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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9:1~9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

LNCK 2021. 7. 12. 23:34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                시149:1~9                       큐티 묵상

 

본문의 배경은, 본문엔 자세한 설명이 안 나오지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귀환하던 당시의 작품으로 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루어진 승리를 배경으로 지어진 시입니다.

물론 '개인적 시'가 아니라, '(예배 때) 회중 앞에서 낭송된 시'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찬양 (1~5절)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 (6~9절)

 

▲5절,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여기 ‘침상’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반면에 악인들은, 침상에서조차도 불의를 계획하고

연약한 자들을 착취할 궁리를 하지만,             *시36:4

성도들은 악인들의 삶과는 달리 침상에서(즉 가장 편안한 분위기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 (6~9절)

 

여기서 '열방'이란, 느헤미야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볼 때,

당시 귀환한 이스라엘 주위에서, 성벽 쌓기를 방해했던

암몬, 아라비아, 사마리아 등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제국을 127도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에9:30

유프라데스강 서쪽에서 예루살렘 주위의 각 도를 다스리던 총독들이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총독 (스룹바벨, 느헤미야 등)과 마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열방은, 넓게 보면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의 모든 나라’로 봐도 무방합니다.

성경은 오직 한 시대에만 적용되지 않고,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세상 나라, 세상 열방들에 대해

시인은 6~9절까지 이렇게 심판을 선포하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요...

 

▲6~7절,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복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시인은 '이방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이런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라요)

 

계19:1~2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본문은 ‘할렐루야 시편’인데,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위 계시록의 구절도 똑같이 ‘할렐루야!’가 나오는데,

역시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할렐루야!’ 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도구는 ‘하나님의 백성, 성도들’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6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손에는 양날 검을 들고서 뭇 나라(이방인)들을 심판하고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히4 :12절에,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스린다’는 말을,

신약적으로 가장 잘 해석하면 ‘섬긴다’입니다.

 

즉 좌우에 날 선 (양날) 검을 가지고

뭇 나라를 심판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말씀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진짜 왕처럼 군림하고 벌을 준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왜냐면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섬기는 왕’으로서의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성도에게는 ‘칼로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칼로 다스리는 권세’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무쇠는 단단하지만, 충격을 주면 쉽게 부러져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칼을 만들려면 수없이 불에 달구고

모루 위에서 때리고 찬 물에 집어넣고 담금질을 할 때.. 비로소 강철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두 날 가진 칼은 바로 그런 칼입니다.

이렇게 연단을 받아서 단련된 칼 만이,

어떤 사탄의 공격도 단 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그런 명검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전쟁을 할 때, 칼과 칼이 서로 맞부딪히면, 강도가 약한 칼은 부러져버립니다.

그래서 ‘톨레도의 명검’은 예리하면서도, 강도가 강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명검을 만들려면,

 

강철(강한 재질)과 순철(부드러운 재질)을 겹쳐서 불에 달군 후

찬 물에 집어넣어서 급속히 식힌 후

다시 망치로 두들겨폈다가 다시 불에 달구는...

이런 과정을 수 백 번 이상 소위 ‘담금질’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칼은, 재질이 수백~ 수천 겹 이상의 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강하면서도(강철) 부드러운(연철) 면이 뒤섞인 명검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부드러워야 잘 부러지지 않잖아요. 강하기만 하면 한 순간에 뚝 부러져 버립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무나 ‘명검’이 되지는 못합니다.

수 백 번에 걸친 ‘담금질’ 과정을 거쳐야 명검으로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걸 통과한 사람이.. 요셉, 모세, 다윗, 예레미야, 사도바울 등입니다.

 

담금질이 없으면.. 그냥 보통 검이 되는 것이고, (한 번 쓰고 버려집니다)

담금질이 수 백 번 있어야 .. 후대로 내려가고 물려주는 명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담금질을 당할 때, 내가 곡소리만 낼 게 아니란 말입니다.

뜨거운 불에 들어갈 때.. 으악 비명이 질러지지요.

