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서 (1)
신약성경 마지막에 세 권의 짧은 서신이 있는데, 사도요한이 기록한 것이고, 그 중에서 한 권이 비교적 길고, 다른 두 권은 아주 짧습니다. 이 몇 권의 서신이 그 전의 바울 서신과 매우 다른데, 당연히 저자가 다르지요. 하지만 성령의 묵시를 사람에게 주어서 기록할 때는 묵시를 주는 그 사람의 특징, 관념 그리고 성경을 완전히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매우 멋진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개성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이 몇권의 서신이 사람에게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데, 매우 따뜻하고, 매우 친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쓴 편지 같다고 하는데, 저는 조부가 쓴 편지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때면 나이가 이미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일하게 천수를 다하고 정침한 사도인데, 다른 사도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가 하면 처형당했거나 혹은 암살 등을 당했는데, 요한은 오히려 천수를 다하고 정침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점에 대해 일찍이 암시했었습니다. 베드로가 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라며,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이 너를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기를 ‘그럼 요한은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그더러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고 하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이 일은 내가 결정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후에 소문나기를 예수님이 요한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고, 요한이 복음서에서 이 잘못된 생각을 교정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확실히 늙을 때까지 살았고, 그가 또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계속하여 봉양했습니다. 그들 함께 에베소로 이주했는데, 이 몇 권의 서신이 바로 거기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후에 ‘요한계시’'을 나눌 것인데, 그것도 에베소라는 이 곳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 학자는 이 몇 권의 서신서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 몇 권의 서신서가 사실 ‘요한복음’과 일치한 특징, 일치한 성품 그리고 일치한 낱말을 사용했고, 많은 특징이 호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몇 권의 서신이 ‘효한복음’과 제일 큰 하나의 비슷한 점이 있는데, 비록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에는 많은 상반되는 대조가 있습니다. 요한은 분면한 사람이며, 그는 자주 상반되는 대조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는 현대에 제창하는 상대론과 매우 다른데, 상대론은 절대적인 맞고 틀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전체적으로 개인적인 방법이며, 맞고 틀림을 분간하지 않으며, 흑백 분간하지 않고, 모든 일이 회색이고, 현대 사회에는 상대적인 방법을 포옹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실것인데, 사실 성경은 옳고 그름을 분명합니다. 요한이 보기에 모든 일에는 생 아니면 죽음이고, 광명이 아니면 어두움이고, 진리가 아니면 거짓이고, 사랑이 아니면 미움이고, 공의가 아니면 불법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사탄의 자녀이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물과 불처럼 용납할 수 없고, 세번째 입장은 없고, 소히 말하는 중간 입장도 없습니다. 빛 속에서 거닐지 않으면 바로 흑암속에서 거니는데, 당연히 제일 큰 대조는 바로 천국과 지옥이며, 달리 갈 곳이 없고, 모든 사람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점으로 보면 이 세 권의 서신서는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도 그가 기록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그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의 이 편시는 누구에게 쓰는 것일까요? 사실 2:12-14절에 아주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세 종류의 사람에게 썼는데, 내가 편지한 대상은 자녀들, 그리고 청년들과 아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실제 년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년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초신자를 가리키는데, 지금 막 중생하여 구원 받은 사람이며, 어린아이가 아직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클 수 있는 것처럼입니다. 초신자는 두가지 일을 경험해야 하는데, 첫째는 죄 사함 받는 것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저도 대략 이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했고, 자녀들, 초신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그가 또한 청년들에게도 썼는데, 조금 컸고, 조금 성숙된 크리스찬을 말합니다. 그는 청년들의 세가지 특징을 가리켰는데,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청년들은 힘이 점점 강해지며, 연약한 어린아이보다는 강건하지요. 두번째는 그들은 성경을 흡수했고, 성경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성경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이래야 그들의 성장이 도움이 됩니다. 세번째는 그들이 처음으로 사탄과 전쟁해서 승리했고, 사람이 마귀를 이기면 영정 생명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를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은 이 세가지 방면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가 주를 믿은지 비교적 오래된 크리스찬에게도 편지하였는데, 그는 이런 사람을 아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비들은 경험이 많을 뿐더러 깊은 심도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험이 많은데 심도가 없습니다. 그가 아비들에게 분부했는데, 바로 진정으로 성숙된 크리스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경험에 대해 길이와 그리고 심도를 겸하여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편지는 세 종류의 사람에게 썼고, 아주 큰 한 민족에게 썼습니다.
