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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시27:1~14 여러 설교 정리
◑절별 해석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1-3절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강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확신이 너무도 강하여 어떠한 두려움도 그를 짓누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비슷하게 삼하 22:29에서는 하나님이 '흑암을 밝혀주는 등불'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흑암이 대적들의 위협과 그로 인한 수치를 상징한다면
'빛'은 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나의 구원이시니’
여기서 '구원'은 구체적으로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 다윗은 이 질문으로써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수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위협하던 대적들의 힘이 약하여서 그가 이러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대적들의 수는 많고 그 힘은 매우 강하였습니다(3절).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안에서 이러한 확신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 3절은 다윗의 원수에 대한 언급입니다.
동사의 시제가 2절은 과거의 승리를, 3절은 미래의 승리를 기록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과거의 승리는 다윗에게 있어서 확신의 뚜렷한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내 살을 먹으려고'라는 구절은 다윗이 그의 원수를 사나운 맹수에다 비유하고 있죠.
아마도 원수들이 다윗을 포위했거나 그를 잡을수 있는 위치에까지 접근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실족하여 넘어졌도다'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저들이 패배했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군대' 나 '진칠지라도'와 같은 단어에서 우리는 다윗을 위협하는 원수들의 많은 수와
그 세력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과거의 놀라운 체험에 근거해
앞으로 벌어질 어떠한 원수들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원문에는 '한가지 일'이 맨 앞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강조입니다.
‘내 성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이는 물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성소에 상주(常住)할 것을 소원 했다는 것은 아니며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겠다는 소원을 의미합니다.
한편, 성소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에서 현재 성소에 돌아올수 없는
그의 어려운 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암'은 '선함', '매력', '아름다운 점', '사랑스러움'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1) 혹자는 이를 영안으로 바라 본 하나님의 '계시(말씀)'에 적용했으며,
2) 또 어떤 학자는 공예배시 경건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적용했습니다.
후자가 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원문 서두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본절은 다윗이 한 가지 일(4절)을 청하였던 그 실제적인 이유를 보여줍니다.
본 구절은 물론 문자 그대로 환난 때에 다윗이 성소에 숨으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이는 환난 날에 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초막', '장막'이라는 말은 다윗과 함께하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바위 위에 높이 두시 리로다’ - '바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는 '거대한 산'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는 여호와의 별명이기도 하죠.
바위는 사막의 모래밭과 같이 변형되지 않으며 어떠한 환난의 폭풍우가 몰아쳐도
언제든지 견고하다. 이는 곧 하나님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다윗은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 승리의 영광에 대한 시적 표현입니다.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즐거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루아'는 축제시에 부는 '나팔 소리'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축제의 기쁨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즐거운 제사' 란 축제의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로서
'감사의 제사'(107:22)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닙니다.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여기서 다윗은 대적에 대한 승리로 인한 축제의 기쁨을
노래와 찬송으로 나타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찬송 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마르'(*)는 '악기를 연주하다'는 의미도 가지죠.
이로 보아 다윗은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7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본절은 다윗의 확신이 탄식으로 바뀌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적의 위험이 크게 증가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12절).
하지만 이러한 탄식 가운데서도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수하고 있습니다(13, 14절)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내 얼굴을 찾으라’ - 이는 '나에게 호소하라' , '나를 신뢰하라',
또는 '나를 가까이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시적(詩的) 표현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신4:29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는 말씀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힘입어 다윗은 전심으로 간구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 주의 얼굴을 숨긴다는 표현은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것, 또는 진노하신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는 문자 그대로 부모를 떠나 살았던 다윗의 개인적인 역사와 관계되는 구절은 아닙니다.
다윗은 여기서 다만 여호와의 사랑을 부모의 사랑에 비교하여
그 탁월함을 표현하려 했을 뿐입니다. (요즘 쓰는 말로 '부모가 의문의 1패 당함')
즉,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다윗은 지금 위기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자애로운 목자와 같이 자신을 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를 받고자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본 구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본절 전체에서 '길' 이란 표현이 반복되었으며
다음 구절의 동사가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12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악을 토하는 자'란 '잔인한 말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
또는 '극도의 증오심으로 저주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혹자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를 압살롬의 일당들이 다윗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거짓 증거하는 사건(삼하15:3)에다 적용시켰습니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내가 산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 이는 지금까지 다윗이 숱한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 받아
현재 지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강조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환난의 때인 지금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여호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 이 문장은 귀결문이 생략된 일종의 감탄문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에는 '내가 멸망하였을 뻔했도다'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죠.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현재 환난의 때에 또다시 여호와를 굳게 의지함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혹자는 이 구절을 타인에 대한 다윗의 권고라고 주장하나
이는 약해진 자아에 대해 낙망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다윗 스스로의 말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강하고'는 원문상 명령형이며
'담대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메츠'는 히필형 단수 3인칭 동사입니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강하라,(그리하면) 그가 너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시리라'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자신이 강해지려고 힘쓰기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대로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윗은 이와같이 강해진 마음으로 끝까지 여효와를 바라볼 것을 스스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적용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시편 27:1-14 2017.06.11.출처
시편 27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전체적으로 다윗의 삶이 위기와 어려움에 빠진 상황에서 기록한 시로 보입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굉장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2절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
원수들이 마치 맹수들이 집어 삼키려고 달려드는 것 같이
내 살을 먹으려고 (잔인하게 죽이려고) 내게로 왔다고 합니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친다”
원수가 한 명이 아니고, 군대처럼 떼로 달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한두 사람이 힘들게 해도 인생은 굉장히 힘든데, 군대가 진을 치고 나를 공격한다는 겁니다.
