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1) *기디언 LCY 번역
‘성경’은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되었고, 많은 인간 저자가 있는데, 하지만 편집은 하나님 한 분만이 하였습니다. 이 저자들은 다른 저자가 있는지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 자신들이 성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근본상 모르고, 또한 성령님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작품을 집합하리라고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저자들은 모두 어떤 절박한 필요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기록한 ‘빌레몬서’가 한 통의 감격적인 짧은 편지인데, 한 노예가 도망간 것을 논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 큰 성으로 도망했고, 결국 그가 바울을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를 네 주인에게로 보내리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편지 한 통을 써서 드릴게, 나는 네 주인 빌레몬을 알고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그가 편지에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빌레몬, 만약 너희 노예가 네 돈을 훔쳤다면, 내가 그를 대신하여 직접 갚아 드릴것이다. 그가 너에게 이익이 있다는 것을 너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매우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예 이름이 아네시모인데, 이익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인이 그에게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가 전에는 너에게 이익이 없었지만 이젠 너에게 이익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이 기록한 한 통의 편지였는데, 하나님의 구속이 생동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개변하였고, 우리더러 하나님에 대해 이익이 있게 하였으며, 그리고 우리를 주에게로 보내었습니다. 여기에 구속을 묘사하였으며, 죄인을 회수하여 다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이 기록한 한 통의 편지였고, 한 통의 짧은 편지일 뿐입니다.
‘성경’에 많은 것이 사람의 연고를 위해 기록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편집도 경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읽고 연구해야 하며, 제가 그들을 ‘역사적 측면’과 ‘존재적 측면’이라 하였습니다. 역사적 측면에는 기록한 원인과 배후에 어떤 인성의 원인이 있는지를 기록했고, 존재적 측면에는 이 책을 왜서 ‘성경’에 개입했고, 하나님이 이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는 것인지입니다.
제가 이 두 가지 방면에서 ‘사도행전’을 논하겠는데, 첫 회는 우리가 역사적 각도에서 보고, 두 번째 회는 우리가 존재적 각도에서 보겠는데, 즉 하나님이 이 책을 왜서 ‘성경’에 개입했는가입니다.
우선 먼저 묻고 싶은 것은 그 사람들이 왜서 이 책을 기록했고, 배후에는 무슨 원인이 있을까요? 누가는 ‘성경’ 전체에서의 유일한 이방인 저자이고, ‘성경’은 40명 저자가 기록하였으며, 그 중 39명은 유대인인데, 유대인 사고 양식이 있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내용 대부분이 유대인에서 온 것인데,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가라는 이 저자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누간가 의사라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이로써 하나님의 유머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고, 당시의 의학은 매우 진보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버클라테스와 ‘시버클라테스 선서문’을 들어보셨을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400년 전 좌우였습니다. 당시의 의학은 매우 진보하였고, 엄밀한 의학 훈련이 있었는데, 그들의 생각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인체의 네 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몸은 건강하게 된다는데, 즉 점액, 혈액, 흑담즙과 황담즙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점액이 만약 평행이 된다면 몸이 건강해 진다는데, 하지만 그들이 의사 훈련하면서 예민한 관찰력을 갖추었습니다. 분석을 잘해야 하고, 병력 기록과 의료에 종사할 때 모두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습는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이 특점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권 서신 모두는 누가가 썼기 때문입니다. 두 권 서신을 기록한 원인과 대상은 똑같았는데, 조금 후에 우리가 다시 논하겠습니다. 이 책이 예민한 관찰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였으며,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정확환 책일 것입니다. 누가가 책에 사실의 진상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책에 그는 의사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 의학 용어로 자주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정말로 유모아적인데, 그가 뜻밖에도 의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을 묘사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생각해보세요. 누가는 반드시 마리아에게서 자세한 상황을 알아야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각도에서 예수님 탄생을 묘사했고, 요셉의 계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적 계보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보에 여고냐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고냐가 저주를 받았고, 후손 중에 다윗의 보좌에 앉을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 법정 계보를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육신을 기록했는데 즉 마리아로 온 계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고, 법정으로는 요셉의 아들이며, 육신은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분에는 이중적인 긍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의사가 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우리더러 마리아의 각도에서 예수님의 탄생 상세한 상황을 얻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것이나 태어난 후 천으로 쌓은 등인데, 사실 그를 쌓은 천은 바로 현재의 기저귀입니다. 누가가 이 상세한 상황을 기록한 것은 의사가 알고 싶은 흥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누가라는 이 의사롤 사용하여 예수님을 증거했고, 그리고 초대 교회가 행한 치유 기적입니다. 의사로 이 일을 증거하게 한 것이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의사는, 심지어 크리스찬 의사들이 치유의 기적에 대해 의심이 가득한데, 하지만 하나님이 의사를 택하여 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응당 아실 것인데, 누가는 12제자 행렬에 들어있지 않고, 또한 예수님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목격자의 증거에 의존해야 했는데, 의사들은 모두 진상과 문제를 묻는데 매우 잘합니다.
