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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 임마누엘 아기의 구원과 심판

LNCK 2021. 9. 14. 10:16

 

 

◈임마누엘 아기의 구원과 심판         이사야9:장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 7, 8, 9장까지 해석 해 오면서,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한 번 처음으로 시도하고,

    몇 년 후에 2차로 해석을 시도할 때는, 현재보다는 좀 더 쉽게 해석될 것입니다. 

 

▲사7:장 8:장 9:장은 연속해서 '임마누엘 아기'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7 :14~16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8:8, 10절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장의 내용 분해

앞서 8: 14절에서, 똑같은 하나님이지만

-거룩하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그분이 성소가 되어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라 했는데,

본문 9:장에 정확하게 그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 되어주실 사람들과, 9:1~7

하나님이 진노를 쉬지 않고 보내실 자들(북이스라엘)입니다. 9:8~21

 

 

◑임마누엘 아기를 고대하라         사9:1~7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비록 '흑암', '고통' 등의 어두운 단어들이 연속되고 있지만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흑암이 걷히고 빛이 다시 비췹니다.

이 모든 변화는 한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비롯됩니다(6,7절).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본절에 언급된 지역들은, 사사 시대이래로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적 색채가 더 짙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 자행된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 732년)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요1:46, 7:41, 52, 행2:7).

 

그러나 새 날이 밝을 때, 흑암이 가장 깊은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췰 것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호수와 그 주변의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볼 때에 변방 지역으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해 주었던 땅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먼저 멸망한 일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북쪽이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앗수르에 정복되어, 영화로웠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노예가 되던지, 피난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하15:29에 이스라엘 왕 베가 때,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와서 북이스라엘을 정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 갈릴리와 납달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본문 1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바로 앗수르에게 망한 것을 뜻합니다.

  

특히 앗시리아의 이주정책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그곳에 와서 살게 되어,

이스라엘 민족과 혼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았던 것입니다(요4:9).

 

예전에 ‘멸시를 당하던’ 땅을

후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앞에 언급된 갈릴리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와 평행을 이룹니다.

 

'흑암'은 슬픔 혹은 재난으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더 넓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총체적인 불행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시107:10, 11)

 

'큰 빛'은 세상의 빛이요(요8:12) 참된 빛이며(요1:9)

의의 태양이신(말4:2)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합니다.

 

마태에 의하면, 이 빛은 맨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에서부터

비취기 시작했습니다(마4:13).

 

그가 처음 이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였으며 (요2:11),

맨처음 가르치신 곳도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이었습니다. (눅4:14-17).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갈릴리 해변가였습니다.(마4:17, 막1:14, 15).

 

이로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신약에 이르러 완전하게 응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사9:1~2절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로 말씀합니다.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이사야의 예언을, (다른 예언서도 마찬가지지만)

<이중예언>으로 볼 때,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이사야 그 당시에는 무슨 의미의 예언이었을까요?

아마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에,

그곳의 피난민들이 자연스럽게 동포의 나라인 남유다로 내려오게 됩니다.

 

또한 남유다의 히스기야도, 온전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왕국의 남은 백성들을, 남유다로 초청합니다. 대하30:1

 

사실, 이러한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규모의 난민을 먹이고 입히고 살리는 일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대하 30장에 의하면,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북이스라엘의 난민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몇 사람이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대하30:9~11

 

과거에 고통 받으며 살았던 자들은, 이제 흑암의 절망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삶의 처절함 속에서 심령과 육체의 고통에 울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삶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고달프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날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멸시받던 지역,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므로 슬픔은 달아나고, 절망의 감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곳을

아름답고 찬란한 세상으로 바꾸어주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멸시받던 절망의 땅을 변화시켜 영화롭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구절을, 현실의 남북관계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내용이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로 바뀝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일 가운데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나라를 창성케 해주신 것입니다.

'창성케 함'은 백성의 수를 많게 함이다.

