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물러가리로다 - 기쁜소식교회 김영준목사 - YouTube
◈홀연히 물러가리로다 시6:1-10 15.11.29 출처
▲성경 말씀은 마치 보물섬과 같아서, 찾는 사람이 임자에요.
아무리 성경에 좋은 말씀이 있더라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든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도, 컵이 없으면 못 마시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천하에 선포가 되지만, 그것을 듣지 못했다든가,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복음이 유익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와 믿는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사명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던지/못 얻던지 간에.
왜냐하면 사람들이 들어야 그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가끔 오셔서 가사도우미로 도우시던 아주머니가 지하철에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전도의 문구를 듣고 염려를 하는 것을 봤어요.
"내가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깐 이 아주머니가 평소에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분이
자신의 영혼에 문제에 대해서 근심하게 된 것은
누군가가 말씀을 전했고, 그것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기회가 있어야 됩니다. 계기가 있어야 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 눈에 보이는 자신의 삶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어야 듣고, 믿고/안 믿고는 그 다음의 문제지만
일단 생각을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나를 위한 말씀인지,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건 일단 들은 다음에 결정할 부분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듣고도 거부한 사람은,
듣지 못한 사람보다도 더 심한 심판을 당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보물섬과 같은 좋은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것을 발굴하지 못하는가요?
▲첫 번째 이유는 게으름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영적인 게으름.
주님의 말씀은 스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읽든, 듣든, 누가 말하는 것을 귀동냥을 해서라도 들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했어요. 열심히 들어야 됩니다.
영적인 게으름을 극복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이유는, 때를 따라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찬장에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지만, 때를 따라 절기에 따라 적절한 그릇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중에도, 때를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절한 말씀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엘서에 벌써 오래전에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이런 말씀이 있었지만, 베드로가 그 말씀을 오순절 날 인용했어요.
그러니깐 찬장에 그 좋은 그릇이 있었지만, 오순절 날 그 그릇을 꺼낸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하나님이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날 베드로가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때에 말씀하셨던 그것이 지금 이루어졌다’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담겨져 있는 많은 귀중한 말씀 중에
성령께서 때를 따라 적절한 말씀을 찾게 하시고, 또 그것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 사역에는, 항상 그런 신비한 면모가 있습니다.
‘왜 특별히 이때에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가?’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은, 아주 기본적이고 단순한 진리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뭐하러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기까지 하나님과의 씨름이 있고, 자기와의 씨름이 있고,
번민과 고민이 있습니다. 그건 기도의 응답을 받아본 사람만이 압니다.
▲어떤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에게 "당신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지셨습니다. overnight."
라고 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맞아요. 그러나 그 밤은 가장 긴 밤이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the longest night.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들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편 6편이 말한 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라고 말하지만 시6:9
그 말을 하기까지, 자기가 거쳐야 했던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해보신적이 있습니까?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하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그 외에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시편은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말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냐?
그것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한 말이지만
거기에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는 것이 유익한가요?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지만,
내가 기도하는 중에, 그 기도가 내게도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 마음으로만 기도하지 않고,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귀중한가요?
내가 영으로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시편 6편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시편 6편은 ‘다윗의 기도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다윗에게는 자신의 죄 문제로 씨름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죽음의 목전까지 가는 것과 같은 시련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리로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냥 그 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그 가장 오래된 어린 시절의 기억 중 하나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저의 어머니가 저를 야단을 치셨어요.
그런데 저는 왜 야단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엄마 나한테 야단치지 말고 나를 귀여워해줘"라고 말을 했는데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녹으셨습니다.
그래서 야단치던 것을 잊어버리고 귀여워해주셨던 것이 생각이 나는데.
자식이기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시고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징계할만한 이유가 있지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징계할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본인도 알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징계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어떤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지요.
하나님께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로 맞았냐면 "몸이 수척할 정도로"
▲그래서 2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heal me. 나를 고치소서.
사람이 징계를 받다보면 인생의 괴로움을 경험하다보면
"내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5절, 그래서 다윗이 말하기를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를 감사할자가 누구오리이까" :5
이 말은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면 되지’라고 말을 하지만
은혜를 받아야 천국이 천국이죠.
내 인생이 괴로울 때는 죽음이 달갑지가 않아요.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천국이 천국이지. 인생이 괴로우면 천국도 달갑지 않습니다. 탐탁하지 않아요.
그래서 시편기자가 말한 것입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누가 기억하겠나이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야 주님을 섬기든, 주님을 예배하든 할 수 있지
내가 죽으면 주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맞는 말이에요.
우리가 살아야 주님에게 유익한 종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죽어버리면 그건 은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물론 주님 앞에 갈 줄 믿지만.
내가 건강하게 잘 살아야 주님을 섬길 수 있을게 아닙니까?