두 번째는 누가는 이방인이며, 안디옥 사람입니다. 안디옥은 고대 파리와 같은데, 지중해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약속의 땅 북쪽입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한 탕자가 간 먼 나라가 아마도 여기일 것입니다. 돈을 낭비하면서 즐거움을 사는 사람 모두가 여기로 갑니다. 이 도시는 음란한 상황 때문에 평판이 나빴는데, 하지만 안디옥에는 오히려 첫 번째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크리스찬이 세운 첫 번째 교회는 모두 이방인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유대인이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그들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이러므로 외부인들이 ‘크리스찬’이라는 호칭을 만들었는데, 하지만 크리스찬 자신들은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호칭이 사용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왜냐하면 뜻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자거나 혹은 성도라 부르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의 크리스찬들은 스스로를 제자거나 성도하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찬이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거기는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새로운 종교가 어떻게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했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많은 이방인 신자가 있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이렇게 종족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정말로 특별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자신들의 나라 종교를 믿으며 변하지 않는데, 하지만 이 종교는 오히려 종족을 뛰어넘었는데, 누가는 이 원인을 매우 알고 싶어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실 ‘두 도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주요로는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전달되었는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수도에서부터 이방인 수도까지 전해졌습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 흥미를 가졌고, 사실의 진상을 충실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누가는 여행가였으며, 뿐만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여행가였습니다. 두 가지 점을 이해할 가치가 있는데, 첫째는 그는 누구와 함께 여행을 했을까요? 답은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의 서술에서 그가 시작에서 첫번째 사람을 ‘우리’라는 복수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웨일즈 코미디언 맥스 포이어스의 입버릇 같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거기를 갔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거기를 갔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메시지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가 전 세계에 퍼졌을 때 당신들도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거기를 갔었다. 왜냐하면 이 카메라가 증명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누구 그와 동행했는지를 특별히 지명하지 않았고, 그는 단지 말하기를 ‘우리가 거기를 갔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태도는 겸손하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습니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신약성경의 저자 모두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습니다. 마태를 이해하고 싶으면 ‘마태복음’을 읽으시면 되는데, 마태가 ‘마가복음’을 수정할 때 자신과 연관된 묘사를 삭제하였습니다. 매우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수정본인데, 하지만 ‘마가복음’에는 베드로에 대한 비평이 매우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습니다. 누가가 이랬고, 요한도 이랬는데,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만 언급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항상 초점을 예수님에게 놓고, 다른 사람들더러 그들을 주의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누가도 다른 사람이 그를 주목하지 않게 하였고, 그는 항상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여행하였는데, 매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배를 타고 여행할 때 누가가 항상 그와 동행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대하 한 가지 견해가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몸에 질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매번 배를 타고 여행할 때 누가가 항상 동행하였는데, 하지만 육지에서 여행할 때 누가가 동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매번 배를 타고 여행하면 바울이 항상 동행하여 그를 돌보았습니다. 