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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2편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LNCK 2021. 8. 10. 14:15

https://www.youtube.com/watch?v=cmZijQGm39A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시편 102:1~28                           출처, 녹취
 

시편 102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의 망하고 이스라엘이 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 중에 한 사람이 썼을것이다.. 그렇게 추측을 합니다. 

그러니까 시102편 기자가 겪는 고난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간 상태에서  
그런 고난을 겪은 사람의 탄식입니다. 

◑3~11절까지 보면, 그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는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3절 '아, 내 날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 뼈는 화로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새번역)

여러분, 희망이 없어져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그런 분이 한 분도 없으실 것입니다. 

희망이 없어지면 그러면 더이상 살 힘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죽하면 그렇겠습니까!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하지요. 
희망이 없어 질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4~5절에, 그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6~7절에, 잠도 잘 못 잡니다. 
8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고 저주하는 말을 듣습니다. 
9절에, 그는 눈물이 자기 밥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징계하셨다고..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10절, '주님께서 저주와 진노로 나를 들어서 던지시니'

그렇게 선지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울면서 호소하고 그렇게 외쳤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도 않고, 오히려 그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이키지 않았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우리가 잘못했구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었구나!' 

그때 깨달은 거예요. '너무 늦었어요, 깨닫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어요!' 
11절에 '내 사는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며 말라가는 풀과 같습니다' 
이런 완전한 절망에 빠져있는 이 시편 기자의 탄식을 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고난을 만날 때가 혹시 있다면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휴 목사님, 그저 돈 문제 정도, 인간관계 정도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라가 망하는 것 같은 어려움을 어떻게 견딥니까?' 

여러분 그러나 준비하셔야 합니다. 
물론 나라가 망하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없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나중에 가서, 그때 가서야 탄식하는 것은..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것 같은 그런 어려움이 아니라도 
그저 일상적인 모든 사람이 겪는 어려움 같아도 
겪는 당사자에게는 아주 (나라가 망하는 것 같은) 큰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큰 재난이 내게 닥친다 할지라도 
내가 믿음을 지키고 그리고 승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는지를 
여러분 스스로 돌아봐야 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기도하게 됩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도 기도합니다. 

1절에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내 부르짖음이 주님께 이르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이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본문 102편의 메시지는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도와주셨다' 
그런 메시지가 아닙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의 기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응답 받지 못합니다. 
7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응답이 됩니다. 

자기(시편 기자)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다음 입니다. 
그러니 본 시편 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응답을 못 받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런 형편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재난이나 고난이 닥쳤을 때 
그냥 무작정 '하나님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만 해서는 
절대로 그는 그 재난과 고난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도에 대한 좌절이 옵니다.
나중에는 불신자보다 더 못한 그런 고백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가 봐, 기도에도 소용이 없어!' 
그는 아직도 기도를 진짜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편 102편을 읽어보면 이 기도는 아주 특별합니다. 
지금 나라가 다 망했고,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이 시편기자의 갈망은, 
고난이 없게 해 달라는 게 아니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2절에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십시오. 내게 주님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속히 응답하여 주십시오.' 

시편 기자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알았던 거예요. 
우리 민족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 
그것이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어요.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 온 거예요.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무엇이 지금 필요하냐? 
우리가 받을 응답이 무엇인가?' 
고한이 없어지는 것,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기도로 바랬던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바로 그런 관계의 회복이었어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한 겁니다. 
1~2절, '주님,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내 부르짖음이 주님께 이르게 해주십시오.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십시오. 내게 주님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만 한다면 
그걸 믿을 수만 있다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그것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내가 그렇게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러면 문제가 될 게 아무것도 없겠다.. 고 깨달은 것입니다. 

나머지는 시간문제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다 시간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면,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면 
그러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게 (자연스레) 믿어지는 것! .. 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언제 행복하고, 우리가 언제 강합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믿어지는 때입니다.

환란과 재난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믿음이 좋은 사람이든, 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
다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란과 재앙 중에 믿음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그 어려움 중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에요. 

믿음이 좋다는 게 뭐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환란 중에라도) 항상 믿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가 뭔지,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응답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기도 오래 못 합니다. 계속 응답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는 반드시 기도에 대한 좌절에 빠집니다. 

기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기도 많이 했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감옥에서 나오지도 못했어요. 

기도는 하나도 응답이 안 되는 거 같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요셉과 같이 계셨어요. 요셉이 그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이것이 요셉이 누렸던 가장 놀라운 기도응답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어떤 형편에서도!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았던 것!'
그 훈련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과도 똑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기도 응답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해도, 항상 이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기도에 가장 중요한 갈망은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시편 기자

시편 기자는 그렇게 주님을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찬양이 터집니다. 

