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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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비밀
오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시겠는데, 제가 먼저 그 중의 몇 구절을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책을 읽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복 받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시록’은 아주 특이한 책입니다. 그는 크리스찬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첫 부분은 감이 읽지 못하고, 다른 부분은 너무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도피하지 않으면 열광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에 대한 견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 책이 아주 멋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이 책이 너무 엉망이라고 생각하여 근본상 읽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계시록’의 ‘글자마다, 구절마다 모두가 비밀이다’라며 비평하고, ‘근거 없는 한 무더기의 상상’이며, ‘기괴한 형상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엉망적인 평가가 ‘열에 여덟을 읽으면 미칠 것 같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 사백년 전의 기독교 개혁자가 ‘계시록’에 대해 정면적인 평가가 없었고, 이 후로 기독교 교회가 계속하여 ‘계시록’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가 사양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 책은 사도 선지자의 가르침이 없고, 모든 사람이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가 있으며, 그리고 이 책보다 볼 가치가 있는 책들이 많다. 나의 영은 이 책을 참으로 인정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 책이 성경에 개입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요한 칼빈도 비슷한 견해가 있었고, 그의 신약 주석에 ‘계시록’을 아예 생략했습니다. 또 하나의 평가가 아주 유명한데, 스위스의 자운리가 말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계시록은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책의 간증들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이런 영향을 받은 것은 이 책을 소홀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시록’을 마지막에 놓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려야 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 천천히 도와드릴게요. 만약 성경이 ‘계시록’이 아니고, ‘유다서’에서만 멈추었다면, 성경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이 ‘계시록’에 대해 매우 정면적인 평가가 있었으며, 이는 하나의 걸작품으로 생각하고, 성경에서의 하나의 걸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의 책입니다. 저는 방금 읽은 그 책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계시록’을 가장 좋아합니다. 저는 이 책이 현재 교회의 역사 위치에 아주아주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 책을 응당 읽어야 하고, 자신이 미래에 대면할 상황에 예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귀의 견해를 알고 있는데, 그는 이 책을 미워합니다. 성경에서 두 부분이 사탄이 당신이 읽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데, 바로 성경 전체에서의 앞 세장과 마지막 세장입니다. 그는 당신이 성경의 앞 몇 페이지와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왜서일까요? 앞 몇 페이지에서는 그의 검은 손이 어떻게 우리를 잡고 있는지를 말하고, 그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와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이 세상의 신이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그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쫓겨나고, 그의 날이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서 그는 이 두 곳의 성경을 미워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더러 ‘창세기’의 하나님 말씀을 믿게 하고, ‘계시록’은 비밀로 하면, 그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지난 20년 간 우리가 많고도 많은 ‘계시록’의 메시지 비디오 테이프를 보냈는데, 하지만 상대방이 받았을 때 항상 ‘계시록’ 20장의 일부분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계시록’ 20장의 마지막 몇 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몇 분이 바로 사탄의 마지막 결말을 강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여러분이 읽고 연구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의 이 책에 대해 어떤 견해가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록’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책만이 시작에서 ‘이 책을 읽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또 ‘이 책을 파괴하는 자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 만약 누가 이 책의 어떤 내용이라도 삭제하거나 혹은 임의로 어떤 내용을 추가하면 이 책에서 묘사한 재앙을 받을 것이고, 구원도 잃게 될 것이며, 하나님 거룩한 성에 들어갈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매우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이 책을 읽거나 혹은 이 책을 듣고 지키는 자는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더하거나 빼는 자는 반드시 저주가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심상치 않는데, 성경에서 이 책에만 복을 받는 것과 저주 받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이제 우리 ‘계시록’이 성경 전체에서의 위치를 보겠습니다. 이는 성경의 마지막 한권의 책이며,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우리는 두가지 각도에서 성경을 볼 수 있는데, 성경 시작부터 마지막까지가 바로 하나의 역사서이고, 다른 종교의 경과 같지 않고, 우리의 성경은 하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성경과 일반 역사서의 차이는 시작한 시간이 더욱 이르고, 끝나는 시간이 더욱 늦습니다.