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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2장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의 말씀
LNCK
2021. 9. 29. 10:29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의 말씀 이사야22장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 13~23장은 유다와 주변 10개국에 대한 심판을 연속적으로 증거합니다.
이제 23장에서 두로와 시돈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면 끝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사야 선지자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를 중단하고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예언(22:1~14절)과
예루살렘의 두 관료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22:15~25절)로 화제를 전환합니다.
이미 1-5장에서 타락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음에도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러 나라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이전에 심판의 경고를 이미 하였음에도
여전히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그 삶을 돌이키지 않아서
최후통첩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한 유다 백성,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심판이 임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절,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이상 골짜기 valley of vision'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5
예루살렘이 삼면으로 골짜기에 둘러쌓여 있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서쪽은 ‘힌놈 골짜기’, 남쪽은 ‘티로포에온(Tyropoeon) 골짜기’,
동쪽은 ‘기드론 골짜기’로 삼면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1)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1~4절은 흥청망청거리던 예루살렘의 허망한 함락을 예언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애끓는 심정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잔치하러 지붕에 올라가 있음을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집들에서 지붕은 평평하였고, 집의 공간 중 가장 넓은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지붕에서 쉬는 것뿐만 아니라 잔치를 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히브리어성경에는 ‘전부’라는 단어가 있음)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떠들썩하게 떠들며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앗수르 군대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히스기야왕이 다스리던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셀 수 없이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유다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하룻밤사이에 그 군대 18만5천명을 송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위 괄호의 해석이 사실이라면, 본문은 그 사건 이후의 상황입니다.
한 번 전쟁에서 승리했으면, 그 다음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데.. 흥청망청 취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역사에 감사하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고, 완악하게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결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 자체에만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닥칠 엘람과 기르 군대의 공격에는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6
혹은 이런 방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지금 전쟁이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상태는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먹고 마시자.’라고 말합니다.
즉 ‘어차피 내일 죽으니 오늘 실컷 죄나 짓자’는 태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조롱하고 부정하려는 교만한 이스라엘의 심리상태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미래에 일어날 비극에 대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고 예언하며 슬퍼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23:37~39)
우리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전도해야 할 자기 민족을 바라보면서
슬퍼하며 통곡하며 기도해야 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영원한 멸망의 형벌”(살후1:8~9)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3절,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백성들을 지켜야 할 관원들이 오히려 제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활도 팽개치고 도망하다가 포로가 되어 결박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명예와 용기가 자취를 감추고, 수치와 비겁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이 '이상을 상실한 백성들'의 결국입니다. :1
유다의 지도자들에 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시선은
1:23, 3:2, 3, 5:13, 7:2,2 8:7, 14, 29:15 등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업무를 저버리고 도망가다가
결박당한 모습을 환상으로 보면서,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본문 상황은 6절에 의거, 앗수르의 침입으로 봅니다.
왜냐면 엘람과 기르가 당시에는 앗수르에 동맹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람은 나중에 바사와 동맹해서 바벨론을 무너뜨리는데 가담하기도 합니다.
▲4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예루살렘의 미래가 이러하므로 선지자는 기쁨으로 환호하는 성읍의 한 가운데서
홀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어떠한 위로도 거부한채 실컷 울기만을 소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딸과 같은 그의 백성이 결국에는 패망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애통해 하며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시77:2, 렘31:15
여기 예루살렘을 ‘내 백성의 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자주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은 “처녀 딸 시온”이었습니다. (애2:13)
사랑스럽고 어여쁜 딸이었습니다. (사1:8, 렘4:11, 8:19, 21, 22)
그래서 예루살렘 성이 패망하여 그 거민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짓밟히고
상처투성이가 된 것을.. 아리따운 처녀 딸이 유린당하여 짓밟힌 것으로 본 것입니다.
왕궁과 성전과 각 가정에 있는 물건들을 수탈당한 것은
처녀 딸이 옷이 벗김 당하여 벌거벗은 상태로 본 것입니다. (겔23:26)
성벽이 헐리고 성전이 불타며 백성들이 짓밟힘을 당하여 죽고 상처 받은 것은
마치 처녀 딸이 벌거벗은 몸에 상처투성이 되어
치료받지 못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렘8:21~22)
너무나 슬퍼서 '나를 위로할 생각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5절, 환상의 골짜기(:1)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두 소리가 들립니다.
