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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31 요한서신서 P2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26

요한일이삼(2)

 

 

우리가 요한일서를 끝내기 전에 먼저 아주 어려운 문제 하나를 논해보겠는데, 그것은 바로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문제입니다. 몇 마디가 서로 무순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곳에서 요한이 크리스찬들은 반드시 죄를 범한다고 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또한 크리스찬들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3:9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아주 큰 하나의 도전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데, 여러분 진짜이십니까? 이것은 여기에 앉아 계신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죄를 짓지 않았다는 뜻인데, 여러분은 감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의 뜻은 매우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면 죄를 짓지 않는데, 하지만 제1장에서는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 크리스찬들에게 씀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그리고 만약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 하였는데, 모순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먼저 이 성경 구절을 보겠습니다. 비록 아직 한 두절을 더 봐야 하지만 이 구절이 가장 곤혹스럽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 대해 큰 물음과 작은 물음이 있는데, 큰 물음은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이 진짜인가?’입니다. 이 성경의 첫 마디가 크리스찬은 죄를 짓지 아니하고, 이어서 또 크리스찬은 범죄하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씨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는 원어에서 정자를 가르키는 것이며, ‘는 원어에서 정자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씨가 크리스찬 안에 있고, 그래서 그들은 범죄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대강에 문자 게임처럼 낙서를 해서 미안해요. 여러분, 개의치 마십시오. 우리가 손을 들어 표결하겠는데, 여러분이 만약 제가 하는 말에 동의하시면 손을 들어 주세요.

 

크리스찬은 죄를 짓는다? 모두가 동의하고, 이 점에 대해 의문이 없이 아주 확실하네요.

 

크리스찬은 반드시 죄를 짓는다. 앉으신 분들 몇 명 동의하셨습니까?

 

크리스찬이 죄를 지으면 부르심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동의하시는 분이 얼마입니까?

 

크리스찬은 범죄하지 못하며, 크리스찬은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이 점에 몇 명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죄를 지으면 절대로 안된다. 여러분이 갈수록 확실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좋아요. 다음 문제입니다.

 

크리스찬은 범죄의 구실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 이 점에 몇 명이 동의하십니까? 이 문제에는 여러분이 비교적 확실하시네요.

 

죄의 관념은 크리스찬에서 근본상 적용이 되지 않는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범죄하지 못한다. 이 점에 몇 명 동의하십니까?

 

마지막 문제입니다. 크리스찬은 범죄하지 못한다.

 

마지막 두 마디에 손을 들어 지지하시는 분이 없네요. 하필 이 성경 구절에서 말하였는데, 정말로 재미있네요. 그래서 여러분은 성경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좋아요. 모두가 웃네요.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어떻게 된 일인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 구절이 말하기를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 우리가 범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이 이 말에 손을 들어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확실치 않았고, 그리고 이 말에 명확히 동의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가 여기의 실을 뽑고 고치를 벗기겠습니다.

 

