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배 중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여러분 안해 충만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의 급훈에 "엄마는 다 보고 있다"가 있다고 합니다. 느낌이 확 옵니다. '엄마는 네가 학교에 있든지, 학원에 가 있든지 다 보고 있어. 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렴!' 그런 뜻이지요.
그런데 하나님도 꼭 그런 느낌으로 믿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다 보고 있어, 나의 모든 걸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계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본문 시편 139편도 다윗이 그렇게 고백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샅샅이 나를 보고 계신다.'
1절에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이하 모두 새번역)
하나님께서 내 모든 말과 행동, 아무도 없을 때 내가 살았던 것까지 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정말 믿게 되면, 정말 두려움일 수밖에 없겠지요.
실제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다'고 했을 때 그걸 두려움으로 받아 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휴 정말 그렇게 산다면, 숨이 막혀서 어떻게 살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를 쓰기를, 하나님이, 그냥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는 것 뿐만 아니고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 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 보면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4절에도,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앞에서 누가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도 그런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려고 했었던 고백을 합니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먹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고 숨었던 것처럼, 다윗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한 번 도망 가 보려고 했던 고백을 합니다.
7절에 보면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11절에 보면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모든 것이 다 드러나서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 상황에서 '어둠이 덮쳐서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되면 좋겠다. 어딘가 좀 숨었으면 좋겠다..' 그런 느낌을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지요.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에 '두려움이 아니고,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고 다윗이 깨달아 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 보고 계셔, 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셔! 내가 잘못한 것, 은밀한 가운데 지었던 죄까지 하나님은 다 보셔!' 그건 두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참 은혜다!'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 참 놀랍지요.
그래서 5~6절에 다윗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5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6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눈동자 같이 그렇게 지켜보고 계시다고 하는 것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감싸 주고 계시고, 하나님이 내게 손을 얹으시고 계시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변화가 너무 놀랍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항상 나를 알고 계시고 지켜보신다!.. 하는 게 사실은 내게 큰 은혜구나!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게 의식이 변화되어지는 이 놀라운 고백을 지금 다윗이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구원 받았으면, 여러분 안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다 알고 계신다, 진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고 이게 부담이 아니라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8절에 보면,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여기서 '스올'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지옥)이나,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뜻하는데 비유적으로는 '지옥과 같은 상태, 완전히 죽은 것 같은 상태'를 뜻합니다.
자기 상태가 얼마나 비참 했으면,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상태이겠습니까. 다윗이 지금 그런 처지에 있는 겁니다.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노려보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신다' 하고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 보고 계시는 것이 나를 '뭐 잘못 하는 거 없나?' 하고 노려보시는 게 아니고
'나를 절대 포기할 수 없으시고, 나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 는 의미로 다윗은 깨달은 거예요.
여러분 모두에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과 늘 함께 계시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교회에 편지를 하는데, 서머나 교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2:9 '나는 네가 당한 환란과 궁핍을 알고 있다.'
서머나 교인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울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예수님 때문에 환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궁핍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신데요. 그러면 된 거죠! '주님이 다 보고 계시구나! 우리가 겪는 이 고난, 이 환란, 이 궁핍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는구나!' 그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고통과 두려움이 한 순간에 싹~ 사라지는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3장에 가서, 사데 교회에 대해서 '너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3:1
이런 극언을 들은 교회는 없어요. '너는 죽었어!' 이런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면 진짜 두려운 거지요. 그런데 사실 이 말씀도 주님이 사데 교회에 대하여 무섭게 책망하는 말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랑이었어요!
만약에 사데 교회가 진짜 죽은 교회라면, 편지 쓸 이유도 없어요. 이미 죽은 교회니까! 이미 죽은 교회에다가 무슨 말씀을 또 하시겠습니까.
사데 교회가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이지만,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사데 교회에 그렇게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죽은 시체를 보면 누구나 가까이 하기 싫을 거예요.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달려들어서 인공호흡도 하고,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죽지 않게 하려고 간절해 집니다. 사데 교회를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꼭 그 마음인 겁니다. 정말 죽어가는 그 교회를 살리시려고 하는 그 간절함이 사데교회에 주님의 그 말씀(편지)으로 임한 것이지요.