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끝나는 종점까지 이렇게 긴 시간 범위를 포함한 책이 없었습니다. 만약 ‘계시록’의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역사의 결말을 모를 것이고, 모두는 결말을 함부로 추측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알고 있고, 크리스찬만이 인류의 역사와 이 세상의 결말을 알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성경 마지막 이 책이 있기 때문이고, 이 책에 우주의 결말을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또한 사랑의 각도에서 ‘계시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사랑이 충만하고, 매우 낭만적인데, 한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해 신부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만약 ‘계시록’의 말씀이 없었다면, 혼례의 상황도 몰랐을 것이고, 단지 이 아들이 여자와 약혼을 했다는 것만 알 것입니다. 여러분,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바울이 교회에 편지하기를 ‘나는 너희들을 그리스도에게 혼약해 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찬이 현재 예수님과의 관계이며, 우리는 예수님과 약혼을 했고, 단지 약혼만 했고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결혼은 마지막에 거행합니다. 뿐만 아니라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같습니다. 성경 마지막 결말은 ‘이로써 두 사람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보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랑 소설에서 글자를 잘 못 타자해서 결국은 그들이 결혼 후에 여전히 행복하고 즐겁게 지냈다라고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결말은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나서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결말인데, 결혼식으로 마쳤습니다. 만약 ‘계시록’이 없으면 혼약이 아마 해제되었을 것인데, 하지만 성경의 결말은 어린양의 결혼식이고, 이로써 그들은 새예루살렘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계시록’의 말씀이 없으면 성경의 내용이 많이 절감될 것이며, 그리고 결말도 없을 것이며, 역사와 사랑 모두도 결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계시록’이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본래는 이 책을 일고 싶지만 몇 장을 읽으면, 대략 제5장까지 읽고, 제6장에 들어오면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읽으면 온통 안개투성이고, 그래서 다시 몇 페이지 읽고나면 포기하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 ‘계시록’을 막 읽으면 정말 복잡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었기 때문인데, 첫째는 ‘계시록’이라는 이 책은 사실 신학 교수를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을 위해 기록했습니다. 누구 말했는지 참 잘했어요. 오늘날 전문가의 지극한 문화에는 불행한 현상이 있는데,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일에 부딛혔을 때 대학 교수를 초청해 와서 의혹을 푸는데, ‘계시록’이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또 다른 한 마디를 인용할 수 있는데, 이 말도 참으로 한 마디로 정곡을 찌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맺고 끊게 말할 수 있는데, ‘계시록’을 읽을 때 그의 뜻을 오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못된 것은 각 세대에 걸쳐서 신학자들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선입관을 쏟아냈는데, 이 책을 망쳐버렸고, 그를 이해하기 매우 힘든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대다수 독자들로 하여금 경원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선입관을 버리면 ‘계시록’은 선시자가 기록한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는 정곡을 찌를 수 있는 말이고, 사실 ‘계시록’은 아주 간단한 한권의 책이고, 보통사람들 위해 기록했습니다. 본래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데, 바로 오늘날 터키 서방입니다. 그들 모두는 아주 보통적인 사람이며,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직위가 존귀한 사람들이 아니고 아주 보통적인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노예인데, 이 책이 그들 위해 기록되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제가 미국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마도 전도인이 생각한 것 같아요. 여러분,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떤 남자아이가 전도자인 아빠에게 묻기를 ‘아빠, 방금 그 이야기가 진짜에요 아니면 그냥 설교일뿐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전도인들이 설교할 때 이야기를 인용하기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은 이 이야기는 아마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학교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들이 미국의 한 신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마침 성경 계시 문학을 가르쳤는데, ‘계시록’도 포함되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전반 학생들이 머리가 하얗게 되어 체육관에 가서 농구 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농구 칠 때 흑인 관리원 한 명이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구를 다 치고 나서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당신이 성경을 읽는 것을 보니 너무 기쁩니다’라고 하니 ‘오, 나는 성경 읽기를 좋아해요’라고 하여 ‘당신이 어디를 읽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계시록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당신이 읽어도 이해못하시지요?’라고 하니 ‘아니에요’하니 그들이 ‘그럼 계시록에서 무엇이라고 하나요?’라고 하니 ‘아주 간단해요. 예수님이 이겼어요’라고 했습니다. 아주 잘 말씀했어요. 이것은 아주 멋있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메시지가 당연히 이렇게 간단하지는 않지요. 우리가 몇 교시로 연구하고 토론했지만 이것은 확실히 ‘계시록’의 골수입니다. 그 평범한 관리원이 예수님이 이겼다는 중점을 잡았습니다.