그가 여기에서 모두 남자 칭호를 사용한 것을 우리는 주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형제 자매가 아니고, 형제라고만 칭하는 것을 주의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주의해 볼 가치가 있는 점입니다. 원인은 이렇습니다. 비록 형제라고만 칭했는데, 하지만 자매도 포함된 것입니다. 하지만 왜서 남성으로 강조할까요? 현재 어떤 성경 번역본에서는 남녀 평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형제라고 하는 곳을 형제자매라고 고쳤고, 부친이라는 곳을 부모로 고쳤는데, 이렇게 읽으면 매우 혼동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성으로 칭하는 주요 원인은 교회의 힘과 성품은 형제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형제가 교회에서 마치 집에서 지도자 책임을 지는 것 같이 해야 하고, 형제들의 성품이 제일 중요합니다. 만약 형제가 교회에서 강하면, 교회 전체가 강하게 되는데, 하지만 만약 형제가 연약하면 교회 전체가 연약해집니다. 그래서 이 5년동안 제가 많은 시간을 형제 사역에 매입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십니까? 제가 받은 감사의 편지는 대다수 자매들에게서 왔고, 그들은 저와 남편의 변함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교회와 집안의 남자가 만약 강하면, 여자와 아이들도 강하게 되는데, 하지만 남자가 연약하면 교회가 바로 연약해집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며, 형제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가정들 왕왕 아내가 남편보다 영적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의 교회에서 이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편이 아내보다 더욱 영적인 상황이야말로 건강한 것이고, 남편이 반드시 아내보다 더욱 영적이어야 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남자 칭호만 사용한 원인입니다. 여자나 혹은 자녀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고 만약 남자의 믿음이 강하면, 여자와 자녀의 믿음도 강해지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하나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편지한 대상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왜서 이런 편지를 썼을까요? 답은 아주 많고, 그가 우리에게 많은 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두가지 가능한 명세서를 드리겠는데, 그 중에서의 하나가 비교적 짧고, 다른 하나가 비교적 깁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합하여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이 이 편지를 기록한 것에 네가지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기쁨이 충망하게 하려 함이고(1:4), 두번째는 그들더러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책망 받는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2:1), 세번째는 그들더러 마귀의 계교를 피하게 하고, 특히는 잘못된 가르침을 피하게 하는데, 이것은 마귀가 제일 잘 사용하는 순단이지요(2:26). 네번째는 그들더러 증거를 얻게하는데, 크리스찬들은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 몇 권의 짧은 편지에서 증거를 겨냥한 가르침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서 불확실한 느낌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확실해야 합니다. 요한이 바로 그들더러 확신이 있게 도와주었습니다(5:13).
이 네개 구절을 귀납한 근거로 총 다섯개 목적이 있는데, 그들은 매우 비슷합니다. 첫째는 그들더러 화목하게 지내고, 서로 교재하고,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것이고(1:3), 두번째는 그들더러 기쁨이 가득하게 하고(1:4), 세번째는 그들더러 거룩함을 지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말씀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고(2:1), 네번째는 이단을 피하라는 것입니다(2:26). 바울 서신을 보고 다시 요한서신을 보았는데, 여러분이 지금 응당 아주 명확하게 아실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제일 큰 위험은 잘못된 가르침이고,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아주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다섯번째는 그들더러 소망이 있게 하고, 그는 그들의 마음속에 미래에 대한 소망이 충만하기를 바랐습니다. 풀이 죽지 말고, 하나님의 미래 사역에 뜨겁게 기대해야 합니다(5:13).
이 모든 것은 요한이 편지를 쓴 목적이고, 그의 마음속에 말입니다. 그는 AD90년경에 이 편지를 썼고, 그 때는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심을 받은지 이미 6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어른신이 긴 수염을 남긴 것을 상상됩니다. 의미심장하게 말하기를 ‘자녀들아, 아비들아’했고, 그가 말하기를 ‘내가 영적으로 너희의 조부일수도 있느니라. 너희들이 만족하기를 바라고, 자신들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거룩하고, 화목하게 사귀며, 소망이 가득하기를 바라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편지를 쓴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유한 목자의 심정으로 이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좋아요. 우리 이제 이 편지의 양식을 보겠는데, 그다지 쉽지는 않습니다. 이 편지가 순서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구조를 찾아 분석하기가 너무 어렵고, 마치 빙빙 돌아서 말하는 것 같고, 그는 선형 사고가 아닌 원형 사고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선형 사고적 사람입니다. 순서대로 근무하고, 저는 한걸음 한걸음씩 논하고, 분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바울은 분석에 매우 뛰어났는데, 변호사처럼 사고합니다. 저는 오히려 선형 사고를 좋아하고, 그래서 원형 사고인 사람을 만나면 제가 조금 헷갈립니다. 계속 빙빙 돌면서 똑 같은 주제를 논하고, 끝나고 나서 다른 것을 논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원래의 것을 말하곤 합니다.
