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앞 시간에 사진 한 장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지 못했는데, 지금 설명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죽고, 라마에 매장되었는데, 그의 무덤 위에 지금 모스크 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시면 모스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근에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모스크가 있고, 각기 뾰족한 기도탑(미나렛)이 있고,
한 개가 더 높게, 산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번은 저희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이스라엘 가이드가
다른 모스크를 가리키며 ‘저것이 사무엘의 무덤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제 파슨은 ‘미안하지만, 당신이 잘못 가리킨 것 같은데, 다른 쪽 것이 맞아요’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그 가이드는 ‘당신은 사무엘서가 상권과 하권으로, 2개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같네요.’ 하하하
▶제가 1강에서, 전체 이야기를 대략 설명하였어요.
이제 당신이 사무엘상하를 읽으신다면, 아주 내용이 친숙하실 것입니다.
거기서 어떤 패턴을, 여러분은 보게 되실 것입니다. 특히 다윗의 일생의 패턴입니다.
왕궁에 들어갔다가(In), 거기서 나오고(Out),
다시 꼭대기에 올라갔다가(Up), 다시 내려오는데(Down), 아주 슬픈 이야기이지요.
그와 함께, 전체 이스라엘이, 다윗 시대의 영화를 그 후 한 번도 다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남북 지파들 사이에 긴장이, 솔로몬 때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고 나자, 내전이 발발하여, 하나이던 나라가 두 개로 나눠졌습니다.
그 남북간 긴장은, 따지고 보면 다윗이 내리막길로 달리기 시작한 후부터, 발생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의 제일 큰 잘못은, 교만하게 백성의 인구수를 세었다는 것인데,
이때가 사단이 그를 시험한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다윗과 밧세바의 음행은, 사단이 직접 주도했다기 보다는,
이는 완전히 다윗 자신이 육신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사탄이 유혹했다고 직접 언금 안 나옴
하지만 몇 년 후에 사단이 다윗을 시험했습니다. *이때는 사탄이 주도
사탄이 ‘다윗, 너는 정말 대단해. 네가 지금 다스리는 백성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세어보지 그래?’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다윗이 인구수를 세었는데요.
그저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문제는 그 근본 동기이지요. ‘왜 세어보는가?’입니다.
<민수기>에서도 인구수를 세었습니다. *그때는 동기가 아무 잘못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다윗이 수를 세어 보는 것은, 전쟁준비 한다거나, 다른 원인이 있지 않고,
자기 교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고 싶어서였어요.
범죄는 언제나 결과가 무섭지요.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전염병 재앙을 가져왔고,
결국은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니, 전염병이 이로써 멈추었습니다.
▶다윗이 또 한 가지 일을 했습니다. 제가 사진 두 장을 보여드립니다.
다윗이 이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왔고,
이 그림은 예술가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성이고, 이것은 궤를 옮길 때의 행렬인데, 다윗의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었지요.
그의 아내 미갈은 그가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로써 미갈은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였어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옮겨 왔고, 예루살렘 성 위쪽에 어떤 편평한 지대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높은 지대로, 타작마당이 있었고, 주인은 아라우나였습니다.
거기에 강한 바람이 잘 불어서, 타작할 때, 알곡은 남기고, 쭉정이는 날려 버리지요.
다윗은 거기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에, 이상적인 장소로 보았습니다.
아라우나는 ‘만약 성전을 짓는다면, 제가 이 땅을 그저 드리겠나이다’라고 하였어요.
다윗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릴 때, 값없는 것으로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삼상24:24
그래서 돈을 지불하고 그 땅을 구입했고, 거기가 도시 높은 곳에 위치한 성전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가 전쟁에 나가서 피를 많이 흘려서 입니다.
성전이 평화의 사람이 건축해야 하는데,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살렘’은 ‘샬롬’이죠. *‘이르’는 city, 이르+샬롬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은 평화의 사람인, 너의 아들이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히브리어로 ‘샬로모(peaceable)’인데, 샬롬에서 나온 말
그래서 다윗은 성전 건축할 계획을 작성하고, 좋은 목수들 모집했고,
좋은 재료들 거두어 들였는데, 레바논에서 온 백향목, 그리고 돌들, 모두가 준비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예루살렘의 언덕에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해야 했습니다.