저는 복음서의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합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매우 좋아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긍정할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긍정했는데, 이는 우리가 평범한 사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식분자들을 쉽게 속일 수 있습니다. 단지 철학적인 술어로 조금만 포장하면 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국왕이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그들은 진상을 말합니다. ‘계시록’은 평범한 사람들 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야 하며, 이 방법이 우리가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고, 간단하면서 직접적인 메시지입니다. 상식을 인용해야 하고, 글자의 뜻을 직접적으로 보아야 하며, 어떤 상징에 미혹되지 마세요. 책 전체를 글자로 해석해서도 안되고, 책 전체를 비유대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것은 글자대로 해석해야 하고, 어떤 것은 비유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아마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 여인이 붉은 용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면, 상식이 그것은 비유라고 알려 줄 것이며, 어떤 때는 상식이 우리더러 글자대로 해석해라고 알려줍니다. 상식을 활용해야 하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원칙을 활용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 중의 한가지 원칙은 동일한 단락에 있으며, 거기에는 똑 같은 단어에 똑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간단하며, 매우 분명하게 들립니다. 아닙니까? 그러나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알려주실 수 있는데, 우리가 계시록 20장을 읽을 때 격렬하게 토론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무천년과 전천년 혹은 후천년설입니다. 이 간단한 원칙만 활용하면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동일한 단락에 똑 같은 단어에 똑 같은 의미가 있으며, 일반적인 간단한 원칙대로 하면 쉽게 명확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우리처럼 이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을 읽은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와 아주 큰 시차 간격이 있었으며, 대략 2000년 간격과 2000마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의 생각과 그리고 그들의 느낌을 이해해야 하고, 그들의 각도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확실히 공력을 좀 넣어서 당시 일곱 교회의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이해해야 우리가 이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중요한 원칙은 바로 이 책은 보통사람들 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더러 ‘계시록’의 두번째 원칙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매우 실제적이며, 아주 실제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이 책의 목적은 여러분이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생각이 있다면, 이를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더러 역사의 선각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신비한 지식을 알고 있고, 이로써 미래에 관한 비밀을 알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책을 주신 것은 우리더러 선각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더러 하나님의 시간표를 추측하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더러 여러 가지로 걱정해서 말일이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를 추측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에 근거해서 이 추측을 하는데, 하지만 이런 추측이 ‘계시록’을 읽는데 대해서 말하자면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안됩니다. 미래가 어떨지 알면 혹시 당신의 호기심에 만족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가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절대로 아닙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매우 실제적이며, 그가 절대로 고의로 현묘한 체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이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자도 위해서이며,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조금 후에 우리가 이 실제적인 목적을 논하겠습니다.
‘계시록’은 하나의 역사서가 아니고, 미래를 상세하게 예고했는데, 책에서 미래에 관한 예언을 많이 했습니다. ‘계시록’에 총 56가지 다른 예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예언은 한 번뿐 나타난 것이 아니며, 그리고 예언의 비례가 신약성경에서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보다는 많지 않아요. ‘다니엘’과 ‘에스겔’에 예언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다른 책과 비교하면 ‘계시록’에 미래에 대한 예언이 제일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용은 확실히 미래에 치중했지만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밝히는 이유는, 그의 목적은 바로 우리더러 자신이 미래에 대면할 준비를 하시라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의 매우 실제적인 목적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미래를 밝히는 것은 우리더러 잘 준비하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동자군의 격언 ‘수시로 준비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젠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신약성경에 미래에 관한 예언 모두는 우리가 현재 바른 길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해답이 없고,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이 저에게 각종 미래에 관한 문제를 물어보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지 않은 일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알려준 일들은 우리가 알 필요가 있고, 이에 반른길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 일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너희들이 속이지 않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때마다 바른 길로 살아가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실제 목적입니다.