먼저 들리는 소리는 적군의 공격을 받아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요,
그와 때를 같이해서 살려달라는 백성들의 비명소리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서 메아리쳐 울립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바벨론의 침공 때였습니다.
그러나 성벽의 일부는, 그 이전에 간헐적으로 무너졌을 수도 있습니다.
남유다 아마샤 왕 때, 북왕국 요아스가 내려와서 예루살렘 성벽 4백규빗 정도를
허물고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왕하14:13
그러므로 5절의 '성벽의 무너짐'을 꼭 바벨론 멸망 때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여기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5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답답한 것은 파괴된 곳을 복구하며 싸울 준비와 노력을 하면서도
그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찾지도 않습니다. (8~11절)
▲6절,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7절,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엘람 사람...기르 사람’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는 앗수르 군대 중에 주도적인 두 나라가 진술됩니다.
'엘람'과 '기르'는 산헤립 당시에 이미 거대한 앗수르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엘람'은 바벨론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21:2),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엘람'과 '기르'는 여기서 각각 바사와 메대 대신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나라로 대표되는 앗수르 군대의 위용은
곧 궁사들과 전차 부대와 기병대와 보병대로 구성됩니다.
엘람과 기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싼 것을 예언합니다.
엘람은 앗수르가 남유다 왕 히스기야를 공격할 때,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고
후에 메대-바사의 연합 군대가 바벨론을 공격할 때는 (앗수르를 배신하고)
사15:1에, 기르는, 모압과 함께, 앗수르에 망한다고 예언되었습니다. ☞사15:1 기르
엘람 사람과 기르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쳐들어 왔습니다.
엘람 사람과 기르 사람은, 먼저 앗수르에게 패한 후에,
다시 앗수르 군대의 용병으로 고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의 병거와 마병이 예루살렘 성 앞에 정렬되어 있습니다.
‘병거는...정렬되었도다’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마다 적들의 병거가 가득하고,
성문 앞에는 마병이 정렬해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8절,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9절,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 못의 물도 모으며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여기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베일로 해석합니다.
현실과 국제적 정세, 주변 상황에 대하여 까막눈처럼 닫혀서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이 눈꺼풀을 벗겨주시자..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회개하도록 하는 데까지는
이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병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에야” (위기의 날이 닥쳐서야)
하나님이 눈을 열어 현실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하자
그 날에 비로소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앗수르의 거대한 군대가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숲속에 감추어두었던 무기 창고의 병기들을 보았더니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며,
다윗 성벽은 여러 곳에 무너진 곳들이 많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였습니다. :9
▲10절,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11절,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성읍 내의 가옥을 계수함은 그것을 헐어내기 위함이요,
그것을 헐어냄은 성벽을 견고케 하는 데 필요한 건축재료를 얻기 위함입니다. (9절, 렘 33:4)
그때부터 성벽을 견고하게 재건하고, 위기를 대비하여 물을 모으고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때 물(식수)은, 무기만큼 필요한 것입니다. (:9b)
자신들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전쟁에 대비한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잠간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단과 방법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 아무리 특출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지한 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묻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권을 잡으시고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앗수르를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다”고 책망하였습니다. :11
예루살렘은, 적군의 침공에 대비해서 예루살렘 방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에만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흥망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니,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아야 함에도, 그들은 인간적 준비에만 분주했던 것입니다.
여기 “경영하신 이”는, 자신의 계획과 목적대로 만들어 가시는 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예루살렘의 환란을 준비하셨고, 그것을 경영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이런 불행한 일을 준비해 오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깨닫지도 못하였고
역사의 경영자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12절,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예루살렘 성읍 앞에서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위기 상황들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경고요, 부르심이었습니다.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띰'은
회개의 외적 증거로서 동방에서 널리 시행되어 온 관습이었습니다. (15:2, 3참조).
이것이 그들에게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에게 “울며 애통하고...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라”(욜2:12~13)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2:18)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통회자복 하는 것만
이 절망적 상황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흥청망청 거리며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13)며
더욱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짓들입니다. 통곡하며 굵은 베를 띠라고 했더니만
오히려 소와 양을 잡아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흥청거렸다는 것은(:13)
하나님께 대드는 반항적 태도인 것입니다.