이게 <사무엘하>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이죠.
다윗이 그 타작마당을 샀습니다.
그렇지만 전체 상황은 내리막길로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 강의에,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당신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읽으실 때, 어떤 시각으로 보십니까?’
이것을 그저 평범한 이야기로만 보십니까?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읽어야 하며, 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까?
이 이야기들을 읽는데 있어서, 우리가 어디에 포인트를 두어야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은 고대 역사이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들이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는 6가지 관점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사실 6가지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관점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의 이야기와 같은,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여섯 측면이 있다는 것을 제가 발견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일화적으로 읽기>입니다. *逸話, 흥미로운 이야기
성경의 이야기를,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 것인데, 특히 어린아이들이 읽기 좋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읽어 주지 않지요. 하지만 어른은 읽을 수 있고요.
읽으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성경 이야기를 근거하여 많은 영화를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성경의 이야기에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전쟁 이야기 같은 게 들어있기 때문인데,
어떤 스토리는 아주 선정적이지요.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성경에 근거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은, 순전히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일 학교에서는, 아마 이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이야기로 들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항상 이런 찬송가를 불렀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로 가득찬 책 한권을 주셨는데,
이 책은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 책이며,
먼저는 동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황금 도성의 이야기로 마치지요.
아빠 엄마가 보는 이야기도 있고, 아이들이 보는 이야기도 있죠.
죽음이 가까운 분들이 읽기에도 좋은 책이고,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읽거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책입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지요.
이 찬양을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Maria Matilda Penstone이 쓴 노래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이야기들은, 확실히 최고 경지의 아주 훌륭한 이야기들입니다.
단어 구사와 문체가 아주 뛰어나서, 읽으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성경을 읽는 이유가, 다만 이야기/스토리가 재미있어서 입니까?
물론 아니겠지요.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둘째 <큐티식 성경읽기>. 일부 사람들은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데,
이때 성경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꾸 자기 개인에게 주시는 어떤 메시지를 찾으려 하지요.
신자들이 대개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저는 이렇게 읽는 방식을 ‘점성술식 성경읽기’라고 부르고 싶어요. “the horoscope method.”
여러분이 매일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적당한 메시지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제 말뜻을 이해하시죠?)
*관련글 : 개인적 신앙을 벗어나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을 읽는데, 어떤 때는 정말로 이런 방식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읽는 성경구절들은, 당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당신이 마음으로 원했던 구절입니다.
만약 당신이 제대로 성경을 읽으려 한다면,
성경이, 당신에게 합당한 구절을 찾아서, 말씀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명중 확률이 아주 높을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마리아’라는 여자를 사랑했는데,
그가 성경을 읽는데,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했지요. 마1:20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저는 이런 오해의 고전적인 예 한 가지를, 지금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어요.
왜냐면 지난번에 다른데서 얘기했을 때, 마침 그런 사람이, 강좌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잘못 적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가 목매어 죽었다’는 곳을 먼저 읽고, ‘오, 이게 음성인지도 몰라’
그리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곳을 읽으면.. 그러면 안 되지요.
좋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전체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에 합당한 구절만 찾아서 읽으려 한다면,
그럼 <사무엘상>의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당신의 가족에 늙은이가 없게 될 것이다.’ 삼상2:31
이것이 당신에게 적합한 메시지, 당신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까?
사실 이것은 어린 사무엘이 엘리에게 말씀한 예언이었는데요,
예레미야가 바로 엘리의 후손이에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17세때부터 선지자로 섬겼어요.
그는 자신이 혹시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저주가 집안 대대로 내려 간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래 구절도 잘못 적용될 수 있는데요.
‘네 손이 무엇을 만나든지, 그 일을 하라(전9:10) 이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지만 이튿날에 계속하여 성경을 읽는데,
‘사무엘이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는 구절을 읽었어요. 삼상15:33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인가? 그렇다면 내 인생에서 아각이 누구인가?’
제 말뜻을 이해하시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방법을 우습게 여깁니다.
저도, 하나님이 어떤 때는, 성경 한 구절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목적 때문에, 성경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성경을, 별개의 각각인 구절들을, 한 통에 다함께 섞어놓은 무더기로 보는 방식인데,
*그 중에 하나를 골라잡으세요.