그가 왜서 선형 사고를 하지 않고 원형 사고로 했을까요? 첫째 그는 어부이고, 바울은 변호사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어부이고, 어부들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면서 말을 합니다. 그는 어떤 교육을 받지 못했고, 선형 사고 훈련도 받지 못했는데, 이것이 아마 하나의 원인일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한 원인은 그의 나이일 것입니다. 일단 나이가 많으면 말이 많게 되고, 나이 많게 되면 한번 입을 열면 그칠줄 모르고, 이것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원인은 요한은 유대인이고, 비록 헬라어로 기록했지만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유대인의 지혜서를 읽고 연구해보면, 예를 들어 ‘잠언’인데, 이것은 유대인의 특징입니다. 유대 랍비가 하는 강의를 들어보셨습니까? ‘옥상의 바이올린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들은 항상 반복하여 말합니다. 이 방면에서 말하자면……다른 한 방면에서 말하자면……. 어떤 유대인이 저에게 유대인들의 목이 왜서 짧은지 아시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양손을 버리고 어깨를 들썩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지혜는 정말로 매우 독특합니다. 이 방면에서 말하자면…… 다른 한 방면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몇가지 주제를 반복하여 나누는데, 이것이 바로 유대식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 이 책이 바로 몇가지 주제를 반복하여 나누고 있습니다. 먼저는 게으름을 말하고, 그리고 잔소리하는 아내와 다른 일들 등등을 논했습니다. ‘아침 일어나서 큰 소리로 친구를 축복하는 것은 그를 저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게으름을 논했고, 그리고 잔소리하는 아내를 논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빙빙 돌려서 한다는 것을 주의했지요. 만약 게으름에 관한 설교를 하려면 성경 많은 곳을 찾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도 똑 같은 상황입니다. 여러분이 ‘야고보서’를 읽으면 볼 수 있는데, 먼저는 혀의 죄를 논했고, 이어서 믿음과 행위를 논했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혀의 죄를 논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는 원형 사고 방식입니다. 몇가지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나타나서 구조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두 개의 반구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두 개의 반구로 나누고, 하나의 세계를 두 개의 반구로 나누는데,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더러 이 반구에 거주하라는 것이고(생명, 사랑, 광명, 하나님 자녀’, 다른 반구에서 표류하지 말라(불법, 정욕, 거짓, 사탄 자녀)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더러 하나님 말씀에 머물고, 이 세상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그림이 우리가 요한 서신을 읽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응당 반구에 거주해야 합니다. 여러분 왜서인지 아십니까? 거기는 생명, 사랑, 광명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명에 아주 큰 영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적도를 건너 남반구까지 간다면, 마귀의 자녀가 바로 거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불법 세계이고, 정욕과 거짓이 가득차있는데, 그들이 세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크리스찬들은 매일 이 선택을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더러 그들을 영향주게 하시겠습니까. 서로 다른 환경이 서로 다른 성품을 만들어내는데,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바로 이런 삶을 살게 되고, 만약 세상을 사랑하면 바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면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일단 요한의 사고 양식을 이해하면 이 서신이 사실 조금 구조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샌드위치 같은데, 먼저는 정면을 말했고, 그리고 반면을 말했으며, 그리고 다시 정면을 말했습니다. 아주 좋은 하나의 샌드위치인데, 정면적인 말이 반면적인 말의 두배이고, 반면적인 말이 정면적인 말의 중간에 끼워있습니다. 무엇은 해야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다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말했습니다.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제1장에서는 생명을 논했고(1:1-4), 제2장에서는 광명을 논했고(1:5-2:11), 그리고 반면적인 부분인데, 주요로는 세상에서의 삶을 말했습니다. 정욕, 거짓과 불법을 논했는데, 2:15-3:10절까지입니다. 이어서 또 정면적인 것을 논했는데, 특별히 사랑을 강조했고,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3:11-4:21). 성경에서 요한만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가 여기에서의 중점입니다. 마지막에 요한이 다시 생명을 논했습니다(5:1-2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매우 혁명적인 방법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말은 한 다른 종교는 없었고, 할 수도 없고, 유대교까지도 이런 말을 못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라고 했지만 이 말은 그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한분만 아니라는 말씀이신데, 만약 한 분이시라면 사랑이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아직 인류가 있기 전에 성부, 성자, 성령만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성령을 사랑하고, 성령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들 세 분은 서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한 분만 아니라는 말씀인데, 하지만 유대교의 신은 한 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심상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는 우리를 사랑한다라고만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삼위일체이기에 서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하나님이 왜서 우리를 창조하였는가 물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그에게 그가 아주 사랑하는 아들 하나가 있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많은 아이를 갖고 싶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일 간단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있는 사랑을 더욱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많은 자녀를 창조했고, 인간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좋아요. 