그 중 한 번은 선난을 당한 서술인데, 고대의 문학의 가작이라 할 만 합니다. 이 단락의 선난 서술이 당시 폭풍을 생동적으로 묘사했고, 후에 배가 몰타 섬에 부딛혔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바울과 함께 동행했으며, 특별히 드로아부터 빌립보까지였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같이 동행했고 또한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동행했습니다. 누가 의사는 항상 그와 동행했으며, 바울을 반드시 돌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바울이 잡히는 그 기간을 표시하며, 누가가 할 일이 없었는데, 이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2년 머물었다는 것과 로마에서 2년 머물었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저는 그는 이 두 기간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의 견해이고, 하지만 실제 상황과 매우 잘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2년을 머물었기 때문에 마리아와 목격자들을 방문하여 그가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있을 때 바울 곁에 없을 때 일어난 일들을 자주 그에게 물었습니다. 제 생각에 각각 2년 기간인 그 두 사이에 이 두 권의 책을 기록한 것 같은데, 제 견해가 맞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조금 후에 우리가 다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 그와 동행했는가를 아는 외에 두 번째 중점은 그가 어디를 갔는지입니다. 앞에 말씀드렸는데, 바울이 매번 배를 타면 누가가 동행했습니다. 하지만 누가가 두 기간에 예루살렘과 로마에 머물렀고, 그는 왜서 이 두 기간을 이용하여 이 두 권의 책을 기록했을까요? 조금 후에 이 문제에 회답하겠습니다.
다시 누가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질을 보겠습니다. 그는 문장을 잘 씁니다. 그가 선난에 대한 생동적인 묘사가 고대의 문학 가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이든 혹은 ‘성경’ 외의 작품과 비교되든 모두 똑같이 문학의 가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재능은 넘쳐흘렀고, 문필이 세련되었고, 그의 서술은 정채로웠으며, 내용이 조밀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읽게 끌 수 있습니다. 그가 쓴 줄거리는 클라이맥스가 거듭되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미 그에게 말하기를 ‘단숨에 사도행전을 읽는 것이 단숨에 마태복음을 읽는 것보다 많이 쉬우니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사도행전’은 비교적 길지만 내용이 정채롭고, 문필이 세련되어 독자들을 그만 두지를 않습니다. 누가는 저자이고 또한 사학자입니다. 훌륭한 사학자는 불필요한 세부 사항을 어떻게 삭제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세부 사항을 삭제했고, 그는 어떤 제재들을 골라야 하고, 어떤 것을 응당 말해야 하고, 어떤 것을 응당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내용이 정확하고, 사실에 부합되었고, 그리고 그는 조사하여 증명할 줄 알았습니다. 좋은 작가는 붓을 대기 전에 많은 시간을 들여 조사합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사실을 장악하여서 어떻게 붓을 들어야 하는지를 매우 똑똑하게 알았습니다.
마지막 점은 누가도 복음을 잘 전하였습니다. 그의 가장 큰 바램은 사람들이 주를 믿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그의 두 책에서의 관건적 단어이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에 줄을 긋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엉망진창으로 줄을 긋는 것인데, 제 ‘성경’이 바로 엉망진창으로 줄을 그어서 결국에는 새 성경을 사지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저는 새 ‘성경’ 쓰는 것을 정말로 매우 싫어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새 슬리퍼 한 컬레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튿날이면 또 낡은 것을 신고 싶어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건의하는데, 서로 다른 색으로 된 펜으로 줄을 그으십시오. 성경이 엉망진창으로 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마시고, 색연필로 중점에 줄을 그으십시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구속’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잉방인이었고, 특히 ‘모든 육체’에 대해 흥미를 가졌습니다. ‘누가복음’에 세례요한을 기록했는데,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라는 것은 ‘누가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모든 육체’에는 사마리아인, 이방인, 여인, 가난한 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누가복음’에서 지명한 구원이 각양각색의 사람에게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성령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는데, 이는 유대인, 사마리아인, 땅끝까지이며,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 종교가 누가 눈에는 모든 사람이 와서 믿을 수 있는 종교였습니다.