깨닫고 보면, 책망을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왜요? 책망은,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고 아직 나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고, 책망이라도 아직 내게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 '책망이라도 좋으니 주여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진짜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은, 꼭 칭찬만 듣기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책망이라도 좋으니, 내게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이 순간에 다윗은 더 깊은 은혜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눈이 뜨인 겁니다.
13절부터 보면 '13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14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16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낳았지만, 실제로 자기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다윗은 지금 아주 비참한 처지에 있어요. 그런데 다윗은 스스로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에요. 자기가 어쩌다가 생긴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지금 형편이 대단히 비참하지만, 스올에 있는 것 같고, 자기 삶이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그런 고통스러운 형편이지만.. 원래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입니다. 자기가!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 다윗에게 일어난 변화가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보고 계시는 것이, 사랑의 눈이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나를 지켜 보시는 게 그런 까닭이 있었구나! 나를 지으신 분이시니까 나를 지켜 보시는구나!'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다윗 안에 모든 낙심과 좌절, 두려움이 다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눈보다도 더한 사랑의 눈으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 섬세하고 자상하게, 정말 구체적인 보살핌으로, 지금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 사실이 진짜 믿어지고 나니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17~18절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 그 수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거예요. 다윗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이고 그리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본문 시편 139편은 그대로 우리의 노래입니다.
▲여러분중에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있는 거 같아요. '하나님이 진짜 정말 나를 그렇게 사랑하실까? 정말 내 아버지가 되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셨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잊어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증거하셨습니다. 사49:14~16절에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15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16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때로는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진짜 나를 사랑하시는 건가?' 그게 믿어지지 않는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지만 여러분이 믿음 하나만큼은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정말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여러분과 늘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왜 나와 함께 하실까? 나를 정말 알기는 하실까?' 여기에 수 천 명이 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과연 내 이름을 아실까, 내 삶을 다 아실까?' 그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내가 너를 만들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너를 모를 수가 있겠어? 내가 너를 어떻게 지키지 않을 수가 있겠어?' 여러분이 오늘 분명히 들으셔야 돼요.
'아니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또 그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가 여러분을 낳았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세요? 여러분이 그걸 눈으로 직접 보셨습니까? 여러분을 낳는 것을.
그런데도 '우리 어머니구나, 우리 아버지구나!' 어떻게 알아요? 나의 똥기저귀 갈아 준 거 보면 알지요. 어린아이 똥기저귀 갈 때, 엄마의 눈과 다른 사람의 보는 눈은 다릅니다. 엄마는 자기 아기 똥도 예쁘게 보이지만, 다른 사람은 냄새난다고 피해 버리죠.
그래서 우리가 보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있는 거잖아요. 나를 위해서 신경 써주고, 나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아껴주고.. '아 우리 엄마 맞구나!' 꼭 출생할 때 봐야 압니까?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 알잖아요.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나 같은 자를 구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낳아 주셨으니까, 부모가 되셨으니까 그렇잖아요. 아니 우리 마음이 시궁창보다도 더 더럽고, 세상의 만물보다도 더 부패한 게 우리 마음인데 예수님께서 왜 우리 마음에 오셨지요?
나를 낳아 주셨으니까, 나를 만드신 분이시니까!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진짜 나를 창조하셨나?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 여전히 믿어지지 않으신다는 분은, 이제는 십자가를 보면서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주님을 정말 믿고, 이제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혹시 여러분 중에 '난 이제 희망이 없어, 끝인가봐!' 그렇게 생각 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기에,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셔서,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니까.. 예수님께서 내안에 오셔서 나와 영원히 동행하시리라고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하나님은 나를 잊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어요. 여러분, 이것이 진짜 사실이라면, 그러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구나!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시구나!' 여러분이 이 사실을 정말 믿게 되면, 무엇이 여러분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다윗의 기도를 한번 잘 주목해보세요. 다윗은 샅샅이 살펴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까지 다 들여다 봐 달라고 간구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주의 인도함을 받고 싶어 하잖아요. 성도들끼리 서로 영성일기를 나누는 것은, 사실은 이 기도시의 그대로의 결론 이에요. 감출게 뭐 있어요? 감춰질 게 있으면 빨리 버려야지요.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성찬은 본문 시139편 그대로 우리가 누리고 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에요. 주님과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 말은,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내 모든 삶을 지키고 함께 계신다는 뜻이죠.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우리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나쁜 길을 가지는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시고 오늘 이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삶,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라서, 주님과만 온전히 동행하면서 주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