그러다 찬 물에 푹 집어넣을 때.. 까무러치듯하는 기절을 하겠지요.

그다음에는 힘찬 망치질이 가차없이 가해집니다. 마치 동네북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게 한 두 번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길게는 40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은 요셉, 모세, 다윗, 예레미야, 사도바울이 못 되는 겁니다.

이런 장기간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거든요.

 

민족적으로도, 이 세상에 (잘/잘못을 떠나서)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박해를 많이 받은 민족이 없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만나는 교차로 지점에 위치해서

모든 고대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팔레스틴이 그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의 밀고 당기기 패권 다툼의

한복판에 끼인 샌드백 신세였습니다. 언제나 얻어맞는 시대의 연속이었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죽인 민족’으로, 그리고 ‘고리대금업’의 죄목으로

유대인들은 열방의 미움을 받아 왔습니다. 

  

중세시대까지 고리대금업(금융업)은 기독교인들은 ‘죄로 여기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떠넘겨졌던 것이고, 그런 업종은 ‘매춘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아주 비천하게 무시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20세기 중반에 독립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피눈물 나는

박해의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유럽이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만큼 ‘담금질의 역사’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는 얘기입니다.

 

정리하면, 성도는 찬양하는 특권과 아울러

심판하고 다스리는.. 즉 섬기는 권세를 (법적으로) 갖고 있는데,

그게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검으로 다스리는 (섬기는) 권세를 잘 사용하려면

수 백 차례의 담금질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민족적으로 다 그렇습니다.

 

▲8~9절,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이 구절은 남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시드기야와 고관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왕하25:7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이 구절과 비슷하지요)

 

본문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방에게 그렇게 되갚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으로부터 회복된 이후

이스라엘이 열방들을 보수하고 이방 민족들을 벌했던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 절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영적인 이스라엘,

즉 성도들이 세상 열방들을 판단하고 심판 할 (즉 섬길)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시인이 먼 미래의 일을 예언했던 것이죠.

 

한편 시인은 “(성도들이)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9

이것은 성도들의 복수가 결코 인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하는 보복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따른 것이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9     *카보드 glory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5                  *하다르 (카보드와 비슷한 말), honor, glory

성도에게 사실 엄밀히 말해서 ‘부와 명예와 장수’가 신약에는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사도바울도.. 그런 약속을 공개적으로, 반복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도에게 약속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광’입니다.

성도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 와 영광’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오쏘리티 와 글로리’ 이며, 헬라어로는 ‘엑소시아 와 독사’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빌딩 청소부이든지, 매점 직원이든지,

아프리카 흑인이든지, 키 작은 정글의 소수부족이든지 상관 없이

진정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었고,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광채가 발산됩니다. 다른 말로 ‘영광’입니다.

그의 언어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자기 직위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에서 나오는 권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와 영광도 있습니다.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이고

그가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매일 저녁마다 교회에 가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도 하지만, 저녁에도 하루에 두 시간씩 교회당에서 불 다 켜놓고 기도를 합니다.

그 이유 중에 한 가지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도들이 자기를 겁을 낸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매일 기도하는 목사님께 대들었다가.. 자기가 화를 입을지 몰라서 몸조심한다는 거죠.

 

물론 꼭 그 이유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기도하는 성도에게 대들다가는.. 화를 입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만 교회 생활을 오래 하면, 주위에서 종종 흔하게 발견되는 일입니다.

 

일례로, 말을 함부로 해서 성도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꼭 그의 입이나 치아가 다치는 경우를 봅니다.

영적으로 보면, '너는 입을 조심하라'고 하나님이 하필 그의 입을 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성도는, 세상의 존경과 두려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장군이라도 이등병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기업의 회장이라도 말단사원을 함부로 막 대하지 못합니다.

그 뒷배경에 하나님이 뒷받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걸 무시하고 어기면 자기만 손해죠. 후폭풍이 엄청나니까요!)

