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6장, 모압은 시온으로 피하라
◈모압은 시온으로 피하라 사16:장 여러 설교 정리
2004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 섬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그 여파로 일어난 쓰나미 10m이상 되는 해일로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태국, 인도,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 탄자니아까지
피해를 주어 그 지역을 초토화 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통계적으로는 17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 되었으나
실제로는 약 5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부분 국가에 주민등록제도가 없습니다.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특이한 것은 그날 아침에 바닷물이 약 2km 가량 빠져나가서 넓은 해변을 만들자
사람들은 이 광경이 너무나 신기하여 해변으로 구경하러 나갔다가
갑자기 10m가 넘게 밀려드는 쓰나미 해일로 참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의아하게 하는 것은
인간들은 금방 다가올 해일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구경하려고 재앙을 향하여 나갔는데
동물들은 자연의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재앙을 피하여 모두 피신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도령 안다만,니코바르 군도에 흩어져 사는 5개 원시부족들도
거의 피해가 없이 멀쩡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 大안다만족과 옹게족 114명 전원은
해일이 오기 직전에 높은 지대로 뛰어 올라가 재난을 피했습니다.
인도의 인류학자들은
“이들은 새의 날갯짓에서 날씨 변화를 감지하고 노 젓는 소리로 바다의 깊이를 알아,
지진해일이 오는 걸 미리 알고 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재앙을 미리 피할 수 있는 오감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오감을 예민하게 훈련시켜서 분석력, 논리력, 판단력 등
정신적, 지적 능력을 확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방탕과 타락 문화로 인하여 환경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재앙을 깨닫지 못하고
구경거리가 생긴 줄 착각하고 그곳을 향하여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위기에서 피신할 수 있는 감각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16장은 15장에 이어서 계속되는 모압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압은 유다나라의 동편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노도(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으면
지리적으로, 유다보다 먼저 파멸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앗수르가 유다 땅 예루살렘에 와서 패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14:25).
그러므로 모압이 살 길은, 안전한 피난처인 시온을 향하여 떠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심판의 대상자인 모압이지만,
그들이 재앙을 피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 시온 산으로 피신하라 사16:1~5
▲1절,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산으로 보낼지니라.
모압은, 방황하여 다니지 말고, 시온 산으로 가서 피신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 왕과 그 군대를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라고 표현하여
그 거대한 물결의 위력이 온 천지를 덮어서 초토화시킬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8:7)
'어린 양들을 드리되'
시온산으로 어린 양들을 보내라는 말은,
앗수르의 침입에 도주하는 입장이 된 모압이, 이스라엘에 조공을 드려서 도움을 청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선물 중에 왜 하필 '어린 양들'을 드리라고 이사야는 예언하는가?
또한 '시온 산'이라고 언급하는가? '유다'라고 하면 될 것을!
이것은 성전이 있는 시온산에, 제물이 되는 '어린 양들'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즉 모압은 시온 산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지금 국가적 재난을 당한 모압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올 때,
그들 모압을 패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10:24~26)
이것은 역사적으로 기원전 701년에 성취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파멸의 물결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는 예루살렘 성,
즉 하나님의 시온 산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압이 파멸에서 구출 받기를 원한다면 시온 산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땅 통치자’는 당시 유다를 통치하던 히스기야 왕을 가리킵니다.
통치자에게 어린양을 드리라는 것은 예물을 드려서라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모압왕 메사가 양 새끼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쳤던 것”처럼, (왕하3:4)
유다 왕에게도 예물을 드려서라도 보호를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셀라에서부터...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
'셀라'는 모압 사람들이 도피하였던 에돔의 수도입니다. (왕하14:7).
그러나 이 말이 고유 명사로서보다는 '바위'(셀라)로 뒤덮인 모압의 주요 도시들을
지칭하는 집합 명사로 쓰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셀라’는 요새와 같은 장소, 즉 ‘페트라’ 골짜기로서
그곳에 숨어 있지 말고 그곳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 시온 산으로 조공(어린 양)을 들고서라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연적 요새, 인간적 방패는 진정한 보호막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피난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줍니다.
