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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두 갈래 길
LNCK
2021. 9. 14. 20:01
◈이사야 9:장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두 갈래 길 사9:9~13 여러 설교 정리
*아래는 이사야 9장의 <적용>입니다.
앞서 사8: 14절에서, 똑같은 하나님이지만
-거룩하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그분이 성소가 되어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겐..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라 했는데,
본문 9:장에 정확하게 그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 되어주실 사람들과, 9:1~7
하나님이 진노를 쉬지 않고 보내실 자들입니다. 9:8~21
사도 베드로가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가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고 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벧전2:7~8)
◑먼저는 '구원 받는 백성' 입니다.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흑암과 고통속에 사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예언이지만
'이중 예언'으로 볼 때,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정황에서는 무엇을 뜻할까요?
이사야 7~8장에 나오는 '임마누엘'은,
장차 오실 신약의 예수님을 뜻하지만,
'이중 예언'으로 볼 때, 이사야 당시에는 히스기야가 그 '임마누엘의 아기'였습니다.
이 구절은, 당시 히스기야 왕이, 북왕국이 앗수르에 망한 이후에,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가지 않고 남은 거류민들을,
남유다로 초청해서, 그들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사건의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면 르호보암 때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진 이후에
북왕국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을 거의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명령을 내립니다.
대하30:5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
6 보발꾼들이 왕과 방백들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왕의 명령을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돌아오시리라
이렇게 북이스라엘에 태어났다고.. 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기 임마누엘 (히스기야 왕)'의 탄생을 계기로
흑암 중에 고통 가운데 사는 북이스라엘 거민들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구원 초청을 거부하는 백성' 입니다.
▲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모든 전쟁이 다 그렇지만, 북왕국이 앗수르에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단번에 망한 게 아니죠.
앗수르의 공격이 망하기 20년 전부터 산발적으로 전쟁을 계속 겪었습니다.
그래서 1절에 의하면, 처음에는 스불론, 납달리 두 지방만 앗수르에 침공을 당했습니다.
변방 갈릴리 해변가의 두 지역만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제1탄의 징계요, 회개로의 부르심입니다.
이스라엘은 갑자기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사태는 예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갈릴리 해변 지역만 피해를 입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는 여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계셨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메시지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리고 '버티기'로 나갔습니다.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상을 입었을지라도
과거의 싸구려 약한 재질로 지은 건물을 다 뜯어내고 *벽돌, 뽕나무
이제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진다고 호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듬은 돌, 백향목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버티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의 말씀이 본문 사9:8~21절입니다.
위 10절을 인용해서,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9 1 1이 일어난 직후에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미국은 뉴욕의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이후에,
그 자리에 더 높고 견고한 건물을 세우자고..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그러면 안 된다.) 벽돌 대신에 다듬은 돌로 지으려 하면 안 되고,
뽕나무 대신에 백향목으로 지으려 하면 안 된다...'
당시 미국이 해야될 것은 회개이지.. 하나님께 911의 징계를 받았다고 보니까요,
더 버팅기면서 '더 높고 튼튼한 건물을 짓자'고 할 때가 아니라는 선포였습니다.
이런 데이빗 월커슨 목사님의 설교가 아마 미국 전역에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론에서도 '더 높고 튼튼한 건물을 짓겠다'는 보도가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고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에 어떤 재건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이사야는, 징계를 당하고도 돌이키지 않는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2탄의 징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11절에 예언합니다.
'르신의 대적'은 언어 유희를 이용한 수법으로 앗수르인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북이스라엘은 아람(르신 왕)과 동맹을 체결했었습니다.
그러나 르신이 죽고 앗수르에 의해 아람이 정복된 이후, (왕하16:9)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아람에 의해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자기와 동맹을 맺었던 아람 사람들이,
앗수르에 가담해 자기들 북이스라엘을 공격케 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아프간 등지에 이런 일이 많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정부군에 속했던 군인들이,
다음날에는 탈레반으로 이적한다고 하지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랍니다.)
아래 12절을 보세요. 버티던 북이스라엘이
징계 제2탄을 맞습니다.
▲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제는 북쪽에서 아람이 (어제까지 동맹군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적군으로 돌변했습니다)
남쪽에서는 블레셋이 협공해 옵니다.
이것은 1탄의 징계를 받고서도 이렇게 교만하게 대응한 결과입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10절)
그러자 하나님은 1탄이 안 되면, 2탄을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12)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잠히 있던 이웃이 일어나고 주변이 흉용해져서 나를 공격하고, 괴롭히고,
빼앗아가고, 삼키려고 오는 '외부적 곤경'은 하나님의 진노일 수 있습니다.
사면에서 외부적으로 불행이 몰려오고, 곤경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손은 계속될 것입니다.
▲13절,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그래서 결국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징계를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심령은
어리석어서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시49:20).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사1:5~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치시기 위한 채찍으로 앗수르를 사용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사10:5-6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악한 나라를 취하여
나의 백성들을 회개와 나의 마음가운데로 돌이키도록 할 몽둥이로,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겠다...
그런데 역사적 결과를 보면, 북이스라엘은 그 마지막 수단을 사용받았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에 완전히 나라가 망하고 말았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거나,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내려와서 유월절을 같이 지키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대하30:9~11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보발꾼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읍으로 두루 다녀서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그 중에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중에서 일부만 some men
스스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대하30:11
많은 사람들이, 남유다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일부 소수의 사람만, 남유다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9:1~2절에, 스불론과 납달리의 회복을 예언했으면,
그들이 순종해서 남유다로 내려와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회복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그런 제안을 담은 보발꾼을 보냈을 때,
‘소수의 사람만이 some men’ 그 제안에 응했던 것입니다.
그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사마리아에, 남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9:9~21의 내용입니다.
<이중예언>으로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회복이 증거되었을 때,
갈릴리의 사람들도 (본문과 우연의 일치로) 소수의 사람만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스불론과 납달리를 저주하셨습니다. 마11:21~23
▲이렇게 잘못된 모든 원인은 <교만과 완악>이었습니다.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겸손이 무엇입니까?
징계로 한 대 맞으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교만과 완악이 무엇입니까?
징계로 한 대 맞으면.. 버티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대 맞으면.. 그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은 나라가 완전히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후에도, 운 좋게 거기 살아남은 거주민들은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유월절을 같이 지키자는 초청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대하30:11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나도 심령에 기름끼가 끼이고(축적되고), 세속에 점점 깊이 물들게 되다 보면,
관성의 법칙이란 게 적용되어서,
더 죄를 짓고, 더 세속적으로 타락하기가 차라리 쉽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기는.. 더욱 더 어려워져 갑니다. 관성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
완악하고 교만하게 '버티기'로 나아가지는 않는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