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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3편 스스로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들어 세우시는 하나님

LNCK 2021. 8. 23. 09:31

 

◈스스로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들어 세우시는 하나님    시113:1~9      여러 설교 정리

 

◑1~3절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해요. :1~3

왜 그런가 오늘 살펴봤더니.. 시편 기자가 이해한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으신 하나님이었어요.

 

그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면

우리를 아는 척도 안 하시고, 무시하시고, 상대도 안 하셔야 되는데

 

6절에,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살피는데, 특히 누구를 살피느냐면,

-가난한 자를 먼지더미 에서 일으키시며   :7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7

-지도자들, 곧 그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8

 

아예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 대상을

살펴 주시고, 관심 가져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에 너무 감격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해 돋는데 부터 해지는 데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라'  :3

이렇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무시와 차별을 당하고 삽니다.

거기에다가 해외에 나가면, 인종차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우울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무시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을 들어서 높이 쓰시는 분이십니다.

 

 

◑4절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절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철학사조 중에 이신론 Deism 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을 믿지만, 신이 하늘에서 잠을 자는지, 어쨌든 인간사에 통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 너무 불의와 불합리가 많기 때문에

‘신이 살아계신다면 도저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것이죠.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6

우리 인간사에 세밀하게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래서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는 육신적 욕구’를

끊임 없이 물리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어 이 낮은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을 믿고 따른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어째서 세상에서 자꾸 높아짐을 추구하겠나요?

(물론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주셔서 천국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경우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성도의 근본 바탕에는 ‘상향적 욕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더라도 ‘나는 담임목사가 목표다’ ‘나는 큰 교회를 이루고 싶다’

‘나는 장로가 되어야 되겠다!’ .. 이게 신앙의 본질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인간적 욕구, 육신의 소욕입니다.

 

이런 욕구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아니라, 자기의 ‘상향적 상승 욕구’이며,

비즈니스 마인드입니다. 인간인지라 그런 욕구가 생길 때는

끊임없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그런 자아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충격적인 ‘하향성의 삶’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은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요, 왕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지만

이 세상의 낮은 곳, 낮은 자리를 지향하는 ‘하향성의 삶’을 뒤따라 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잔소리 같지만, 산 정상에 가면 아무도 못 만납니다.

친구들이 떠나고, 아무도 자기 곁으로 가까이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아니고는, 인위적으로 ‘상향적 삶’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7~8절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주1)

 

제가 결혼 30주년 기념일을 챙긴다고, 아내에게 선물을 사 주려고
제 혼자 명동의 백화점에 나가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나갔는데 낯이 설더라구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우연히 명품관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가방이 눈에 띄길래 '가방을 사서 선물할까?' 하고 봤더니 5백만원이었습니다.
'무슨 가방이 5백만원이나 하나!' 하고 놀라서 급히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또 놀랐던 것은, 젊은이들이 그런 가방을 사겠다고 줄을 늘어 서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확 밀려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몇 사람씩만 입장시켜서 쇼핑하게 했습니다. 

그때 명품관에 인테리어 한 것과, 
또 거기 직원들의 복장이나 대하는 태도를 볼 때, 좀 주눅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느낌을 알 수 있었어요. 말은 안하지만, 그렇게 행동도 안 하지만 

섣불리 아무나 덥석덥석 들어가지 못하게 그렇게 인테리어를 하고.. 
그것도 아마 다 명품매장의 마케팅 전략일 것입니다.

그런데 명품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런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차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난 너하고 달라, 나하고 너하고는 클라스가 달라!'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데서 오는 어떤 우쭐감, 무의식적인 만족..
그게 고가의 비싼 명품으로 치장하는 사람의 심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교만함과 차별의식,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요.
거기서 얻는 쾌감이 있어요.
권력욕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7~8절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하나님은 정말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들어 세우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시70: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86:1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도, 목동 시절의 가난하고 비천한 자신의 처지를

늘 잊지 않고 기억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사무엘하 7: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은 과거에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목동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었는지 잊지 않았고,

본문 7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자기 스스로 낮추어 '주님, 저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입니다'하며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기도할 때, 주님은 내게도 다윗 같은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겸손하게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낮추신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했는데,

그 마음에 우리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정말 뒤섞이기 싫을 정도로 가장 천하고, 추하고, 비천한 자들에게 내려오셨는데,

그래서 구원 받은 내가, 누구를 무시하며, 누구를 더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 '나는 구질구질한 사람들과 함께 엮이기 싫어!' 하시는 분이 있다면,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 갔는데

얼마나 그 불이 뜨거워서, 아브라함에게 물 한 방울만 자기 입에다가 적시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 왜 그랬지요?

자기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죽어가는 것을 한 번도 내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나사로 같은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기회,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 속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는 기회!

 

혹시 지금 경제적으로 가난한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것도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병든 사람의 심정은, 병들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잘 알고요, 동병상련이죠.