이 시를 다윗이 언제 기록했을까요? 다윗의 인생에 큰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는 사울 왕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피신을 하며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광야를 쫓겨 다닐 때 기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아들 압살롬이 그의 인생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피신 생활에서 기록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가능성이 있는데, 본문을 보면 상황을 여러 가지로 묘사합니다.
2절부터 자세히 보면 악인, 대적, 원수, 군대, 전쟁, 위정자들, 악을 토하는 자들 등
이런 단어들이 나옵니다.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우리는 두려움, 불안,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일어난 상황보다 더 무서운 것이 두려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 닥쳐온 상황 때문에 실패한다고 생각하지만
상황보다 그 상황으로 인해 일어난 내적인 두려움이 인생을 무너지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싸우고 뛰어 넘어야 할 적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그 상황이 아니고
그로 인하여 일어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면 인생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두려움은 주로 인간관계를 통해서 옵니다.
우리는 홀로 살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얽히게 됩니다.
어제의 아군이 적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어떤 적이 있었습니까?
장인어른 사울입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장인이 왕이니 군대를 풀어서 사위를 죽이려고 합니다.
또 믿었던,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을 당합니다.
그래서 왕실에서 쫓겨나 도망을 다니니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자녀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 장인이 나를 죽이려 하고
믿었던 신하 아히도벨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인생의 힘든 것 중 하나가 배신입니다. 배신은 먼 관계에서 배신하지 않고 아주 가까운 사람이 배신합니다.
이게 혹독한 고통입니다. 가족들 안에도 배신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겪었던 사건들이 오늘도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키웠던 자녀가 어느 날 반항을 합니다. 부모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믿고 동업을 했던 친구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함께 살던 부부가 위자료를 두고 첨예한 법정 공방을 끝도 없이 이어가며
인연을 매몰차게 끊어버린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특히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사방을 둘러싼 적들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당장 적들이 생깁니다. 대충 신앙생활을 하면 잘 지낼 수 있는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자 하면 심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10:34~36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여기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는 신뢰한다, 안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은 원수가 군대와 같이 떼로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다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이나 사람에게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집중하고 주야로 묵상하면 싸움에서 지고 마귀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영적인 것입니다. 어떤 태도나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두려움은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아무리 지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지식이 내가 처해져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 감정적인 노력, 지성적인 노력을 해도 두려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입니다.
사울 왕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두려움에 빠져 삽니다.
삼상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과 비교가 안 됩니다.
사울은 왕권과 군사력으로 다윗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공격자입니다.
다윗은 도망 다니는 도망자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고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버리셨고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다윗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사울의 인생은 두려움을 제거하지 못해서 몰락합니다.
다윗에 대한 지나친 질투심으로 불필요한 행동들을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문제를 점점 키웁니다. 판단력이 무뎌지고 지각이 무뎌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나중에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광기어린 폭력을 동원합니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정신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때로는 전문적인 지식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려운 마음, 두려움의 영은 바로 사단이 주는 겁니다.
마귀가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게 함으로 아무 것도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영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의 실체(마귀)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고 다르게 행동했던 힘이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그가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상황이 어려워지면 마음이 나누어지고 마음이 깨져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릇이 깨지듯이 마음이 깨어져 버리면 마음이 산란하다, 심란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마음이 집중 안 되고 나누어진 것입니다. 분산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한 가지를 구한다는 겁니다. 마음이 깨어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 찾고 있는 한 가지는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바라는 것 하나는 성전입니다.
성전을 찾는 이유가 뭘까요?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 것입니다.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 다윗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 대적 등의 단어와 대칭을 이루면서 계속 함께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4절 “여호와의 집” “그의 성전”
5절 “그의 초막” “그의 장막”
6절 “그의 장막”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복하고, 계속 나오는 단어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은 원수의 공격에도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집, 성전입니다.
그의 기도의 초점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다윗은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4절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평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 동안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어려움이 올 때마다 성전을 들락거립니다.
그의 시편의 많은 부분에서 그는 끊임없이 성소를 사모하고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가 머물러야 할 곳은 여호와의 집,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시편 84편 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의 고백입니다. 왜 시인이 그의 성전을 사모하는 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5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와 직접 싸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악한 인간을 묵상하고 싸우다 보면 나도 비슷한 사람이 됩니다.