그게 아니라.. *성경은 문맥으로 봐야 합니다.
비극은, 성경을 장과 절로 분리한 것이, *편리하라고 그랬겠지만요.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서,
‘구절 중심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맥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요.
만약 그렇게 구절 중심으로 읽으면, 성경으로부터 얻는 게 아주 적어집니다.
그건 어리석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한 구절을 집어서 주실 때가 있기는 하지만요.
▶3. 세 번째 성경의 이야기를 읽는 방법으로,
설교자들이 보통 이런 방법으로 사무엘서를 읽고 연구하지요. 바로 <인물별 연구>입니다.
성경의 아주 큰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성경은 매 인물들의 선한 점과/ 약한 점을 모두 다 말씀합니다.
그들의 실패와/ 성공, 그들의 미덕과/ 죄악, 그들의 강점과/단점을 모두 정직하게 지적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인물별로 읽고 연구하면, 우리에게 매우 도움을 줍니다.
야고보가 신약성경에서 ‘성경은 거울과 같아서, 성경에서 자신을 볼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을 쳐다봄으로써, 교훈을 배울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약1:23~24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그 인물들의 잘한 점과 잘못된 점을 양면 다 거울처럼 지적하는데,
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외가 있는데요, 성경에서, 예수님 말고,
결점이 하나도 없이 제시된 분이, 유일하게 딱 한 분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요셉입니다.
만약 당신이 요셉의 일생을 읽고 연구하면, 요셉이 예수님의 일생과 아주 병행(평행, 닮음)됨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모함을 당했고, 어려운 곤경에 처해서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서 자기 백성의 구원자가 되고, 애굽을 다스렸습니다.
요셉의 모든 일생이, 예수님과 너무 같은 모형type입니다.
구약에서, 요셉 한 사람만 단점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인격을 성경을 읽으면서 살펴보면,
그는 시작부터 강점을 나타냈는데, 잘 생기고 키가 컸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니, 그가 딴 사람으로 변화되면서,
그래서 그의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격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는데,
자기 주변 사람이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보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약점이기도 하지요.
이로 인해 사울은, 주변 사람과 인간관계가 좋지 않게 되고,
마지막에 성령이 떠나시고, 악령이 들어갔지요.
다윗을 읽고 연구하면, 그의 키워드는 바로 ‘마음’입니다. 다윗은 선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키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컸지만, 다윗은 선한 마음이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다윗을 연구하면, 그의 ‘선한 마음’을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선한 마음을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삼상16:7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선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인격을,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는 야외 활동을 좋아했고, 노동자(당시 목동)이었으며,
음악에 능숙했으며, 매우 용감했으며, 그래서 혼자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 동안이나, 그는 대화하거나 노래할 대상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외롭게 하나님과만 교제했습니다.
그 오랜 외로운 교제의 세월이,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는데, 준비기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성경을 읽다가 멈추고, 밑줄을 친 것은
다윗이 수없이 ‘하나님께 물었다’고 언급한 부분입니다.
어떤 결정을 앞두고도,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한 원인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합했고,
어떤 일도, 자신이 혼자 서둘러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로 의논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그가 많은 잘못을 범하였지만, ‘하나님께 물은 점’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계속 사랑하신 이유였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해도, 남을 너그럽게 대하였습니다.
그는 적들이 죽는 것을 보면 마음이 슬펐고,
심지어 사울의 아들 중 하나가 죽임을 당했을 때도, 그는 아주 분노하였습니다.
사울이 그의 대적이었잖아요.
이렇게 그는 적들을 너그럽게 대했고, 용서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는 또한 용감한 사람을 존중했고, <사무엘서>에는
다윗이 존중한 많은 사람들의 명단이 몇 차례 나오는데,
거기엔 그의 용감한 세 명의 부하 명단도 나옵니다.
다윗이 쫓기는 기간이었어요. 그가 한번은 아주 어리석게 말했지요.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정말로 한 모금 마시고 싶구나. 그 우물의 물이 진짜로 마시기 좋았는데’
다만 고향이 그리워서 한 번 하는 소리였는데,
하지만 그의 제일 용감한 세 용사가, 그 말을 듣고서, 적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서, 한 밤중에 베들레헴에 가서,
그 우물의 물을 떠서, 가져왔지요. ‘여기 베들레헴의 우물물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으며 하나님 앞에 부어 드리며 말했어요.