1~11절까지와 12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영원히 보좌에서 다스리시며, 
주님의 이름은 대대로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12

찬양이 터졌습니다! 
현재 상황은 포로로 잡혀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형편인데, 무슨 찬양이 터집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자기를 바라보고 있음을, 그(시편기자)도 본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하는 고백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13절에 '주님, 일어나셔서 시온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때가 왔습니다. 시온에 은혜를 베푸실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나니까 
이 시편 기자의 마음 속에 답이 왔어요.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왔군요!' 
'이제 우리들의 고생과 재앙은 끝날 때가 왔군요. 하나님 속히 그 일을 이루어 주십시오!' 

마치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만큼 확신이 온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마치 자기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14절 '주님의 종들은 시온의 돌들만 보아도 즐겁습니다. 그 티끌에도 정을 느낍니다.'

마치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을, 
이렇게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15절에 '뭇 나라가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이 땅의 왕들이 주님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16 '주님께서 시온을 다시 세우시고 그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게 기도의 능력이에요. 
형편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것이 기도 응답인 것입니다.

1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헐벗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기도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살려주세요, 구원해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렇게만 기도하는 기도는 
기도에 대한 좌절을 맛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 안 들어주시나봐!'
'하나님은 기도에 역사 안 하시나봐,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나 한 거야?' 
'살려 달라, 도와 달라!' 이런 형태로만 기도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얼굴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18절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

'기록하여라!' 어떤 느낌이 있으십니까? 
지금 시편 기자가 갑자기 기록하라는 거예요. 

재앙이 왔습니다. 끔찍한 재앙이 왔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은 그대로 기록하라!' 
그런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기도 합니다. '그 기도도 기록하라!'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 마음에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도 다 기록하라!' 

왜 그렇게 하지요? 도대체 시편 기자가 왜 그걸 기록 하라고 하지요? 
'다음 세대, 아직도 아직도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기록하여라! ' :18

지금 이 시편 기자는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는데, 자기들은 이스라엘 땅에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래도 그들은 들었습니다. 

근데 이 바벨론 땅에 온 2세, 3세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 말을 배우고, 여기서 공부를 하고, 여기서 자라고 
여기서 모든 걸 다 본 2세, 3세들은 '하나님 믿음'을 진짜 가질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다 끝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우리가 지금 죽을 것 같은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기도 중에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다 기록하자!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그것을 읽게 하자!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리 후손들 2세, 3세들에게 전해지게 하자.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 잃어버려지지 않게 하자!

▲오늘날 우리가 영성일기를 쓰는 동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운 분 계십니까? 기록하세요. 
탄식만 하지 말고, '하나님, 제가 지금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나님 저 지금 이렇게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 그것도 다 기록하세요. 
'하나님 이거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 여기 역사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 좀 만나 주십시오!' 

기도하면 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것도 기록하십시오. 
'내가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고 이런 은혜를 주셨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기록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실제가 됩니다. 

그저 스치듯이 지나가는 하나님의 깨우침은, 잠시 지나고 나면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근데 그걸 붙잡고 써 보면, 나중에 책도 한 권 나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도도 했으면서, 은혜도 받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다 어디 갔습니까?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기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기록해두면.. 십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놀랍게 기억이 회복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후손들입니다.
우리 아빠, 우리 엄마가 어떻게 신앙생활 했었는지.. 
무슨 문제를 기도 했는지..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그리고 기도 중에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주셨는지.. 

성경 읽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아빠가 엄마가 남겨둔 영성일기 속에 담겨 있는 기도와 응답에 대하여 읽고서..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됐구나!' 
'그래서 우리 가정이 이렇게 됐구나!' 
자녀 세대가 그걸 알게 된다면, 이거 얼마나 놀라운 신앙 성장의 밑거름이 되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19~22절

주님께서 성소 높은 곳에서 굽어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살펴보셨다.
갇힌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죽게 된 사람들을 풀어 놓아 주셨다.
 
시온에서 주님의 이름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울려 퍼질 때에,
뭇 백성이 다 모이고, 뭇 나라가 함께 주님을 섬길 것이다.  :19~22절

아 갑자기 도대체 이거 무슨 내용의 고백을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열린 거예요. 