이것이 바로 요한서신의 구조이고, 우리가 아직도 많은 것을 논해야해서 빠른 속도로 강의하렵니다. 제가 조금 빠르게 강의할게요. 저의 강의 원고가 이 대강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설교를 하고, 그리고 우리 다시 이 대강을 보겠는데, 그것은 뒤의 부분을 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단을 논하고 싶은데, 이것은 요한이 에베소의 잘못된 가르침에 반박하고 싶어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가 편지에 우리, 너희와 그들이라는 것에 주의했을 것인데, 제가 논하려는 것은 ‘그들’이라는 부분입니다. 미안해요. 여러분에게 이 부분에 대한 대강을 보여주지 못하겠네요. 여기에서도 육체와 영혼의 대립적 헬라 사고가 농간을 부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적 사상이 우리 마음에 일찍이 이미 뿌리가 깊게 박혔습니다. 헬라어에만 소히말하는 ‘신성’과 ‘세속’이라는 두 단어가 있고, 성경에서는 ‘세속’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는데, 하지만 크리스찬들까지도 그들이 세속의 사업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도덕이거나 위반적인 사업외에는 무슨 ‘세속적’ 사업이 없습니다. 제가 다시 강조하겠는데, 죄외에는 무슨 ‘세속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한번은 제가 영국 북부에서 이 말씀을 했는데, 전국에 알려진 유명한 가수가 이 말을 듣고 주를 믿었습니다. 죄외에는 무슨 ‘세속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 후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속적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가 광고를 위해 항상 광고 방송의 노래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현재 이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죄외에는 ‘세속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헬라 사상에는 모든 것을 유체와 영혼으로 구분하고, 신성과 세속, 잠시와 영원으로, 모든 것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특히는 육체와 영혼인데, 이로써 우리가 이런 사상의 해를 깊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혼은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시 들어보세요.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혼은 좋은 것이라는데, 이런 사상은 사람더러 육체와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더럽고 죄악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마저도 이런 사상에 도를 입었고, 이런 사상은 크게 틀렸습니다. 이런 사상을 예수님에게 씌우면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며, 하나님이 어찌 평범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근본상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잠시적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이고, 인간은 육체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땅의 평범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당연히 크리스찬들의 신앙 뿌리를 흔들게 하지요. 파생된 이론이 매우 많은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하며, 그의 몸은 진짜가 아니고 단지 환상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단이 있는데, 그들은 이를 ‘환상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단지 탈을 쓰고 나타났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그의 선신에서 말하기를 ‘만약 누구 예수님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마귀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바로 신세기의 철학 방법입니다. 인성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과 신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를 구분하였습니다.
요한시대에 어떤 이단설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보았고, 읽어도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이고, 그가 30세에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가 죽임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서 떠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고, 무덤에 매장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신세기 철학이 ‘그리스도’라고 하고,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라고는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견해가 매우 교묘한데, 많은 사람을 속여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이런 견해가 말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와 영적인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고, 육체가 있고 영혼도 있으며, 신성이 있고, 인성도 있으며, 그는 살아계시고,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헬라 사상이 하나님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시간 밖에 있다는 말을 하기 아주 좋아합니다. 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적이 없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원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완전히 서로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고, 하나님이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 사상은 하나님과 시간은 완전히 구분했습니다. 이외로 많은 크리스찬들이 천국에 가면 시간 밖에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되고, 시간은 무한히 연속됩니다. 하나님 안에 시간이 있고, 성경 안에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History)는 바로 그의 이야기(History)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이단을 반드시 엄격히 반박했는데, 이는 그들이 인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과 신성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구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이고, 절대로 그리스도에게서 난 자가 아닙니다.