‘이것은 너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져온 물이니, 나는 이 물을 마실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이렇게 그는 자기 용사들을 존중했어요.
다윗은 자기가 존중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갖고 있었고,
<사무엘하>는 마지막 부분에,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매우 존중하였는데, 이 점이 사울과 완전히 상반되지요.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사람들을 존중하기를 좋아했어요.
사울은 하나님께 대해 선한 마음이 없었고, 자기 주위의 뛰어난 사람들을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다윗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비록 두 사람 모두가 시작은 잘 했지만, 마지막이 모두 좋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사무엘서>중의 여자들을 읽고 연구해 보세요.
한나의 이야기도 아주 감동적이지요.
하나님이 그가 아들 하나를 낳을 것이라고 할 때, 그가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후 15세쯤 된 젊은 여자가 있는데, 이름은 미리암(마리아의 히브리어)입니다.
우리는 그를 마리아라고 부르지요.
그도 우리가 ‘마그니피캇’이라 부르는 노래를 지었는데, *소위 ‘마리아의 찬가’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이 ‘마리아의 노래’가 불려지고 있습니다.
*Magnificat : Magnify의 라틴어 ‘내 영혼이 주를 높이며’ 눅1:46,
하지만 마리아의 이 노래는, 한나의 노래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무엘상 1장을 읽을 때, 이 노래를 주의해 보셨습니까?
또한 아비가일도 읽고 연구해 보세요. 이 여자는 연구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앉으신 자매님들은 반드시 성경을 읽고, 연구해 보시는 게 좋습니다.
다윗이 그의 남편(나발)의 집에 와서, 자기의 군대에게 음식을 제공해 달라고 하니,
그의 남편이 ‘이 다윗이 자기가 누군데?’라고 하였어요.
그는 다윗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성경은, 아비가일을 나발의 ‘아내’로 말씀하는데,
데이빗 파슨 박사는, 영어 강의에서 ‘딸’로 말합니다. 아마 잠시 헷갈리신 듯. 번역은 ‘딸’→‘아내’로 고칩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히브리어 성경 사본에는 ‘딸’로 나오는지도 모르겠지요.
그래서 다윗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어요.
하지만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다윗을 맞이하러 나왔지요. 큰일 날 뻔했지요!
그는 참으로 남자를 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여기에 참석하신 자매님들이 만약 남자를 대하는(다루는) 방법을 알고 싶으면,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그의 말이 너무나 현명해서, 남자들이 꼼짝 못합니다.
그는 다윗에게, 남편은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나발에게 너무 화를 내며, 심각하게 응대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어요.
그렇게 해서 자기 남편의 생명을 살렸지요.
그런데 나발은, 얼마 안돼서 심장 발작으로 죽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처신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이런 <인물들>을 읽고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의 ‘개인 인격적 측면’이든지, 혹은 그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적 측면’이든지
두 방면 다 읽고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제일 좋은 성경 읽는 방식은 아니지요.
이 방법이 도움은 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닙니다.
▶4. 네 번째 성경연구 방법은, 이스라엘 <역사>를 읽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한 가족에서→ 한 부족으로→ 또한 나라로→ 마지막에는 왕국empire으로 변천했는지를 보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다윗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제게 Tom Houston 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 오늘날의 정치인들을 위하여, 다윗에 관한 책을 썼어요.
그 책이 아주 훌륭해요. 다윗이 어떻게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길렀고,
어떻게 사람들과 협력해서, 정부를 잘 운영했는지에 대하여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정치지도자들이 리더십에 관해 연구하는데 있어서, 아주 뛰어난 책입니다.
우리가 앞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이 계속 변화되어 출현했다는 것을 논했습니다.
즉 족장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왕까지,
그들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인도해서 계속 상승세로 올라갔고,
결국 그들은 약속의 땅을 완전히 점령하기까지 이르렀는데,
이렇게 역사를 읽고 연구하는 것은, 아주 좋은 연구방식입니다.
