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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8장 앗수르가 오지만, 임마누엘로 승리하라

LNCK 2021. 9. 13. 09:08

 

 

◈앗수르가 오지만, 임마누엘로 승리하라     이사야8장           여러 설교 정리

 

※아래는, 이사야 8장의 각 구절별 해석이고,

적용은https://blog.daum.net/rfcdrfcd/15979476 를 클릭하세요!

 

7장에서 북왕국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연합해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주전735년 경

 

이 때 남유다왕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의 충고(임마누엘의 징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한다)를 물리치고

결국은,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그것은 괜한 요청이었습니다.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북왕국과 아람은, 남유다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7:1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즉 타다 만 두 나무막대기에 불과하므로,  7:4

현실은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지만,  7:2

이사야의 예언을 믿고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한 이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더 쌓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는 비록 유다가 북 이스라엘과 아람의 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지라도

앗수르의 발에 짓밟히고 말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도입 예화              주1)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임마누엘)’로 이긴다      사8:1~10

 

▲8: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본장은 7장의 연장선상의 예언인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앞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먼저 아람과 에브라임이 몰락하고, 그 다음에 유다가 황폐해질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새로 주어질 이 징조는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큰 서판을 취하도록 명령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1인 피켓 시위' 하듯이, 서판을 들고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판에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서판: 나무, 돌, 금속 등의 재질로, 뭘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깎아 편평하게 만든 것

 

이 말은 군인들이 전쟁에 임했을 때 하는 말로

"신속하게 약탈하고 재빠르게 파괴하라"는 의미입니다.

곧 (앗수르에 의한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약탈과 파괴가 곧 있으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4

     

▲2절,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운 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확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우리는 이사야가 그렇게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며 부인할 수 있으므로

이사야는 자기 예언의 확실성을 굳히는 의미로, 두 명의 증인을 세운 것이다. 

    

▲3절,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주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또한 이사야의 아내가 아들을 낳자, 또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로 짓도록 했습니다.

1절과 3절에, 즉 2번이나 반복해서 곧 약탈과 파괴가 (아람과 북왕국에) 있을 것을

강력히 예언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선포 대상은,  7~8장이 연속적이라는 정황으로 볼 때

아람과 북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연합 침략이 실패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스겔도 이런 '행위 예언'을 몇 번 보여주었는데,           *'행동 예언'이라고도 함

이사야가 자기 두 아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당시 사람들의 귀에는 '남은 자가 돌아온다', '신속하게 약탈 당하리라'는 말을 듣게 되니,

임박하게 닥친 전쟁에 대한 예고를.. 사람들은 매일 듣다시피 하게 된 것입니다.

(호세야도 자기 자녀들에게 비슷하게 특별한 의미의 이름을 준 적이 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4절,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아빠'(아비)와 '엄마'(임미)는 갓난아이가 최초로 발음하는 소리입니다.

 

이제 예언 성취 시기는 7장의 '임마누엘'의 때보다 더 앞당겨졌습니다.

왜냐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 것'보다,      *7:16

'아빠-엄마'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만 놔둬도, 북왕국(사마리아 수도)과 아람(다메섹이 수도)이 패망할 것을,

아하스는, 이사야의 예언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여서,

괜히 앗수르 군대를 끌여 들여서, 일을 엉망으로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앞서 7:2에서, 북왕국과 아람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남유다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거렸다’고 그 두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8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북왕국과 아람이 앗수르에 망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게 바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뜻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읽지 못한 남유다의 아하스는

엉뚱하게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이고 말았습니다.(사7장)

이제는 앗수르가, 아람이나 북왕국보다, 더 큰 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6절,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7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일차적으로 아람과 북왕국의 멸망 예언, 이차적으로 남유다도 피해 봄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는 곧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비밀한 보호를 뜻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짓눌려 있어서

천천히 흐르는 이 실로아 물이야말로 참된 구원이 됨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의 패망)을 기뻐하나니’

유다 백성들이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의 파멸을 보고, 자만하여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파멸을 보고.. 라는 말을, 성경본문에 삽입해야 이해가 되고, 안 하면 이해가 안 됩니다.