당시 크리스찬들이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만났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습니다. 보고, 만지고, 들었다는 이것은 사람에게서 제일 강렬한 세개의 감관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고, 직접 만졌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전에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고, 요한이 그의 머리를 이렇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만져보았고, 바로 이렇게 진실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제일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느냐’라는 이 문제는 제일 기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짧은 시 하나를 썻는데, 제가 만약 잘못 기억했으면 여러분들이 교정해 주세요. ‘너희가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느냐. 이것은 최종 테스트이다. 네가 만약 잘못 봤다면 모든 것이 틀릴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예수를 누구로 보느냐하는 이것은 제일 기본적인 하나의 사건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완전한 신이시고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의 안에서 육체와 영혼은 완전하게 하나이고, 다른 세계와 이 세계가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헬라 사상은 시간과 영원을 구분했고,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했는데, 이런 사상은 일격에 불과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데, 확실합니다. 그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에게서 발사한 영광이고, 귀신 같은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면 당신이 예수님에 대한 신념에 영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찬의 행위에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헬라 사상은 구원 받는 것이 몸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몸의 행위가 영혼과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헬라 사상이 가져온 영향입니다. 몸체 하나를 두 칸으로 나누는데, 한 칸은 육체가 거주하고, 한 칸은 영혼이 거주한다고 하면서 왕과 왕이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뜻을 응당 아실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아주 보편적이고, 요한이 편지에서도 이런 사상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점차적으로 크리스찬이 범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는 티켓을 이미 받았으니 범죄해도 상관 없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크리스찬은 죄가 없다라고 하는데, 이런 완벽한 논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눈에 죄가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참으로 크게 틀린 생각이 있는데, 즉 주를 믿으면 후에 범하는 죄도 모두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틀렸습니다. 사람이 주를 믿을 때 지나간 죄만 사함을 받고, 후에 범하는 죄는 하나님께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이 여기에서 이 크리스찬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즉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끊임없이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끊임없이 씻어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한번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지금 마음대로 죄를 범해도 지나간 죄 모두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이 후에 범한 죄는 반드시 하나님께 사함을 구해야 합니다. 제가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발견했는데, 바로 죄를 인정하면 그가 우리를 사해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끊임없이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 교훈 들을 필요가 매우 있고, 우리는 요한의 서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헬라 사상이 교회에서 불법과 부도덕적인 행위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더러 자신이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인줄 알고, 크리스찬은 옳고 그름의 준칙에 속박되지 않는줄로 아는데, 이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바울이 말하기를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절대로 공평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비크리스찬들의 죄를 무시하지 않고, 크리스찬들의 죄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그는 언제든지 우리를 사면합니다. 이런 헬라 사상은 사람더러 마음이 오만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합니다. 크리스찬은 죄를 범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크리스찬에게는 죄가 없다는 두가지 사상을 합쳤는데, 이로써 교회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지요.
우리가 아래로 계속하여 보겠는데, 요한은 크리스찬들더러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확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의 특징을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이 광명인만큼 하나님의 자녀는 광명을 향해야 하고, 광명의 길로 가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인만큼 그의 자녀도 사랑을 나타내야 하고, 하나님이 생명인만큼 그의 자녀도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사건을 볼 수 있는데, 누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반드시 광명의 길로 갈 것이고, 사랑을 나타내며, 생명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고, 그의 자녀도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가 더욱 자세한 부분을 논했는데, 네가지 테스트로 한 사람이 크리스찬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아주 엄격한 테스트인데, 그는 이 테스트를 아주 자세하게 논했습니다. 여러분 미안한데 우리가 자세히 논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점을 언급하여 여러분이 그의 뜻을 이해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첫번째는 교의적인 테스트입니다. 모든 크리스찬은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즉 당신은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만약 육신의 예수님에 확신 없고, 즉 신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혹은 그가 사람이고 또한 사람이라는 것에 확신이 없으면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찬이라면 반드시 이 교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신치 않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위인인줄 알고 있고, 그는 단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교의가 아니고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또한 완전한 사람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인데, 이것이 첫번째 테스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점을 믿지 못한다면 첫번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두번째는 영적인 테스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그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만약 성령이 없으면 두번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당신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미안한데 여러분 제가 여기에서 한마디를 끼어들어야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구원 받은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에는 이런 증거가 없습니다. 저의 뜻은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어떤 사실을 추론하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면 나는 어떻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이런 논조를 들어보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하지만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이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 받은 증거는 성령에서 온 것이지 성경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을 증명하면 안됩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크리스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성경이 아닙니다. 두번째 관문은 영적인 테스트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 자신이 그의 자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에게 성령님이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두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여전히 마귀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며, 여전히 그의 악령에 통제되고 있습니다.
