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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0장 남은 자만 구원 얻는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남은 자' 신학)

LNCK 2021. 9. 15. 16:21

 

◈남은 자만 구원 얻는다     사10:20~23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서에 나타난 '남은 자' 신학)

 

※아래는 이사야 10장에 대한 <적용>입니다.

10장의 각 구절별 해석은 https://blog.daum.net/rfcdrfcd/15979480  를 보세요.

 

백성이 바다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 얻는다!  사10:20~23

 

본문 이사야 10장에도 '남은 자'가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에 망할 것이지만,

그 중에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1~10장 사이에 나오는 '남은 자'에 관한 말씀을

모조리 한 번 묶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21세기 전 세계에

자기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신자들은 많은데,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는 신자는.. 많지 않습니다.

'흰 예복을 입었다'는 신자도.. 많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나 '신부가 되고, 흰 예복을 입는 것'은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 이사야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민'들은 많았습니다.

정말 바다에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모래 알갱이들이 모두 다 구원받는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사10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위 구절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이사야는 계속 이렇게 증거합니다. 

  

10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 일은 앞서 스알야숩(7:3,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이름을 통한 예언이었는데,

이사야는 10 :21절에서 다시 재차 확증 confirm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은,

‘포로 귀환’을 뜻하기 보다는,

세상이 변하고, 신앙이 타협되어도,

그 중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의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의미는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22

파멸, 즉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남은 자가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계시록에도, 대환란이 있지만, 그 속에서 성도들은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더욱 굳세게 신앙을 지켜나갈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남은 자’입니다.

 

22절,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죠. (창 22 :17)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되었으나,  (삼하17:11)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했습니다.  (롬9:6~8, 27)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다수 이스라엘이 멸망을 받은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며,

신약적 표현으로는 '넓은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남북 이스라엘의 그 많은 숫자를

거대한 물결,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앗수르”로 (사8:7)

몰살시켜 버리셨던 것입니다.

신약적 표현으로는 '영생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소수의 무리, ‘남은 자’는 남겨두십니다.

그들만 ‘그루터기’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사6:13

 

더 정확하게는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남은 자'가 수동태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까마득한 과거 성경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20세기에도,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21세기에도

시리아, 이라크, 아프간, 아제르바이잔, 수단, 미얀마 등지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렇게, 세계적인 전쟁을 허락하십니다.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한 ‘남은 자’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전쟁을 통해서라도요!

 

이제까지 사10장에 나타난 '남은 자' 신학을 살펴보았고,

지금부터는 1~9장에 나타난 '남은 자' 신학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남은 자 신학'

 

▲1:8~9절,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나라 전체가 망하여 마치 포도원의 망대처럼, 참외밭의 원두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초라하게 조금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9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남은 자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조금 남겨 두셨다'는 이사야서에 흐르는 '남은 자 신학'인데,

본문 이사야서 서두 1:장 9절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에게 내려진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노아를 남겨 두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유황불의 심판 속에서도 롯의 가족을 남겨 두셨습니다.

자포자기하려는 엘리야를 위해서는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들 가운데 조금을 남겨 다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조금 남겨두지 않았다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인들은 <조금, 남은>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남았다고 말하면 대개는 시시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남겨 준다고 말하면, 대개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버럭 화를 냅니다.

오로지 <많음>이 미덕이요, <조금 밖에 없음>은 죄악입니다.

 

그러고는 지금 당장 죽여 없애도 할 말 없는 죄인 주제에,

나는 왜 여기에 이 모양으로 남겨 두시느냐고 불평합니다.

나의 모든 것 다 거두어 가셔도 할 말 없는 주제에,

왜 이만큼만 남겨 두시느냐고 늘 원망합니다.

 

아니오, 조금이라도 남겨 두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 죄인 살려두시고,

여기에 이렇게 남게 하심에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몽땅 다 쓸어 없애버려야

할 것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남겨 주심은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4:3절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큰 나무를 베어내면 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무의 밑동만 남아 초라하고 처량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들은 '남은 자'를 가리킵니다. :3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며, 세상에 타협하지 않은 일부 성도들을 뜻합니다.

 

즉 그 날에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싹이 나올 것이며,   :3

그들을 거룩한 자들로 칭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은 자'는 수동태입니다.

그러니 '남겨진 자'가 정확한 번역이죠.

 

내가 남은 자가 되겠다고 소원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남겨주신다, 남겨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 사상은 이사야서에 매우 중요한 신학입니다. 곳곳에 나옵니다. 

1:8~9절에 처음 나왔고, 4:3에도 나오고, 6:13, 7:3, 10:22절 등 앞으로 계속 나옵니다.

 

이렇게 남은 자들은 천국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칭함을 얻으리니’  4:3

'기록된'이란 표현은 '생명의 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계3:5, 13:8, 17:8, 20:12, 15, 21:27

 

오늘날 이 시대에 왜 거룩한 남은 자들을 보기 힘듭니까?

