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bEysF5TI2-4
◈말라기 P1 영어녹취록
조금 후에 말라기서를 공부하겠는데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죠
하지만 먼저 몇 분간 모든 구약 선지서들로부터 제기되는
한가지 중대한 문제를 특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 선지서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유대인의 미래를요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외의 많은 교회들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미래를 논하는 것을
결코 들을 수 없는데 여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미래 예언에 대해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서방 주류 기독교 교회의 견해는 제 견해와는 좀 다른데요
제가 앞에서 ‘구약 선지자 개론’시간에
제 견해를 얘기했었는데
예루살렘의 미래에 관해 약속된 것, 열방 가운데 이스라엘의
미래와 그 지위 등등이죠 이 일들이 정말 이루어질까요?
거기에 대한 세가지 견해는 아래와 같습니다
① 첫번째 견해는 어떤 성경해석학자들은 말하기를
이 약속들이 조건적이라는 거죠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복해야
(이 약속들이 실현된다는 거죠)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또한 순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약속들이 취소되었다고 봅니다
그 언약들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결코 성취되지 않을 것인데
왜냐면 그 언약에는 조건이 붙어 있는데
그 조건들이 만족되지 않았다는 거죠 그 언약은 조건적이며
다른 말로 그 언약들은 그들이 협력할 때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협력하지 않고 특별히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거절했어요 유대인들은 그래서 모든 미래를 저버리게 되었어요
(라는 첫 뻔째 주장)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그 모든 예언들은 땅 바닥에
떨어졌어요 그것들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결코 이뤄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될 겁니다
이것이 왜 일부 설교자들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해
결코 언급하지 않는지 한 가지 이유죠
② 두 번째는 그 언약은 무조건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니고
조건 여부에 관계 없이 이뤄진다고 봅니다
그것이 무조건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이것이 내가 하겠다고 한 것이고
그래서 내가 그것을 행하겠다’
그렇지만 이 무조건적 언약으로 믿는 그룹 속에도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놓고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아마도 주류 교회가 주장하길 그 언약들은
신약교회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고
구약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은
상징적으로 또는 영적인 방식으로
신약교회에 이미 성취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견해를 ‘대체 신학’이라 부르죠
신약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고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예언은
이제 신학교회를 통해 성취되거나 혹은
현재 성취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영적인 방식의 성취이지 문자적 성취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의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 예루살렘으로 이끌림 받고 있으며
기름짐과 축복의 약속은
신약교회의 성장 등에서 볼 수 있다는 식이죠
이런 해석은 참으로 재미있어요 제가 참다못해 비웃고 싶은데
이는 모든 축복의 예언을 신약교회에 적용시키고,
구약의 모든 저주의 예언은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데
(언급하지 않는데)
이런 식은 성경을 아주 엉망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옛날 Authorized Version 영어성경에 보면,
특별히 이사야서에서, 모든 축복은 ‘교회에 대한 축복’이고
(단락 제목에) 모든 저주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로 나와 있죠
이것은 심각한 편견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다수 교회들의 견해입니다
교회가 이미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하고는 (관계가) 끝장났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스라엘에게
다른 이방 나라와 똑같이 복음을 전해야 하며
다른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민족적으로’ 어떤 특별한 미래가 없으며
하지만 개별적으로 회심한 유대인은 우리와 똑같은
이방 크리스천으로서의 미래가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새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데
습관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 이름이
신약성경에서 74번 나타났는데
이를 한번도 교회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 중 73번은 아주 분명하게 유대인이라고 가리켰으며
단지 한번은 뜻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스라엘이라하기에 (근거가) 부족합니다
저는 교회를 새 이스라엘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상이 두번째 견해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하나씩 실현되고 있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영적으로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은
그리스도가 초림으로 (그 이후 쭉)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③세번째 마지막 견해는 제가 예언서를 가르칠 때 취한 견해인데
바로 그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은 무조건적이며
반드시 실현될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스라엘에 문자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서 그 예언들은
아직 미래의 성취로 남겨져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구절은,
②번 입장 지지자들에게는 교회에 적용합니다만
그러나 그 ‘이스라엘이 구원 받으리라’는 구절은 이스라엘로 보죠
그래서 이 예언들의 성취는 (③입장에서는) 초림이 아니라
재림에 초점 맞춥니다
여기에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여러분이 어느 것을 믿을 것인지
반드시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결정에 영향 준)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특별히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부분입니다
특히 로마서 11장에서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은 혹시 하나님을 버리셨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느니라'
또한 하나님은 말라기서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 하나님은 자기 민족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내가 너희와 세운 약속을 파기했지만
나는 이 약속을 절대로 파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오늘도 아직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비록 그들은 믿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했고 하나님은 약속을 깨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저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들의 성취의 초점을 반드시 예수님 재림에
놓아야 합니다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실 예수님이 왜 재림해야 하시는지 모호합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예수님이 재림을 믿느냐고 물어 보세요
그들이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재림하시고 그가 오셔서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라고 하면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하늘로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으면 이미 하늘에 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또 우리를 다시 데리고 오십니까?