가난한 사람의 심정은, 가난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잘 알거든요.

 

그래서 부자도, 빈자들을 도우지만

빈자들이 빈자를 더 잘 도웁니다. 왜냐면 그 빈자의 심정을 그들은 잘 알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난한 것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받은 은혜를 잘 사용하셔서, 주위에 나사로 같은 이들을 더 잘 도우시기 바랍니다.

 

 

◑9절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여기서 ‘임신 못하는 여자’는, 당시 고대사회 정황으로는 수치스런 여자로 여겨졌습니다.

7절의 ‘가난한 자, 궁핍한 자’와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주 천대를 받았죠.

반면에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가 존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도 복 받은 여인으로 인식되었죠.

 

한나는 기도 응답의 결과로 사무엘을 얻고 난 뒤에 시를 지어 찬송하였는데,

그 찬송시 가운데 시편 113:6~8과 동일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꼭 임신하지 못하게 해서.. 그렇게 낮추셔서 또 역사하십니다.

사라도 임신이 잘 안 되었고,

리브가, 라헬도 임신이 잘 안 되었고,

한나도, 엘리사벳도 잉태가 잘 안 되었어요.

그래서 그들로 낮추시고 많이 눈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믿음의 사람을 선물로 주셨죠.

많이 기도하고 잉태케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가난하고 궁핍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잉태치 못하게 하시든지

우리를, 인생의 어느 시점에 꼭 한 번 낮추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섭리를 당할 때는, 너무 이상한 일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면, ‘나중에 혹시 높이실 계획이 있나보다’ 하고 그냥 받아들이세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거장들은, 다 한 때 낮아진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요셉이, 모세가, 욥이, 다윗이..

하나님이 낮추셨다가, 그를 높이셔서 쓰시는 섭리가 있으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언제나 이끌어 가십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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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 6개의 시편은 탈무드에서 “이집트의 할렐 the Hallel of Egypt”로 부릅니다.

이집트의 할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출애굽(엑소더스)을 노래하기 때문에

“출애굽 할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선명해 보입니다.

 

이 시들은 114편과 118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 113편은 첫 번째 출애굽 할렐로서,

형식적으로는 주님의 영광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비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짧지만 빼어난 찬양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편들은 유대인의 3대 명절(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불렸고

특히 유월절 식사 때 113~114편은 식사 전, 둘째 잔 이전에 불렀고,

115~118편은 식사 후, 즉 넷째 잔을 마신 후에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을 드신 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막14:26

바로 이 시편으로 보입니다.

 

 

주1)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기독교보다 약 1백년 앞서 조선에 먼저 들어왔지요.

천주교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심각한 핍박을 받았지요.

 

그런데 그때 순교 당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은지 한 일주일 밖에 안 되는 사람도 순교를 했더라고요.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니 어떻게 믿은지 일주일밖에 안 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배반 하지 않고 죽었을까?'

 

그 이유는,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당시는 상놈, 천민이 사람 대접 못 받던 양반 문화였습니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 구분이 엄격했습니다.

 

근데 기독교는 그게 없었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했습니다.

그러니 천민들, 상놈들이 그때 사람 대접을 처음 받아 보니까

'난 죽어도 이런 신앙을 위해서 죽어도 돼!' 하며 순교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종로 2가에는 승동교회가 있습니다.

그 최초의 장로님이 백정 출신이었어요.    *백성춘 장로

여러분, 백정은 상민도 아니고 천민이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 지도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과거에 승동교회에는 백정들이 참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그 때는 수원에 백성들이 많이 살았는데,

수원에 살던 백정들이 백리 길 되는 그 길을 걸어서 승동교회를 다녔습니다.

사람대우 받는 게 얼마나 좋았으면 그렇게 먼 길을 걸어서 교회를 다녔을까 싶습니다.

 

그 교회에 왕손 이재형 대감이 있었는데, 나중에 승동교회의 7대 목사님이 되셨어요.

그 분은 자기 마부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엄영수 (영수는 당시 선교사를 돕던 사람)

그 마부는 정동제일교회의 영수였습니다.

 

어느 날 승동교회가 왕손의 집과 가까웠는데

부흥회를 해서 왕손이 예수 믿고 부흥회에 참여했는데

거기에 자기 마부가 와 있었어요.

 

그 마부에게 무릎걸음으로 가서 '형님!'하고 불렀랍니다.

누가 자기를 형님이라고 부르나 보니까, 왕손 이거든요.

 

자기가 하늘처럼 보시는 왕의 후손이, 자기를 '형님'하고 부르니까

기절초풍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나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저를 형님이라고 부르십니까?'

 

'예수 안에서는 다 같은 형제자매 라면서요!

우리가 다 같은 형제자매인데,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님이시죠!'

 

여러분, 한국의 초대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영향력, 파괴력이 얼마나 컸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