우리가 우선 먼저 여기에 몇가지 조건이 있는 것을 보겠습니다. 요한이 왜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또한 우리가 죄를 범죄하지 못한다고 하였을까요?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첫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 원어에서 정자라는 뜻인데, 아주 강렬한 남성 비유입니다. 하지만 단지 이 두가지 요소이겠습니까? 여러분은 단지 이 두가지 요소라고 생각합니까? 일단 앞뒤 문장으로 이 구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번째 요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절대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고 조건이 있습니다. 절대 성립은 사방에 놓아두는 것이 모두 비준이어야 하고, 조건이 있으면 반드시 조건이 부합되어야만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위에 한 구절이 말하는 것을 보세요. ‘그의 안에 있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전체 상황을 바꾸었고, 처음에는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헬라어를 한번 논해보겠는데, 여러분이 반드시 헬라어를 아셔야만 제가 강의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모르시면 제가 한 말만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동사 형태가 매우 특이한데, 이를 현재진행형이라고 하며, 헬라어의 현재식 동사이고, 현재 진행의 뜻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진행형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계속해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계속해서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요한복음3:16절까지도 오해석 되었습니다. 이 구절도 현재진행형 동사를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계속해서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이 이 구절에 대한 이해가 아직 더 바꿀 것이 있습니까? 한번 믿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믿어야 생명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라는 이 성경은 그리스도안에 계속 사는 사람은 계속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산다거하다와 같은 것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나의 안에 거하는 자는 나의 안에서 계속 사는 자이니라. 만약 이 조건이 성립되면, 그럼 이 말이 바로 성립됩니다. 계속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를 짓지 않고, 또한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다면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만약 매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그 좋지 않는 습관도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 이런 습관은 파괴됩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는 갈수록 진보하게 됩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찬이 아니인지를 논했는데, 바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이며, 영적 생명이 진보가 없는 자인데, 이런 사람은 이 약속에 들어지가 못한 사람입니다. 제가 한 두절 성경을 읽을 테니 한번 들어보세요. ‘그의 안에 있는자마다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그를 보지 못했고, 그를 알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신국제역본에서 이렇게 번역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고, 그는 계속하여 범죄하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진보가 있게 되고,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 당신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성립하는 조건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이해하시리라고 봅니다. 만약 이 구절을 단독적으로 인용하면 여러분까지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방도 성경의 말씀을 부인했잖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결국에는 이 진리를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크리스찬입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앞뒤 문장을 보지 않고 한 구절만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경은 반드시 앞뒤 문장을 같이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서신서 전체의 전제 모두가 크리스찬은 반드시 죄를 짓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짓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죄 사함 받은 후 다시 고의적으로 범죄하면 다시는 드릴 속죄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찬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죄를 범하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크리스찬의 한가지 특징이라면 자신의 지은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당신이 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한 자신이 죄 짓지 않기를 바란다면, 해결 방법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맞습니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범죄하지 못합니다. 저의 이 설명이 명확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5장의 한 곳에서도 크리스찬의 범죄에 대해 논했는데,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5장에서 형제가 범죄했을 때 응당 그가 회개하도록 힘껏 도와야 하며, 그래야 그 형제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그가 죽음에 이르는 죄를 말하였는데, 이런 죄를 범한 형제는 그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데, 성경에서 계속해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신앙에서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후퇴할 수 있는데,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입니다. 우리는 이런 심각한 경고를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가장 명확하게 말하였는데, 사람이 더는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만일 형제가 이런 죄를 범하였으면 더는 그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참포도나우를 떠났고, 더는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이 크리스찬이 죄를 지었다는 말씀들을 정리하면 아주 명확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중의 한 마디만 본다면 평행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죽음에 이르는 죄라는 구절만 보고, 이런 죄를 범한 형제는 그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만약 이것만 말하면 회중들이 두렵고 불안해 하며, 자신도 전에 사함 받지 못할 죄를 범하였다면서 무서워하겠지요. 반대로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형제가 죄를 지었는데, 그보고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있으니,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사함을 받을 수 있다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계속 죄를 범해도 괜찮을 줄로 생각합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또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이것은 아닙니다. 이 두가지 극단적인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쪽 평행입니다. 요한이 말한 크리스찬이 죄를 짓는 말을 합하여 보아야 태도가 정확한 것입니다. 긴장하지 않거나 혹은 현재에 만족해 하고, 하나님에 대해 합당한 경외심을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더러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설명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모든 의문에 해답이 되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을 못하겠네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찬이 죄를 짓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빛이라면 우리는 빛속에서 행해야 하고,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하고, 만약 하나님이 생명이라면 우리가 그 안에 거해야 합니다.

 