미래 예언에 드러난 모든 것은 현재에 영향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가지 덕행인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의지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하지만 그 중에서 소망이 가장 약하니라’. 이것은 제 개인적인 번역입니다. 저는 현대 교회에서 ‘소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망’은 미래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실 ‘희망’이라는 이 단어가 좋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불확실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모든 것이 순리롭기를 바랍니다’, ‘제가 시험에 합격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은 불확실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자의 헬라 원에는elpis인데, 아주 확신한다는 의미이며, 반드시 발생하리라는 것입니다. 매우 확신하고, 반드시 발생하리라는 것입니다. 아주 확고한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 같다고 하였습니다. 폭풍우가 임할 때 우리가 주안에서 여전히 소망이 있고, 우리는 미래에 대해 확고한 소망이 있는데, 이는 에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바로 이 사실을 핵심으로 하였고, 시작과 끝 모두에서 예수의 재림을 논했으며, 그가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폭풍우가 임할 때인데, 마치 닻처럼 우리를 진정시키며,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가 미래에 대한 기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떠한 정치인물도 우리에게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매번 선거때마다 마치 구세주를 선거하는 것 같아요. 주의해 보셨습니까? 매번 선거때마다 정치상의 구세주를 찾는 것 같아요. 마치 그가 우리를 이끌고 바른 길로 가고, 재앙을 멀리하게 하는 구세주 같습니다. 매번 누군가가 투표에서 이기면, 우리는 구세주를 찾은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면 우리는 실망하기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면 모든 환상이 파괴되는데, 이는 이 세상에 구세주는 한분이기 때문입니다. 훗날에 많은 사람이 구세주라고 자칭할 것인데, 하지만 단 한 분만 다시 오셔서 국면을 전환시킬 것입니다. 훗날 어늘날에 예수님이 우리 중에 오셔서 그가 천하를 뒤바꾸고, 그가 마귀를 쫓아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오시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를 쫓지 못하기 때문인데, 하지만 예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뒤로 뛰어 넘은 것 같네요.
‘계시록’에 한가지 실제적인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책 한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계시록14:12절입니다. 저는 이 한 구절이 여러분이 ‘계시록’ 전체 중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계시록14: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예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예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견디느니라’.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특별히 고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 위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고난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이 많은 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순교했으며, ‘계시록’의 뜻이 그들에게는 더없이 뚜렷하지요. 아마 고난을 받은 크리스찬이야말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성과 학술의 각도에서만 이 책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우리가 고난을 인내하며 견디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의 저자는 주를 위해 이미 고난을 받은 사람이며, 이 책은 요한이 밧모라 하는 섬에게 기록했으며, 이 작은 섬은 길이가 8마일밖에 되지 않고, 에베소와 직경 60마일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정치범이어서 섬의 채석장에서 반드시 일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그림 한장이 있는데 우리 함께 봅시다. 밧모섬 제일 높은 저 산에 수도원 하나가 있는데, 성요한 수도원이라고 해요. 하나의 성처럼 보이는데 바로 감옥 옆에 있고, 채석장 부근에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채석장에서 화강석을 파야 했고, 밤에는 바로 이 감방에서 자고 합니다.
그럼 요한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말씀을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반역자입니다. 로마 제국의 반역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이 악마의 섬 같은 곳에 그를 유배했고, 그가 여기에서 감옥살이를 하며, 그가 여기에서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고 있는 사람을 위해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으리라는 사람을 위해 기록했으며, 그는 그들더러 고난을 대면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찬들이 갈수록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점점 가까워 올 때 고난을 갈수록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채은 우리더러 곧 임할 고난에 대면할 준비를 하시라는 것이며, 이래야 고난이 진짜로 임할 때 인내할 방법이 생기게 됩니다.