교회 다니는 자들은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성전 뜰만 밟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 열심히 다니고 있으니깐 걱정 없어” 라고 안심하는 자들 많습니다.

'남은 자'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예수 믿는 자는 많은데 거룩한 자를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이 수술을 받지 못해서 그럽니다.

 

계8:11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쑥물'은 타락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홍수 시대에 먹을 물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 때 그 날에 사람들은 영적인 생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산으로 들로 헤메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를 '남은 자, 그리스도의 신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

그 외 '이마에 인 맞은 자',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 이런데 두어야지

그저 '요3 :16절을 믿는 자'에 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6:9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위 구절은, 대단히 의아하고 다소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이사야, 네가 열심히 말씀을 대언해 보아라, 그러나 백성들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리라!'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13:11

 

즉 '남은 자'들만 복음을 듣고 깨닫고 돌이켜 믿을 것이지만

가라지들, 넓은 길을 가는 자들, 선데이 크리스천들은 '복음의 비밀'을 못 깨닫는 것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10

그런데 말씀을 듣고서, 오히려 마음이 더 둔하게 되고 더 눈이 감기는 것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도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남은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누가 깨달을지/ 못 깨달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듣든지/아니 듣든지 열심히 전하고 선포해야 하지만

 

그러나 어쨌든 현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룹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상 이들은 언제나 주류였습니다.

천국은 좁은 문, 좁은 길인데 말입니다.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은 자'들도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도 황폐하게 되고 타락할 수 있는 여지가 늘 상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비극적 결말은 아닙니다.

아직도 희망의 불씨가 살아남아 있습니다.

바로 '남은 자들' 때문입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사6 :13

 

정리하면,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의 사역은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때로 전망 없는 사역, 결실 없는 사역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순종해서 하는 것이.. 진정한 사명자입니다.

 

오늘날 21세기에도

'전망이 안 보이는 사역, 전혀 가능성이 안 보이는.. 싹수가 노란..'

그런 사역, 그런 사역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도 반드시 '남은 자'를 남겨두십니다.

절대 절망, 절대 희망이 안 보이는 사역에도 희망과 기대를 거십시오.

바로 하나님이 남겨두시는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라는 말의 특성상.. 그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7: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고,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입니다.

 

이사야는 '남은 자 신학'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아들 이름을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고 지었죠.

그래서 그가 자기 아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유다 사람들은 모두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그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지자가 행동이나 행위를 통해 예언을 전달하는 방식을 '행위 예언'이라 부릅니다. 

위 7:3절은, 아람-북이스라엘 두 연합군이 힘을 합쳐서 공격해 와도

하나님은 남유다를 남겨두실 것이란 뜻인데...

(당시에도 예루살렘만 남겨두고.. 그 외 대부분 지역이 적군에게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1:8

 

영적으로 해석하면, 이 세상에 어떠한 위태로운 환경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8: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는 <성소>가 되어주시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보호처가 되시지만, 동시에 걸림돌도 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소(sanctuary)가 되시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에게, 그 백성의 보호처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임마누엘'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도움으로 생각하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국가와 사람들,

즉 '남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실 것입니다. :14b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저버린 이스라엘의 두 집,

즉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의 대부분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걸림돌이 되시고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시겠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가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리라고 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벧전2:7~8)

 

그러나

8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여기에 '남은 자'라는 말이 직접 나오진 않지만, 

전체 흐름을 통해 볼 때 '남은 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자들입니다.

 

8:16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봉인)하라’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공개)되어질 것입니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남은 자)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신데,

말씀을 봉함한다는 것은 신앙 공동체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혈통적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국민이라고, 그들 모두가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8 :13

그들에게만 하나님은 성소(피난처, 안식처, 구원)가 되어 주십니다.  8 :14

 

즉 남북 이스라엘이 바다의 모래처럼 숫자가 많았지만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았습니다.  

 

▲17:5 (북이스라엘이 망할 때)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6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할 때, 아주 극소수이지만 '남은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얼마나 극소수인가 하면, 6절에 감람나무에 열매 2~3개, 혹은 4~5개 뿐일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남은 자는 있을 것입니다. 전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28:5절,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절, 그 날 살아남은 당신의 백성에게는,

만군의 야훼께서 고운 꽃관, 화려한 왕관이 되시리라. (공동번역)

 

두 면류관이 대조됩니다. 에브라임이 적에게 삼킴을 당하는 그날에,

교만한 면류관(사마리아 도성)은 쓰러지고,

대신 영화로운 면류관(하나님 자신)이 햇빛처럼 솟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남은 백성'에게 제한시킵니다.

 

이 '남은 자들'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합니다.

-'도성의 파멸에서 살아 남은 열 지파의 생존자',

-멸망한 열 지파와 비교할 때 '남은 자로서의 두 지파, 왕국 즉 유다'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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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특히 남유다와 아하스) 의지했던 앗수르는, 결국은 ‘자기를 친 자’였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받고 난 다음부터는,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