 

실로아 (실로암)물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생명의 원천과 같은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며 필요를 공급해 주는

힘과 번영의 원천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 실로암 물’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대수롭게 평가하지 않아서 거절했다는 뜻입니다.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는 백성들에게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야말로 거세게 넘실대는 유브라데 강물처럼

마음 든든한 바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백성들이, 위기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습니다.

진정한 도움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 대처한 결과, 하나님의 예언은 어떻습니까?

앗수르가 고대 근동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 유다도 같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두 왕국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댐이 폭파되어 강줄기로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쓰나미처럼 앗수르에 의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7

 

실제로 BC 732년에 아람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르신은 아람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10년후 BC 722년에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베가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마지막 왕은 호세아

 

▲8절, (앗수르 물결이)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남유다)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목에까지 미치리라’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약탈은 목에까지 물이 차는 정도의 극심한 홍수 상태로 비유되었습니다.

(7절에서 앗수르의 홍수는, 아람과 북왕국의 머리를 다 덮었다면.. 8절은 그것보다는 약하죠,

목에까지만 찼으니까요. 결국 남유다는 앗수르에 안 망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디글랏 빌레셀의 대군은 몇 년 안 되어

유다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예물뿐 아니라 공물까지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하28:20, 21).

  

‘임마누엘이여’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의 관심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합니다.

 

아람과 북왕국은 앗수르의 범람하는 홍수에 망하겠지만, 

남유다는 그 홍수에 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앞서 이사야를 통해 예언으로 약속하신 '임마누엘' 아이 때문입니다.  사7:14~16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들(우리)과 함께 하시므로' 앗수르는 남유다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익사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겪을 것입니다.  '물이 목에까지 미치리라' :8

 

어쨌든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침략하는 위기보다

몇 배나 더 큰 위기가 남유다에 몰려올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잘못으로)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나님이 날개를 펴서, 남유다를 보호해 주시겠다, 임마누엘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9절,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다른 민족들은, 모두 다 앗수르에 패망당할 것입니다.

 

▲10절,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임마누엘)이니라   *원문에, 8절에 이어 10절에도 '임마누엘' 쓰임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보아라 (과거 개역에 '훤화하라')’  :9

'민족들'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훤화하다'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 '제멋대로 날뛰다'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합니다.

 

‘필경 패망하리라’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필경 패망하리라'는 말이 9절에서만 3번,

10절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2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선언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는 <성소>가 되어주시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신다      사8:11~22

 

대부분 사람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겠지만'  6:9

구속사 속에 언제나 '남은 자'들이 있어서, 그들 소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6:13

이제 이사야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격려의 예언을 전합니다.

   

▲11절,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선지자의 마음은 자연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었습니다. 6:9, 10

 

'손'은 전능자 여호와의 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선지자에게 얹혀질 때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겔1:3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라'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11

즉 대중이 원하는 길로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건 앗수르와 손잡는 길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정책이었습니다.

아람 연합군의 공격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7:4   *차라리 '그루터기'를 빼고 해석함이 이해에 유리

 

그러나 앗시리아 군대를 끌어들이면, 그들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가 되어

나라 전체를 목에 까지 차오르는 물로 떠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사8:8

  

▲12절,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번역이 모호한데.. 새번역이 의미 전달이 좋습니다.

"너희는 이 백성이 모의하는 음모에 가담하지 말아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새번역)

 

12절에, ‘반역자’는, 원어적으로 ‘동맹자’라는 뜻도 됩니다.

백성들은 ‘앗수르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 ‘그들과 동맹만이 살길이다’라며

아우성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만이 유일한 자신들의 동맹자요, 구출자라고 생각하여 난리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다수의 무리의 큰 소리에 사회는 굴러가고

소수의 말이 옳다 할지라도 묻혀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신앙인들에게

다수의 잘못된 것을 따라가지 말라고 강력히 제지하고 있습니다.

