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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9편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는 다윗
LNCK
2021. 8. 18. 11:28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는 다윗 시109:1~31 여러 설교 정리, 출처
▲본문의 구조
1. 원수에 대한 탄원과 저주 (1~20절)
1) 원수 자신에 대한 저주의 기도 (6~9절)
2) 원수의 집과 후손에 대한 저주의 기도 (9~13절)
3) 원수의 조상에 대한 저주의 기원 (14~15절)
4) 악인이 저주를 받는 마땅한 이유 (16~20절)
2. 시인의 자기 구원을 위한 기도 (21~31절)
▲서론
본문 시109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들에게 맡기셔서
고통당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저렇게 악한 자들을 왜 살려두시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악한 자들이 밉습니다.
악한 자들은 성도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우리 성도들이 겸손해질 때까지 우리에게 실컷 고통을 주다가
우리가 충분히 겸손해지면 없어질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
원수였던 사울 또는 도엑의 핍박 때에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삼상21:7, 22:18
정당한 보복은 구약과 신약의 성경적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만큼 하나님의 본성과 사역에 중심을 이룹니다.
시편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근거하여
자신이 당한 고통에 대한 정당한 심판이
그의 원수들에게 임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격려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인의 저주 기원은 정당하지만,
원수를 축복하는 길은 더 나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1절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시인은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로 시편을 시작합니다.
원수에 대한 저주 기원을 담고 있는 이 시편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원수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마음을 가진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30절)
로 마치는 것을 볼 때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그는 원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원수와 자신의 삼각관계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시인은 입을 열자마자 그의 원수들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2~3절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다윗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악의에 넘치는 말들로
공격을 당하고 있었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악한 입’, ‘거짓된 입’, ‘속이는 혀’, ‘미워하는 말’, ‘까닭 없이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공개적으로 또한 격렬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데
본래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요8:44)
자기가 가진 놀라운 속임수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고한 비방을 퍼부어
마치 모든 사람들 가운데 버림을 받아야 할 자들인 것처럼 모략합니다.
◑4~5절,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시인을 향한 원수들의 미움과 공격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더구나 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몹시 억울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기도할 뿐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탄원, 호소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명예와 위신을 지키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혹시 우리도 부당한 공격을 받을 때면, 어떤 개인적 차원에서의 대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이름을 염두에 두고서, 그의 이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께 호소, 탄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6~11절 (아래 나옴)
여러분, 본문 말씀을 차분히 끝까지 읽어보십시오. 내용이 당황스럽지 않으십니까?
저는 본문 시109편을 읽으면서 마음에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지금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거든요.
우리가 늘 생각하고 은혜받던 다윗과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다윗이 쓴 것 맞을까?' 할 정도로 의심이 갈만큼, 이 시편은 참 당황스럽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내용을 보면, 지금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에 대해서,
다윗이 대단히 상처가 크고요, 마음에 분이 있는데요.
그걸 다 일일이 하나님 앞에 지금 고자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 자들을 혼내주세요' 하는데요,
그 내용이 정말 인간적이예요.
'아 다윗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나하고 똑같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 진짜 노골적인 묘사이고요, 너무 인간적인 사람의 마음입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서 서게 하소서' :6
'그가 심판받을 때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7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8 주1)
어휴, 무서워요.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9~10 주2) *중요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11
이런 식의 고자질을 하나님께 하는데요,
이것을 보면서 '다윗이 지금 대단히 속상했구나! 정말 원한이 맺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걸 보면서 알게 된 게 있어요. 다윗은 "하나님께만 그랬어요!"
하나님께 호소하고요, 다윗은 친히 원수 갚지 않았어요.
다윗에게는 그런 힘이 사실 있지 않았습니까? 골리앗도 이긴 사람인데요.
골리앗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마음만 먹으면 자기 손으로 다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인데요...