우리가 왜 다시 이 땅에 와서 또 살아야 합니까?‘
이 점은 당신이 아시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미 자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데
이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이 땅에서 다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갖게 될 것이고
하늘에서는 새로운 몸이 필요 없지요
하지만 이 땅에서는 새로운 몸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왜 다시 돌아와야 하고
이 땅에서 새로운 몸을 얻어야 합니까?
어떤 위대한 목적(재림 예수의 세계 통치)이
반드시 먼저 땅에서 달성되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게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는 열방 중에서 왕이 되어
통치하시기 위해서 라고 믿습니다
그 때 우리 모두는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치고
세상 나라가 우리 하나님과 그리스도 나라로 변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가 왕으로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 견해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제 구약 마지막 책을 보겠습니다
말라기서는 제가 강의한 구약의 마지막 비디오입니다
지금까지 65개 강의를 마쳤고
이것은 우리가 비디오로 만들 마지막 (구약의) 책입니다
말라기서의 배경은 학개서, 스가랴서와 아주 비슷한데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된 바벨론에서 돌아온지 이미 백년인데
그들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황폐하고 그 곳 근방에 거주하고 있던
족속들은 여전히 그들이 온 것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 땅은 여전히 메마르고 가꾸지 않아서 수확물들이 적었고
메뚜기 재앙이 있어서 생활이 어렵고 위험했습니다
성전 재건은 이미 완성했는데 하지만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니
아주 작았습니다 성전은 BC520년에 재건을 완공했고
지금까지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당시 파괴된 성벽은 느혜미야가 이미 재건을 완성했지만
백성들은 그래도 성밖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지금은 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와서 거주하게 하려고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궁을 아직 건축하지 못했는데 이는 아직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다윗 직계 자손이 있었는데
하지만 스룹바벨의 가족들은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고
그들은 (왕으로서) 통치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안 총독이 여전히 그들을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은 아직 작은 마을으로 에워 쌓인
작은 언덕 도시일 뿐이고
다윗의 나라와 완전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매우 실망했고 환멸을 느끼고
심지어는 모든 의욕이 결핍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할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가 돌아온지 이미 백년이고
우리가 세울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한가지 문제를 물었는데
이것 또한 현대인들이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바로 ‘굳이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있겠나’
그들의 삶이 안착되고 나니 현실에 안주하고
나름 만족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침체가 먼저는 그들의 신앙생활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포로기간 중에 한 교훈을 배웠는데
우상숭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그 후 그들은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않았고
종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이 형식적으로 변했어요
그들은 성전은 다녔지만 전통을 따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질적인 의의는 없이 신앙이 형식으로 변했고
더 이상 삶에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물었습니다 ‘신앙 활동에 할애할
최소한의 시간은 얼마만큼이 되어야 하는가?’
‘헌금의 최소 액수는 얼마일까?’
‘성전 헌금함에 드리는 제일 작은 동전은 얼마짜리일까?’
