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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 이사야의 소명과 사명
LNCK
2021. 9. 10. 09:11
◈이사야의 소명과 사명 이사야6:1~13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서 설교모음
인생이 발견해야 할 것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다가
삶의 무의미에 대하여 날마다 고민하며 자살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1897년 어느 봄날 아침에 그는 깊은 산중을 헤매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생각해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공상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나는 자살 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외치며 방황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홀연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때 그는, 삶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절망과 불안,
그리고 삶의 무의미성이 전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진정 회심을 체험한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때로부터 톨스토이는 생활 속에서 체험되어지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에 대하여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등
유명한 작품들 속에 표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삶의 전환점, 즉 turning point가 필요합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전기(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것입니다.
◑1. 사명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1~4절)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 즈음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B.C.745~727년)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런 때에 이사야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이사야서 6장에 기도하러 성전에 갔을 때
주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어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예배를 드릴 적에, 주의 옷자락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를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옷자락)이 주의 교회에 있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보혈의 옷이 성전에 있고,
우리의 모든 슬픔과 우리의 불행을 덮어 주는 의복이 주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입니다. 성도의 삶은 주의 옷자락 잡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주의 옷자락은 생명의 옷자락입니다.
우리를 죽음과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생명의 옷자락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은 영광의 옷자락입니다. 실패와 모든 절망에서도, 부끄러움 에서도,
주의 옷자락의 덮으심을 받은 사람은 다 영광스럽게 됩니다.
주의 옷자락은 그 나라를, 그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종으로 만들어 주는
사명의 옷자락인 것입니다.
주의 옷자락은 치료의 옷자락입니다.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14:36
어떤 질병과 어떤 마음의 상처도 아무도 치료할 수 없는 불행한 사람들도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면.. 한없는 기쁨을, 새 생명을, 행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은 자입니다. 성경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장소가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고 해서.. 보통 이사야가 성소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지만,
환상 중에, 주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강력하게 체험한 사람들이
간혹, 성경보다 체험을 더 앞세우고, 스스로 자꾸 체험에 빠지고자 애쓰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체험이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본문 사6장의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사6장을 보통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 임직식’이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는 1장에서 ‘사명 임직식’을 했고,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1:4~5
에스겔은 1~3장에서 ‘사명 임직식’을 했습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1~2
▲2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주1) 스랍 과 그룹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고, 천사들이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거룩하다’라는 말씀이 3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3번 반복되는 것은, 최상급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비교급 다음의 최상급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 땅에 충만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온 땅의 통치자이심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에도, 신령한 하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음성은, 남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여자의 목소리도 아니고,
아이의 음성도 아니고, 노인의 음성도 아니고, 젊은이의 음성도 아니고,
한국어든지, 영어든지, 자기가 알아듣는 음성을 주시지만,
목소리 자체만 갖고는.. 남녀노소의 구분을 전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천사의 음성이요, 하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계음도 아닙니다.)
스랍 천사가 두 날개로 두 얼굴을 가린 것은.. 자기 부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은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두 발을 가린 것은.. 발은 보통 더러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종은 자기 더러움(죄)를 늘 회개하며, 보혈의 피로 가려야 합니다.
▲4절,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로 충만하심을 보았습니다.
‘연기’ 또는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상징입니다. (출19:18, 대하5:13~14, 7:1).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영적 경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고(출3:4),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청년은 환상 중에 예수를 체험한 후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바뀌었습니다(행9:3~5).
젠센 플랭클린 목사는, ‘성전 문지방’이 떨리는 환상을 보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고,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면,
‘문지방의 터 posts of the door가 요동하게’ 됩니다.
가만히 쥐죽은 듯 앉아 있지 않습니다.
설교 시간에도, 교회 문지방이 흔들거리고,
찬양 시간에도, 교회 터가 흔들거립니다.
주님이 권능으로 임재하실 때, 사람들의 가슴도 막 떨리고,
사방이 온통 떨리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나아가면,
‘문지방의 터’는 다시 말하면 일종의 ‘기둥’입니다.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 posts’입니다.
성전의 기둥(지도자)들부터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흔들거려야 합니다.
성령충만으로 벌벌 떨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부흥이 임하는 증거입니다.
이런 모습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젠센 프랭클린 / 부흥이 필요한 때 -클릭-)
◑2. 사명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5~7절)
※ ◑1.이 ‘하나님’을 발견함인 반면에
◑2.는 ‘자기’를 발견함입니다.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자기를 발견하고 탄식하였습니다.
칼빈이 주장한 대로, '하나님을 알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서,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죄인의 몸으로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는.. 인간은 자기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뵌 사람만.. 자기 실체를 똑똑히 들여다봅니다. 자기가 죽을 죄인인줄 압니다.
▶6절,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5절에서 이사야의 죄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릅니다.
한 스랍이 핀 숯을 취하여 입에 닿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고 사죄 선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왜 ‘입술’일까요?
숯을 머리에/ 손에/ 몸에/ 발에 댈 수도 있는데, 하필 왜 ‘입’일까요?
이것은 이사야의 사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대언은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 주님의 입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원하는 분들은,
‘자기 입술이 제단 숯불로 지져지는’ 체험을 간구해야 합니다.
입술이 거듭나야/ 불세례를 받아야/ 변화되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같지 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약3:11
즉, 말씀의 사역자가 되려면, 항상 입술이 거룩해야 합니다.
평소에 쓴물을 토하던 입술이, 갑자기 단물(하나님의 말씀)을 토할 수는 없으니까요!
◑3. 이사야, 파송을 받다 (8~13절)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세상이 타락하면.. 아무도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선뜻 나서지 않게 됩니다.
