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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0장 심판이 작정되었지만, 남은 자를 보호하신다
LNCK
2021. 9. 15. 08:57
◈사10장 해석, 심판이 작정되었지만, 남은 자를 보호하신다 이사야10장 여러 설교 정리
◑1. 악한 사회에 대한 형벌 사10:1~4
▲1절,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이것은 악법을 제정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백성들을 법에 따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 억압하고 학대하면서
철권을 휘두르려는 전제국가 독재자들이 하는 행동을 지적한 것입니다.
1~4절은 세상 모든 나라에 대하여 선포하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으나
아래 3절과 연관지어 보면, 특별히 북이스라엘에 선포하는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불의한 법령'을 책이나 서판에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2절,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를 억울하게 하고 짓밟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화 있을진저’ 책망하고 계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보복을 받을 것입니다.
▲3절,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벌하시는 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 페쿠다'는 문자적으로 '방문의 날'이니,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하심을 특별히 나타내시는 때를 가리킵니다.(호9:7)
그날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곧 앗수르에 의한 침공을 암시합니다. (5절, 5:26).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절, 포로 된 자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악인은, 포로들 틈에 끼여 쪼그리고 앉았거나 시체들 사이에서 뒹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악인은, 시체에 깔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약자를 괴롭힌 악인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적으로는 최후 심판이 있는 역사의 마지막 때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 될 때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접한 대로 대접 받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마7:12
그래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에서,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마찬가지지만)
사회 저변층,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압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대접한 그대로, 대접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앗수르 또는 바벨론을 통한 심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을 바로 본문 사10:1~4절이 명확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내가 압제를 당하고, 내가 앗수르에 핍박을 받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과거에 약자들을 괴롭히고, 아픔을 주었던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심판할 자가 없는 것 같을 지라도,
하나님은, 앗수르의 힘을 빌어서라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2.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사10:5~19
사람은 간혹 성공을 하든지 세간에 인기를 끌게 되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객기를 부리며 거들먹거리고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월권하여 일을 그르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앗수르에 대한 책망과 진노의 말씀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세계를 제폐하며 승승장구하여 나아갈 때에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자랑하면서 기세등등하여 교만을 떨었습니다.
사실은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그들에게 승리와 권력을 주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승리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면서
잔인하게 파괴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할 자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날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장차 큰 멸망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혹시 우리들에게도 세상에 살면서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5절,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절,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잠시 사용된 후,
그 교만 때문에 역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바벨론도 마찬가지 운명이었죠.
그런데 아래에 나오지만, 앗수르는.. 분수에 지나쳤습니다.
▲7절,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역할만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월권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들은 잔인하게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나라들을 점령만 하면 될 일을
자신들이 점령하는 국가와 민족들을 완전히 말살하는 잔인한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도시와 가옥들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이민족들과 혼혈정책을 써서 완전히 민족성을 없애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정책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월권하는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예후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가운데서
‘지나친 열심’으로 큰 살육을 벌인 것처럼 (왕하10:11)
앗수르 군대도 지나친 열심으로 잔인한 파괴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8절,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9절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이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앗수르가 거둔 혁혁한 전과를 자랑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점령하는 곳마다, 자신의 부하들을 전부 그 곳의 관할자로 세웠습니다.
(바사 Persia는, 점령을 해도, 그곳 지도자와 종교를 계속 유지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경건치 아니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가는 곳마다 점령하여 전부 자신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월권을 저지른 것입니다.
▲10절,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보다도 많은 신상을 만들어놓고
그 신들을 섬기는 나라들을 내가 이미 손에 넣었다.' 라는 앗수르의 자만의 말입니다.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고대의 정복 전쟁은 신들 간의 전쟁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앗수르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다른 나라의 우상들,
특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수입된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결정적인 실책이었죠.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에서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우상들의 신전 규모로 따져 볼 때,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은 초라하기 그지없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사람들은 큰 소리를 친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우상은 보이는 시각적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기에, 우상 신전의 화려함에 비교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만한 앗수르는, 심판을 받아 망했습니다.
▲12절,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13절,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총명한 자라’
그는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을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용맹스럽게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을 땅으로 끌어내렸다.'는 뜻입니다.
혹은 '용감한 자 같이'를 직역하면 '황소처럼'이 됩니다. (시22:12).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열국을 정복했다고 떠벌렸습니다.
‘나는 총명한 자라’, 자신이 아주 특출 난 지혜와 총명의 소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경계선을 무너뜨렸다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그들에게 정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었건만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지혜, 자신들의 힘으로 성취해 냈다고 뽐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5:21)
▲14절,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음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그들은 열국 정복은 버린 새알을 주운 것처럼 쉬웠다고 떠벌렸습니다.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강조점은 아무도 앗수르를 대적하거나 저항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세계 정복을 성취해 냈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입니다.