▲2절,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아르논 강은 모압이 아주 자랑하는 강입니다. 절대로 마르지 않으니까요.
모압의 딸들을, 아르논 나루터의 떠돌아다니는 새처럼 방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온산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1, :3
모압 사람들의 처지가 딱하고 가련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마치 강 나루터 위에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새처럼,
더욱이 안전을 보장해야 할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서 갈 곳을 잃어버리고
흩어져 있는 새 새끼처럼 위험과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잠27:8)
언제까지 방황하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며, 언제까지 위험이 노출된 상태에 방치해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피난처, 보호처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어린양을 데리고, 예루살렘의 치리자에게,
시온산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1절).
모압 같은 불신자라도, 진정한 나의 피난처, 나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줄 곳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신다”(사25:4)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 너(시온, 또는 남유다 왕)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을, '모압 사절들의 간청'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사야가 모압을 위해 예언했다고 보기도 하는데요..
후자로 해석하면,
모압이 시온의 왕에게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히브리어로 5개의 명령 동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모압이 떠돌아만 다니지 말고
시온 왕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라는 하나님의 조언의 말씀입니다.
‘모략을 베풀며’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워주소서.. 라는 요청입니다.
우리 정치권은 폭력정치를 일삼는 북한 정권에게 잘 보이려는 아부의 정책보다는
탈북자가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구출할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엉뚱한 정치적 계획보다, 북한의 전체 국민을 포용하고 구출할 계획을 마련해야 합니다.
‘공의로 판결하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올바른 결정을 내려 실행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지옥 같은 북한 땅을 탈출하여 목숨을 걸고 숨어 다니다가 대사관에 찾아갔는데
외면하면 안 되겠습니다.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
뜨거운 대낮의 태양에서 밤처럼 그늘을 만들어 주소서.
불쌍하게 피난온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인권적 차원에서 마땅한 일입니다.
‘쫓겨난 자를 숨기며’
모압의 피난민들을, 남유다가 받아달라는 요청입니다.
제가 미국 국가를 좋게 평가하는 것 중에 하나가
그래도 어떤 나라보다는 인권을 존중히 여기고,
세계적 난민들을 수용하여 공부시켜주고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정치적 탄압에 도망 다니는 사람, 경제적 파탄으로 절망하는 사람,
인권이 유린당하여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
여러 가지 이유로 무고한 생명이 학살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방랑자를 숨겨줄 수 있는 피난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모압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앗수르를 도구로) 심판을 받지만,
모압 사람이라고 잔인하게 죽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들도 보호받고 구출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3절을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말세에는 모압으로 대표되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아 시온산(교회)으로 나아오게 될 것인데,
진정 그들을 숨겨주고, 그늘이 되어줄 진정한 참 교회(본문의 시온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피난처요, 안식처요, 산성과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 신약 교회의 사명입니다.
▲4절, (이 구절 개역성경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선택했습니다.)
모압에서 쫓겨난 자들을 너와 함께 살게 하고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침략자를 피하게 하여라.
억누르던 자가 없어져 침략이 멎고 마구 짓밟던 자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때, (공동번역)
유다는 모압의 피난처가 되어, 정의를 구하고 공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4~5절).
여기 눈여겨 볼 것은 “나의 쫓겨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모압 사람들이 비록 이스라엘의 원수노릇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며 업신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나의 쫓겨난 자들”(My outcasts)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신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탄식하셨으며, (사15:5)
그들의 구원을 위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쫓겨난 자들에 피난처가 되고 함께 거처하게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비록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이웃 모압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불행을 보고 그냥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쫓겨난 자들’이기에
그들이 찾아오면 환영하고 함께 거처할 수 있도록
환경과 자리를 마련해 주라는 것입니다.
모압으로 하여금 멸절하려고 달려오는 앗수르 군대 앞에서
피할 피난처가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자와 공의를 기본 정책으로 삼는 사람, 또는 국가, 정부의 할 일입니다.
