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권의 핵심적인 주제는 "여호와가 왕이시다" 입니다. *90~106편 이 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 는 말이 되고요 우리는 그 통치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뜻입니다.
근데 여기에 또 한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하나님처럼 다스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다짐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왕이 되겠습니다. 이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라는 다짐이 또한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1편이 바로 그러한 시입니다.
시101 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그 당시 가장 존경받는 왕,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하게 여기시고 기쁘게 사용하셨던 왕으로 등장하고, 그 왕의 노래가 시편 101편 입니다.
오늘 시편 101편에는, 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왜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는가? 라는 것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말이 바로 1절입니다.
◑1절,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본문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다윗의 <대관식> 때 부르던 노래' 입니다. 다윗이 드디어 왕이 되었어요. 이제 왕위에 올라 대관식을 치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왕이 되어서 무엇을 얻기를 원하겠습니까? 여러분 각자가 만약 왕이 되었다면, 그 대관식 날, 마음으로 무엇을 원할까요?
왕이라는 자리는 그 당시에 권력의 핵심이자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모든 사치와 모든 방탕을 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최고의 정점에서 흥청망청 살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대관식, 왕이되는 자리에서 다윗은 두 가지를 구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자(사랑)과 정의입니다.
'내가 인자한 왕이 되겠습니다, 정의로운 왕이 되겠습니다!' 라고 선언하면서 :1 다윗은 그 대관식에 오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겠습니다' 라고 다윗이 출발하는 거예요.
여러분, 인자와 정의는 시편에서 굉장히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인자'는 헤세드,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즉 변치 않는 사랑,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뜻합니다. 여러분, 왕이 인자(사랑) 하지 않으면 왕이 제대로 통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왕이 그 나라 전체를 돌봐야 되는데, 만약에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면 통치 자체가 의무요, 고된 노동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근데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나라를 돌봤느냐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사랑하시듯이, 그 헤세드(사랑)를 가지고 그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앞으로 돌보겠다.. 는 다짐인 것입니다. 대관식 날에요! 얼마나 훌륭한 왕입니까!
근데 여러분 보통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에만 치우치는데, 여기는 <정의>도 나와요. 인자(사랑)와 정의가 함께 나와요. :1
정의는 '미쉬파트'인데, 올바른 재판, 또는 통치 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이나 통치는 당연히 '정의 justice'가 되겠죠.
그래서 인자와 정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어서, 서로 보완해주지요. 각자 자기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인자한 쪽인가, 공의 쪽인가?'
많은 리더들이 이 두 가지 중에 하나에 치우칩니다. 그래서 인자함에 치우쳐 너무 무른 사람이 되든지 정의에 치우쳐 너무 딱딱한 사람이 되든지... 이게 균형이 쉽지않습니다.
저는 기질상 정의를 강조하는 쪽에 기울어지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땅한 일은 반드시 해야 되고, 또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누가 나에게 뭔가를 맡긴 일은 끝까지 책임 있게 감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에게 부족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을 품어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일에 대해서 반듯하게 하고, 또 철저하게 하고, 또 공평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그건 참 좋은 일이겠지만 동시에 제 마음속에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 공정하지 못한 일, 그런 일을 만날 때는 제 속에서 불같이 그 사람에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주님은, '네가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영광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과 정의 둘 다 있어야 돼요. 근데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라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마다 다 제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과 정의에 대해서 할말들이 있어요. 사랑이 뭔지, 정의가 뭔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거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나라가 이렇게 분란이 많고, 깨어지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 어느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나 싸우는 곳에 한번 가 보세요. 다 자기 옳다는 주장 때문에 싸웁니다...
여러분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가 보세요. 어느 한쪽은 좋은 편이고, 다른 쪽은 나쁜 편입니까? 자기는 나쁜 (정의롭지 못한) 편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자기가 좋은 (정의) 편이에요. 자기가 옳은 편이에요.
내 주장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견 대로 해야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잘 된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싸우는 거예요. 사사기 21:25절에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잠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근데 이게 우리 들이에요. 우리들이 그래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잘했다/ 잘못했다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쉽지 않지요? 교회는 왜 그렇게 시끄럽죠? 사회는 왜 이 모양이죠? 모두 다 자기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잠26:12
다윗이 그걸 깨달은 거에요. 자기의 사랑과 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자기는 노래(추구)하겠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죠!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러분, 노래한다는 것은,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통일을 노래한다는 것은 통일을 갈망한다는 의미지요. '내가 인자 와 정의를 노래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하나님처럼 인자한 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정의로운 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라고 하는 바램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이 '인자와 정의'라는 이 삶을 이루었습니까, 못 이루었습니까? 만약에 이루었다면 다윗은 완전한 왕이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다윗도 죄를 범했고, 다윗도 완전한 왕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기쁘게 보셨어요. 왜일까요? 다윗이 행위에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의 의도는 완전 했어요.