누가는 복음 중의 예수가 세상 사람들의 구주라는 것을 보아서 ‘사도행전’에서는 오히려 다른 중점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전 세계에 관삼이 있었는데, 하지만 이 말이 헬라어에서는 단지 한 글자로만 묘사하기를 ‘Oikoumene’였습니다. 이 글자에서 ‘온 세상’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모든 교회가 아니고 전 세계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누가는 온 세상에 관심이 있었고,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 보기를 바랬는데,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전도자의 재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는 문장을 잘 썼기에 그래서 그는 글 쓰는 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무슨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렵니까? 하나님이 이미 당신에게 당신이 복음 전하는 가장 합당한 방식을 주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방식이고,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방식이 있으며, 그래서 당신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데 합당한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는 자신이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알았고, 글 쓰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가장 위대한 사도인 의사가 되었는데, 이런 사역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냉수 한 그릇을 선지자에게 주어서 마시게 하면 네가 받을 상이 선지자와 똑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약속이 매우 멋있지요? 당신이 만약 어느 한 사역에 협조하면 당신이 받을 상이 그 사역에 받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가 힘을 내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수행 의사였고, 그래서 그가 배 멀미를 하는 바울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독자를 논하겠는데, 우리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겠습니다. 저자는 논했고, 지금은 독자를 논하겠으며, 그리고 제가 말하는 독자는 복수가 아닙니다. 누가가 이 두 권의 책을 기록한 것은 단 한 사람으로 인한 것인데, 정말로 믿기가 어렵네요. 이 사람의 이름은 데오빌로인데, ‘모도우’라는 뜻이며, 우리는 그를 ‘데오’라 약칭합니다. 이 데오는 누구일까요? 누가 의사는 왜서 이 데오라는 사람을 위해 장관설을 기록했을까요? 한 사람의 영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심력을 지불할 가치가 물론 있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많은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정말로 많은 노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제 생각에 누가가 4년 동안 조사했고,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지불했는데,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시간과 정신을 쏟아 붓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두 가지 이론이 있는데, 제 자신의 이론은 추측뿐이며, 하지만 실제 상황과 매우 잘 맞습니다. 우리가 가끔은 증거에서 결과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론을 가진 사람들은 데오빌로는 지어낸 인물이라 생각하는데, 제가 이 책을 성심성의껏 묻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말할 수 있듯이 저는 친애하는 질문자를 쓸 것입니다. 그들은 데오빌로는 지어낸 이름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기독교에 대해 흥미가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뜻이며, 하나님을 찾고 싶어하고, 또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ㅌㅇ해 어떻게 하나님을 찾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이론이 괜찮은데 하지만 실제 상황과 완전하게 맞지는 않습니다. 저는 데오빌로가 진짜로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이 ‘모도우'에 진짜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는 왜서 단지 데오빌로 한 사람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을까요? 그에게는 반드시 좋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한 가지 이론이 있는데, 제가 추측한 것이라 승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마도 이 사람은 출판업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을 대량적으로 인쇄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선생일 것입니다. 누가가 그의 말솜씨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이 실제 상황과 매우 잘 맞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중요한 공직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그 이름을 호칭한 외에 직함까지 붙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라고 존칭했는데, 고대에서 소수 사람만이 이런 직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변호사일 수 있고, 심지어 법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직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누가가 왜서 한 변호사에게 예수님과 바울을 상세하게 소개했을까요? 답은 바울이 로마에서 심판 받을 때 이 사람이 그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일 것입니다. 이 변호사가 바울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너를 위해 변호하게 한다면 나에게 완벽한 보고를 주어야 한다. 