죽음을 앞둔 사람이 거치는 단계 중에 ‘흥정’이라는 단계가 있다고 하죠.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는. "나를 살려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연장해주시면 그럼 제가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흥정은 무익한 것이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또 신앙에 경험 중에는 흥정을 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과 흥정을 했어요.
"나를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라고 흥정을 해서, 그가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히스기아 왕이 하나님 앞에서 흥정했어요.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를 살려주소서" 죽음 앞에서 흥정을 했더니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이 너희 기도를 듣고 너의 눈물을 보았노니 너에게 15년을 연장해주겠다"
하나님이 흥정에 응하셨어요.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이 흥정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살아야 하나님을 섬기든, 찬양을 할 것이 아닙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말을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흥정이 통했어요.
이 구절이 성경에 기록돼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고 나서야 다윗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
▲8~9절에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그 말은 울면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9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어떻게 하시리로다? “받으시리로다."
이것이 오뚝이와 같은 신앙인이에요. 넘어지지 않아요.
넘어졌더라도 곧 일어서는 오뚝이와 같은 신앙이에요.
질긴 신앙, 포기하지 않는 신앙이에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포기를 했을 텐데
그는 하나님과 흥정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그러다가 긍정적인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 받으시리로다."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림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괜히 사랑하시는 게 아니에요.
이러한 면 때문에 다윗을 사랑하시는 것이고,
다윗과 같은 사람이 세상에 그렇지 많지 않습니다.
이런 식에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선포를 합니다. 선포!
선포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어휘에 생소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적인 선포를 해보신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로 애걸복걸을 합니다. 애걸복걸하는 데는 익숙한데
신앙적인 선포를 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일반 어휘에 선포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대한민국만세!
그건 선포에요. 대한민국 만세! 그건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반적인 언어에도 선포를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선포가 필요할 때가 있어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건 선포에요.
그건 권고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고, 간구도 아니에요. 선포하는 거에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할 지어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포는 간구의 언어와 다릅니다. 간구하는 것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지만
선포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그 말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 - Let there be light" 그건 선포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선포하셨더니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선포하는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선포한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선포하심을 고치셨어요.
"깨끗함을 받으라" 선포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선포하신거에요.
"네 상을 들도 일어나라" 선포하신 거에요.
예수님의 사도들도 그것을 그대로 배웠기 때문에
병자들을 고칠 때 선포했어요. "예수께서 너를 고치시느니라"
선포했더니 병자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10절, "네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선포의 말씀인데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원수가 우리에게 다가 올 때는 막강해보이고,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숫자가 많아 보입니다. 이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끝난 것처럼 보이고 원수가 다가올 때는 그렇습니다.
마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같습니다.
한국전쟁 때 미군은 막강한 화력과 막강한 무력을 갖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미군이 중국에 대하여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미군은 독일과 싸워서 이겼고, 일본과 싸워서 이겼고,
또 냉전에서 소련과 냉전에서 이겼지만, 중국에 대해서만큼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숫자로 그들이 밀어부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도 그렇게 우리가 느낍니다. 많아 보입니다.
막강해보이고,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좌우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원수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한 말 "우리와 함께한 이들이 우리의 대적보다 더 많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도 있는 말씀이 있지요.
"우리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버티노라면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여러분이 믿으셔야 돼요.
▲오늘 말씀의 핵심은
10절에 "네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심히 떪이여"
어떻게 부끄러움이 물러가리로다라고 했습니까? “홀연히!”
그 말은 갑자기. suddenly.
그렇게 많아보이던 원수가 홀연히 물러간다고 했어요.
그렇게 강해보이던 원수가 홀연히. 어느 날. 그들이 보니깐 다 사라졌어요.
불현 듯.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원수의 공격이 "홀연히 그친다."
여러분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이 말씀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보물섬과 같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은 정전협정이 발효될 때 홀연히 끝나죠.
1차세계대전이 1918년 12월 11일 오전 11시 기해서 정전협정이 발효가 됐는데,
정전협정이 발효가 되니깐 갑자고 총성이 멈췄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대포소리 총소리가 요란했는데, 11시 정각이 되니깐 총소리가 멈췄습니다.
전장이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왜 그랬습니까? 전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릴 때가 괴로워서 그렇죠.
우리가 믿음으로 매달리노라면
하나님이 원수를 명하여 그들의 괴롭힘을 중단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원수가 홀연히 물러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저는 죄인인데 죄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여 네게 노하지 마옵소서. 징계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흉내 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저는 죽음의 문턱까지 간 것처럼 느낍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에 "죽으면 누가 주님을 찬양하리이까"라는 기도를 흉내 내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담대히 선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네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네 원수가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성경말씀에 "원수가 한 길로 갔다가 일곱 길로 달아난다" 그랬어요.
원수가 오는 길은 한 길이지만 달아날 때는 일곱 길로 달아나요. 홀연히.
여러분 이것은 다윗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윗만의 고백이라면 왜 성경이 이것을 기록했겠습니까?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에 경험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홀연히 물러갑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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