우리는 <사사기> 마지막에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지금은 왕이 있지만,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도자를 읽고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가치가 있는 일이지요.
그들의 정치 구조도 우리가 연구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습니다.
12지파의 각각 독립된 연방제에서, 중앙집권제로 변하였는데,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오늘날의 유럽 상황과 흡사한데요.
여러분도 각 지파의 연방제와, 중앙집권제의 두 구조의 차이점을, 연구해 보세요. *미국이 연방제
우리가 성경에서 얻는 교훈은, 중앙집권제에 편향하면 할수록,
그 중앙정부의 성격이, 나라의 운명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좋으면 더 좋게, 나쁘면 더 나쁘게.. 어쨌거나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울은 나쁘게, 다윗은 좋게..
여러분, 이러한 역사적 시각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다윗의 뛰어남과 관리 능력이 돋보였지요.
그래서 다윗 때에, 중앙정부제의 운영 하에, 그들은 평화와 부의 최고경지에 도달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내리막길을 달린 원인 또한 중앙정부로 인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만약 권리가 집중할수록, 권리를 장악하는 자들의 도덕성이
국가의 운명에 더욱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공부가 오늘날의 상황(유럽 통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1994년 강의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제일 정확한 방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영국이 아직 EU에 가입하지 않고 있나요?
▶5. 또 한 가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은, 신학자들이 채택하는 방법인데,
이것이 제일 나쁜 방법입니다.
바로 <비평>적 방법인데, 독일에서부터 시작 되었지요.
전에 제가 독일에 있었을 때, 베를린 어떤 큰 교회에서 설교를 했어요.
그 교회 강단에 어떤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틴 니뮬러입니다.
그는 1차대전 때 잠수함에서 함장이었지만, 2차대전 때는 히틀러를 반대하여
다호(地名)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제가 그 강대상에서 독일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를
‘당신들이 전 세계에 준 피해를 어느 때에 회개 하겠습니까?’
그들은 제가 2차 대전을 가리키는 줄로 알았는데, 저는 그게 아니었지요.
그들은 제가 유대인 대학살을 가리키는 줄로 알았는데, 사실 그것도 아니었지요.
저는 ‘당신들 독일인들이, 전 세계에 준 제일 큰 피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고등비평 입니다.’
이 신학이 세계 각지의 신학교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사역을 훈련 받으러 갔다가,
믿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성경비평학적 연구가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한 손에 가위를 들고서,
기적 같은 부분은 가위로 잘라내고 읽도록, 배웠어요.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성경(고등)비평’입니다.
‘성경 비평학’에는 두 단계가 있는데, 모두 ‘성경에 어떤 실수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학문’입니다.
‘하등 비평’ lower criticism 은 별 문제가 안 되는데,
‘고등 비평’ higher criticism 은 큰 문제가 되지요.
이 두 용어를 여러분은 아마 못 들어 보셨을 것이에요. 제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겠는데요,
이러한 비평학이 아주 큰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신학 묘지로 변하게 하는데,
그들이 실제로 ‘믿음’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하등비평은, 성경을 베껴 써서 사본을 만들 때, 어떤 실수가 있지 않았는가를 연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 원본은 없고, 손으로 베껴 쓴 사본에서 사본으로만 계속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베껴서 사본을 만들던 과정 중에, 틀린 곳이 없는지 점검하는 것인데요,
저 파슨은 전적으로 이 하등비평을 지지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굉장한 수고를 해서, 가능한 성경의 원문으로 향해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이 원본과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증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은 그 정확도가 98%에 달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은 차이가 조금 더 난다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 사본에서 사본을 만들어 왔는데,
피할 수 없는 오타가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1948년에 한 베두인 목동이, 우연히 돌맹이를 동굴 안으로 던졌을 때,
거기서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 보니 완전한 <이사야서>가 보존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이 <이사야서>가, 그전까지 현존해서 내려오던 최고 오래된 이사야서 사본보다
무려 1천년이나 앞선 사본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가 사용한 최고 구약성경사본은, 서기 900년 경에 쓴 사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해에서 발견된 이 사본의 년대는 주전 100년경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정확성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1천년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1948년 당시 미국은 RSV 영어성경 중 <이사야서>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Revised Standard Version
그 번역 작업을 잠정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1천년 전 고대 사본을 찾았으니까요.