어떤 법적 절차, 사회적 제도, 여건...등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압제하는 자들을 이 땅에서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여기 ‘토색하는 자’ ‘멸절하는 자’ ‘압제하는 자’는
온 천지를 짓밟고 정복하고 만행을 저지르던 앗수르 군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세력을 한 순간에 멸하시는 것입니다.
사40:15의 말씀처럼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탁’치면 사라져버릴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 앞에서 앗수르 군대 18만5천명을
한 순간에 떼죽음을 당하게 하여 말씀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5절,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폭력과 착취로 능사를 삼는 지상 제국이 멸절한 자리에 :4
그와 대조적인 다윗의 왕국이 돋아남을 봅니다.
이 왕국은 다윗 장막에서 나온 한 왕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왕권은, (모압 난민에 대해) 인자함과 진실한 판결로 정치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의 장막’은 다윗의 왕가를 말합니다.
다윗 왕의 계승자들로서 메시아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 (눅1:32)
그 왕권의 통치적 특색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세울 것입니다.
‘인자’(hesed)는 ‘친절’(benignity), '자비‘(mercy), '자선’(benevolence)의 의미로
다윗 왕가의 왕권의 기본 정책이 백성들에게
자비와 친절함을 성취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폭력과 착취를 기본 정치이념으로 삼는 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둘째는, 왕은 보좌에 앉아 진실함으로 판결할 것입니다.
‘충실함’(emet)은 ‘진리’(truth), '성실‘(faithfulness), '진실’(verity)의 뜻으로
다윗 왕가의 통치 이념은 진리를 기본으로 삼고 모든 것을 판결한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불법, 술수와 모함이 판치는 정치로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진리에 입각해서 바른 정치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는 정의를 구할 것입니다.
‘정의’(mishpat)는 '공정‘(justice)의 의미로 악을 제거하고
사회와 사람들을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는 것을 통치 이념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mishpat)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사42:3)
넷째는, 그는 공의를 신속히 실행할 것입니다.
‘공의’(zedeq)는 ‘의로움’(righteousness)의 의미로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만드는 것이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암5:24)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워질 정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특히 북한동포, 탈북자)의 불행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불행을 겪고 있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피난처,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 기업,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 방황하는 자들의 참된 피난처는
하나님이 마련한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온으로 가야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어 거짓된 것을 자신의 피난처인 줄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압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사16:6~14
타이타닉호(Titanic)는 영국에서 만든 4만6천 톤급의 대형 호화 여객선으로.. 주1)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 :18)
사람은 교만과 거만함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망치게 하는 불행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거만함에 거들먹거리며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성경은 모압이, 왜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망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이사야의 예언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던 요소, 자랑하고 거들먹거리게 만들었던 요소를
꺾어 멸하므로 교만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고하고 책망하는 내용을 일찍 깨닫고 대비하는 것이
모압 국민들이, 멸망에서 사는 길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모압은 안타깝게도, 그 재앙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듣고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압을 향한 경고의 말씀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6절,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교만한 자랑은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압은 경제적 부요 때문에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8절에 보니,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 가지가 야셀까지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다’고 했습니다.
헤스본에서는 엄청난 여름 실과와 농작물이 쏟아져 나왔고,
십마에서부터 광야까지 넓은 지역에 포도나무가 무성하여 엄청난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다 건너까지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름지고 엄청난 농작물의 수확으로 인하여 경제적 부를 이루게 되어
살림살이가 넉넉해졌다는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요해지면 사람들은 교만해지고 거들먹거리며 건들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교만은 극에 달했었습니다.
6절에는 모압의 교만이 “심히 교만하도다”라고 평가하면서
네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하다는 것입니다(conceit).
-교만하다는 것입니다(pride).
-화를 내면서 설쳐댄다는 것입니다(rage, insolence).
-자랑한다는 것입니다(boast, babbling).