 

둘째는, 즐거움을 더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백성의 수의 증가와 즐거움의 증가는

모두 메시야 시대를 특징짓는 주도적인 현상들로 간주됩니다.   (26:15, 66:8, 슥14:10, 11)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3~5절)

어둠의 절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사망의 그늘에서 비통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광명의 빛을 체험하게 되자 기쁨과 희열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마치 농부가 곡식을 수확했을 때의 기쁨 같고,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눌 때처럼 기쁘고 즐겁다고 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은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수축하고 성전을 재건하여 회복된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앞서 2절에서, 히스기야 시대에, 유월절이 회복되며,

남왕국과 북왕국이 합쳐지는 시대를 예언한다고 설명했으므로,

지금 살피는 3절도, 히스기야 시대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중예언으로 볼 때, 이 날은, 장차 메시야의 회복의 날을 뜻합니다.

 

▲4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멍에'와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이 가운데 특히 '멍에'와 '그 압제자'는, 애굽에서의 속박을 연상시킵니다. (출2:11)

성경적 표상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을 속박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미디안의 날'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수효로 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가장 분명하게 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삿7:2)

 

본문 사9:1~5절의 주제는, <새 날이 오리라>, <회복의 날이 오리라>입니다.

그 이유가 3절과 4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4절의 상황도,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18만5천 대군을 기적적으로 물리친 사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 근동 지역에서, 앗수르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앗수르는 군사강국이었고, 무자비하기가 역사상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약소국 남유다와 히스기야가

군사강국 앗수르를 꺾은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흥강국 바벨론이, 사신과 예물을, 히스기야에게 보낼 정도였습니다.

 

본문은, 억압에서의 해방을 ‘미디안의 날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미디안의 악정에서 기드온의 용사가 승리하므로

해방시켜 준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삿7~8장).

 

▲5절,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상은, 기드온의 승리나 앗수르의 전멸보다 더 큽니다.

 

전쟁을 위한 무장들인 '갑옷'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군화'로 번역함) 과

'군복'이 불에 태워지리라는 표현은, 적들의 패망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더 나아가 전쟁 자체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절에서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온 천지를 짓밟았던 침략자들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들을

불에 타 없어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침략자들로 패배하여 돌아가게 하시고

참된 구원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새로운 희망의 날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버림받아 절망에 처한 자들에게 희망의 날을 주실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의 빛이 비치며,

     슬픔과 절망은 환희와 희망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모든 멍에의 줄을 꺾어버리실 것입니다. 압제한 모든 사슬을 끊어버리실 것입니다.

     모든 실패와 분쟁의 요소들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모든 회복의 역사가

우리나라와 아울러, 특히 북한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흑암에 행하는 백성들, 스불론과 납달리의 북쪽 변방(북한)이

빛이 비취고, 영화롭게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망합시다. 9:1~5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왕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장차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는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아 왕이십니다.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정사'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정사를 어깨에 멘다'는 말은,

권위의 상징으로 주어진 금고리나 열쇠를 어깨에 걸친 데서 연유한 듯합니다. (22:22 참조)

 

‘기묘자라, 모사라’

'기묘'(wonder)와 '모사'(counsellor)를 구분하여 해석할 수도 있으나,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28:29)

 

왜냐면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의 모든 묘사가

형용사-명사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기묘한 모사'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묘한 모사 Wonderful counsellor'란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神性)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영존함'은 신성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아버지'에 놓입니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22:21, 욥29:16, 시103:13).

 

따라서 '아비 아드'(영존하시는 아버지)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라’

마지막으로 그는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로서 '왕'이라 불리웁니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의 개념은

히브리적이라기보다는 이교적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평화의 왕'으로 불립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 역시 평화로울 것입니다. (시72:3, 7, 렘33:6, 미5:4, 슥9:10 등)

 

그는 통치권을 가진 왕이십니다.

6절 서두에는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 ‘왜냐하면’(כי, 키)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1~4절에서 어둠의 절망의 땅이 영화롭게 되고,

그 거민들에게 희망의 광체가 비치고 해방과 승리의 역사가 일어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한 아기로 세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절망에 처해 있는 세상에 장차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들은 새로운 왕을 환영하고

그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중 예언>으로 볼 때, 본문 6절은, 이사야 당시에는 무슨 뜻으로 예언한 것일까요?