나는 네가 따르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 새로운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상세한 것을 나에게 알려주어야 내가 너를 도와 변호할 수 있다. 나는 너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왜 네가 항상 로마 당국을 불만스럽게 했는지? 네가 이전에는 무슨 죄명으로 고소 당했고, 전에 심판 결과는 또 어떠했는지? 나는 모든 것을 장악할 필요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때에 누가가 바울에게 자진해서 말하기를 ‘제가 쓸 테니 이 사건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자료를 수집하러 가겠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누가가 예루살렘에 있는 기간에 예수님 생애와 죽임 당한 자료를 수집했고, 그가 로마에 있는 기간에 바울의 자료를 수집했을 것입니다. 만약 진짜로 이렇다면 누가가 왜서 이 두 권의 책을 기록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책에서 로마는 왜서 이 새로운 종교를 그렇게도 동정했을까요? 로마는 예수든 혹은 바울에 대하여 한 마디 비평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두 차례 심판에서, 즉 예수가 심판 받을 때와 바울이 심판 받을 때 그 두 사람은 사실 세 번이나 무고하다고 말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무죄라고 세 번이나 말했고, 로마 당국이 바울이 무죄라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항소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벌써 그를 석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사실 이 두 책에서 크리스찬들이 번거로움을 당한 것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항상 그들의 흠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인이 그들의 흠을 찾은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인의 눈에는 예수님과 바울 모두가 무고했습니다. 왜서 이 보고를 썼는지 여러분이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을 ‘사도행전’이라 하였는데, 제 보기에 사실 이름이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책의 삼분의 이가 바울을 논했으며, 바울이 주를 믿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장하였는데, 전체 초점은 바울에게 있습니다. 그렇지요? 책에 베드로를 언급한 것은 바울을 데리고 출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출전하니 베드로는 잊혀졌습니다. 이 책은 단지 바울을 대신 변호했을 뿐이고, 로마 당국에 이 새로운 종교가 선동이나 전복의 의도는 절대 없고, 오히려 항상 당국을 이해해 온 것이라는 것을 진술했습니다. 바울 본인이 로마 공민이어서 로마 법률에 근거하면 예수님은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압박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혔고, 바울도 유대인들의 압박 때문에 번거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바울이 로마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되면 비로소 유대인에게 사실 왜곡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에 있다면 유대인들은 방해하려고 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현재 바울은 로마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결코 사법을 어지럽힐 방법이 없었습니다.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그래서 만약 이것을 바울 변호사에게 자료로 제출해서 그를 위해 변호하게 하였다는 것이 가장 맞습니다. 가장 잘 맞는 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도행전’이 갑자기 끝난 것인데, 여러분은 주의했습니까? 마치 갑자기 끝난 것처럼 결론이 없습니다. 바울이 심판을 기다라는 것을 기록하고, 갑자기 끝났습니다. 이는 다른 또 하나의 문제를 가져왔는데, 즉 이 보고가 작용을 발휘했을까요? 결국은 변호사가 도대체 바울을 도와 무죄 석방했을까요? 모든 증거는 바울이 마지막에 무죄 석방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심판에서 결국은 무죄 석방되었고, 후에 그가 디모데와 디도에게 서신을 써서 보냈는데, 그가 심판 받기 전 상황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그때 무죄 석방된 것으로 표시되는데, 하지만 후에 다시 잡혀서 유죄를 판결 나서 목 베임 당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정말로 항상 가고 싶어했던 스페인을 갔다고 믿습니다. 그는 항상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고, 거기에 교회를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스페인에 오래된 교회가 몇 개 있는데, 바울이 그 교회의 창시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인지 확신못하는데, 하지만 전통적인 증거에서 드러나기를 바울이 첫 번째 심판 받은 결과는 무죄 석방이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다시 잡혔는데, 결국은 목 베임 당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투입한 노력은 헛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누가가 이 두 책을 기록한 것이 바울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이 위대한 선교사를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더러 계속해서 사역하게 하는 것은 누가가 성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누가가 자료를 수집하여 이 보고를 기록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초대 교회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것입니다. 그의 이 두 책은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의 중요한 결함을 보충하였습니다. 이로써 신약성경 전체의 관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자신의 간증을 세 번이나 나누었는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주의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도들은 자신의 간증을 나누지 않았는데, 바울의 간증은 왜서 이렇게도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심판을 받는 사람은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전에 상황을 반드시 알아야 했고, 이래야 이 증거가 그에게 이로운 것이지 해가 아닙니다. 