이런 다윗의 성경 기록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다윗은 하나님의 대적과는 싸웠고,
자신의 대적과는 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은.. 다윗이 대항해서 싸우고
다윗 자기의 대적은.. 하나님이 (자기 대신) 싸워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똑같은 내용이죠.
다윗 자신의 대적들에게, 다윗은 기도하기를
'하나님, 혼내주세요!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자기 속에 있는 인간적인 말을 조금도 가감 없이 다 토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윗이 기도한 대로 그렇게 시행하셨을까요? ..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따라 그걸 행하셨을 것입니다.
다만 이런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만큼은
'그래,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아마 그러시며 다윗을 일단 달래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그 분한 마음, 화나는 마음, 억울한 마음을
그냥 하나님께 다 쏟아놓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구나! .. 하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을 주께 맡기라!' *히10:30등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꼭 몸에 익혀야할 굉장히 중요한 삶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원수가 많아요. 참 미운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를 억울하게 한 사람 참 많아요.
화나고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근데 하나님은 '참으라' 그랬어요.
네가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어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가인을 손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보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가인이 죄인이라고 함부로 손댔다가 실수할까봐, 악해질까봐
우리가 지나쳐서 하나님을 대신할까봐.. 그래서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목회할 때, 가장 힘들었을 때는 두 달 동안 교회도 못 나가고 쩔쩔 매던 시절이 있었어요.
오른쪽 머리에 신경이 터져서, 몸에 절반 마비가 왔어요. (나중에 회복되었죠)
그 다음에 또 하나 나타났던 현상이 있었는데
제 눈이 따가워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눈을 감고 있었어요.
어느 한의사 장로님이 진단하기를,
그게 (시력 이상) 간에서 화火가 풀리지 않아서,
그 열이 시신경을 건드려서 나타난 현상이라며,
심하면 실명된다고 진단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제 속에서 일어나는 화를 참지 못 하니까,
그냥 보통 사람들 같으면, 한 번 대판 싸우고 풀 터인데, 그렇게 풀 수도 없고
안 믿는 사람들처럼 술 먹고 풀 수도 없고...
그래서 마음속에서 계속 누르고 있으면서 풀어야 되니까
그게 제 눈을 치더라고요. 그때 참 힘들었어요.
분노, 화, 억울함, 노여움...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질을 참 떨어뜨립니다.
또 그걸 그냥 다 자기 원하는 대로 풀어버리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되고, 선을 넘게 되고,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속에서 일어나는 화를 참으면... 병이 되고
그걸 속시원하게 밖으로 풀어버리면.. 지나쳐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여기서 해결책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셔서, 공의로 정의로 심판하여 주셔서 갚아 주실 거야!'
'절대로 나를 억울하게 안 하실거야'
이 분노, 이 화, 억울함, 손해.. 다 갚아주실 거야!
이게 여러분, 믿음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냥 시시콜콜 다 얘기하고요.
그러고 자기 속에 있는 감정을 조금도 속이지 않고 기도로 다 고했어요.
'하나님 저 원수들 혼내주세요,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다 뺏기게 해 주세요.
그들의 기도는 죄가 되게 해 주세요!'
이런 말을 다 할 만큼 다 풀어놓고는, 그 다음에 시원하게 끝내버렸어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과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일어나는 노를 다스렸습니다.
다윗이 정말 분노를 다스렸다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데,
여러분, 다윗이 억울함을 다스린 증거가
억울하게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을 때
다윗이 굴에 숨어 있었을 때
사울 왕이 용변을 보려고, 그 굴 속으로 들어왔어요.
여러분, 밝은 데서 갑자기 굴 속에 들어가면 캄캄해서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갑자기 극장안에 들어가면 처음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이 지금 그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 굴 안에서는 사울이 들어오는 게 보이잖아요.
그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다윗은 죽이지 않습니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억울함을 자기가 풀지 않아요.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억울함과 분노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냄, 노기, 화의 분출 .. 이런 것들이 삶의 질을 참 나쁘게 합니다.