좋아요. 우리 요한일서를 끝맡쳤어요. 다음은 요한이서와 삼서를 강의하겠습니다. 제가 심상치 않은 머리말을 쓰려고 하는데, 먼저는 남녀의 다른점을 논하고, ㅎㅎ,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었고, 남녀가 서로 보완하게 하였습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남자의 장점이 마침 여자의 단점과 서로 보와하게 하였고, 여자의 장점도 마침 남자의 단점과 서로 보완하게 하였으며, 남녀가 서로 필요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이 웃긴 그림을 놓았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제가 남녀가 서로 다르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 범위 안의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의 특징에는 한가지 범위가 있는데, 모든 남자가 일반 남자 같지 않다는 것이며, 또한 모든 여자가 일반적인 여자와 같지 않고, 여자의 특징에도 한가지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의 특징 범위에는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말하는 일반적인 특징에는 예외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남자의 키가 비교적 크거나 혹은 여자의 키가 비교적 작다는 것을 말하려는데, 이렇게 말하면 틀리지 않지요? 여기에 앉아 계신 어떤 여성분들은 키가 확실히 저보다 크네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남자의 키가 여자의 키보다 커요.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예외적인 상황 때문에 제가 잘못 말했다고 지적하지 말아 주세요. 어떤 남성은 여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어떤 여성은 남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자들의 잘못은 인류가 한가지 특징 범위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에는 남성의 특징이 있고, 여성의 특징과 혼합 특징이 있습니다. 마치 남녀가 똑 같은 것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남녀 유별입니다. 하지만 두가지 특징 범위가 중첩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극히 남성적인 남성과 극히 여성적인 여성이 있습니다. 마치 실베스 스탤론이 바로 그 끝에 있고 마릴린 먼로가 바로 이 끝에 있었던 것처럼입니다. 두가지 특징 범위가 있는데, 중간에 중첩적인 부분이 있고, 이 중첩된 부분에서 많은 남자들이 여자로 변하고 싶어합니다. 우리 나라에 이만오천명의 남자가 이미 여자가 되었는데, 나라가 무료 수술을 제공하여 매우 큰 성 착란을 일으켰고, 또한 많은 여자들이 남자처럼 배후에 막강한 여권력 힘을 키우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남녀를 서로 다르게 지었고, 우리는 남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요한이서, 삼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요한이서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거의 비슷한 요한삼서는 오히려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내용은 상반대입니다. 하지만 주제는 똑같은데, 이는 하나는 여성에게 보내는 것이고, 하나는 남성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녀는 크게 다릅니다.

 