좋아요. 저의 이 추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두 책에 변호사의 문제를 상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묻기를 ‘누구 이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였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 종교를 믿게 되었을까? 다른 곳에 있는 로마 당국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제 생각에 이 모든 것은 변호사들이 질문해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저와 아내가 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어떤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나는데, 이 모든 것은 변호사들이 묻고 싶어하는 문제이고, 누가는 모두 여기에 기록하였습니다. 어찌됐든 누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보고 보기를 원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과가 확실히 또한 이렇게 되었습니다. 법정 공개 청문회에서 이 증거들을 들을 수 있고, 법정에서는 이 증거들을 나타냅니다. 당시 이 안건 발전의 보고를 한 기자들도 있었는데, 누가 의사가 기자들이 그의 자료를 전파해 나가기를 바랐고, 이 새로운 종교가 가장 중요한 기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 심판이 이방인의 수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로마의 메시지가 반드시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심판은 매우 중요한데, 바울이 아니라 기독교가 로마에서의 첫 번째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는 하나의 관건적 심판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 의사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변호사에게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나는 낱낱이 사실대로 알려줄 것이고, 날자도 아주 명확하게 할 것이며, 모든 자료는 가장 정확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데오빌로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쓰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으나 하지만 내가 쓴 모든 것은 정확하니라. 내가 당신에게 오린 것 전부가 사실입니다. 데오빌로여 진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적 각도에서 보겠는데, 사실 이 두 책의 책명을 ‘기독교 역사 상하’로 정해야 합니다. 책에 33년 기간 동안 포함된 정채로운 모든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오셔서 사역함으로부터 바울이 로마에 감금되기까지였는데, 많은 사실을 길록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이 충만했습니다. 이 의사가 환자에 대해 친절했고, 그가 사람의 뜻도 잘 음미했습니다. 그의 말하는 방식으로 보아 그는 사람의 뜻을 잘 음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런 태도로 마리아더러 그에게 열도록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원래는 조심스럽게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는데, 하지만 이런 친절한 의사를 대면하면서 전 경과를 안심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책의 구조가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가져왔습니다. 제 생각컨데 대다수 사람들이 일단 저자가 기록한 목적을 알게 되면 다음으로 그 책의 구조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저자가 어떤 구조를 채용했으며, 껍질이 벗겨진 후 어떤 골격이 남았을까요? 여기에서 세 가지 이론을 제출했는데, 여러분은 좋아하는 이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한 가지 이론은 ‘사도행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인데, 베드로와 바울은 각각 그 중의 영웅이고, 그들은 초대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였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였는데, 이런 분법이 괜찮습니다. 누가가 베드로를 묘사한 것이 그가 바울을 묘사한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마치 누가가 똑 같은 말을 하려고 매우 애쓴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큰 위험은 두 파로 나누는데, 유대인파와 이방인파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매우 조심했고, 누가도 동일한 부담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베드로와 바울이 대립 상황이 없게 하였는데,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의 동일점은 이렇습니다. 두 사람 모두 기적을 행했고, 두 사람 모두 환상을 보았고, 두 사람 모두 신앙을 위해 고난을 받았고, 두 사람 모두 아주 긴 설교를 했고, 두 사람 모두 성령 충만했고, 두 사람 모두 담대히 설교를 했고, 두 사람 모두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전도를 했는데, 베드로는 주요로 유대인에게 전도했고, 바울은 주요로 이방인에게 전도를 했고, 두 사람 모두 감옥에 갇혔었고, 또한 모두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여 감옥에서 나왔고, 두 사람 모두 환자를 치유하였고, 모두 태어나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였고, 두 사람 모두 귀신을 쫓았고, 두 사람 모두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치유의 기적을 행했는데, 베드로는 그림자로 치유했고, 바울은 손수건으로 치유했으며, 두 사람 모두 죽은 사람을 부활하게 하였고, 두 사람 모두 가짜 교사에게 심판을 선포했고, 두 사람 모두 남에게 절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아직도 많은 동일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만약 베드로와 바울을 하나하나씩 비교하면 누가가 그들에게 했던 동일한 묘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그들 두 사람은 매우 똑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만을 따를 필요가 없고, 그들 두 사람을 대립하게 할 필요 없고, 두 사람 결국에는 모두 로마에서 죽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입니다. 