세번째 관문은 도덕적인 테스트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르게 살면 양심이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했다고 알려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심을 주셔서 내가 구원 받았는지를 확신하게 하여 줍니다. 만약 우리가 양심에 물어 부끄러운 바가 없고, 자신이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이라고 알면, 당신은 의롭게 행하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도덕적인 이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고,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치심을 합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그의 뜻을 배반하여 행하면 세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이 요한의 서신을 반드시 자세히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네번재는 사회적 테스트입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면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크리스찬을 미워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도 다른 크리스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형제 속에 있는 크리스도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예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한가지 증거이고,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한데, 성령님이 당신더러 유대인을 사랑하게 하여 줍니다. 아주 생각밖입니다. 그렇지요? 사람의 본능으로는 유대인을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모두가 유대인을 미워할 것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행위에서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기도를 특별히 언급하였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사랑이 우리 속에 확실하게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크리스찬이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지만 땅에서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평상시에 좋아하지 않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느 srmemf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테스트가 아주 유용해요. 여기에 앉아 계신 전도인들이 이것을 설교 제목으로 이용해도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음주에 설교를 하신다면, 이것이 이미 만들어진 제목입니다. 좋겠지요? 여러분이 이 네개의 테스트인 교의, 성령에 속함, 도덕과 사회를 자세히 강해하십시요. 요한은 만약 당신이 이 네개의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집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고, 일단 이 증거를 얻게 되면 극히 큰 자신감이 있게 됩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매일 세가지 방면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찬은 겁쟁이가 아니고, 크리스찬은 이렇게 고개를 숙이면 안되며, 이렇게 부끄러워 하면 안되고, 우리는 정직한 사람들이며, 성경에서 정직한 사람을 논하고 있으니 우리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야 합니다.
어떤 태어나서부터 다리가 불편한 젊은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과 그리고 희롱을 당했고, 가족 사람들도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후에 그가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한번은 제가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니 그가 ‘빌립’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빌립, 너는 크리스찬이냐?’라고 하니 그가 ‘네’라고 했고, 제가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고 하니 그가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럼 지금부터 너는 빌립 왕자이고, 매일 아침 일어나서 거울보고 빌립 왕자 안녕이라고 하라. 너는 왕실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라. 항상 고개 숙이지 말라’고 하니 그가 바로 고개를 들고 저에게 묻기를 ‘당신이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여 제가 ‘무엇을? 내가 어떻게 아시냐고라니?’라고 하니 그가 ‘제가 매일 아침 공장에 나가 일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빌립 왕자가 왔다고 비웃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이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야. 내일 아침 네가 공장에 일하러 가서 만약 그들이 너보고 빌립 왕자 안녕이라고 하면, 너는 네 자신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이 맞다라고 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그 남자아이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폈고, 삶 전체가 변하였습니다. 당신 자신이 하늘 왕실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당신이 왕자라는 것을 알면, 당신이 이 땅에서 바로 왕실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야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더욱 담대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자신감이 있게 됩니다. 당신 자신이 그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아버지,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이 일을 구합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서신이 아주 멋있지 않습니까? 그는 마치 자비하신 영적 조부 같습니다.
다음 우리가 또 다른 하나의 주제를 보겠습니다. 이 주제가 아주 중요한데, 우리 여기에서 먼저 멈춰야겠습니다. 다음회에서 우리가 이 중요한 주제를 다시 논하겠는데, 이 주제는 크리스찬이 범죄한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몇 마디가 아주 신기한데,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똑똑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금은 해석할 수 있어요. 저는 우리가 여기에서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절대로 단장취의(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장취의 한 성경에서 기괴한 오류가 없는 이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임의로 인용했는데,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성경 인용시에 반드시 앞뒤 문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단장취의는 터무니없는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제가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말씀을 아주 잘 하였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말씀드릴 테니 들어보세요. 제 성경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 구절의 앞뒤를 보면 어리석은 자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예가 조금 웃기네요. 하지만 단장취의는 잘못된 이론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서신에서 크리스찬이 죄를 범한 그 구절이 자주 단장취의 되어서 사용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뒤 문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다시 자세히 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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