 

앞서7:14에서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어서 8:10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앗수르를 이길 것이라 하였고,

 

이어서 본문 9:6에도,

<기묘, 묘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란 이름을 가진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이중예언으로 볼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은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며,

히스기야가 실제로, 앗수르를 물리치고, 남유다에 평화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예언은, 이중예언으로 볼 때,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공평'과 '정의'야말로 메시야 왕국을 지상의 나라와 구별 짓는 결정적인 표지입니다.

 

우리는 공평과 정의의 메시아의 통치를 갈망합니다.

그분은 이미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세상에는 어둡고 고통스러우며 절망적인 세상이 많습니다.

아직도 그의 나라와 그의 통치 세력이 온 세상에 펼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심령, 우리 가정, 우리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리하여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희망을 보기를 원합니다.

모든 억압의 사슬들이 끊어지기를 바랍니다.

정말 이 세상에 공의와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물론 재림의 그날에, 이 예언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이, 작은 예수가 되어서,

예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이 땅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북이스라엘들에겐 진노가 쉬지 아니하리라           사9:8~21

 

맷돌위에 신발이 두 짝이고,

젓가락이 두짝이듯이

심판-구원이 두짝으로 항상 같이 갑니다.

 

사9장에서도, 

1~7절까지 구원을 예언했다면

8~21절까지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보통 종말론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종말의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는 말씀이 12, 17, 21절에 3번 거듭 나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 사마리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현실 속에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에 대한 진노인 것은,

9절에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9:1절에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히스기야 왕이, 북왕국이 앗수르에 망한 후에,

남은 거류민들을, 남유다로 초청해서, 회복시키는 사건의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하30:9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일부만 some men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대하30:11

 

많은 사람들이, 남유다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일부 소수의 사람만, 남유다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9:1~2절에, 스불론과 납달리의 회복을 예언했으면,

그들이 순종해서, 남유다로 내려와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회복되어져야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런 제안을 담은 보발꾼을 보냈을 때,

‘소수의 사람만이 some men’ 그 제안에 응했던 것입니다.

 

그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사마리아에, 남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9:9~21의 내용입니다.

 

<이중예언>으로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회복이 증거되었을 때,

갈릴리의 사람들도 (본문과 우연의 일치로) 소수의 사람만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스불론과 납달리를 저주하셨습니다. 마11:21~23

                                                                      (녹음은 여기까지만 합니다, 너무 길어서)

▲8절,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쓰였으며, 여기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5:3)과 대조되는 표현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기보다는 교만으로 일관합니다.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상을 입을지라도

과거의 싸구려 재료로 지은 건물을 다 뜯어내고  *벽돌, 뽕나무

이제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진다고 호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듬은 돌, 백향목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르신의 대적'은 언어 유희를 이용한 수법으로 앗수르인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아람(르신)과 동맹을 체결했었습니다.

그러나 르신이 죽고 앗수르에 의해 아람이 정복된 이후, (왕하16:9)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아람에 의해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동맹을 맺었던 아람 사람이,

앗수르에 가담해 북이스라엘을 공격케 되는 것입니다. 아래 12절을 보세요.

 

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성들이 교만과 완악한 마음으로 거역하므로, 진노가 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8~12

 

하나님은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습니다.

“알았으면”(:9)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갖고 건방지게 말했습니다. (8~10절).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10절)

 

자신들의 능력, 재주, 수완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극복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앞뒤에서 적군이 몰려와서 삼킴을 당하게 만들 것입니다.(11~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12)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잠히 있던 이웃이 일어나고 주변이 흉용해져서 나를 공격하고, 괴롭히고,

빼앗아가고, 삼키려고 오는 '외부적 곤경'은 하나님의 진노일 수 있습니다.

 

사면에서 외부적으로 불행이 몰려오고, 곤경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손은 계속될 것입니다.

 

▲13절,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그 백성(북왕국)은 반역적인 태도를 고집하였다.

징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았으면서도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13~17절).

 

그러나 징계를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심령은

어리석어서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시49:20).

 

▲14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종려가지'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으로 인해 대단히 고귀한 식물로 평가되었으며,

이와 대조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갈대'는

습지, 늪 혹은 시궁창에서 자라는 풀로, 대단히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이 둘은 아마도 고귀한 자와 천한 자를 암시합니다. 