이 모습을 생각해 보니,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성도,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소득에 비해 씀씀이가 크고,
자동차나 입고 다니는 옷이 크고 화려합니다.
교만한 개인, 교만한 사회는, 분명히 하나님께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에 의한 자랑은 허무하게 될 것입니다.
과테말라의 방언 중에서 교만을 “숙이지 않는 목”이라고 한답니다.
목을 꼿꼿이 세우고 오만하고 거만하여 기고만장하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모압 사람들의 오만하고 거만한 행동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렘48:26~29)
하나님을 거스려 건방지게 행동하고 사람들을 얕보면서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라고도 했습니다. (렘48:30)
그들의 자랑은 아무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허무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괜히 우쭐거리며 건방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127:1~2)
모압의 교만에 대하여는 25:11,렘 48:42을 참조하세요.
다음절에서 모압의 교만은 통곡으로 바뀌어집니다.
▲7절,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라는 말은 모압사람들이
서로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운다는 뜻입니다.
'다 통곡하며'
모압 국민 모두가 다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만한 그들을 반드시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8절,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라버릴 것입니다.
여기 ‘멸하다’라는 말은 ‘병들다’, ‘쇠약해지다’는 뜻으로
농작물들이 병들고 흉작이 들어 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왕성했던 산업이 시들어버리고 황폐하게 되어, 경제가 곤두박질치게 된 것입니다.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본문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십마의 포도주의 우수성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지역에서 번성하던 포도나무가 급작스레 황폐하게 된 원인을 설명합니다.
언급된 '열국의 주권자들'은 아마도 여러 민족 단위의 사령관들로 구성된
앗수르 군대를 가리킵니다.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어 버릴 것입니다.
여기 가지를 ‘꺾는다’는 말은 ‘뭉개버리다’, ‘박살내다’, ‘타격을 주다’는 뜻으로
모압이 자랑하던 무역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말입니다.
각 나라의 주권자들이 모압의 농산물을 수입 금지시키고
무역선의 입항을 가로막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만들 것입니다.
그로 인해 경제의 원천이었던 농업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9절,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실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일어남이니라.
10절,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본 단락(6~14절)의 행간에 흐르는 주제는 '선지자의 눈물'입니다.
선지자는 십마의 포도나무가 황폐케 된 것을 슬퍼하는 야셀의 울음에
자신의 눈물을 섞습니다. 그의 눈물은 쉬임없이 흘러 헤스본과 엘르알레를 적십니다.
이 눈물은 물론 모압의 참상에 대한 선지자의 인간적 동정심의 발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범죄한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름진 밭에서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가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9~10절)
여기 기쁨이 사라진 것을 뜻하는 말을 ‘그쳤다’, ‘떠났다’, ‘없어지다’, ‘사라지다’ 등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수확물로 인한 즐거움의 소리가 끊어지고,
들판에 기름진 밭을 볼 때에 느끼는 기쁨과 희열이 줄어들고,
포도원에서 들려지던 노래 소리는 없어지고,
전 산업 현장에서 들려지던 소리들은 전부 중단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원래 포도짜는 농부들이 포도즙을 밟을 때 내지르는 즐겁고 유쾌한 소리가 없어지고
이제 비옥한 들판이 침략군의 장화에 의해 짓밟히는 소리가 가득할 것입니다.
▲11절,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하나님은, 교만으로 심판 당하는 모압을 위해, 슬퍼하십니다. (15:5)
하나님의 보편성 universality을 잘 보여줍니다.
보편성이란.. 하나님은 유대선민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음'과 '창자'는 몸의 내장, 심장, 창자를 가리킵니다.
이로 보건대, 선지자의 눈물은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것이 분명합니다.
'소리를 발하며'는 직역하면, '격렬하게 떨리며', '요동하며' 입니다.
모압에서 이루어질 가공할 심판을 생각할 때
선지자의 창자는 마치 하프 줄이 떨림같이 고통으로 뒤틀린다는 것입니다.