아주 건방지고 오만방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마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신다”(12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렘9:23)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매사에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청지기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15절,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앗수르의 교만의 어리석음을, 이사야는 날카롭게 공박합니다.
도끼와 톱은 유용한 물건이긴 하지만, 사람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 도끼와 톱이 정반대로 자기들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요?
이것은 앗수르가 행한 교만과 건방짐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경영자는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종이 주인 행세하고,
심부름꾼이 주권자 행세를 하려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앗수르의 행동은 마치 주객을 전도시키는 꼴이 된 것입니다.
도끼가, 자기가 나무를 베었다고, 주인에게 자랑하는 꼴입니다.
톱이, 켜는 자에게 큰체하는 꼴입니다.
막대기가, 잡은 자를 들려는 꼴입니다.
몽둥이가, 사람을 들려고 하는 꼴입니다. 사람이 몽둥이를 잡거나,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한 불꽃이 되어, 앗수르의 영화를 전부 불 질러 버리실 것입니다.
하루 사이에 그들의 모든 것을 소멸해 버리실 것입니다.
▲16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앗수르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로 선포되니,
하나는 병의 형별이요, 다른 하나는 불의 형벌입니다.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한다'는 말은 질병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레26:16, 신28:22).
이는 앗수르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져(추정)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이 죽었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37:36)
선지자는 '불태우다'는 의미의 '야카드' 동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합니다. 16, 17, 18절
17절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절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형극과 질려는 앗수르인들의 하류 계층을 가리킵니다.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은 상류 계층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앗수르 인들의 총체적인 파멸은 '전부'라는 말에서 강조되고 있으니,
이는 직역하자면 '영혼에서 육체까지'입니다.
19절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교만한 앗수르는,
불에 소멸되는 것처럼 소멸되며 :17
병자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처럼 점점 약해져 갈 것입니다. :18
결국은 초라하게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특별히 ‘하루 사이에’ 소멸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히스기야 때, 앗수르의 18만5천명 대군이
하루 밤 사이에 다 물러간 것을 예언하는 듯합니다. 왕하19:35
17절에는, (앗수르가) 소멸되었다. 즉, 불에 타서 없어져버렸다고 말합니다.
계시록에도 바벨론이 하루 사이에 망했다고 했죠. 계18:8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앗수르처럼, 내가 성공할 때,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주와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주와 역사를 경영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들어 쓰신다면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내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주신 권한에서 벗어난
월권적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행하는,
악행을 자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순종, 감사, 영광만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3. 남은 자의 대열에 서라 사10:20~23
주류는 심판을 받아서 망하지만,
그들 중에 소수는 고난 받다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살아남아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자를 ‘남은 자’, 또는 ‘그루터기’라고 불렀습니다. (사4:2~3, 6:13)
본문 사10장에도,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다 할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무섭게 파괴를 일삼던 앗수르의 공격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돌아와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이 ‘남은 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된다할지라도, ‘남은 자’의 대열에 서기 바랍니다.
▲20절,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특히 아하스) 의지했던 앗수르는, 결국은 ‘자기를 친 자’였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받고 난 다음부터는,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 하나님만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7 :14에서 ‘너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긴다’
그 증표로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8 :10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임마누엘)으로 이긴다’
9:6에도, <기묘, 묘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란 이름을 가진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임마누엘) 아기가 태어날 싸인을 통해,
너희가 이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힘을 의지하지 말고,
무기와 병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임마누엘)’만 간절히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7~10장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라고 부르짖게 된다 할지라도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지고 오직 진실하게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21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 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입니다(9:6).
여기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은,
‘포로 귀환’을 뜻하기 보다는,
세상이 변하고, 신앙이 타협되어도,
그 중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의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의미는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22
파멸, 즉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남은 자가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계시록에도, 대환란이 있지만, 그 속에서 성도들은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더욱 굳세게 신앙을 지켜나갈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남은 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돌아간다’(슈브)는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찢어진 자리를 도로 낫게 하실 것이며
상처 난 곳을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호6:1).
우리는 남은 자가 되어 회개와 회복의 선봉장이 되어야 합니다.
▲22절,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죠.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합니다.
남북 이스라엘 국가에는 엄청난 인구가 있었습니다.
마치 바다의 모래같이 많은 숫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파멸되어 죽고 포로로 끌려가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의 숫자만 남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북왕국 10지파는 앗수르에 거의 다 망했고,
남유다, 두 지파, 소수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받은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순종했기 때문에, 몽둥이로 그들을 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그 많은 숫자를
거대한 물결,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앗수르”(사8:7)로
인하여 몰살시켜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소수의 무리, ‘남은 자’는 남겨두십니다.
그들만 ‘그루터기’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사6:13
또는 (예언으로 볼 때) 남게 될 것입니다.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그럼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된 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전후 문맥을 따라서 검토해 보면 '앗수르'입니다.