왜서 ‘사도행전’이라고 했을까요? 다른 사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 두 사람의 행전만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이런 위험이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두 파로 나누었는데, 하지만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울을 함께 놓고, 사람들에게 그 중의 한 사람만 택하지 말아야 하고, 두 사람 한 것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첫 번째 이론이 사도행전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전 20장은 베드로를 논했고, 두 번째 부분은 바울을 논했고, 바울을 논한 편폭이 비교적 길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분별 방법입니다.
두 번째 분법은 지리 위치를 겨냥해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분법은 두 사람을 겨냥해 두 부분으노 나누었고, 두 번째 분법은 세 지역을 겨냥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 시작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누가가 마치 이 순서대로 그의 주제를 전개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주 적절하게 안배하였습니다. 1-7장은 먼저 예루살렘으로부터 논했고, 8-10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논했고, 그리고 거기서부터 유럽과 땅끝까지 퍼졌는데, 이것은 하나의 가능한 구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몇 구절이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읽으면 여러분은 아마도 한 가지 일을 점점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제가 빠르게 한 번 읽겠습니다. 사도행전6:7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9:31절에서 말하기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12:24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5절에서 말하기를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20절에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이 구절들의 유사점들을 주의했습니까? 모든 구절에서 교회의 인수가 끊임없이 증가한다고 언급했으며, 교회의 인수가 끊임없이 증가하며, 교회의 인수가 끊임없이 증가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총 다섯 곳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마치 각 단원의 중점을 매긴 것 같습니다. 제 뜻을 이해했습니까? 먼저 어떤 일을 강의하겠는데,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인수가 끊임없이 증가했고, 복음이 널리 전해졌습니다. 먼저 어떤 일을 강의하겠는데,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인수가 끊임없이 증가했고, 복음이 널리 전해졌습니다. 먼저 어떤 일을 강의하겠는데,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인수가 끊임없이 증가했고, 복음이 널리 전해졌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주제입니다. 한 새로운 종교가 로마 제국 안에서 끊임없이 증가하여 전파했습니다. 각 단원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잔물결이 밖으로 퍼지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각 단원 모두는 하나의 더욱 큰 잔물결인데, 저는 그것이 누가의 기본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누가의 사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돌을 못에 던졌는데, 그 돌이 바로 예수의 죽임 당함과 부활이고, 현재는 잔물결이 일어나 각 잔물결의 마지막에서 교회가 증가하였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으며, 교회가 증가하였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하는데, 이ㅡㄴ 명백히 역사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각도에서 ‘사도행전’을 이해하면 딱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누가가 어떻게 사건을 선택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모든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한 것과 말한 것은 세상의 모든 종이를 다 써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는 그가 기록하려는 일을 어떻게 선택했을까요? 그가 선택하면 다음 잔물결을 일으킬 관건적 사건이 됩니다. 그 사건이 발생하기만 하면 복음은 갑자기 한층 더 퍼지게 되는데, 이해가 됩니까? 복음을 전파해 나가는 첫 번째 큰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순절 그날입니다. 오순절 그날에 유대인들은 각 나라에서부터 와서 절기에 참석할 것입니다. 성령이 120 성도에게 임했는데, 마치 돌을 못에 던진 것처럼 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마가 다락방에 있은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가지 않았으며, 그들이 전도하러 가려고 조급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들 모두는 거기에 앉아있었고, 11명 사도와 베드로만 함께 일어섰는데, 그들이 거기에서 9시 아침 기도에 참석했습니다. 그 곳은 바로 솔로몬 행각에 있는데, 거기는 오늘날의 악사 모스크이고, 성전 지역의 남쪽입니다. 초대 크리스찬들은 당시에 바로 솔로몬 행각에서 아침 기도를 했으며, 아침 9시면 성전안에서 기도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마치 돌을 못에 던진 것처럼 세계 각 곳인 로마, 구레네, 리비아 등 사람들을 첩촉하였고, 세계 각 곳의 사람 모두가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방언을 듣고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일어서서 말하기를 ‘아니다.