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K
2021. 8. 26. 10:05
◈기도는 서원(결단, 약속, 서약)이다 시116:1~19 여러 설교 정리
◑죽음에서 건져주신 구원에 감사 (1~9절)
본문은 생명에 위기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시인(아마 다윗)이
거기에서 벗어난 후에 지은 감사찬양시이자 서원시입니다.
시편 기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절박한 처지에서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1~2절.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인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소리와 간구함을 들어주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기도하겠다고도 결단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귀를 시인에게 기울여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말할 때나 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서로 입과 귀를 맞댑니다.
2절의 ‘기울이시다’가 문자적으로 그런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당신의 귀를 시인에게 갖다 대시듯이 행하신다고 고백합니다.
▲3~5절,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인은 지금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둘렀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죽음의 고통을 겪는 상황속에서도,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줄’과 ‘스올(무덤, 죽음)의 고통’은 같은 의미로
살 소망이 사라지게 하는 일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때라도 성도가 잘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때에 성도가 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지는 일입니다.
▲6~7절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하나님이 시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게 병이든지, 아니면 대적의 공격이든지
죽음의 위기에서 시인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살려주신 것입니다.
▲8~9절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 다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구원을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묘사합니다.
그는 어둠과 죽음의 땅에서 빛과 생명의 땅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그는 생명과 빛의 땅에서 사는 자유를 한껏 느끼고 있습니다.
혹자는 ‘생명이 있는 땅’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루살렘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지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산다는 말입니다.
◑서원 이행의 결단 (10~19절)
시인은 1~9절에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앞으로 평생 사랑하며 기도할 것을 결단하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곳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간증했습니다.
이제 10~19절에서는 평생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서원한 것을 지키며 살 것을 결단합니다.
▲10~11절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때 몹시 두려워,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새번역)
시인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에서 ‘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두려움이 몰려올 때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도울 사람은 없고, 도울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궁극적으로 도울 수 없고, 하나님만이 도우시며,
하나님만이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한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12~14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뭐라고 합니까? 서원을 갚겠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갚겠다고 합니까? 하나님께 갚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기도 속엔 이미 서원이 담겨 있다는 뜻이요,
그 서원은 오직 하나님께 갚아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꼭 '서원'이란 말을 쓰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서 기도하는 성도는..
반드시 크고 작게 약속, 결단 (서원, 약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기도할 때는, 이것저것 서원 (결단) 기도를 해 놓고는
정작 응답을 받고 난 후 그 서원을 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어서 그 서원을 갚아 드리라는 겁니다.
그 서원을 갚아드리는 것이, 기도의 최고봉이라는 겁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윗은 오늘의 시편을 마감하는 18절과 19절에서
이를 다시 반복합니다.
거기 보니, 14절, 18절에서 반복하여
서원을 갚고, 갚고, 또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18절,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절,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서원을)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15절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죽음의 위기를 극복한 시인은,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죽음도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죽음도 이젠 두렵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죽음의 위기를 극복함을 통해서,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작년에 제 (김동호 목사) 가 암을 발견하고,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하면서
멀리만 있던 죽음이,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죽음이
제 코 앞으로 다가왔음을 느꼈습니다.
무섭지는 않았는데, 꽤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더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 죽음에 직면한 후부터
‘평소에 죽음을 좀 대비해 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늘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위해서
실감있게 한 번 다시 ‘죽음’에 대해 정리하는 중입니다. 대강 이런 것입니다.
1)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과 죽음의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죽음이 닥치고, 그 죽음의 고난과 고통이 임한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갑자기 죽음이 닥칠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평소에 마음에 이런 준비를 하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많이 살아계시므로, 안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16개월된 아이가 먼저 부모를 떠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실까요?
세상에 온 순서대로 가면 좋을 터인데요...
여러분, 세상에 온 차례대로 가게되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해이해 집니다.