요한이 바로 밧모섬 감옥에서 이 책을 기록했고, 그 날은 ‘주의 날’이며, ‘주의 날’이지 ‘주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이 바로 일요일인 줄 생각하는데, 혹시 요한이 전에 목양했던 교회를 매우 그리워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가 말하는 것은 일요일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역사를 조금 강의할게요. 예수님 탄생 25년 전에 로마에 가이사라는 대제가 있었는데, 여러분들 들어보셨을거에요. 그가 전에 여기 해안을 침공했고, 가이사 대제는 첫번째로 자신을 하나님의 황제라고 책봉한 사람이며, 자신이 살람일 뿐아니라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자칭했습니다. 그의 후임자는 아구스도와 디베료인데, 아구스도가 한 술 더 뜨는 자였습니다. 그는 백성더러 자기를 경배하라고 명령했고, 전국 각 곳에 신전을 지어 그를 경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써 각 곳마다 가이사 신전을 지었고, 그리고 아구스도를 하나님처럼 경배했습니다. 특히 터키 서쪽에서 로마 제국의 이교 뿌리가 깊었으며, 여기에 황제를 경배하는 많은 신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기록했는데, 대략 AD96년, 제1세기 말인 그 때에 크리스찬들은 이미 고난을 받기 시작했고, 로마와 네로의 핍박을 받았으며, 네로가 아주 많은 잔혹한 일들을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로마 갈 기회가 있으면, 경기장을 등지고 서서 보시면 멀리 다른 한 쪽의 푸른 산언덕이 보이실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네로 황제의 어화원이고, 그가 그 화원에서 만찬회를 열었고, 크리스찬들을 기둥에 묶어놓고, 역청을 바르고 불을 달았습니다. 이로 그의 바비큐 연회에 불빛을 제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도 그가 거기서 크리스찬의 몸에 짐승 가죽을 함께 꿰메게 하고, 그리고 들개를 풀어 그들을 물게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연극이라 여기며, 이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 핍박이 로마성 밖의 지역가지는 만연되지 않았고, 대략 또 30년 지난 후에 다미밭이 로마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처음에 로마 제국 경내의 각 곳 크리스찬들을 핍박하기 했습니다. 다미밭이 자신에게 두개의 칭호를 붙이고, 백성들에게 그를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명령했습니다. 주와 하나님, 도마가 전에 나사렛에서 오신 목수더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미밭이 또 매년 어느 한 날을 정하여 모든 사람이 반드시 나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반드시 나의 반신인 조각상과 불이 있는 제단 앞에서 향을 한 웅큼 집어 들고, 제단에 뿌려 태우고, 그리고 손을 들어 가이사는 주이시라고 선포해야 한다고 명령 하였습니다. 그는 매년 어느날엔가 전국 백성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대로 하지 않는 자는 바로 사형인데, 크리스찬들에게 무서운 선택이 임한 것이지요. 단지 ‘가이사는 주이시라’고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주이시라’는 이것이 교회에서 가장 일찍이 있었던 신조이고, 그들은 다른 사람을 주라고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예수를 높였고, ‘주’라는 칭호를 그에게 주었으며, 이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시고,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고 예수를 주라 부를 것이라.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타협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충성하는지의 가장 큰 시험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몇 글자되지 않아요. 다미밭이 전국 각 곳에 이 법령을 내린 그 날, 그날을 특별한 이름을 붙혔는데, 즉 ‘주의 날’이었습니다.