  

▲13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앗수르라는 동맹자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는 너희의 동맹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주3)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무턱대고 정권이나 사정기관을 의지하는 것은, 결과가 뻔합니다.

그것은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40:15를 보십시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아무리 거대한 강대국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톡’ 치면 산산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맹을 맺어야 할 분, 찾아가서 상의할 분,

머리를 맞대고 모사를 도모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14절,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올무가 되시리니’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보호처가 되시지만 걸림돌도 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소(sanctuary)가 되시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보호처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는 8절과 10절에 나왔듯이 '임마누엘 (너희와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도움으로 생각하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국가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실 것입니다. :14b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저버린 이스라엘의 두 집,

즉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에 대하여서는 걸림돌이 되고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시겠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될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비틀거릴 것입니다(to stumble).

-넘어질 것입니다(to fall).

-깨어질 것입니다(to be broken).

-덫에 걸리듯이 걸릴 것입니다(to be snared).

-사로잡힐 것입니다(to be taken).

 

사도 베드로가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가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고 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벧전2:7~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낳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기상황에 처하게 될 때

당황하거나 두려움에 빠져서 판단력이 흐려져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에 빠질수록 더욱 정신을 차리고 신앙심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다수의 무리가 주장한다고 휩쓸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잘못되었다면 편승하지 마십시오.

오직 두려워하고 의지하고 도움을 청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피난처요, 도움이시요, 모사이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16~18절은, 

예언의 말씀과 제시된 징조를 보면서도 돌이킬 줄 모르는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입니다.

 

▲16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봉인)하라

 

이사야는 증거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묶어 봉함하도록 명령받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계시(예언)가 무시되고

거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봉인)하라’

이사야서는 1~39장(심판)과, 40~66장(회복)의 메시지의 내용이 아주 다릅니다.

혹시 그 이유가, 여기 '봉인'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설이 있습니다)

 

즉 40~66장은 이사야가 예언서를 작성했으나.. 하나님의 명에 따라 봉인했고,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에 공개했으리라 보는 것입니다.

(혹자는 150년 후에, 바벨론 포로 말기에,

포로 귀환 즈음에 후대에 의해 공개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사야 사후에요.)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공개)되어질 것입니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남은 자)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주의 계시(예언)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신데,

말씀을 봉함한다는 것은 신앙 공동체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스겔도 한 때, 혀가 자기 입천장에 붙어서 예언을 못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겔3:26

 

▲17절,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7절은 이사야의 개인 간증입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얼굴을 내미신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은혜 베푸시려는 것이며

그 얼굴을 향하여 드시는 것은 평강 주시려는 것입니다. (민6:25~26).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시44:24, 69:17, 88:14)

  

▲18절,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즉 스알야숩과 마할랄렐하스바스가 징조와 예표가 된 것을 뜻합니다.

 

본문의 해석은 이중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몇몇 옛주석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히2:13)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메시야 자신이며,

'자녀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많은 다른 학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화자(話者)이며,

'자녀들'은 그의 두 아들 즉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징조와 예표’                      주4)

 

이사야 선지자는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향하여 열심히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자녀의 이름을 예언의 도구로 사용하여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사야의 예언의 메시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신앙적 행동만 거듭했던 것입니다.

 

19절,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증거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무속을 찾아다닌다면

아침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19~20절에서 유다 백성들의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기상황에 처하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말씀을 부여잡기 보다는

신접한 무술인들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20절,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0절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 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딱딱한 계율을 말하기보다는 원래의 뜻은

‘지시’(instruction), ‘지침’, ‘방향’의 의미로

그 백성의 합당한 삶을 위한 지침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의 말씀’은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주신 삶의 지침서인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귀담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아침빛이 없을 것입니다.