▲12절, 모압 사람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찌라도 무효하리로다
그들이 아무리 통곡하고 산당을 찾아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피곤하도록 봉사하며'는 직역하면 '모습을 드러낼 때, 기진맥진할 때' 입니다.
이는 그들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응답을 얻어내기 위하여
제 몸을 학대하는 이방 종교의 예배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상18:28 참조)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 신을 섬겼습니다. (왕상11:7)
도시와 마을 곳곳에 그모스 신을 위한 산당을 지어놓고 숭배를 했던 것입니다.
어려움과 위기를 당하자 사람들은 울면서 산당을 찾기 시작하여 그곳에서 통곡했습니다. (사15:2)
얼마나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정성을 쏟았던지 피곤하여 지칠 정도였습니다. :12
그러나 그 노력, 그 수고가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재난을 만나기 전에 정신을 차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참 신이신 하나님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13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어니와
14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품군의 정한 해와 같이
삼년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찌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소용이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
‘전에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어니와’
선지자가 제시했던 모압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 전에 그에게 주어졌던 말씀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예언이 첨가되어 계시의 결론 부분을 형성합니다.
'품군의 정한 해와 같이' 본문을 새번역은 풀어서 알기 쉽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삼 년 기한으로 머슴살이를 하게 된 머슴이 그 햇수를 세듯이, 이제 내가 삼 년을 센다.
삼 년 안에 모압의 영화가 그 큰 무리와 함께 모두 능욕을 당할 것이며,
남은 사람이라야 얼마 되지 않아, 보잘 것이 없을 것이다." (새번역)
마지막으로 결론의 말씀은 이 일이 3년 내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압의 모든 영화는 사라지게 될 것이며, 백성들은 능욕을 당하여
초라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히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건방지게 행동하면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압의 운명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교만으로 시작해서 수치로 마감되다.'
마치는 말
여러분! 비록 모압을 위하여 주신 경계의 말씀이지만,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듣고 경계해야 할 말씀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요해 질 때, 일들이 형통하여 잘 뻗어갈 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를 얻게 되었을 때,
내가 손만 대면 일들이 척척 잘 풀어질 때, 남보다 승진이 쭉쭉 올라갈 때.. 등
성공할 때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교만과 거만함에 빠지지 마십시오. 건방져지고 목에 힘이 들어가지 마십시오.
남을 깔보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안하무인격으로 큰소리 치고 자기 잘난 것만 과시하지 마십시오.
옆에 있는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도도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귀넘어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한 번 막으시면, 이루었던 모든 영화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사라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항상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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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타이타닉호(Titanic)는 영국에서 만든 4만6천 톤급의 대형 호화 여객선으로
영국 해상 권력과 진보된 기술의 상징이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영국을 출발하여 뉴욕 항으로 첫 출항을 할 때,
2,200명의 승객들은 흥분과 기쁨에 들떠서 마음껏 즐겼습니다.
호화롭고 거대한 배, 그것도 최고의 기술과 장식으로 제조된 여객선이기에
선장을 비롯해서 모든 승객들은 거만함과 사치스러움에 빠져서
웃고 마시고 춤추면서 흥청거리며 밤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본국으로부터 ‘빙산에 주의하라’는 무전이 왔습니다.
그러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J. Smith)는 승객들에게 안심시키며
거만을 떨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또 빙산 경보군요”
“걱정 말아요. 이 맘 때면 늘 그렇죠.”
“이 거대한 배가 그따위 빙산에는 염려 없습니다.”
그 후 다섯 차례나 계속되어지는 빙산 경보에도 시속 22노트로 계속 질주했습니다.
쾌속 질주하는 한 순간 거대한 빙산을 발견하였지만
이미 속도를 늦출 수도, 방향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에는 화려하고 거대한 타이타닉호는 두 동강이가 나서
첫 출항 닷새 만에 무려 1,515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깊은 심연(深淵)으로 침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 기술에 대한 과신과
호화롭고 사치스러움에 거만함을 떨다가 자멸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