‘계시록’ 1장에 말하는 ‘주일’은 헬라 원어에서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를 형용사로 사용했으며, 명사인 ‘주’가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기를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일’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7일 중의 첫째 날을 주일이라고 하였는데, 하지만 ‘주의 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황제가 매년 한번씩 ‘가이사는 주’라고 말하라는 그 날입니다. 옥중의 요한은 상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큰 시험이고, 그가 전에 목양했고, 가르쳤던 그 일곱 교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들은 굴복했을까요? 그들은 고개를 숙였을까요? 이로서 그는 이 책을 기록했으며, 성도들더러 끝까지 인내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인내 뿐만 아니라 인내는 밑에 깔려 있습니다. 그가 또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책 전체에서의 관건적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통했는데, 바로 ‘승리’입니다. 인내는 어떤 물건에 의해 밑에 깔려있고, 승리는 그 깔린 위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면서,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이겼다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친구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문안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아주 잘 지낸다. 나는 나의 환경을 이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크리스찬으로서의 아주 멋진 답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더러 승리하라고 힘을 부여했습니다. 압력을 참아야할 뿐만 아니라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 불렀던 승리하고도 넘침이 있다는 노래 가사처럼입니다. 환경 위에 있어야지 환경 아래 눌려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계시록’이 우리에게 두가지 동력을 주는 것을 알려드릴게요. 하나는 정면적인 동력이고, 또 하나는 반면적인 동력입니다. 정면적인 동력은 바로 이기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이기는 자는 많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 상에는 어떤것들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마치 하나님 낙원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도 되는 것처럼, 두번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게 되고,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만나와 백석도 받을 수 있는데, 돌에 새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만국을 통치할 권세가 있고, 깨끗한 흰 옷을 입고, 하나님 안에서 기둥이 되고, 다시는 거기로 나가지 않고, 그리고 보좌에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정면적인 상이고, 핍박에서 견디어 이긴 크리스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을 초월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에수님이 ‘계시록’ 한 곳에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자신이 해보지 못했던 일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적 동력이 크리스찬더러 무엇을 잃게 할까요? 만약 그가 임할 때 굴복을 선택했다면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책 전체에서의 가장 중요한 경고입니다. 계시록3: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우다’는 바로 긁다라는 뜻인데, 양피지에 잉크로 쓴 이름을 칼로 긁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한 상식으로 이 구절을 본다면 이기지 못한 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아주 간단한데,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긁어낸다는 것이며, 이름을 긁어낸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단지 다섯곳에서만 생명책을 언급했으며, 하지만 네 곳에서 이름을 생명책에서 긁어낸다고 언급했습니다. 바로 ‘계시록’ 마지막 곳입니다.
이 책은 성도에게 쓴 것이지 죄인에게 쓴 것이 아니고, 비크리스찬에게 쓴 것이 아니고, 일곱교회의 성도에게 쓴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계시록’ 마지막 한 구절이 아주 특별한데, 즉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묘사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크리스찬에게 쓴 것이 아니고 크리스찬에게 쓴 것이며, 바울과 예수님이 성경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에 부합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만약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거의 인용한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로 한가지 문제가 나타나는데, 크리스찬들이 항상 말하기를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한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런 말이 근본상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에게 저의 책 한권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입니다. 제가 책에서 언급하기를 예수님이 언급한 경고 중에서 두 가지만 중생하여 구원 받은 크리스찬을 겨냥한 것이 아닌데, 그 두 가지 경고는 바리새인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크리스찬들과 지옥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의 제자들과 지옥을 논했는데, 이는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크리스찬의 이름이 계속하여 생명책에 남게 도와주는 것이며, 그들이 마지막에 새로운 도시와 새 하늘 새 땅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사실 바로 이렇게 간단하고 실제적입니다.
‘계시록’ 이 책에서 두가지 영원한 귀숙을 모든 크리스찬과 그리고 아시아 일곱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한가지 귀숙은 부활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에서 참여하게 되고, 또 다른 한가지 귀숙은 우리가 천국에서의 유산을 잃게 되고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지옥이 무서워요. 그래서 지옥을 논합니다. 어떤 죄인은 반드시 지옥 갈 것이고, 나는 반드시 천국 갈 것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아니에요. ‘계시록’이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예수님이 다실 올 때 그를 믿고 의지한다고 선포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끝까지 지키는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합니다.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관건은 끝까지 견디고 지키는 자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에서의 매우 실제적인 목적입니다.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미래에 대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 책에서 상황이 반드시 악화되어야 전환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대환난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계시록’에서 한가지 일을 언급했는데, 우리더러 매우 위로되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중에서의 대환난이며, 대재앙인데, 단 삼년 반동안만 지속되며, 즉 42개월이나 혹은 1260일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대환난, 대재앙 후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땅에서 천년동안 왕으로 있습니다.
책 전체에서 우리에게 절대로 이전의 공로를 포기하지 말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악한 환경에 처했거나 혹은 대면하기 매우 힘든 상황일 때 미래의 소망을 반드시 꼭 잡고 절대로 이전의 공로를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께 지속적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의 인내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예수님께 지속적으로 충성해야 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록’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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