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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10~31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LNCK 2021. 9. 4. 10:5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사1:10~31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서의 간략 개요>
66장이 긴 것 같지만, 이렇게 명확히 나눠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12장,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

13~23장,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

24~27장, 이사야서의 소묵시록

28~35장,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화와 복의 노래)
36~39장, 히스기야의 앗수르 격퇴 역사 기록

40~66장, 회복과 축복

 

타락의 원인은 - 예배의 타락부터 시작한다          사1:10~17         

 

남유다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1:6

이 모습은 남유다의 육적으로, 영적으로 타락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으로 땅까지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토록 타락되었음에도 그들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배의 타락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임하고 있는 타락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타락된 모습은 없습니까?

원인을 깨닫지 못하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10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참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형식과 외식으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까?

-많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예배인줄 알았습니다. (11절)

-성전 마당만 밟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12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드린 그들의 예배는

형식과 외식으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타락한 예배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곳곳에서 타락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볼 때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1. 종교적 행위를 멈추어라    1 :13~14절

 

오늘날 이 시대 교회를 다니는 자는 많은데 진정한 성도들을 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은 많은데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을 주고 있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와,

본문 당시 성전 제사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거룩했을까요? 

아마 이사야 당시 성전 제사는.. 그래도 형식은 거룩했습니다.

 

그 성전 제사가.. 이사야를 통해 책망 받았다면

그 성전 제사보다 훨씬 더 못 하게 보이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과연 얼마나 더 큰 책망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남유다의 제물과 모임을 싫어하셨습니까?

 

첫째는 가증스러운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즉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상 앞에도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도 제물을 드린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은 가증스럽게 여겼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십계명에는 첫째와 둘째 계명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그 어떤 것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성회를 싫어하셨어요.

 

13절b,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 영적인 악이라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악은 일반적인 죄악들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 천번 만번 드려도 아무 소용없는 짓입니다.

 

또한 구약의 제사법에서도 짐승의 피가 드려지는 제사를 열납 하였듯이

오늘날도 모든 예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야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리지 않는 예배는 사람들의 모임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셋째로 형식적인 절기 준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오늘날 이 시대 이미 예배의 타락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이러한 예배의 타락은 갈수록 무섭게 퍼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보기 힘들 날이 올 것입니다.

 

▲2. 악행을 그치라   1:15~17절

영어에 '젖은 담요 wet rag' 라는 말이 있는데, 세탁을 해 보면 물 먹은 담요는 아주 무겁죠.

예배 드리러 나온 신자들이 너무 영적으로 저하되어 '젖은 담요'들일 때가 많습니다.

예배당에 '젖은 담요들'만 가득하니... 그 예배에 성령에 은혜가 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주일에 생기 있는 예배를 드리려면.. 신자들이 주중에 악행을 그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해요.

본문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은

이어지는 15~17절에, 그들의 손에 악행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문은, 남유다의 악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많은 기도를 했지만, 손에 피가 가득했습니다.

남(특히 약자들)을 해치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뜻입니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기도 자세였죠.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악행을 범하면서도

전혀 죄에 대한 회개를 하지 않고 금식 기도도 하고 매일 3번씩 기도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모습이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애통함이 없습니다. 죄를 깨닫지도 못합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철저한 회개가 없는 기도는 허공만 치는 기도일 뿐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59:1~2 

  

내가 진정으로 회개 기도할 때 그 회개 기도는 나를 통해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간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 땅에 회개의 바이러스 세균이 우리들을 통해 강하게 퍼져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의 악행을 버리지 않고 계속 행했습니다.

 

16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하나님 목전에서 악행을 범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불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선행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약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몰랐던 것입니다. 

 

17절,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죠.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거죠.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였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랑을 보이라고 하십니까?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17

이런 성도들이 모인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사1:18~31        

  

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이런 말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변론하자” 라는 용어는 법정 용어로서

이해 당사자 간에 공개적으로 잘잘못을 따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자는 것입니다.

 

    ‘변론하다’는 ‘입증하다 prove', '해결하다 decide', ‘교정하다 correct' 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초지종을 말하고, 잘못된 것은 용서 빌고, 고칠 것은 고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받아들여 새롭게 할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덮어놓지 않고

그것을 법정에서 다루듯이, 정확하게 짚고 가기 원하셨습니다.