그건 하나님께 헌물이 아니라 팁 정도 였죠
사실 믿음으로 더 드린 사람은
더 많이 (수확을) 거두게 되어있어요
(헌금의) 헌신이 작은 사람일수록
(수확도) 작게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 시기에 제사장들은
단지 먹고 살기위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얼마나 예배에 참석하는지에 관심 두지 않았고
그들은 그저 자기 일만 했고 그래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죠
아마 오늘날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하였고
전혀 아무렇게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의식을 거행했는데
마치 그들이 어떻게 하든지 그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여겼죠
그들은 더 이상 최선을 드리지 않았고
그렇게 하던 일만 계속 반복 했습니다
이런 것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만약 여러분이 그런 태도로 신앙생활 한다면
그건 여러분의 도덕 생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
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바로 대답하기를 ‘무슨 도덕이 필요하냐’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만약 한 세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면
다음 세대가 말하기를 ‘바르게 살 필요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이 현상을 이미 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영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는데
지금 우리가 그런지 벌써 3~4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제가 어느 공장의 식당에 가서
거기 남자들한테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끝나고 한 사람이 일어나서 제게 도전하여 말하기를
“제자랑은 아닙니다만, 목사님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여기 노동자들이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누구를 찾아 가는지,
누가 그들을 돕는지 물어보십시오”
그는 말하길 “노동자들이 저(불신자 임)를 찾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제가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팩트(사실)입니다”
“ 우리 동네에 한 번 오셔서 제 모든 이웃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누구를 찾아 가는지요
이웃들은 저를 찾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가 말하길 “저는 교회도 안 갑니다
성경도 읽지 않아요 저는 기도도 안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의 말은 내가 교회는 가지 않지만 크리스천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
제가 성령님께 기도로 ‘지식의 말씀’을 달라고 구했어요
제가 말하길 ‘당신의 조부는 교회를 가셨지요?
당신의 조부는 성경말씀으로 기도했지요 그렇죠?‘
그는 네 라고 대답했어요
‘그렇다면 제가 말하겠는데
당신의 손주들은 당신 같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만약 당신이 하나님(신앙)을 그들에게 전달해 주지 않으면
당신은 그들에게 선함을 전달해 주지 않는 겁니다
(당신보다 더 악하게 될 겁니다)‘
조상의 신앙은 2~3대까지만 내려오다가 없어집니다
그들 속의 하나님이 없어질 때면 도덕도 없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말라기의 발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너 스스로 자신을 챙겨라
가능한 열심히 돈을 버는 일을 최우선 해라
그리고 하나님께는 가급적 적게 드려라‘
모두 장사꾼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장사를 잘 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장사하는 것이 잘못 임을 알았지만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 밖에 큰 시장 열었어요
이러면 안식일에도 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지요?
소비지상주의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가정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처음엔 ‘왜 하나님께 신실해야 하지?’ 하다가 곧
‘왜 아내에게 신실해야 하지?’ 합니다
특히 아내가 늙어서 성적인 매력을 잃게 될 때
‘왜 젊고 모델 같은 아내로 바꾸면 안 될까?’ 합니다
당시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세대에 걸쳐)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시 여자들이 부족했는데 이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 대부분이 남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왕 여자가 부족한 바에야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여자들이 부족했는데 이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 대부분이 남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왕 여자가 부족한 바에야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솔로몬도 이방 여자를 맞이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가?’
그래서 그들은 이혼하고 다시 장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까지 어기면서 이방 여자를 맞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도시에 버림받은 아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사회복지 같은 것도 없었고 과부와 고아와
버림받은 아내들의 삶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시세가 좋지 않을 때마다 누군가 속죄양을 찾아서
대신 뒤집어 씌웁니다
우리한테 속죄양 하나있는데 바로 정부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정부를 속죄양으로 만들기 아주 쉬워요
우리는 항상 정부가 돈이 매우 많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돈이 아니라 돈을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죠
사실 정부의 돈 모두는 우리에게서 취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길 정부는 무한대의 자원(돈)이 있는데
여기에 쓰지 않고 다른 데 쓴다고 비난합니다
마치 그들이 쓸 예산이 많은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세금을 낮추고 더 많이 쓰기를 원합니다 (모순)
그건 제정신이 아니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속죄양을 만들고
매 4년마다 우리는 그들을 쫓아내버립니다 그렇지만 물론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비난할 (유대)정부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탓했습니다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짊어지게 떠 맡기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반어법) 그들은 말하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중지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을
멈춘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만
한다 그 분이 우리를 포기하셨다
그래서 우리 역시 스스로 행복을 구해야 한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비평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이 선한 사람에 상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이 나쁜 사람을 징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신경쓸 필요가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인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합니다
혹은 그들이 그처럼 말하지 않아도 그런 식으로 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경쓰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의 율법을 지키려 애써야 되는가
그의 율법을 접어놔도 뭐가 잘못이냐?‘
말라기가 와서 이 상황을 반드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의 모든 예언은 산문이고 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 대해
이미 감정이 없어졌다는 표시입니다
사실이 바로 이와 같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 대해
이미 감정이 없어졌고 그리고 다음 400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과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는데 말투가 냉담하고
따뜻함이 없고 감성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이성으로 말씀했죠
즉 말투가 냉담한 논쟁이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는데 말투가 냉담하고
따뜻함이 없고 감성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이성으로 말씀했죠
즉 말투가 냉담한 논쟁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아주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그가 백성들과 논쟁
하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자 백성들에게 말로 공격 당했습니다
왜냐면 그의 메시지가 백성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죠
그의 메시지는 백성들을 몹시 기분 나쁘게 했습니다
그의 기본적 메시지는 ‘너희가 이 모든 일을 촉발했다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먼저 하나님께 신경쓰지 않았다’
이는 학개의 메시지와 비슷합니다
말라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먼저 하나님을 무시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을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이런 원칙으로 반응하십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을 포기했다’ 아주 공평하지 않습니까?