미국에서 20~30년 전부터 신학교 지원자 수가 현격하게 감소하고
선교사 지원자 숫자는 더 현저하게 감소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도 그런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하시나
이사야처럼 '나를 보내소서!' 하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미국의 얼바나 대회를 본뜬 '선교한국' 대회가 매2년마다 열리지만
그 열기나 참여자 청년들의 숫자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앞서 사3: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
사회가 극도로 타락하면, 아무도 지도자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 아무도 개혁의 역군으로 자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다 먹고 살기가 편해져서 그런지
과거처럼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 한 몸 버리겠다!' 이런 사람을 눈 씻고 찾기 힘듭니다.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관리)로 삼지 말라' .. 3:7
나는 이 사회 문제들에 대해 책임을 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한 몸 편하게 먹고 살다가 죽겠다는 '보신주의' 입니다.
이사야가 훌륭한 점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선뜻 자원한 것입니다.
아래 9~10절을 보면, 그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 지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세대에 이런 청년이 필요합니다.
이사야가 60년 가량 사역했다고 보는데 (웃시야 왕이 죽던 해~므낫세 재위까지)
그럼 이사야가 소명 받던 이 때는, 그의 청년 때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모두 소 사러 가고, 밭 갈러 가고, 시집장가 가는 일에 몰두하는 이 때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른들은 '나는 고치지 않겠노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을 너무 많이 아니까요!
아직 뭣도 모르는 청년들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서원하고 헌신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고쳐서 만들어서 쓰실 것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위 구절은, 대단히 의아합니다. 우리 보통 생각과 정 반대의 내용입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눅4: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행26:18)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마음눈이 밝아지기를”(엡1:17~18) 기도합니다만,
위 말씀은 정반대로.. 도리어 마음을 둔하게 하고, 감기게 하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일면 모호합니다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13:11
그리고 애굽의 바로처럼,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강퍅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가
이 같은 결과를 직접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무슨 독약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서, 오히려 마음이 더 둔하게 되고 더 눈이 감기는 것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마13:11절에 의하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복음과 천국 비밀을 듣고 깨닫는 부류와,
복음과 천국 비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부류입니다.
본문 사6:9~10절은,
후자 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즉 비밀을 못 깨닫는 그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누가 깨달을지/ 못 깨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룹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상 이들은 언제나 주류였습니다.
(천국은 좁은 문, 좁은 길)
이사야는 그들에게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남은 자'들이 있지만,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사명자는 듣든지/ 안 듣든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서를 보면,
알곡 그룹과 가라지 그룹을 구분해서/차별해서 전도에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대중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안 될 때,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도.. 저들이 믿지 않을 때,
결과론으로서,
본문 이사야 6:9~10절이 신약에서 종종 인용됩니다. (마13:14, 막4:12, 행28:26)
▲11절,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여, 이 백성들의 눈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 라는 뜻)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것은 바벨론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순종하는 유다는 결국 완전히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비극적 결말은 아닙니다. 아직도 희망의 불씨가 살아남아 있습니다.
바로 '남은 자들' 입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13b
정리하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의 사역은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때로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순종해서 하는 것이.. 진정한 사명자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41년간 사역했지만, 실용적인 결과로는..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큰 부흥이 일어나거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외형적으로는 성공적이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에 비록 희미하지만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침략으로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성취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하여도, 거룩한 씨를 남겨두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부패하여도 “거룩한 씨”만은 남겨두십니다.
이것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또한 ‘거룩한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에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셨지만”(창6:5, 12),
한편 하나님의 눈에 노아의 은혜로운 모습도 “발견 되었던”(창6:8)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가족을 심판에서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다왕국을 멸망으로 심판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거룩한 씨”를 엘리야 시대에 7천명을 남겨두었듯이 남겨두신 것입니다.
철저한 야웨 신앙과 언약을 준수하면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신앙인들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들만이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될 것입니다.
큰 나무를 베어내면 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무의 밑동만 초라하고 처량하게 남지만
그곳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새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거룩한 씨’ 라고도 하고, ‘그루터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을 유망주(有望株)라고 합니다.
여기 주(株) 자는 나무 밑동의 그루터기를 뜻하여
‘그루터기에서 새롭게 돋아난 싹처럼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인 거룩한 씨, 그루터기만이 세상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전략입니다.
거의 대부분 주류는,
마음이 둔하여 지고, 눈이 감길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 그루터기, 남은 자들이
........................
주1)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그러니 보좌의 공중에서 (마치 비행기처럼)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스랍들'(스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보좌의 <아래>에서 호위하고 시중드는 천사는 '그룹(체루빔)'이다. 겔10:1
주2)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로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서 생을 마친 박관준 장로님(1875-1945)은
직업이 의사로서 자기만을 위하여 산다면 편안한 생을 살아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럽고, 신사참배 문제로 목사들마저도 일본과 합작하고 있었습니다.
신사에게 절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예식이라는 이론을 펼치고 있는 친일파 목사들이 우세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신사는 분명히 일본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그 즈음 어느 날 박 장로님이 새벽기도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릴 자가 누구인고?’
박 장로님은 이런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하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또 들려 왔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십자가 군병을 뽑을 것이다!’
박 장로님이 응답했습니다.
‘주여! 이 생명 바쳐서 싸우는 십자가 군병이 되겠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두루마리였습니다.
그 곳에 십자가 군병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박 장로님의 이름이 제일 먼저 또렷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신문에 기사가 났습니다.
<신사 참배 문제로 기독교가 위기에 처하다>
이 신문을 보고 박 장로님을 당장 총독 면회를 신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우상에게 절하게 하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아달라’고
당당하게 외치다가.. 그 날로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서도 계속 신사참배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장렬하게 옥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온 나라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불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그루터기’만 있으면 됩니다.
한 사람만 남아서 버티더라도, 그 사람 때문에 판세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