삶의 품격을 떨어뜨리고요, 우리 사람을 좋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거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다스리고 풀 줄 아는 법..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고
더 근사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화, 억울함을 풀었습니다. 하나님께 고하고 풀었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여러분도 하나님께 다윗처럼 얘기해 보세요.
'그 아이들 고아되게 해 주세요. 고리대금업자에게 다 뺏기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 그렇게 호소하고서는...
분노가 막 치밀 때는, 좀 심한 말을 하나님께 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정, 공평 하시니까
다윗이 심한 말을 한다고 해도.. 공평하게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다윗의 호소라도.. 공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 다윗은
'저는 하나님을 믿고 제 억한 심정을 다 풉니다. 끝났습니다.
이제 저는 기쁨으로 찬송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2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이 단락 출처-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는 사람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목마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일간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목마름도 없이 습관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살던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렸고,
죽은 자와 방불한 인생을 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의지하는
목마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선명한 빛이 어둠을 가르고 우리의 영혼에 내리쳤을 때,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셨을 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올랐고,
우리의 눈은 주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빛났고,
우리의 손에는 섬김이 있었고, 우리의 무릎은 꿇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너무나 마음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주님이 얼마나 아파하시겠는가요?
▲은혜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던 때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목말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고,
둘째로, 은혜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시인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아버지 집이 얼마나 풍족한지를 생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궁핍함을 깨닫게 된 것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눈뜨게 될 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궁핍한지 깨닫게 됩니다.
다윗 역시 원수들로 둘러 싼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궁핍함을 고백하고 있고,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있던 때를 제외하고
그는 인생을 사는 동안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궁핍한지
탄식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부요 속에서 너무나 쉽게
자신의 영혼의 가난한 상태에 대해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궁핍하던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연약하던 자를 강하게 하고,
무력하던 자를 능력있게 만드시는 것은
그 축복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자원으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받은 축복으로
평안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환경 속에 살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기도의 자리에서, 섬김의 현장에서,
우리는 형식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삶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피곤함과 지루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향한 권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부요함의 빛 아래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고,
무엇이 그 빛을 받지 못하게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궁핍한지를 깨닫게 되자 마음이 짓이겨져서
고통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상하는 것은 죄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룩의 효과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의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상한 마음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응시하는 눈을 거두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요하다 말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난하고 벌거벗었으며 눈 멀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로 은혜에서 부패하게 하는 것들을 멀리하고,
다시 처음 사랑과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첫 사랑과 첫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가운데, 사모하는 심령에게, 주님이 이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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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시 109: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위 구절에서 지칭하는 대상은 ‘도엑’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가리킬 때 이 시편을 인용하였습니다.
행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주2) 시편의 ‘저주시’에는 두 가지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악담이요 자기 마음의 불편함, 억울함의 토로이겠지만
또 하나는, 악인들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장차 그 행한 악독으로 인해 당하게 될 끔찍한 결과에 대해
예언적으로 ‘이러할 것이다’라고 미리 말해 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연민’입니다.
무조건 미워해서 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들이 거지가 되게 하고, 자녀들이 걸식하게 해 달라’고 저주시가 선포한다면
그들이 장차 그렇게 될 것에 대한 염려와 연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말이나 표현은 겉으로 쎄게 하지만, 겉바속촉(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처럼
그 속에는 그 악인들이 장차 당하게 될 비참한 결과에 대한 염려와 연민이 담긴 것이죠.
9 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그들을 덮게 하소서
10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11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 시140:9~11
2. 이 저주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며,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저주시는, 어떤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것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억울한 실상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2~1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13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140:12~13
그 공의의 하나님의 심판을 부탁하는 (합당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주시의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탄원시의 최종은 원수로부터의 승리나 감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원수의 악행과 같은 거짓된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 행하신 하나님의 정의가 계속해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제 우리가 주 앞에서 살면서 우리 또한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갈 것에 대한
믿음의 실천과 다짐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