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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9:121~176 말씀 묵상은 주님과 가까이 교제케 해 준다
LNCK
2021. 9. 2. 08:40
◈말씀 묵상은 주님과 가까이 교제케 해 준다 시119:121~176 여러 설교 정리
시편 설교 모음
왜냐면 주님은 말씀이시므로(요1:1),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곧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이 필요한 이유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분주해서 말씀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성경을 펴면.. 이제 피곤해서 빨리 성경을 덮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분은, 지금 자기 인생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이 바쁘고 분주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모든 인간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여유를 갖고 가족을 돌봐야 되는데
이제는 가족과 함께 보낼 여유도 없어져 가족관계도 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내면세계는 정말로 빈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지 않는 분주한 인생은 영적 빈곤, 정신적 빈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 피곤해지고, 더 빈곤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지쳐서 쉬어야 하기 때문에 묵상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쳐 있는 정신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는 것은 소용이 없다!
‘내가 너(자신)에게 휴식을 주겠어. 이제 천천히 산책을 하도록 할게.
혹은 이제 편안히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께..’ ”
무슨 말이냐면, 그냥 쉰다고 진짜 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영혼에 쉼이 있으려면.. 새 힘이 솟아나야 되고,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누워서 쉬기만 하는 것은.. 진짜 쉼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소파에 누워 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분주합니다.
만일 마음속에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있다면
누워서 쉬어도.. 여전히 걱정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을 때도
단순한 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영혼의 안식이요,
그것은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이 은혜를 받을 때
우리 마음은 새로운 세포가 활동을 시작하고
비로소 기분 전환이 되고 휴식이 됩니다. 원기가 회복되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정신적인 피로가 있을 때에도
말씀으로 인한 새로운 동기부여만 되면
다시 원기와 활력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말씀의 은혜로, 영적인 활력과 원기가 회복된 다음에도
계속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영적인 활력과 원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아는 예화입니다.
옛날에 한 인디언 노인이 어린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검은 늑대와 흰 늑대!
그런데 서로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싸움을 자주 한단다.
손자가 “할아버지, 그런데 두 늑대 중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얘야,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늘 관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 묵상이 매일 필요합니다.
▲126절,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소돔 성이 멸망당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대화했던 것 처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회의(소드 야웨)에 참여한다'고 말한 것처럼.. *렘23:18참조
기도는 일방적인 자기의 모노로그가 아니라, 하나님과 쌍방간 대화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쩌면 당돌하게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어떤 액션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그랬다면, 우리도 기도 시간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132절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즉 믿음의 조상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이제는 내게도 관심을 보여주시고, 내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비록 오늘 시인에게 사람들로부터의 박해가 있지만(134절),
과거에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나도 누리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즉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 모세 – 그 외 여러 선지자들,
그 믿음의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은혜를 나에게도 베풀어주십시오!
과거 조상들의 신앙을.. 자기가 본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과거에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 모세 –
그 외 여러 선지자들이 받았던 은혜를 똑같이 받을 수 있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는요!
▲147절,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마음을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바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내 모든 삶의 희망을 두겠습니다.”
▲148절,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묵상하는 이유는, 고요한 시간이라 잡념이 사라지고
하루 중 어느 시간 대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성경 암송은 예수님과 교제하기 위한 터전을 제공해 줍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말씀드리기 때문입니다.
▲150~151절. 악을 좇는 자가 가까이 왔사오니.. 저희는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와)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마귀의 조종을 받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다윗을 둘러싸고
그와 이스라엘을 폐허로 만들고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대적이 가까이 다가올 때
주님이 보다 더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것을 믿는다고 증언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분의 오른 손으로 자기를 붙들고
모든 원수의 공격을 통과시켜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이 증언은 당신과 나를 위한 놀라운 약속입니다.
사탄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괴하고 괴롭히며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원수는 우리를 절망, 혼돈, 죄와 정죄의 구덩이에 빠뜨리려고
그의 능력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을 대항해서 마귀의 “악을 꾀하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습니까?
압도적인 유혹입니까? 시련들입니까? 사업상 문제들입니까?
재정적 부담입니까? 결혼생활이나 가족 문제들입니까?
당신을 좇는 자들이 당신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로 다가올 때, 기억하십시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 곁에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 가까이에 계시면, 당신을 위해 행동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 옆에 가까이 계시면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를
마귀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학대하고 타락하게 만들도록 허용하시면서
가만히 앉아 계신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166절,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8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인은 주의 말씀을, 그저 묵상하며 즐거워한 것만 아니라
삶으로 실제로 살아내었습니다.
‘일일 일선’이란 말이 있는데, 하루에 한 가지씩 말씀을 행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전통적 신앙은 ‘경건’을, 신앙의 제일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경건한 성도’가 교회에서 제일 존경 받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가난한) ‘경건’은 구석에 쳐박혀 버리고
돈 잘 버는 성도, 높이 출세한 성도가.. 공동체에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값싼 은혜’ 신학과도 관련있습니다.
구원은 누구나 쉽게 받는 ‘따 놓은 당상’이니, 그 다음에는 부자, 출세가 추앙받는 거죠.
우리는 변질된 기독교에서,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전통처럼, 경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하든지/가난하든지.. 생활속에서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경건한 신자’가 되는 것을
기독교인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무조건 부자가 아니라요!
▲173절,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할 수도 있고,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선택과 결단 없이 모두 ‘하나님의 예정대로, 뜻대로 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은
운명론이요, ‘하이퍼 (극단적) 칼비니즘’이라 하는데,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적 신앙은, 성령과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 끊임없이 선택,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기 ‘의지’적 측면을 너무 배제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모두 ‘코치’이지, 선수는 아닙니다.
시합은 선수가 하는 것이지, 코치가 하는 것이 아니므로,
말씀을 순종하여 승리하는 선수가 됩시다!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176절,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우리는 본문의 시인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신앙이 언제나 굳건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르게 갈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들리며 가고, 비틀거리며 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으면 구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