만약 한 나라가 하나님을 포기하면
하나님도 그 나라를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모든 나라들 중에서
영국이 뜻밖에도 전 세계 두 번째 순위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하나님이나 신을 믿는 믿음에 대한
일반적인 조사를 했습니다
결국에는 일본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나라의 첫 순위이고
영국이 두 번째입니다 여러분이 영국 사람으로서 뿌듯하십니까?
영국이 종교적이지 않은 나라로서 세계에서 두 번째 나라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면
하나님도 사람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오 폭력이 난무하고
이기심과 교만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말라기가 말하기를 ‘너희가 먼저 하나님 사랑을 중단했고
먼저 하나님께 무관심했고 너희가 먼저 하나님을 무관심했다
하나님은 항상 자비로 너희들을 대했는데 너희들이 하나님께
신경 쓰지 않고 이젠 하나님도 너희를 흥미 없어 하신다
너희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반복적으로 항의했어요
‘우리는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욕당했고 공격당했다고 느꼈어요
그들은 성을 내면서 말라기와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신경 쓰지 않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라’
이는 예수님이 가르친 양과 염소의 비유와 매우 비슷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고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뭐라고요? 우리는 당신이 감옥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주린 것을 보지 못했나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나의 형제 속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백성들이 여기에서 대답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신경 쓰지 아니하였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무관심 했습니까?’
그래서 말라기가 하나 하나씩 똑똑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의 예언 전체가 백성들과 논쟁인데
백성들의 모든 행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먼저 하나님께 무관심했고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에게 무관심했다는데
이것이 말라기서의 배경입니다
말라기서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데
이 5가지 특징은 아주 이례적입니다
제가 먼저 대략적으로 지금 언급하고 다음 단원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이것이 말라기서의 5가지 특징입니다
①첫째는 이 책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다른 소선지서보다
많습니다 55구절중에 47구절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비율이 아주 높지요 85%가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데
이 비율은 선지서중에서 제일 높습니다
②둘째는 이 예언은 무명입니다
말라기가 그의 이름인 줄 알고 있는데
사실 말라기는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말라기는 ‘메신저’라는 뜻인데 그게 전부입니다
이것이 혹시 그의 이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구약성경 어디에도 사람이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자주 사용은 되었는데 사실 성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사자(멜라크)’ 로 사용되었죠
그래서 그는 단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는 무명의 메신저였죠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이스라엘에 전달한
‘노바디’(별 볼 일 없는 사람)였습니다
③세 번째 특징은 이 대화는 선지자와 백성들 사이에 주고받는
예리한 논쟁 형식을 띱니다
그가 12번이나 말로 공격당했습니다 백성들이 말하기를
‘하지만 네가 말하기를.. 하지만 네가 말하기를’ (라며 반발했죠)
그들이 선지자와 12번 변론했습니다
그들은 줄곧 그의 메시지를 끊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것이 틀린다 네가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데
네가 우리를 너무 나쁘게 말한다’
그는 백성들의 모든 이의 제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대응했습니다
④넷째 특징은 제가 이미 언급했지만 그의 예언은 산문이고 시가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감정이 바닥났어요 완전 말라버렸죠
하나님은 바짝 마르게 느끼시고 자기 백성들에 대해 지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4백년 동안이나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여러분은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도 질리지 않겠어요?