*번역할 때 쓰던 이사야서 원본을, 사해사본으로 바꿔야 하는 처지.
그런데 신학자들이 다 검사하고 나서, 그들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에서 RSV영어성경을 계속 번역해도 된다고 통지하였습니다.
왜냐면 이사야 사본이 1천년이 지났는데도,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된 것을, 알게 되었지요.
다만 몇 곳의 사소한 내용만, 수정해야 될 곳이 있었어요. 아주 흥미롭지요.
이렇게 ‘하등비평’은, 성경 사본의 원문을 찾는 것인데,
성경이 정확할수록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피해를 주는 것은 고등비평입니다.
고등비평은, 설령 성경의 원문을 찾았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이 쓴 것이니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피해를 입히는 것은 고등비평입니다.
고등 비평적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먼저 자기 주관적인 전제, 또는 선입견을 갖고서 성경을 연구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기적은 불가능하다. 과학이 기적은 불가능하다고 증명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성경에서의 기적을 보면, 이것은 성경저자들의 실수라고 하며,
응당 삭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이러한 고등비평이 사람들의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지요.
성경의 원본을 찾는 것은 올바른 자세입니다. 이래야 성경의 뜻을 오해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사무엘서>의 어떤 사본에는
‘사울이 1세 때부터 다스리기 시작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잘못 되었지요.
왜냐하면 다른 사본에는 ‘그가 30세에 다스리기 시작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두 개 모두 맞을 수는 없고, 어느 한 곳이 반드시 틀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힘써 성경 원문에 가까운 것을 찾아내어, 어느 것이 정확한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등비평의 작업인데, 정확한 사본을 가려내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인데요,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그거 실수 맞죠?
우리가 가진 성경이, 요나가 직접 써서 준 게 아니죠?’ 라고 말하는 것과, *이건 고등비평적 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게 현대 과학적 사고와는 맞지 않잖아요.’
*의심이 들지만, 진실을 찾겠다는 자세,
이렇게 비평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방식이 있는데, 신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연구를 합니다.
독일에 이런 신학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심지어 교회도 안 갑니다.
그들은 성경을, 순전히 학문과 지적 연구의 소재로 삼지요.
가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조각조각 잘랐고,
어느 부분을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합니다.
▶6. 성경의 이야기를 읽는데 제일 정확한 방법은 <신학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이라는 단어에 반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사실 ‘신학’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법’이어서, 그래서 모든 사람은 신학자입니다.
왜냐면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해, 자신들이 바라보는 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의 이야기를 읽을 때,
여기서 ‘하나님을 알아 가야’ 하고, 하나님이야말로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사울이 아니고, 다윗이 아니고, 사무엘도 아닙니다.
전체 이야기 배후의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시고, 그분이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십니다.
그분이 사무엘에게 기름을 다윗에게 부으라고 하셨고, 그분이 사울을 처리하셨고,
그분이 다윗도 징계하셨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렸던 ‘선지자적인 역사’이며, 성경의 중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물어야 할 질문은,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분이 어떻게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이끌어가고 계십니까?’
‘그의 언약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 각권 전체를 읽을 필요가 있는데, *각 구절 조각이 아니라요
이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에 개입하셔서 영향을 주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신학적 관점으로 본, 사무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래 전에 철학가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말했지요.
니체는 독일의 철학가이고, 히틀러에게 배후에서 실제적인 정신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말뜻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다시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죽은 사람은,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현실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세상에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는 거지요.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하니,
제가 독일의 어느 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는데,
누가 대학교 벽보에 큰 글자로 ‘하나님은 죽었다 - 니체’라는 글이 써 붙여져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학생이 그 밑에다 ‘니체는 죽었다 – 하나님’라고 썼습니다.
정말로 적합한 잘이었지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믿습니다. *특히 서구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시는 이 세상에서 활동적으로 살아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공부하는 <사무엘상하>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다윗은 그분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보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
네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뜻은, 그분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계속 말씀하시고, 어떤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중요시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가 사람의 행위에, 어떤 반응을 하시는지..