부르시는 것은 차례가 없기 때문에 ‘오늘 내가 갈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70세가 되기 전에 젊은 나도 죽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것,
그게 바로 종말신앙입니다.
그래서 늘 죽음을 준비하고 사는 삶이, 신앙적이고 또한 유익한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를, 모르게 하신 것처럼
각 사람이 자기 죽음의 때를 예측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
그것은 옳은 일이다.. 하고 제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3) 죽음은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쉽지 않습니다. 쉽게 죽는 수도 혹 있지만
대부분은.. 죽음은 고통을 겪고 죽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이기도 하거니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고통스러우니까요.
여러분, 높은 데 올라가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립니다.
왜냐면 죽음을 조심하라고, 함부로 떨어질까봐.. 어떤 면에서 두려움은 안전장치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섭게 하심으로써, 사람으로 함부로 죽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는 게 너무나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만약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럽지 않다면
사람들은 쉽게 죽을(자살할) 것입니다. 벌써 많이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무섭기 때문에, 힘든 삶을 버틸 수 있는
그런 방패막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는 고통이 없는 것보다, 고통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인 것입니다.
힘들지만, 죽음의 고통이 있어야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뭔가 하면
4)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으로 죽음을 끝낸다’ 이게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서, 아픔이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삶,
질병의 고통도, 슬픔도, 고난도, 역경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죽음의 순간에도, 고난의 순간에도, 고통의 순간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고난의 강을, 죽음의 강을, 고통의 강을
우리 손을 붙잡고 함께 건너가 주십니다.
제가 암투병을 하면서 이런 사실들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지식으로 다 알아도, 고난의 강, 고통의 강, 죽음의 강을 건너려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너무 힘들고, 무섭고,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많은 신앙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키워야 그 무섭고 힘든 고난과 죽음을 건너 뛸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데 어떤 믿음을 키워야 하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요?
(시115편에 이어) 본문 시116편에서 반복되고 있는 주제인데요..
시115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작든 크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들이 반복되거든요.
살아오는 동안 고난도 많았고, 고통도 있었고,
죽음 같은 어려운 상황들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거든요.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상황들.. 그런데 안 죽고 구원받았거든요.
그런 시기들을 우리는 이미 다 겪어왔습니다.
그런 위기들을 다 건너와서 오늘까지 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구나!’
그것을 자꾸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아멘, 아멘!’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믿음이 자꾸 생기면,
그것이 정말 사망의 골짜기, 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도
끝까지 하나님이 나를 손잡고 건너갈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이
마치 굳은 살이 배기는 것 같은 굳은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본문 3절에도 '사망의 줄, 스올..'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을 썼을까요.
그는 과거에 죽음의 고통을 당했던 것을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을 다시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뭘 기억해요?
지금 그것을 기억한다는 뜻은, 그곳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그러면서 믿음의 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당할 그런 고난과 역경과 죽음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믿음의 근육이 생기는 것입니다.
▲16절,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여종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자신을 낮추는 표현입니다.
‘남종’은 7년 째 자유할 수 있지만, 여종과 그 자녀들에게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종의 아들이란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에 속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주님의 종들 가운데 가장 낮고 비천한 종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박을 푸셨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종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비천한 여종의 아들이 주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자기를 (질병이든지, 원수의 공격이든지)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풀어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살려주시고, 건져주셨으니까
시인(다윗)은 자기가 주님의 종이 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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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시편 저자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원수들에 의하여 생명이 위협을 받았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하였으며,
치명적인 병까지 들어서 사람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병에 걸려 힘든데 정죄와 배척까지 당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병 고침을 받을 후, 성전으로 나아가 받은 은혜를 보답할까 라고 자문합니다.
본 시편의 저자는 주석가마다 다른 추측을 하지만 대체로 다윗을 저자로 봅니다(칼빈).
그 이유는 본시의 내용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의 모습과
너무나 잘 부합되기 때문입니다(참조, 삼하 16-1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