만약 여러분이 그들을 포로에서 구해내서 고향으로 데려왔어요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⑤다섯 번째 특징은 말라기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구약을 이런 순서대로 (마지막 책으로) 배열한 것에는
잘했습니다
이 책은 확실히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이고
그 마지막 단어는 바로 ‘저주’이죠 *말4:6 히, 헤렘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말라기서를 읽을 때마다
마지막 구절인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4:6)라는 구절도 읽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직전 5절을 다시
한 번 더 읽는데 이는 ‘저주’로 끝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말씀에서 끝내지 않죠
그들은 직전 구절을 두 번 읽음으로서 행복한 기분으로 끝냅니다
여러분이 회당에 가시면 그들이 말라기를 읽을 때 보실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을 공부하고 있어요 4백년 동안 오직 이 말씀뿐입니다
지금부터 말라기서의 개요를 보겠는데
우리 먼저 첫째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말라기가 선포하기를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시되
에서는 미워하느니라’
오늘날 많은 깊은 분쟁이 역사를 거슬러 옛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야곱과 에서 쌍둥이의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말했지만 저는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 사랑함과 미워함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의미를 오해할 수 있어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최고 좋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저 그들에 대해 좋은 감정만 느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 언어로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못하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분은 여러분이
부모에 대해 쓴마음과 거부감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부모보다 나를 더 관심가지라는 뜻이죠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니면 그 뜻을 오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나간 야곱과 에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에돔 두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깨우치시길 지난 수백년 동안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선을 행하셨고
에돔은 징벌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먼 과거(에서와 야곱)가 아니라
가까운 과거(수 백년)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까운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죠 바벨론이 와서 유대인을
포로로 데려갔고 예루살렘을 파괴했어요 그때 에서의 후손
에돔사람들은 요단강 건너편 산악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흥분했고 얼마간 그 일에 가담했어요
이때 그들은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끝장났다’
그리고 에돔 사람들이 와서 유대 어린아이의 발목을 잡고
그들의 머리를 예루살렘 성벽에 메어쳤습니다
바벨론이 침범했을 때 에돔 사람들이 빈틈을 타서
침입한 것이죠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기간에 매우 비통한 노래를 지었는데
가사를 제가 한자도 빼지 않고 인용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대략적인 뜻은
‘우리가 그 곳의 버드나무 위에 수금을 걸었다
우리가 이방에서 어찌 시온의 노래를 부르겠느냐
나의 혀가 입천장에 붙이기를 원하고
나의 오른손이 기교를 잊기 원한다
만약 내가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137편
여러분 이 시편을 아시죠? 이렇게 끝납니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내려치는 자가 행복하리라 에돔아’
시137:9
여러분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건 그저 바벨론이 그 성을 취한 게 아닙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이 거기에 조인했어요 그들이 야곱의 후손을
대적했어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에돔을 벌하셨어요
몇 달 후에 우리 중 일부는 페트라에 갑니다
그곳은 에돔이 살았던 곳이죠 지금은 텅 비고 황폐해졌습니다
그곳이 세일 산인데요 에서의 후손이 살았던 곳입니다
후에 하나님이 아랍 사람을 끌어들여 그들을 쫓아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네게브 사막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는 식물을 심을 수 없어서 베두인(사막 거주민이란 뜻)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간신히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나이 반도 네게브(남쪽이란 뜻) 사막이
후에 에돔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시나이 사막에서 떠돌아다니면서
간신히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그곳이 이두메가 되었죠 이렇게 에돔인들은 전에 살았던
페트라 라는 굉장한 곳에서 쫓겨나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에서야 내가 너를 미워했다
그들 에돔이 너희 이스라엘에 한 것처럼
내 하나님이 그들 에돔에게 그렇게 하리라
‘기억해라 내가 애곱은 사랑했지만 에서는 돌보지 않았다
(미워했다)’ 1:2~3
여러분 헤롯 왕이 바로 에돔 사람 후대입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가 로마 사람을 설득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에게 팔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마침 헤롯이 왕일 때입니다 그는 에돔
사람입니다 여러분 펼쳐진 역사가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말라기가 말하는 뜻은
‘너희들이 어떻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지를 생각하라
에돔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악을 행한 결국을 보라
또한 내가 어떻게 너희들에게 행했는지를 보라’
내가 너희는 사랑했고 그들은 미워했다
너희는 내게 감사해야 한다
다른 말로 너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는
그 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과
또한 너희에게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기뻐하며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말라기는 이를 토대로
그들이 하나님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논쟁을 풀어 나갑니다
우리 다음 단원에서 계속하여 논하겠습니다
초벌번역 LCY
영어타자 Chris
교정, 자막 Ji Kim
'분류 없음 > 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38 요한계시록 6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0) | 2018.12.27 |
---|---|
말라기 P2 / David Pawson (0) | 2018.10.01 |
스가랴서 P2 / David Pawson (0) | 2018.09.15 |
학개서 / David Pawson (0) | 2018.08.29 |
스바냐서 / David Pawson (0) | 2018.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