이것이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읽는 의도입니다. *소위 <신학적> 읽기
하나님이 역사의 사건들을 발생하게 주도하셨고,
그리고 그가 그 사건들에 반응하시고, 응답하심을 보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성품을 알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사울, 다윗, 한나와 아비가일의 성품을 읽고 연구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인물별 연구
하지만 성경을 읽는 진정한 목적은, 이러한 성경의 모든 사건/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할 뿐아니라, 그분의 감정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정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떠한 일들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가?
어떠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감정들을,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배우게 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고,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
하나님이 성경의 백성들에게 느끼시는 방식 그대로, 당신에 대해서도 느끼십니다.
이는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본성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땅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그분께 거역하고, 그분을 화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내심이 있어서, 항상 오래 참으셨다 징계하셨는데, 여러분은 이 점을 주의해서 보셨습니까?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셔서 감사하지요. 만약 그분이 급히 노하시면,
여러분들은 오늘 이 강의에 참석하지도 못하시고, 이 자리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셔서 참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인내심이 없어요.
미국 보스턴에 필립 브룩스 라는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는 종종
‘문제는 내가 아주 급하다는데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급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급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음 주 목요일까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멸하기를 바랍니다. *급합니다.
‘주님, 당신이 왜 저 나쁜 사람들을 멸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남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사실 (자기는 선하다는) 전제가 있는데, 그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네 봅니다.
‘하나님이 왜 저 나쁜 사람들을 속히 멸하지 않으실까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그들은 하나님이 나쁜 사람들을 멸하시면, 자신들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 나쁜 사람들을 속히 다 멸하시면,
이 세상에 생명을 보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분이 노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며,
하나님의 분노가 끓어 넘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언젠가 하나님도 더는 참지 못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분의 인내심이 고갈되는 날,
만약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있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대환난, 마지막 심판 때를 뜻하는 듯
▶이스라엘에 왕을 주신 목적 – 참 왕을 기다리라고!
첫 번째 왕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이 왕이 제대로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분이 선택하신 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많은 일들을 행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왕을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에 공부할 <열왕기서>에서 논하겠습니다.
왕을 주셨다는 것은, 이 왕의 성격이, 나라 전체 백성들의 행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옛날 왕정 시대는 그랬죠.
나쁜 왕은, 전국을 부패하게 만들었고,
좋은 왕은, 그들을 옳은 길로 이끌 것인데,
우리는 지금 영국의 국왕 제도에서 이 점을 볼 수 있는데요,
지금 거기에 영국 왕실에 도덕적 큰 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국왕이나 선한 여왕을 원하는 것은,
그들로 말미암아, 전국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국 왕께 충성하며, 엄청난 책임감을 그들에게 부여한 것은,
그들이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여, 우리의 모범이 되길 바라며, 그래서 우리가 왕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왕이 선하지 못하면, 왕정 제도가 아예 없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왕은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가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 영국에서 모두가 토론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호주에 새로 임명된 수상이 *1996년 상황
전임 수상 공화당 폴 키팅과 같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 영국 여왕에게 충성의 서약을 할 때,
그 서약문 중의 한 마디를 삭제했는데요,
원본에는 “여왕에게 충성하고, ‘여왕의 계승자에게도’ 충성하리라”는 맹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읽지 않았어요. *‘여왕의 계승자에게도’를 생략하고 선서함.
그는 여왕에게 아주 충성했습니다. 하지만 여왕의 계승자에게는 충성하려고 하지 않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왕조 monarchy 제도의 위험입니다.
왕조 제도에는 많은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왕 한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공화제의 연방정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왕정 제도도 이제는 변하고 있습니다.
사울, 다윗과 솔로몬 세 사람이 각각 40년씩 왕으로 다스렸고,
그러나 다윗의 사람(후손)들은, 그 후 내리막길을 걸어갔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좌를 솔로몬에게 주었고, 솔로몬은 처첩이 많았고,
솔로몬 이후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북방과 남방 사이에 큰 긴장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남방에 속했기 때문에, 모든 돈을 남방에 투자하여
남방이 북방보다 번영했는데, 듣고 보니 영국과 아주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이제 강의를 끝맺기 전에, 무엇보다 제가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다윗과 아주 특별한 언약을 세웠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언약을 세운 후, 처음으로 다시 언약을 세웠는데,
그가 다윗과 언약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무엘상하>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입니다.