이 시편 기자에게, 하나님이 앞으로 되어질 일을 놀랍게 보여주신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열방의 민족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모일 그날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다시 지어진 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을 읽을 때, 별로 충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쓰여질 때는, 바벨론 포로로 있을 때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때가 아닙니다. 
희망은 점점 없어질 때였어요. 
눈앞에는 절망이 짙어질 때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갈 때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나.. 하나님은 다 보고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과거나 미래가 없어요. 
그러니 포로로 잡혀 간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시편 기자에게 
이제 그 백성이 다시 돌아갈 것을, 하나님 보여 주시는 일이 뭐 어렵겠어요? 

기도하는 자에게 이런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정말 갈망하는 자에게, 이런 역사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에게도 똑같아요. 
우리는 미래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나 미래를 다 동시에 알고 계세요. 

우리가 주님을 계속 바라보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하지요?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비로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길을 정확하게 인도하실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서 받은 은혜,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받은 은혜가 정말 크고 놀라울 때 참 귀하지요. 
근데 만약에 기록하지 않았다면, 자기도 금방 잊어버리고 
가족도 자녀들도 교우들도 알 방법이 없어요. 그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기도로 역사해 주셨는지 알 방법이 없어요. 

만약에 시편 기자가,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과 
그때 받았던 응답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 손에 본문 시102편이 들려 질 수가 없지요.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편 기자가 쓴 본문의 시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구나!'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은혜를 받잖아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 
그게 지금 고통중에서 드리는 탄식의 기도라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증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은, 반드시 나중에는 간증이 돼요. 

여러분이 그것을 정확하게 기록하였다면, 그 가운데서 여러분이 신실하게 믿음으로 반응했다면 
여러분이 그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며 나아갔다면 
지금 있는 이 어려움은, 앞으로 정말 뛰면서 기뻐할 간증거리가 될 것이고,  
그것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믿음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문 102편을 다니엘이 썼다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리고 세 제국에 걸쳐서 총리가 됐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어요.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기도하던 사람이었어요.

그게 정적들에게는 공격을 받는 올무가 됐어요. 
그래서 다니엘을 실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신에게 절하는 (기도하는) 사람은 다 사자굴에 보낸다' 이런 칙령을 만들고 
결국 다니엘을 올무에 걸리게 만듭니다.

다니엘은 다 알았어요. 자기를 사자굴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올무인줄!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 기도했어요.

그래서 그는 사자굴에 끌려 들어갔어요.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아서 사자굴에서 살아나왔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지요? 

다니엘서를 읽어 보면, 다니엘이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중에 그가 받은 은혜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어요.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는 걸 봤어요. 

70년 뒤에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것도 다 알았어요. 
뿐만 아니고 이제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시는 
그 장면까지 다 보았어요. 다니엘서가 묵시록 입니다. 그걸 다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게 무섭지가 않았어요. 

여러분 주님의 얼굴을 바라본 사람,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게 진짜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문제가 안 됩니다. 

왜 우리가 흔들리죠?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없으니까 
거짓말에 무너지고, 조그만 이익에 무너지고, 조그만 일로  인간관계 때문에 무너지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뭐 준비 해야되요? 
주님과 동행하는 기도의 삶, 
늘 주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학 중인 목사님 한 분이 자기 딸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는데, 하루는 뭘 잘못해서 엄마에게 아주 혼이 단단히 났어요.

근데 엄마가 야단을 치는데, 이 딸이 그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야단을 맞는 겁니다. 
엄가(사모)가 엄청 더 화가 났어요. 자기 눈을 깔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니까요!

우리 한국 가정에서는 이건 정말 무례한 일입니다. 
어떻게 야단치는 엄마를, 그 눈을 똑바로 쳐다봐요? 
한국, 일본 문화에서는 '눈 깔아야' 됩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건 엄마에게 반항하는 거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딸이 더 혼이 났어요. 

근데 이 아이는 참 억울해요. 왜냐면 학교에서는 반대로 배웠어요. 
이스라엘의 학교를 갔는데, 거기서는 뭘 잘못해서 선생님이 야단을 지고 지적하면

절대로 눈을 깔면 안 돼요. 선생님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돼요. 

그래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선생님이 나에게 뭘 말씀하시는지.. 
내가 알고, 모르면 또 물어 보고, 
왜 내가 이런 야단을 맞는지 모르면 선생님에게 또 물어 보고.. 확인하고.. 
그래서 고치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눈을 똑바로 뜨고 선생님을 쳐다보게 합니다.
문화적 차이죠.  
그래서 엄마가 야단을 칠 때, 딸이 엄마 눈을 똑바로 쳐다 본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데, 꼭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 같아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는 살 길이 없다니까요!

'도대체 주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주님,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뭘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때만 우리는 일어날 힘을 얻게 돼요. 