그런데 더 엄밀하게 말하면 '남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가운데도 '남은 자가 돌아오리니' 하는 그 대열가운데 합류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방 가운데 계속 남아있던 이스라엘도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된' 그룹에 속하는 것입니다.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다'.. 이 말씀은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앗수르의 파멸이 작정(예정)되어 있다는 뜻인데,
사13장에는 전 장이 '바벨론의 파멸이 작정 되어 있다' 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안 믿는 세상과,
하나님을 건성으로 믿는 자들, 즉 남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가라지' 신자들이
세상에서 득세하고, 승승장구하고, 자기 세를 뽐내며 뭔가 화려한 권세를 자랑할지라도
그들의 결론은 미안하지만 이 말씀입니다.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다!'
▲23절,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위 구절은, 앗수르를 통해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20세기에도,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하나님은 때때로 이렇게, 세계적인 전쟁을 허락하십니다.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한 ‘남은 자’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사야1장부터, 악한 백성에 대한 심판이, 강도 높게 예언되었습니다.
비로소 사10장에 이르러,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남유다도 같이 심판하실 것을
(1장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 약속 (24~34절)
▲24절,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택한 백성들에게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한 심판은 작정되었고, 심판은 반드시 시행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파멸>이 아니라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들아’,
하나님의 부르시고 택하신 백성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징계 중에라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유는, 혹시 앗수르가 너희를 공격할 때에
애굽 사람들이 때리고 학대했던 것처럼, 막대기로 때리고 몽둥이로 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25절,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남유다도.. 심판과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교정, 징계>입니다.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도리어 택한 백성을 공격한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내리셨던 분노는 그치고
앗수르를 향하여 진노로 멸망시킬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신원하시고, 원수를 갚아주시러 오실 것입니다.
천하를 정복하는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벌하시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사40:15)
▲2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채찍을 들고 앗수르 군대를 치실 것입니다.
마치 기드온이 삼백명의 용사로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 군사를 물리치고
장수 오렙을 오렙 바위에서 죽인 것처럼(삿24:25)
앗수르 군대를 멸하고 그 장수들을 죽여 버리실 것입니다.
또한 홍해 바다에서 애굽 군대를 멸하신 것처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하여 막대기를 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군대를 치시되 마치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몰살하여 죽였듯이
전부 멸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물통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사40:15
하나님이 ‘톡’치시면, 전부 흩어지고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27절,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기름'으로 번역된 '솨멘'은 '비만', '지방', '기름'을 뜻하는 말로서
앗수르로부터의 이스라엘 해방은 황소의 목이 비대해짐에 따라
멍에가 찢어져 자유하게 됨과 같이, 그렇게 확실하게 올 것입니다.
‘그날에’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 앗수르가 주었던 모든 무거운 짐과 멍에는 벗겨질 것입니다.
모든 억압, 모든 사슬, 모든 불행은 벗겨질 것입니다.
▲28절, 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그의 장비를 두고
'그의 장비를 두고'
여기서 그들은 짐을 풀었다. 이는 행군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병참 기지를 건설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29절, 산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도다
30절,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31절, 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
32절, 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해오는 여정을 그린 말들입니다.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손을 흔드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위협적인 제스처입니다.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 앗수르 군대가 휘두르는 손이 클로즈업되면 문득 예언은 끊깁니다.
여기 28~32절을 보면, 앗수르 군대가 점령해 가는 모습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강대국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향하여 파죽지세로 정복하며 몰려오는 그 위용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들이 지나가는 도시마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고”(29절)
“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31절)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전부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비참하게 짓밟혔던지 ‘길림의 딸들은 비명을 지르고...
아나돗은 가련하다’(30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딸 시온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32절)고 했습니다.
여기 ‘손을 흔든다’는 것은 살랑살랑 손짓하는 것이 아니라
격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뜻합니다. 앗수르의 위협과 공갈의 손짓입니다.
이런 소문, 이런 모습을 보면 두려움에 주눅이 들고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은 자’의 신앙인은 이런 두려운 소문을 듣고, 무서운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33절,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삼림의 비유가 다시 등장한다. 그 삼림은 앗수르입니다.
벌목하시는 이는 주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큰 나무, 굵은 나무 할 것 없이 모두 다 찍혀 넘어집니다.
이 모양으로 앗수르의 파멸은 철저할 것입니다.
34절,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레바논이...작벌을 당하리라’
앗수르는 종종 레바논의 삼림에 비교되었습니다(겔31:3).
그리하여 장대한 장군들이 찍혀 나가고 높은 고관들이 낮아지고
‘빽빽한 숲’처럼 많은 군사들이 전부 베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두려움의 요소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온갖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의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만이 남은 자로 끝까지 지켜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다수를 보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실한 신앙인을 찾고 계십니다.
세속에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신실히 남아 있는 자,
그 사람이 이 시대의 ‘희망의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회복시키고
축복의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남은 자가 되십시오.
불신앙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남은 자의 대열에 서십시오.
그들은, 세상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아무리 위태한 일을 당해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