남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겠습니다. 남자의 외모에는 각이 있고, 여자의 외모는 곡선 같은데, 아주 선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의 어떤 남성들은 곡선 같고, 어떤 여성들이 오히려 각이 나 있습니다. 남자들은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들은 직감을 좋아합니다. 저의 와이프 직감 판단이 제가 6주동안 연구한 결과와 같았는데, 이 점에 대해 제가 참으로 평행을 못 잡겠네요. 하지만 대다수 여자들은 확실히 아주 강한 직감이 있고, 그리고 남자들이 오히려 앉아서 분석하고 연구합니다. 남자들의 생각은 비교적 추상적이고, 여자들의 생각이 오히려 비교적 구체적입니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개괄적인 일이고,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세부적인 일입니다.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세부적인데, 여자들은 세부적인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남녀의 두가지 큰 다른점인데, 남자는 목표를 지향하며, 삶이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하지만 여자들은 요구를 지향합니다. 남자의 성취감은 그의 목표를 완성하는 것이고, 여자의 성취감은 그의 요구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다음 이 점은 남녀의 제일 큰 다른점인데, 남자들은 사물에 대해 비교적 흥취가 있고, 여자들은 사람에 대해 비교적 흥취가 있습니다. 남자 몇 명이 함께 있으면 기계차, 자동차 등 같은 것을 얘기하는데, 하지만 여자 몇 명이 함께 있으면 그들 남편 얘기를 합니다. 남녀 서로가 필요합니다. 제가 또 다른 서로 다른 점을 예로 들어볼게요. 사실 비록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삶에서 자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이지와 감정을 나눌 수 있지만 여자들은 자신을 자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몇 명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지만 여자는 한번에 한 남자만 사랑합니다. 이것이 남자들이 대면해야 할 하나의 시험이며, 여자들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여성이 남편이 외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남편에게 당신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라고 하니 남편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담이지만 아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이지와 감정을 자를 수 있지만 이를 핑계로 범죄하면 안되지요. 오히려 징계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들은 이지와 감정을 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처리하고 처벌하는 상황에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저는 사형을 지지합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기를 당신이 그 사형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하여 제가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인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자에게 가정과 교회의 징계 책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형제 특별 모임에서 이 부분을 논합니다. 남녀에게 이런 다른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사실에 비교적 관심이 있고, 여자들은 사랑에 비교적 관심이 있으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남자들의 위험은 사실에 중시하지 않는 것인데, 하지만 사랑은 오히려 너무 중시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요한이서와 삼서가 논하려는 것이 바로 이 특징에 부합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 두권의 서신을 보겠습니다. 이상은 단진 개괄적인 배경 소개였으며, ‘요한이서, 삼서의 주제를 강의했습니다. 이 두권의 서신은 아주 짧습니다. 단지 A4용지만큼 크기이고, 사초지 한 장이 딱 A4 사이즈인데, 바로 여러분이 보신 이 모양입니다. 이 두통의 편지 모두는 손님을 대하는 방법을 이야기했고, 손님을 대하는 방법이 초대교회 시기에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크리스찬들이 각 곳에서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집을 떠나 밖에서 반드시 서로 배려해야 했고, 그리고 타지의 전도인들이 자주 교회에 와서 봉사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전도인이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 하고, 또한 타지에서 오신 전도인의 설교도 들어야 하여 두가지 모두 필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자신들의 전도인이 하는 설교만 듣고, 타지 전도인의 설교는 아예 듣지를 않는데, 이것은 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밤낮으로 타지 전도인을 초청해 오셔서 설교하고, 그 교회 전도인은 설교를 아주 적게 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교회내의 전도인 외에 타지에서 오신 사역 목사, 교사,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 등이 있습니다. 초대 때 어떤 기독교 문헌에 경고하기를 만약 선지자가 한 교회에서 삼일 이상을 거주하면 그는 가짜 선지자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견해인데, 이는 선지자가 한 교회에서 오래 머물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만약 선지자가 여러분의 교회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비참한 것입니다. 그가 매주마다 무례하게 예언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고,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했고……라고 합니다. 오래 들으면 오히려 마비되는데, 이런 상황은 매우 위험합니다. 선지자는 각 곳에 가서 봉사해야 하고, 복음 전하는 자는 각 곳에 가서 봉사해야 하고, 목사와 교사는 교회에 남아서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인은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목회도 안하고 밖에 나가서 설교도 하지 않으면 이는 교회에 너무 불공평한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우두머리가 없어서 회중들은 목사가 어느때 계시는지를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전도인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타지에서 오신 전도인의 설교도 들어야 합니다. 특히는 타지에서 오신 전도인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항상 저에게 여관에 거주하렵니까 아니면 가정으로 접대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저는 항상 가정에 숙박하겠는데, 하지만 반드시 좋은 집을 찾아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면 그들이 묻기를 당신의 뜻은?’이라고 하면 제가 제가 두 글자를 들이겠는데, 저는 이 요구만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두 글자일까요? 바로 진실’, ‘진실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가식없는 가정을 찾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다른 요구가 없고, 단지 진실되고 가식없는 것만 요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타지에서 오신 강사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거나 혹은 자신들의 행위가 강사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기대할 필요없습니다. 저는 진실된 가정만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요한이 이 두권의 서신을 써서 이 잘못된 손님 대접을 교정했습니다. 첫번째 편지는 한 여사에게 보냈고, 두번째 편지는 한 남자에게 보냈는데, 이는 이 여자가 손님 대접하기를 너무 좋아했고, 하지만 이 남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두가지 상황인데, 우리가 여기에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런 잘못을 자주 범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의 위험은 사랑이 너무 많은 것이며, 진짜 가짜 분별을 모릅니다. 그는 접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접대하였습니다. 그는 손님 대접하기를 너무 좋아하고, 마음이 쉽게 연약해집니다. 그가 오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고 모두 접대하는데, 접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접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여 잘모된 가르침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요한은 조부의 역할에서 온유로 그를 책망하기를 당신은 진리를 소홀히 했고, 사람에게 이용되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한가지 일을 일깨워 주고 싶은데, 어떤 아내들은 교회에서 지나치게 열정으로 봉사하고, 그리고 진리를 쫓는데, 하지만 그들 대신해서 짚어주는 남편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모든 아내들에게 권면하겠는데, 당신이 어떤 책을 보든지, 어떤 설교를 듣든지, 당신 남편과 상의하세요. 당신 남편더러 당신을 이끌게 하고, 당신을 도와주게 하고, 뭐든지 다 받지 마세요. 여자들은 가정으로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성이 통치하게 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저의 조그만한 나눔입니다. 여러분 디모데후서에서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과부와 의지력이 약한 사람은 잘못된 가르침을 쉽게 듣고 믿습니다. 이 여자들은 보호하는 남자가 없고, 이로써 잘못된 진리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여자들은 성경을 가르치면 안된다고 언급하였고, 하와마저도 속임당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한 마디 보충하겠습니다. 하와가 속임 당할 때 아담도 옆에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저로 하여금 남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단과 하와가 변명할 때 아담도 옆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하지만 그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tv에서 고난을 당한 부부를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는데, 모두 누구 말을 합니까? 남편은 늘 그 곳에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응당 아내를 보호했어야 합니다. 응당 책임지고 발언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아내에게 던졌습니다. 제가 반드시 남자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겠습니다. 응당 공평해야 합니다.