 

즉 2절에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놓고

계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참석한 법정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고발이 정당한 것인지 확인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발이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고발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죄를 시인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같은 내용의 말을 두 번 반복하며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은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홍과 진홍”의 붉은 색과 “눈과 양털”로 표현된 흰색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홍과 진홍 같은 검붉은 죄를 말끔히 지우시고,

눈과 양털처럼 정결하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은총을 누구에게 약속하셨습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영혼의 정결케 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어떤 죄라 할지라도,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지워질 수 없는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와 죄를 고백하십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있다는 것을 19, 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모두 죄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59:1~2

 

우리에게 무엇보다 급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죄의 담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죄의 문제가 해결 안된다면 금식하며 회개 기도 해야 합니다.

    금식 기도는 죄의 죄사슬을 끊어버리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변론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까지 하신 것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셨습니까?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결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까?

순종하지 아니한 그들은 바벨론의 칼에 철저하게 짓밟힘을 당하고, 

BC 586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변론하자고 원하실 때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회개를 촉구할 때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지만

거절하면 칼에 삼키리라는 말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그대로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놈이 죄가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약1:15)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타락한 지도자들의 모습      1:21~23

 

21절부터 끝 절 31절까지는 이사야의 많은 시들 가운데 첫 번째 시입니다.

“어찌하여” 라는 전형적 애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말씀하셨는데

21절에서는 부부 관계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전에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21절,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정숙한 아내처럼 신실했던 예루살렘이었지만

지금은 타락한 창녀의 모습처럼 변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추하게 더러워진 창녀 같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어서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실상을 슬퍼하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 도시들처럼 아주 버려둘 수 없는 예루살렘입니다.

어떻게 택하신 예루살렘입니까?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깨닫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이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이전의 모습은 신실했고, 공평이 가득 했고 의리가 있었습니다.(21절)

즉 하나님께 신뢰받았고 평등한 사회였고 의로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모습은

창기의 모습이고 살인자들이고 쓸모없는 지도자들만 있다는 것입니다.(21-23절)

 

22절,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은과 포도주는 지도자를 의미하는데 (23절과 연결해서 볼 때)

“은이 찌끼가 되고 포도주가 물 섞였다”는 것은 쓸모없는 지도자들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영적 창녀가 되었고, 불의를 판치는 살인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방백(지도자)들의 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도적과 짝하고 있고, 뇌물을 사랑하였고,

-사례물을 구하였고, 불쌍한 자들을 편에 서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를 먼저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이미 하나님에게 쓸모없는 존재들로 변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이토록 타락했으니 백성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그 옛날에 신실했던 모습을 다 잊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23절에 이스라엘 방백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오직 복음을 위해서 오직 예수를 위해서 신앙을 고수하는

그루터기 같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있습니다.

 

타락한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아니한 7천명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오직 예수 한 분을 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보기 힘든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마지막 때에 지도자들이 이처럼 타락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성도들보다 먼저 영적 지도자들이 즉 주의 종들이 먼저 타락할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 회복될 예루살렘     1:24~27

악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 성은 하늘의 유황불로 심판을 당하고 멸망하였지만

예루살렘은 언약의 성읍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악대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더러운 찌끼와 혼잡물을 제거하여 예루살렘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징계의 심판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심판 없이 회복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심판은, 예루살렘을 깨끗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또 다른 은혜인 것은, 그것이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고

회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분의 이름에 주목하십시오.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입니다. :24

 

이처럼 하나님의 칭호가 결합된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반드시 하겠다는 것입니까? 3가지를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보응(보복)하겠다는 것입니다.(24절)

 

24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누구에게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내 대적”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 누구들입니까? 22-23절에 언급한 부패한 지도자들입니다.

거짓된 지도자들에게 보응을 해야 하나님의 마음이 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내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습니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지 23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둘째는 제하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25절)

 

25절,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직접 하나님의 손으로, 버려서 청결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하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지도자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보응하시고,

보수하시고 버리시고, 제하여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은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의 성읍”으로 “신실한 고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26절,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 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27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돌아온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정죄와 심판은 구속을 위한 것입니다.

1~25절까지 정죄와 심판이 나왔다면, 26~27절은 구속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서 매를 때리시지만 '내가 반드시 너를 돌려놓고 말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너를 살리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언약 백성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어떻게 회복하십니까?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회복시키십니다.  :26

 

그러나 그 회복의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너무나도 긴 세월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70년 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서 그들은 회복되었습니다.