 

15절,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이사야가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꼬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꼬리'(자나브)에는 본래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마치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권세있는 자들의 편에 빌붙어 부끄러운 말과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6절,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3:12의 탄핵과 유사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특히 무겁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은 자신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우두머리인 지도자들은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로 미혹케 하여...멸망을 당하게”(16절) 만들 뿐이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사1:5~6)

 

하나님은 그들을 잘라내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실 것입니다.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는 지도자인 머리도,

비열하게 거짓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인 꼬리도,

백성들 가운데 존귀하다고 폼 잡는 종려가지도,

연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인 갈대도 .. 전부 끊어버리실 것입니다.

 

▲17절,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이는'(키)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시며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죠.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 모두가 부패했습니다.

 

우리는 조금한 일, 작은 환난 속에서도 자기를 살펴보고

회개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회복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아

그 앞에 나아와 그 얼굴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노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손이 펴져 있으리라'

우리나라는 주먹을 쥐고 때리지만, 중동은 손바닥을 펴서 때립니다.

손이 여전히 펴 있다는 말은, 계속 때리시겠다는 뜻입니다.  12, 17, 21절에 각각 나오죠.

    

▲18절,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죄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선지자는

그것을 '불'에 비유합니다.

이 불은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타오릅니다. (창4:7)

 

물을 부어 꺼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이 불을 끄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끝없이 타오르는 악행의 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롬1:28-32)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같은 것이라’

선지자의 묘사는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을 연상시킵니다.

 

‘죄악의 불길은 먼저 가시나무를 삼키고’

질려와 형극은 보통 사악한 사람의 상징어로 자주 쓰입니다.(삼하23:6, 미7:4)

 

이어서 큰 삼림에까지 옮겨 붙음을 뜻한다.

혹자는 이를, 죄악의 집단에 참여한 온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대 초원 위에 지천으로 타올라 마침내 온 하늘을 연기로 가득 채웁니다.

 

이러한 일련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어떻게 온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6절)

 

진노 속에서 회개하기는커녕, 악행을 계속 행하면 진노는 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빽빽한 수풀”까지도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19절,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죄악의 불길 위에 또 하나의 불길, 곧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오버랩 됩니다.

대초원을 태웠던 죄악의 불길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임을 알게 됩니다.

 

화마(火魔)가 핥고 지나간 그 땅은 검게 그을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소화된다'(네으탐)는 말은 '빨갛게 달아 오르다', '타서 검게 되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백성들 가운데 엄청난 내분이 일어나게 하여 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다 태워버리시고

백성들도 불에 타는 섶나무 같이 만드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그 형제를 아낌” 같이 아끼며 사랑하여야 하는데

아끼기는커녕 서로 움켜지고, 물고 뜯고, 잡아먹기 위하여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20절,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무정부 상태하의 내란, 즉 동족간의 무자비한 살육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굶주림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에 지배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이런 자기 파멸적인 탐욕은, 선지자의 다음 말,

곧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팔'(제로아)은 비유적으로 '힘', '원조', '도움'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상부상조해야 할 이웃을 가리킵니다.

 

21절,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서로 보호하고 위해 주어야 할 이웃(혹은 지체)이

오히려 서로 물고 뜯는 원수로 변할 때 거기에는 '완전한 파멸' 밖에 남지 않습니다. (갈5:15)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간 길이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북왕국 안에서 형제끼리 싸우더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유다를 공격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빚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왕하15:13-16, 25, 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충족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경고성 예언’으로 봅니다. ‘미래에 꼭 필연적으로 이렇게 된다’가 아니라,

‘이렇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해라. 이렇게 되지 않게 해라’는 뜻입니다. ☞ 경고성 예언

  

엄청난 내분이 일어나 서로 물고 뜯으며 죽이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서

지리멸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회적 혼란', '내부적 분쟁'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내분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강퍅한 마음을 같고 물고 뜯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될 것입니다.

내분, 분쟁 속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이사야 9:1~7절은, 구원의 날, 새 날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9:8~21(끝)절은, 심판의 날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순종하여.. 구원의 새 날을 살아가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뻔히 알고도, 무시하고 불순종해서.. 더 큰 심판을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2001년 911사태가 일어났을 때,

위 본문 사9:10절을 인용해서, 설교하셨습니다.

 

심판을 받았을 때, 더 완악해지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가자는 취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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