◑그러나 한 번 은혜를 받았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커도,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또 무너지고 또 절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시편 기자도 그랬습니다. 

23~24절에 보면 갑자기 또 기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나는 아직 한창 때인데 기력이 쇠하여지다니, 주님께서 나의 목숨 거두시려나?
나는 아뢰었다. "나의 하나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주님의 햇수는 대대로 무궁합니다."

아니 갑자기 시편 기자가 왜 이렇게 또 낙심을 합니까? 
받은 은혜는 너무 커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도 보여 주시고 
이스라엘의 미래도 보여 주셨어요. 

그런데 여전히 자기는 현실 속에서 살아요. 지금은 포로로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기는 나이가 한 해 한 해 더 들어요. 
포로 생활하는 중에 그가 얼마나 몸이 또 빨리 쇠약하겠습니까. 

'이러다가 내가 고국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는 거 아니야? 이렇게 끝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문득 시편 기자에게 엄습해 온 겁니다. 

여러분, 상상이 안되는 은혜를 받았어도 
지난날에 받은 은혜 가지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 못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과거에 기도 많이 했고, 또 큰 은혜 받으셨던 분들 다 있잖아요. 
근데 그 은혜가 지금 현재 내 문제를 해결 못해 줍니다. 
은혜는 항상 지금 현재 받은 은혜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내가 바라본 주님! 그게 되어야 오늘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시편 기자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일어나요. 또 반전이 일어나요. 
25~27절 '그 옛날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들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들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커 보이고, 자기는 너무 비참하고 
자기는 여전히 육신의 죄에 자꾸 무너지고, 
이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 같고... 그래도 그건 다 끝납니다. 

지금은 고난이 영원히 갈 것 같아도, 
이 세상도 끝이 나고, 고난도 끝이 나고, 우리 자신도 끝나는 한계가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결 같으십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한결 같으신 분이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참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28절에 '주님의 종들의 자녀는 평안하게 살 것이며, 
그 자손도 주님 앞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나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고요?' 이런 말이 없어졌어요. 

'우리 자녀들이 반드시 평안하게 되고, 우리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 앞에 굳건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 속에 '내가 비록 이렇게 죽는다 하더라도 괜찮아 
결국은 우리 후손들이 이스라엘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하나님 앞에 굳게 서게 되는 그때가 올 거야!' 그 확신이 오고 나니까 
더 이상 자기 자신은 문제가 되지도 않아요. 정말 대단한 일이죠? 

여러분 언제까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 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끝날 것입니까?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영원히 복이 될만한 그런 문제로 기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때 하나님 앞에서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문제로, 기도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기도 제목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무슨 기도제목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하나님 나 좀 살려 주세요. 하나님 나 좀 먹여 주세요.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그런 기도는 계속 우리를 좌절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을 원합니다. 하나님,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저에게 주세요!' 이런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세요.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놀랍게 일하십니다.

▲오래 전에 알프스 산자락의 마을 작은 마을에 아주 아름답게 지은 아담한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행객들이 산장에서 묵으면서 내려다보면, 그 마을 예배당은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저녁에 그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저녁에 예배가 있는 날인가보다' 
여행을 하던 여행객이 가이드에게 전화를 했어요. 
'저 예배당에 오늘 나를 좀 데려다 주세요!' 

가이드가 산장으로 찾아왔는데, 그는 등불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산길을, 그 등불에 의지해서 그 마을까지 내려갔습니다.

그 마을에 도착해서 예배당에 가 보니까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에 중앙에 등불걸이가 쭈욱 있었어요. 

여행객은 예배당에 들어가서 그 등불걸이에 자기 등불을 걸었습니다. 
그러니 예배당이 좀 환해 지기 시작했어요. 

예배시간이 가까워 오니까 사람들이 모여요, 
한 100개의 등불이 그 등불걸이에 걸렸습니다. 예배당이 아주 환해졌어요. 
여행객이 보니까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둑컴컴하던 예배당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등불을 가지고 모이면서 

이렇게 환한 예배당이 될 수 있다니!'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고 살면 
여러분 자신이 빛으로 살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데,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면서 (반사되는) 빛을 봐요. 

우리가 그렇게 살다가 이렇게 예배당에 함께 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연약하고 작아 보여도 
정말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라면, 우리 각자가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죠.
 
그 등불인 우리가 이렇게 모이면, 우리는 세상에 밝은 희망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살기를 갈망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너무너무 중요한 문제이고,  
또 각자 우리가 등불이 되는 그것은, 한국 교회를 살리고 
우리 민족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