 

70년 동안 이사야 시대에 악한 자들은 모두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땅에 너무나도 심각하게 퍼져있는 죄악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지르고 있는 죄악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롬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그냥 덮어두시고 지나친다고 절대로 생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더구나 내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회개치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마지막을 역사적으로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보수하고, 버리고, 제하여 버리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영적 회복이 너무 길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영적 회복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안 됩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고후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까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까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언제 보응을 하실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영적 회복이 되어 의의 성이 되시고 신실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또한 여호와의 손으로, 그 일을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치 아니한 자들  1:28~31

 

28절,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서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수치를 받고 멸망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용광로의 제련 과정과 같아서

“남은 자들” 과 “패역한 자들”로 구별될 것입니다.

 

회개치 않음으로 멸망 받을 자들은 누구입니까?

패역한 자와, 죄인과, 여호와를 버린 자입니다.

 

패역한 자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며 순종치 아니한 자들입니다.

죄인은 히브리어로 “핫타” 라고 하는데 “빗나가다” 로서

하나님 말씀에서 빗나가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버린 자는 하나님을 쓸데없는 것을 여기고 거절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고 멸망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치 아니한 자들이 당할 심판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29절)

 

29절,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상수리 나무'는 우상숭배하던 장소를 뜻한다. 심지어 거기서 자녀를 바치기도 했다. 사57:5

주목할 사실은 그들이 “기뻐했고”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인해 수치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후에 바벨론에게 철저하게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방 세력들에게 의해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 또한 깨닫지 못한다면 이러한 부끄러움과 수치가 찾아 올 것입니다.

 

둘째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처럼 되고 물 없는 동산 같이 될 것입니다.

 

30절,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이스라엘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의 제단을 쌓고 우상을 숭배하였고

또 경치가 좋고 물이 풍부한 동산에다가 제단을 만들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우상들을 볼품없이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상입니다.

심판을 깨닫지 못하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하던 것이 아무 소용없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셋째는 강한 자라 할지라도 삼오라기 같이 불 속에서 재로 변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1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삼오라기는 삼베 조각 같은 새끼줄 같은 것을 뜻하는데

불 속에서 새끼줄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리듯이

재산, 권력이 있다고 강한 자 입니까? 나는 건강하므로 강한 자입니까?

 

재산 권력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의 건강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아무리 강한 것도 삼오라기처럼 순식간에 재로 변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내 현재 모습이 어떠한지 날마다 살펴보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제까지도 내가 신실한 자였지만 오늘 내가 창기와 같은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제까지 내가 오직 예수를 사랑했는데

오늘은 내가 창녀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고 명예 권력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모습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새롭게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주홍 같은 죄, 진홍같이 붉은 죄라도 희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이라고 칭함을 받게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호6:1-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에서 심판을 받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멸망의 손길에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 속에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사야서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이 시대의 모습과 너무나도 같다는 마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1장의 이스라엘 패역한 모습 속에서, 저는 이사야의 눈물을 보았고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이 눈물은 곧 우리를 보고 흘리고 계신 눈물입니다.

1장 속에서 “슬프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고 있는데

이사야가 한번 외치고 있고, 하나님이 한번 외치고 계십니다.

 

“하늘이야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 애통해 하는 소리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메아리치기를 원합니다.

 

“부패한 자식이 되지 말라”는 외침이 우리의 영혼 속에 메아리치기를 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마당만 밟지 말아라”는 외침이

나의 신앙생활 속에 매일 매일 메아리치기를 바랍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하나님과 날마다 변론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다시 회복시켜서 다시 자녀로 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지 말고 말씀이 들릴 때

순종하고 하나님께 나오고,

나를 잡아주실 때 순종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고 손길을 뿌리친 자에게 오는 심판은

너무나도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너무 큰 반면에

그 사랑을 배신한 자에게 오는 심판과 저주 또한 너무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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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이 설교할 떄, 말씀 그 자체만 전하지 않고

이런 저런 흥미로운 얘기를 너무 많이 섞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 자체만 전하면, 회중들이 지루해하기 때문에

마치 쓴 약에 설탕을 타듯이, 설교를 들리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직하게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죽는 길’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라’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전도가 되느냐?’라며 호소합니다.

 

신약이 ‘십자가의 길’을 강조한다면

구약에서도 ‘어떻게 (인생을 잘 마치고) 잘 죽을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잘 죽는 길이.. 결국은 잘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본질을 놓치면,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사는 길’에 포커스를 옮겨 놓으면

어떻게 해야 잘 사는지도 모르는 채.. 방황합니다.

 

잘 죽는 길이.. 잘 사는 길인데

그저 잘 살려고만 몸부림을 치는데.. 그게 허무하지 잘 살게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읽어가면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나?’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타락의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도 다들 그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