적어도 자기가 인자와 정의의 왕, 즉 하나님과 같은 왕이 되려고 결심하고 노력했어요. 그 의지, 그 의도 자체만 갖고도, 하나님은 다윗을 기쁘게 보셨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아침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100%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못 살아요!
그런데 그렇게 살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그것(의지, 의도)을 보시고,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기의 순수함을 보십니다.
다윗이 인자와 정의를 노래했다는 것은, 그런 삶을 살기로 의지적으로 마음 먹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마음만 먹었을 뿐인데도, 그를 기쁘게 보시고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고, 그런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 한 번도 실수 없이 정말 100% 완벽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아침에, 우리가 마음에 적어도 다짐할 수 있어요, 결단 할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은 그것을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행위'는 불완전해도, '의지'로는 완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의지만이라도)
▲자녀들은 부모님을 닮는 것이 특권이요, 권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행위가 아니라, 적어도 의지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 왕들을 평가할 때 보면, 하나님은 '다윗의 길을 걸었나/ 안 걸었나'로 판단하십니다.
다윗의 길을 걸어간 왕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왕이었고, 다윗의 길을 져버린 왕은, 아주 형편 없는 왕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럼 이 둘의 차이가 뭐예요? 다윗의 길을 걸었나/ 못 걸었나? 이것은 다윗처럼 살았나/ 못 살았나? .. 가 아니예요.
'행위'가 아니라 '의도, 의지'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가졌느냐, 하나님 마음에 합한 대로 살려고 하는 그 마음에 결단이 있었느냐?' 즉 '다윗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느냐?' 이것이 그 왕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기준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한 부모가 되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회인이 되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에,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이 중요해요. 마음의 결단!
저도 매일 하나님 말씀을 만나면서, 아침마다 결단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행하는 그런 목회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느껴요. '아침마다 이렇게 되새기지 않으면 나도 잘못 되겠구나!' 하나님은 모든 영혼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새로운 계획과 새로운 결단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절,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두 가지를 말씀하는데요, '완전한 길' 과 '완전한 마음'입니다.
그런데요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완전한 길을 갑니까? 인간이 어떻게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습니까? 이거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요, 이게 가능해지는 길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2b
주님의 임재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시면, 내가 '완전한 길'을 향하여 갈 수 있고요 '완전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내게 임하시는 임재가 나타나면 이 임재,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것을 내가 만나면, 그때부터 나는 완전한 길을 지향할 수 있고요, 완전한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완전함이란, 행위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의지의 완전함입니다. 우리 소망과, 우리 바램의 완전함을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왕의 바램,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2b 똑같은 바램이, 오늘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바래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는 무소부재 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왜 구해야 되죠?
내 마음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다시금 내가 하나님께로 향해 가겠다는 고백이 바로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이 바로 이 부분 입니다. 많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다'.. 라고 스스로 믿어요.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다' 라고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잘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주여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2 주1)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다윗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6: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마음!
내가 사람을 앞에 대하고, 일을 대하지만 일도 사람도 나라도 국가도 외교도 내가 그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거죠. 그 가운데서 모든 일을 해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는 흔들리지 않는 왕이 될 것입니다! .. 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어집니다.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니다'
즉 하나님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임재를 구할 때 하나님은 나의 미래까지도, 나의 결과까지도 주장하신다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내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마음이 바로 오늘 본문 시101편에 나오는 '인자와 정의를 구하는 마음'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오늘 시101:2절 말씀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분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직장 일도 잘 되어야 하고, 사람도 얻어야 하고 건강도 유지해야 하고, 물질도 얻어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이 모든 것을 따라가다 보면.. 지쳐 넘어져 쓰러집니다. 그리고 하나가 무너지면, 또 하나가 연쇄적으로 무너집니다..
그런데 각각의 이 세상적 가치를 구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임재를 구하는 거예요. '주여 어느 때나 나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주님, 주님을 기다립니다!'
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임재의) 바램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마음으로 살아 갈 때,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 되는지요? 3절부터 나옵니다.
◑3절,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천한 것'은, 개역성경에 '비루한 것'이라 했는데 주2) 가치가 없다는 말이에요.
가치 없는 것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것들이 얼마나 내 눈 앞에 많습니까? 그것들을 내 눈 앞에 두지 않겠다는 말은, 아까 말한 '여호와를 내 앞에 두겠다'는 말과는 반대되는 말이지요.
그런 비천한 것, 비루한 것들, 가치 없는 것들을 내 앞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내 앞에 모시겠습니다... 그래서 배교자들의 행위,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을 버린 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고, 그 어느 것도 내가 붙들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시 한번 결심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내 앞에 여호와를 모시고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내 앞에 목적으로 두지 않겠습니다!' 라고 3절은 다시 한번 결단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