 

요한이서의 이 아내는 제멋대로 주장하여 집에서 모임을 했는데, 혹시 남편이 괜찮다고 했을 것입니다. 당신들 모임할 때 내가 다른 방에 가서 있을게요라고 했을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남편들은 조용하기 위해서 감히 아내와 도리에 맞설 수 없습니다. 어차피 가화만사성입니다. 아닙니까? 그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이 교회에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아요라고 하는데, 사실 그는 매우 개의치만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아내는 집을 교회로 하고, 성경 교사라고 자칭하는 모든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저의 집에 오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저녁 저의 집 모임에 설교하여 주세요라고 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사랑과 진리 모두는 함께 돌보아야 하고, 이 사람이 가르치는 것이 진리인지를 반드시 확신해야 하고, 그리고 그를 당신 집으로 들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3권의 서신은 역설적인 위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요한은 이 형제에게 편지하였고, 이 형제는 자신의 교회를 보호했습니다. 그는 타지에서 온 전도인을 접대하지 않고, 그들을 거절하였는데, 이것은 반대의 극단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위험은 진리를 너무 중시하여 사랑을 잊었습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성경에 대해 제일 정확하게 안다고 생각하며, 그처럼 이렇게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그는 집문을 단단히 잠궜습니다. 이 남자는 마음이 매우 강하고, 그의 문은 아주 단단히 닫겨있습니다. 심지어 좋은 성경 교사조차 문전박대를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남자들이 쉽게 받을 수 있는 시험입니다. 저는 남자의 신분으로 이런 말을 하는데, 남자들은 이렇게 하기가 쉽습니다. 진리를 너무 중시하여 사랑을 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 기도를 매우 좋아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드시 교정해야 하는데, 하지만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평행을 취하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습니다. 여자들은 사랑을 너무 중시해서 진리를 잊어버리기가 쉽고, 남자들은 진리를 너무 중시해서 사랑을 잊어버리기가 쉬운데, 남녀가 확실히 서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남녀를 지으신 것은 서로 보조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마다 모두 결혼해야 한다는 뜻이고, 배우자만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일 좋은 예입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여자들과 완벽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아꼈고, 여자들을 도왔고, 그들이 와서 봉사하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남녀가 응당 져야 할 역할과 책임을 여전히 지켰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남녀 차이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녀의 차이는 확실히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다양화하는 여러가지 다른 것들을 창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광명과 흑암을 구분하였고, 땅과 해양을 구분했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고, 모두가 평등한 존엄이 있고, 패망과 귀숙이 있고, 완전히 평등되는데, 그러나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서로 다른 분부와 서로 다른 인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이런 인도를 주었는데, 두가지 모두가 겸하여 돌봐야 합니다. 여자는 겸하여 돌보는 사랑과 진리가 필요하고, 남자도 겸하여 돌보는 사랑과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길입니다.

 

우리가 이 두권의 서신을 한번 분석해보겠는데, 이 두권의 편지 모두가 아주 짧습니다. 이 두개의 편지는 동일한 시기에 기록했다는 것이 선명하고, 이 두권의 편지가 똑 같은 양식입니다. 우리는 이 여자의 이름을 모릅니다. 혹시 콜리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여사라는 뜻입니다. 혹시 이것이 귀부인의 칭호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녀가 누군지 모릅니다. ‘자녀는 아마 그 집에서 모임하는 영적인 자녀를 가리킬 것인데, 우리는 이 점도 모릅니다. 두권의 편지가 동일한 대강인데, 하지만 강조하는 중점이 다릅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두권의 편지가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남녀에게 주는 메시지는 확연히 다릅니다.

 

여기에 한 대강이 있는데:

 

요한이서’, ‘요한삼서

 

1-3 진리에서 오는 사랑 1 진리에서 오는 사랑

 

4 진리를 행함 2-4 진리를 행함

 

5-6 사랑을 행함 5-8 사랑을 행함

 

7-9 어떤 사람은 진리를 거절 9-10 어떤 사람은 사랑을 거절

 

10-11 그들을 초청하지 말 것 11-12 그들을 본받지 말 것

 

12-13 우리의 기쁨 13-15 너희의 평안

 