20절에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21절,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우선, 그들의 처지는 사막의 불볕 아래 음식도, 물도 없이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선지자는 아마도 앗수르의 압제 아래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격분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격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저주하게 될 것입니다. 출22:28, 왕상21:10

 

선지자의 묘사는 비유로 가득합니다.

본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배적인 색조는 흑암이며, 절망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침을 빼앗긴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땅에서 희망을 찾으려 하면

더 심한 흑암(절망)만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미련한 사람들은 분노를 터트립니다.

 

여기 ‘격분하여’는 ‘화를 내다’(to become angry)는 뜻이지만

이것은 초조하고 불안하여 미친 듯이 고함치며 날뛰는 행동을 말합니다(to rave).

 

자신이 잘못하여 곤궁한 처지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하늘과 지도자에게 돌리면서 삿대질을 하며

자기 왕을 저주하고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21b,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라는 말씀은

자신이 처한 곤궁한 처지를 어떻게 해야 구출을 받을 수 있을까하여

하늘을 향하고 땅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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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입 예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래를 예측하고 전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뛰어난 미래학자 중 한 사람 앨빈 토플러는

40년 전에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이라는 책을 통하여 예견했던 것들이

현실적으로 거의 적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통하여 21세기를 예측했습니다.

그는 제1물결은 키우는 것(growing)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혁명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토지를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여기며 일하는 시대에

어민과 수렵민을 농민으로 탈바꿈시켰다고 했습니다.

 

제2물결은 만드는 것(making)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산업시대는 석탄, 천연가스, 석유가 가장 중요한 에너지가 되어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장을 짓고, 공장 생산이 높아지면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공장을 찾아 대도시로 집중하게 되었고

농민을 공장 근로자로 바꾸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제3물결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서비스하는 것(serving), 생각하는 것(thinking),

아는 것(knowing), 경험하는 것(experiencing)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혁명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과거 산업혁명시대는 기계와 건물이 큰 자산이었으나

미래에는 인간이 가장 큰 자산으로 ‘창조적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로서

산업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고도의 정보화 시대’에는 정보와 지식이 기반이 되는 사회이기에

최고의 정보와 지식을 갖춘 자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기성세대는 정보 기술이 부족하여 당황하고 소외되고 있으며

신세대들은 정보 기술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여, 세대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세계를 하나의 정보 체계로 엮게 되므로, 지역적 차이는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토플러는 우리 생활 속에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문명이 출현하고 있는데,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비하는 위기의식(personality crisis)이 없다면

엄청난 위기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정치, 관료체제, 경제, 지식...뿐만 아니라 교회까지도

과거의 구시대적인 사고에 붙들려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답답한 상황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역사를 보는 안목(眼目)을 가져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국제적 상황과, 국가적 위기 상황을 보는 안목이 열려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인지를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豫言)의 책입니다.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를 정확하게 집어주고 인도해 주는

안목을 열어주는 책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안목이 열리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2)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직역하면 '내가 여선지자를 가까이하매' 

'여선지자'(하느비아)는 그의 아내를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그 남편이나 부친의 품위를 따라

여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출15:20)

그녀가 반드시 어떤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3)

13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역사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 ‘만군의 여호와, 너희는 그를 거룩하게 하다’에서

‘거룩하다’(קדשׁ)는 히브리어 단어는

12절에 나오는 ‘동맹하다’(קשׁר)와 언어유희(wordplay)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네(T. K. Cheyne)와 둠(B. Duhm)과 같은 학자들은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는 너희의 동맹자로 여기라’

(Yahweh of Hosts, him shall ye make your conspirator)고 읽습니다.

 

 주4)  ‘징조와 예표’    

이 두 용어는 '미래 사건의 표징, 암시'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낱말들로서

자주 결합되어 쓰인다. (신4:34, 6:22, 7:19, 26:8, 28:46, 29:2, 4:11, 시135:9 등).

18절은, 이사야가 자신의 예언 활동이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언의 메시지는 이사야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징조와 예표들도 장난삼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온 산에 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받아서 전한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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