅니다.
즉 ‘의식이 깨어있으라’는 얘깁니다.
의식이 깨어있다는 얘기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대해서 갖는 관심처럼, 의식이 몰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잠자고 있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수표를 만지면서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처럼,
물질에 대해 그는 ‘잠든, 깨어있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가 물리학에 너무 심취하고, 몰입하다 보니까.. (깨어있다 보니까)
그 이외에 세상 것에 대해서는, 잠자는 상태가 된 거죠.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 ‘잠자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의미라고 해석해 봅니다.
주님 임하심과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 외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버리는 상태..
그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2. ‘재림’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해 깨어있는 것
▲그러면 우리가, 왜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를 못할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아예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지 않는 이유는
아예 평소에,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깨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 아닌데!, 나는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는데?’
그게 깨어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설명해 봅니다.
제가 강릉에 있으니까 말씀을 듣던 분들이나 지인들 중에
저를 만나러 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어떤 분A는, 서울에서 출발해서 강릉 왔다가
길면 네 시간 이렇게 있다가 가시거든요?
그 동안에 제 근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제게 전화를 걸고 저를 만나서, 대면하여 식사하고, 차 마시면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제 근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를 않습니다.
제 근황에 대해서는 의식이 깨어있지를 않는 거예요.
4시간 동안, 계속 당신 말씀만 풀어놓고 가십니다.
저를 만나고, 오래 시간을 가졌지만, 제게 대해서는 ‘깨어있지 못한’ 겁니다.
굳이 깨어있다는 표현을 쓰자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어있고’,
제게 대해서는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B는, 친구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아예 당신 얘기는 일절 하지 않으시고,
‘아, 그랬어? 저랬어?’ 하고 제 얘기만 묻습니다.
그런 분도 계세요.
그러니까 온통 그분의 의식은, ‘저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기도하고,
나의 상황을 아뢰고, 내 상황을 개선시켜 주시기를 바라고...
전부 다 예수님과 기도를 통해서 대화하고 있지만
내 상황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것이에요.
또 세상 형편에 대해서만 ‘환하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해서 깨어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주님이 계시고 다스리시는 천국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되는 겁니다.
어차피 재림은, 우리가 그 때를 알 수 없으니까,
주님에 대해서 깨어있으면,
주님이 지금 다스리고 계시는 천국에 대해서,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깨어있으라’는 이 말씀은 막13:35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깨어있으려면, 그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때를, 시계바늘 끝을 맞추는 것처럼, 그렇게 깨어있으라는 뜻이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깨어있으라는 것이고,
바꾸어 말하면 그 얘기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의 수표처럼 잠자고,
천국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처럼 몰입해라!’
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이 세상일에.. 우리가 몰입되어 있고, 즉 환하게 깨어 있고,
주님과 천국에 대해서는.. 우리가 곤히 잠들어 있다는 겁니다.
날마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게 주님과 천국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그저 자기 세상일에 몰입되어 있어서.. 그거 잘 되라고, 드리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내 자식에 대해서 깨어있고, 내 사업에 대해서 깨어있고,
내 건강/장래 문제에 대해서 바짝 깨어있습니다,
거기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실제로 계신 천국에 대해서는.. 완전히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랬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
◑3. 세상 일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깨어있다는 것이 몰입한다는 얘깁니다.
모든 잡념, 방해물들을 차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어느 한 곳에 자신의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것,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아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깨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세상에 대해서 깨어있어요.
세상에 대해 깨어있다는 것, 이 세상 삶에 몰입되어 있다는 것은
그게 바로 ‘내 마음의 더러움’이라는 겁니다.
내 마음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몰입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것에 몰입되어 있는 상태가 더러움이요, 바로 죄입니다.
하얀 실크블라우스에, 김칫국물을 잔뜩 묻히고 있다면,
(김칫국물이 나쁜 것은 아니요, 실크블라우스도 더러운 것이 아니지만)
실크블라우스에 김칫국물이 묻으면.. 둘 다 더러워지고, 못 쓰게 되는 겁니다.
‘세상’도 나쁜 것이 아니요, 가치중립이라 보고요
‘나’도 더러운 사람이 아니지만,
내가 세상에만 몰입되어 있으면.. 그게 둘 다 더러워지고, 못 쓰게 되는 겁니다.
‘내’가 깨끗해지고, ‘세상’도 아름다운 것이 되려면,
내가 오직 주님께만 몰입되어질 때, 그 우선순위가 분명할 때,
둘 다 깨끗하게 보존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몰입되어(내가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오실 때,
그 더러움을.. 주님이 이제는 견디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에요.
◑4. 생명의 면류관 얻기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계2:10
‘생명의 면류관’
아마 일제시대 때, 옥중 성도들과 그 외 성도님들이,
가장 많이 외우고, 또한 실제로 붙들고 살았던 요절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면류관’은
순교자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종말이 오기까지,
성도는 이 세상에서, 룰루랄라 휘파람 불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곳곳에는,
성도에게 ‘견뎌야 하는 시험’이 있다고 말씀/경계합니다.
그래서 인내 perseverance가 필요하고,
인내로 견딘자만.. 생명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순교자들이 쓴다는, 그 면류관을 똑같이 받아 쓰는 것입니다.
약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초점은, 종말과 재림의 그날까지,
(깨어있어야 하는데, 같은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자 되고, 성공해서, 보란 듯이 사는 성도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참고 견디라.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향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요? 방향이 엉뚱하면, 열심 낼수록 손해입니다.
당신은 오늘 ‘고난 중에 인내하며’ (참고 견딘다는 뜻, perseverance)
생명의 면류관을 쓸 그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된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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