우리 모두는 이 남자의 이름을 아십니다. 사실 저는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이 남자는 마음이 좁고, 그는 손님 대접할 줄 모릅니다. 그의 이름은 디오드레베입니다. 말이 많고, 오만하고 완고하고, 아마도 대권을 쥐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 작은 교회를 보호하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부의 전도인들에게 그의 전도인의 기세를 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그더러 데메드리오를 대접하라고 분부했고, 이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는데, 디오드레베의 배척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그들더러 그를 대접해라고 분부했고, 그는 아주 좋은 성경 교사이니 그를 대접하기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요한의 서신을 논했고, 마지막으로 제가 요한 말년의 두가지 이야기를 하겠는데, 이 두가지 이야기는 교회 문헌에 기재된 것이고, 이 두가지 이야기에서 요한이 겸하여 돌보는 사랑과 진리의 태도를 제일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제일 좋은 본보기이고, 그는 진리를 지켰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는 이 점을 요한일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구 그리스도의 신분을 의심하면 그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사랑이 매우 많은 어르신이었고,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불리웠고, 예수님이 그를 사랑했으며, 결국 그는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래는 그의 두가지 이야기입니다.

 

요한이 나이가 늙었을 때 사람들이 매을 그를 들어서 교회에 갔는데, 그들은 특별하게 제작한 의자를 이용하였습니다. 가마를 메는 것처럼 이 년로한 사도를 교회에 들어 갔습니다.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그더러 몇 마디 하여 달라고 하고, 그러면 그가 앞에 앉아서 자녀들이여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다시 들어서 회중석에 앉히십니다. 다음주에 그들은 또 그를 들어서 교회에 오고, 또 그에게 무슨 권면하실 말씀이 없는지를 묻습니다. 그가 있다고 하면 그들이 그를 앞에 들어 옮깁니다. 그가 또 입을 열어 말하기를 자녀들이여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그를 들어 회중석에 옮깁니다. 다음주에 사람들이 또 그에게 무슨 권면하실 말씀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 그를 앞에 들어 앉히면 그가 또 입을 열어 말하기를 자녀들아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가 년로하여 건망한 것이 아닌지 했습니다. 매번마다 똑 같은 말을 했고, 후에 그들은 듣기 귀찮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 같은 말을 계속하는데, 정말로 듣기 귀찮습니다. 영국 북부에 어떤 어르신이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매 주일 아침마다 그가 기도하기를 주여, 제 마음의 거미줄을 제거하여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매 주일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마지막에 어떤 젊은 사람이 참다못하여 큰 소리로 말하기를 주여, 그 거미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ㅎㅎㅎㅎ. 그 사람이 계속해서 똑 같은 말을 하면 사람더러 듣기 귀찮게 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저의 뜻을 응당 이해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이여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마지막 그들은 참다못하여 요한에게 묻기를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칭호가 앚 재미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서 이 말만 하세요? 그가 말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그럼 됐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아름답지요?

 

그들은 또한 자주 그를 들어서 로마 공용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시키는데, 매우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한번은 그들이 요한을 물에 넣으니, 요한이 못의 다른 끝에 있고, 맞은편에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당시 유명한 가짜 교사였습니다. 각 교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가르쳤습니다. 요한이 말하기를 나를 일으켜세워라. 나는 저 사람과 같은 못에서 씻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방법없이 그를 들어 올렸고, 결국 그는 그 날에 샤워를 하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요한은 사랑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도 매우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사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 요한을 보았을 때 요한의 성격은 아주 폭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이것은 무슨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당시 모두 폭발적인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두 사람을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고, 두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도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할 때 그들을 접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명령하여 내리셔서 그들을 태워버립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보세요. 하지만 요한이 후에 많이 변했습니다. 그의 본성은 싸우기를 좋아하고, 심술을 부립니다. 그의 어머니가 한번은 예수님을 찾아오셔서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의 두 아들이 큰 자리에 앉게 해 주세요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또 한번은 요한과 그의 형제들이 또 이 일을 논했는데, 다른 제자들이 질투했습니다. 그들 형제가 하늘 나라의 자리 모두를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요한이 오히려 사랑과 진리를 겸하여 돌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사람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반드시 변화될 것이고, 갈수록 예수님을 닮을 것이라는 책을 기록했지요.

 

이상은 요한 세권의 서신을 논했고, 아래 아직도 두개 단원이 있습니다. 그리면 신약성경 모두 끝마칩니다. 우리가 짧은 편지 하나를 보겠는데, ‘유다서입니다. 우리 오늘은 여기까지 강의하고, 다음에 유다서를 강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