악과 싸우려면 나도 악을 동원해야 합니다. 진흙탕 싸움이 됩니다.
다윗의 관심은 자신을 대적하는 대적자에 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여호와의 성소, 장막, 초막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수없는 위기를 넘나들었고 환란의 연속이었습니다.
포화가 끊임없이 쏟아 붓는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방공호는 여호와의 장막이라는 겁니다.
다윗의 신앙의 중심은 성전입니다. 다윗은 성전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자의 삶이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대표적 예배자는 다윗입니다.
법궤를 모셔오고자 했던 것도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위기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어디가 가장 은밀하게 자기를 보호할 곳인지를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장막, 초막, 성전입니다. 오늘날은 이 장막이 없습니다.
오늘 날의 하나님의 장막,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 이곳에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그곳, 그곳이 직장이든, 버스 안이든, 시장터든
어디든 그곳이 성소일 수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피할 은밀한 곳이 있습니다. 피할 곳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피할 곳이고 안전하다고 여겼는데 더 위험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붙잡으면 내 인생이 풀릴 것 같았는데 더 위험한 인생이 됩니다.
내가 정말 안전하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내 인생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다윗은 그곳을 하나님의 성소라고 얘기합니다.
▲6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매우 중요한 단어를 하나 쓰고 있는데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즐거운 제사” 이것은 형식적인 제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시간이 되어서 의식적으로 참여해서
그냥 드려지는 제의적 제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머리가 원수들에게 둘러 싸여져 있는 아주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여기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것은 주로 성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서 이 즐거움과 기쁨이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예배만큼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기쁨과 즐거움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단순히 노래를 신나게 불러서 즐거운 게 아닙니다.
사실 세상도 신나고 즐거운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파티에 갔다 왔다고 현실적인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예배는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의 주일예배는 부활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믿고
그 부활의 신앙의 고백 아래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뭡니까? 죽음마저도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어떤 비극도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위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도 하나님과 연결되면 역전의 드라마로 바뀌는 겁니다.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시인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시간입니다.
성전에서의 즐거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성전에서 모든 걸 잊고
예배 안에 들어가 즐거운 제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오늘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냥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되면 안 됩니다.
단순한 제사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여기에 “즐거운 제사”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형식적, 의식적, 의례적, 종교적인 생명 없는 예배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참된 제사는 즐거운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않으면 세상에 밀려오는 상황에 떠밀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면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8절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다윗이 그냥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다윗에게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신 겁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얼굴을 내가 찾으리이다”고 하는데 여호와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떨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One Thing 오직 한 가지 일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One Thing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오늘 ‘원 씽, 오직 한 가지 일’을 구하는 목사님을 잠시 만나 뵈었습니다.
그 분은 매주 수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매주 수요일마다 10시간씩 (식사시간 두 시간 제외)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한 가지만 하십니다.
오늘도 수요일이라 원씽 타임(오전 9시~오후 9시)에는,
그 분을 못 뵈고, 오후 9시가 지나서야 잠시 만나 담소하였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바라라’고 되어 있어서,
그 분은 매주 수요일은,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만 묵상하고, 하나님의 얼굴만 구하신답니다.
오직 그 일 한 가지만 하신 답니다.
몇 년을 하셨냐고 물어보니
그렇게 한지 4~5년 되었답니다.
수요예배는 원씽 타임 중에 있고, 성도들은
예배 전후에 자유롭게 "원씽"에 참여한답니다.
다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도 그게 잘 안 되는데
그 분은, 그래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오직 그 일 한 가지를
지난 4~5년 계속 해 오면서, 영적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피곤하면 예배당에서 잠시 누워있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고,
목회적 사역이나, 만남, 심방, 이런 것 일절 하지 않고,
오직 주님과 독대하는 일에만, 그 시간을 할애해서 쓰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밤에 뵌 그 분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주님의 존전 앞에서 받은 은혜를 반사하는 것인지..
아무 설교를 못 들었지만,
"원씽"을 마치고 나오신 그 분의 환한 표정에서, 제가 벌써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분은 주일에도, 성도가 누가 나오고, 안 나오는지
일절 신경을 안 쓴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예배자로 나아가는 일에 신경 쓰다 보니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목사인 자신이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서
성도들 출석에는, 아예 쳐다보지를 않는답니다.
그리고 예배가 마쳐도
한 남자 집사님은,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자기 혼자 두 시간 정도 계속 찬양과 연주를 한다고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요, 경배이기 때문에
남들이 따라 하든지 말든지, 남들이 쳐다보든지 말든지
자기는 혼자서 두 시간 정도, 찬양과 연주로
하나님께 예배와 경배를 드린다고 하는데요,
그 집사님 부부는, 커피숍과 인테리어 사업을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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