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느니라. 우리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지금 아침 9시여서 술집들이 아직 문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일찍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각종 서로 다른 언어들이 나타났는데, 목적이 바벨탑과 상반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탑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인류에게 주어서 혼잡하게 하였는데, 지금 그가 서로 다른 언어를 주어서 그들을 모이게 하였으며, 목적은 바벨탑과 상반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구약성경에서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있었는데, 바로 바벨탑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첫 번째로 서로 다른 언어를 주신 것인데, 하지만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첫 번째는 심판이었고, 두 번째는 긍휼이었습니다. 오순절 그날의 사건은 못에 던진 첫 번째 돌이었으며, 잔물결을 일으킨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이어서 과부가 교회에서 그들의 식사를 소홀히 했다고 원망했는데, 이것이 교회가 확장되는 하나의 관건적 사건이었습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정말로 아주 재미있어요. 오늘날 교회는 반드시 자매들을 지명하여 파견해 식사를 책임지게 하는데, 하지만 초대 교회는 비교적 지혜롭게 일곱 형제만 지명하여 파견해 식사를 책임졌습니다. 왜서 이렇게 안배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과부들은 의지할 남자가 없었고, 그들은 그들을 돌볼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교회가 일곱 형제를 지명하여 파견해 책임지게 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은 스데반이었습니다.
위대한 전도인 대다수는 종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집사였고, 바나바와 함께 돈을 관리했습니다. 기억하세요. 이 일곱 형제는 식사 책임을 자원했습니다. 이 사건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누가는 오히려 이 사건이 사실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은 스데반의 순교를 가져오게 되었고, 크리스찬은 이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보기에 불행한 것 같지만 잔물결이 확산된 것입니다. 전체 사건은 한 형제를 지명하여 파견해 식사를 책임진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누가는 더욱 큰 물결을 일으킬 사건만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강의할수록 흥분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주를 믿었는데, 관건은 바로 빌립이 사마리아로 간 것입니다. 그는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고, 영적인 부흥을 야기시켰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고, 복음이 사마리아인에게 전해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그들이 성령의 세례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때 또 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왜냐하면 전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을 때 불을 하늘에서 내려 사마리아인들 모두 태워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다른 원인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데,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변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디오피아 내시인데, 이 사람은 무슨 중요성이 있을까요? 그는 복음을 아프리카에 전했으며, 첫 번째로 주를 믿은 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이 주를 믿은 사건 모두는 우연이 아니며, 이 사건들 모두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는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더욱 큰 물결을 일으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심중하게 선택하였으며, 그는 초대 교회 모든 사람이 주를 믿은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천명이 주를 믿었는데, 그가 깊은 영향력이 있는 이야기만 선택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어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는데, 그는 반드시 정결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가 아주 억지로 먹었는데, 하지만 이 사건의 의미가 중대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이 먼저 유대인으로 변해야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은 불필요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먼저 유대인으로 변해야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마침 상반되는데, 유대인들은 반드시 이방인으로 변해야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 답도 불필요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신분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오늘부터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하지만 유대인들이 만약 그를 거절하면,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음회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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