당시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어요.
자기는, 자신을 위해서 호화로운 궁전을 지었는데,
바로 옆집에는, 하나님이 누추한 장막에 거하시니,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충분히 그 부끄러움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내가 당신을 위해, 제 왕궁보다 더 좋은 집을 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어요.
이에 나단 선지자가 3가지 메시지를 주었지요.
첫 번째 메시지는 ‘지어도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메시지는 ‘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생각이 있었는데, 이 생각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장막으로 충분하다. 내가 언제 돌로 만든 성전을 요구했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지요?
‘네가 왜 나를 위해 성전을 건축하느냐? 나는 계속하여 이 장막에 있을 테니, 다른 요구는 없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비꼬는 것입니다.
‘네가 자신을 위해 이 큰 궁전을 지었는데, 네가 정말로 이 궁전이 필요했느냐?’
이것이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내가 너에게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겠다.
네 손에 너무 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아들은 성전을 건축해도 된다.
그는 평화의 사람이다.’
솔로몬은 한 번도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태평세월을 계승 받았기 때문이지요.
다음으로는 언약인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네 아들을, 나의 친아들처럼 여기고 그를 징계하겠지만,
나는 그를 영원히 사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말이지요.
그리고 이어서 이런 위대한 약속을 하셨는데,
‘네 집안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네 왕권도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영원한 집을 지어 줄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해 전을 건축하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내가 너를 위해 집을 건축해 주겠다.
그 집은 왕실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이 후로 다윗의 자손들은, 모두 아주 조심스럽게 자기 가계 족보를 기록했어요.
그 이유는, 그들이 그 다윗의 후손(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 동안, 예수님 탄생 전까지,
남자 아이만 출생하면, 아버지가 거리에 나가서 큰 소리로
‘다윗! 다윗! 남자 아이입니다. 남자 아이라고요’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그 아이를 ‘다윗’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삼하7장의 그 언약의 주인공이길 바라며,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
저희 결혼 25주년일 때, 아내가 제게 반지 하나를 선물했어요.
제가 보니까, 예루살렘 뒷골목의 유대인 반지세공업자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반지에 ‘예루살렘 성벽’이라는 글을 새겼고, 제일 위에는 히브리어 세 글자로
‘다윗’(DWD)이라고 새겼어요. 히브리어엔 모음을 안 써요. *설교자 이름이 데이빗 파슨
아내가 제게 이 반지를 선물하면서, ‘제게 예루살렘 성벽의 파수꾼이 되라’고
기억하게 해주었습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 매번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그들은 ‘다윗! 남자 아이입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가 혹시 ‘다윗의 자손’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습관이 수백 년 동안 연속되어 왔고, 1천년 후에,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셨고, 예수님은 어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셨지요.
그들은 이 족보를 보존시켰습니다.
기이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 모두가 다윗의 직접적인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들은 부친의 후손이 될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legally’ - 예수님은 부친 요셉의 피가 안 섞임. 그러나 ‘법적인’ 후손. 진짜 피는 마리아..
그런데 혈육으로 말하면, physically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 되십니다. *누가복음의 족보
그래서 예수님은, 두 방면으로 모두 확실한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가 세상이 있을 동안 항상 다윗의 자손이라 칭함 받았고,
그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올 때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라고 말했어요.
‘다윗의 씨로 오시리라’ 요7:42 그분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시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의 왕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왕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이 ‘다윗의 자손’에게 있습니다.
그 권세가 앞으로도 영원히 그분의 손에 있을 것이며,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분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실천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하기를 그의 후손이 영원히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되셨고,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신분으로 탄생하고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교회의 왕이시고,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시기에 주님은 응당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종종 우리에게 ‘교회를 그 통치권을 내게 돌려 달라’고 부르짖으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이 세상의 왕이 다시 오실 것이며,
‘다윗의 자손’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스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그에게 마지막 한 질문을 여쭈었지요.
‘당신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때가 바로 이때입니까?’
주님은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친절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어요.
이 말뜻은, 이 일은 반드시 발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엔가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더욱 흥분스런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메시지는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무엘서>를 당연히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이야기들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책은 ‘인물별 연구’에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일 좋은 읽는 방법은, 거기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을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그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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