 

나는 오늘날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열방(이방)을 잘 다스리고 (섬기고)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 성도로서의

권위와 영광이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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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가진 영광.. 그 실제 사례 2건   (시149:5, 9)

1) 노벨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가 어릴 때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그 부모님이 중국 선교사님 이에요.

아버지 선교사님이 전도여행을 한번 떠나면, 한 달 이상씩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캐롤라인 선교사님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전도 여행 간 사이에 집을 지키고 사는 겁니다.

 

어느 날 밤에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중국 사람들이 뭐라고 막 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어요.

그 해 그 마을에 심각한 가뭄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신을 노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신이 노했는가?

우리 마을에 서양귀신이 들어왔다는 거죠.

그들이 우리 신을 노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밤에 이 사람들을 다 죽이자..'

그래야 우리 마을에 가뭄이 그친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는데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남편도 없어요. 집에는 어린애들 밖에 없어요.

캐롤라인 선교사님이 골방에 들어갔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 했어요.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은 언제나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 믿어 졌어요.

자기 마음에 왕이 좌정해 계신 거예요.

 

깊은 밤이 되면서, 사람들이 진짜로 낫과 곡괭이와 삽을 들고 집으로 쳐들어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순간입니까?

 

그런데 캐롤라인 선교사님은 너무나 편안했어요.

그 사람들이 대문을 밀치고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니까

'어서 오시라' 그랬어요.

그러자 뜻밖의 환대에.. 난입한 사람들이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어요. 앉으시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쭈뼛쭈뼛 앉았습니다.

 

'차를 드시고 그리고 다과를 드시면서.. 그 동안 제가 노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오르간에 앉아서 중국어로 중국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이 폭도들이 너무 난감한 겁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보면서 너무 멋적어 하는 것입니다.

 

그 캐롤라인 선교사님이 찬송을 부를 때, 한 두 명씩 다 바깥으로 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당시 어린아이인 펄벅 여사가 어릴 때 경험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어요.

 

우리가 진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신 것을 믿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찬송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어떤 두려움도 다 제거합니다.

 

 

2)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평전>에 보면 아주 감동적인 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피고는 반드 블랙이라고 하는 남아공의 백인 경찰관입니다.

 

그와 동료 경찰들이 18세 흑인 소년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에 태웠어요.

 

그 사실을 가족들이 아는 것을 알아채고, 경찰들은 그 집을 쳐들어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가족의 집을 불 태웠어요. 그 소년의 아버지도 죽여서 불 태웠어요.

그걸 그의 아내(죽은 소년의 어머니)가 지켜보게 했습니다.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어요.

 

그 사실이 결국은 드러나고 반드 블랙은 재판을 받게 됩니다.

재판 중에 마지막 선고를 하는데, 판사가 그 노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우리가 반드 블랙에게 어떤 판결을 내려주기를 원합니까?'

 

그 노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판사님, 저는 세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 번째는 남편과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반드 블랙 씨가 남편의 시신을 불태운 장소로 가서

그 재를 모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반도 블랙 씨가 우리 가족들을 전부 죽였지만

나는 그와 함께 나눌 사랑을 아직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씩, 그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제가 그에게 엄마 노릇을 해 주고 싶습니다.

 

세 번째,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그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를 진심으로 용서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하기 위하여

지금 제가 그를 한번 안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그 노부인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피고석에 있는 반드 블랙에게로 다가간 겁니다.

 

그때 그 법정에 있던 어떤 한 사람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한 사람, 두 사람이 같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금새 법정 안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이 떼창처럼 울려 퍼졌어요.

 

그런 와중에 그 노 부인이 반드 블랙에게 다가가는데

반드 블랙이 그만 갑자기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무참하게 사람을 살해하던 그 끔찍한 죄인도

그 상황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우리 성도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

마귀는 화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면

마귀는 정말 견딜 수 없이 분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정말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

마귀는 기절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평생 얼마나 마귀에게 시달리고 사십니까?

이제는 마귀를 좀 기절 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가진 사실로 인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