심지어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13)며 향락에 빠지고 될 대로 되라는
막가는 행동은.. 어처구니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13절, (보라)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13절 서두에는, 우리 성경에는 없는 감탄사 ‘힌네(보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좀 더 실감 있게 번역하면, “꼴 좀 보소!”입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그러나 회개에의 기대는 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미래의 재난 앞에서
자포자기로 일관하였습니다. 니느웨가 보인 반응과 비교해 보십시오. (욘3:6-9)
답답한 것은 파괴된 환경을 보면서 회개할 줄은 모르고
오히려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망령된 언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살 길, 용서받는 길을 명령하셨습니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통회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회개하기를 거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절대로 맛볼 수 없음을
엄숙히 선고하는 말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지는 않고 오히려 막가는 행동을 취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그들이 죽기까지,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단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을 심판하여 비참한 비극에 던져버리시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고 답답한 인간들의 행동에 대한 대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답답한 인간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어리석게 행동하고,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침략인지 하나님의 심판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재난은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닌지를
살펴 볼 줄 아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에 인간적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먼저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무릎 꿇고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할 생각은 하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슴을 치며 통회자복하며 회개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셉나와 엘리야김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 사22:15~25 출처
사22장 1절부터, 예루살렘에 대해서 예언하다가,
22:15절부터, 예루살렘의 관원인 셉나와 엘리아김에 대해 예언합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위 22:3절에 관원들의 비겁함이 나오고,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또한 사1:23에서도, 관원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결국 예루살렘의 죄와 허물은,
백성들을 잘 인도하지 못한, 지도자의 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지도자 엘리야김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 그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래서 사22장은,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심판을 당할 것이지만, (1~14절)
엘리야김으로 예표되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5~24절)
(마치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을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15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셉나에게 보냈습니다.
셉나는 유다의 국고를 맡았고, 궁의 재무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이자, 궁의 재무를 담당하는 총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에 대해서 우호정책을 펴는 사람들의 두령으로 있었고,
유다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애굽으로부터 원조를 구하는 정책의 중심역할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국고를 맡은 일’이란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가장 높은 직위였으며,
특히 중대한 국가의 공직에 주어진 이름으로 궁내 대신격이었습니다.
▲16절,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하지만 셉나는 이러한 위치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상황은,
주변의 열강으로부터 잦은 침공으로 인해 백성들은 불안할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셉나는, 자기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
셉나는 예루살렘과 아무 연관도 없는 이방인이었지만,
자기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저명한 유대인들의 묘실이 있는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만들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높은 곳’은 ‘다윗의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대하32:33)이란 말에서 보여진 것처럼
열왕 들의 묘실을 가리킵니다.
이들 무덤들은 예루살렘 주변 산들의 경사진 곳에 바위를 뚫어 만들었는데
이는 침해를 방지하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셉나는, 자신을 위대한 자라고 생각하여
유다의 열왕들이 묻힌 장소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17절,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18절,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19절,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그러나 예루살렘 높은 곳에 왕들처럼 묻히고자 하는 셉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는 단단히 속박된 채로 공처럼 말려져 광막한 지경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국땅에서 최후를 맞이함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불행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암7:17)
그는 관직에서 쫓겨나서, 서기관으로 보직이 낮아졌습니다.(사36:3)
그리고 그가 타던 영광의 수레도, 그와 함께 광야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18
여기서 셉나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자’로 표현한 것은 :18
그가 여호와의 지성소로 간주할 수 있는 거룩한 예루살렘을 더럽히고
또 지위를 올려 준 히스기야에게 누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는데,
이는 국가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들을 남용하여
자신을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때에
동일한 정죄를 당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셉나는 서기관으로 강등되었으며(36:3), 그 자리를 엘리아김이 차지했습니다.
▲20절,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절,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셉나의 자리에,
하나님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세웠습니다.
이름 앞에 ‘내 종’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한 것은
엘리아김이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던 종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20:3, 삼하3:18)
그의 부친 힐기야는 궁내 대신이었습니다.
힐기야는 아들에게 엘리아김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세우시리라’ 라는 뜻입니다. 이름처럼 되었습니다.
21절의 ‘옷’은 사람의 신분과 권세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두른 ‘띠’는 취임식 때 입는 관복을 가리킵니다. (출28:4, 39)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셉나의 띠를 풀어 엘리아김에게 주고
그를 새로운 직위(국고 책임자)에 올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사람을 세우십니다.
마치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왕을 세워주셨듯이
우리는 사람이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높아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낮아져 있는 상태라고 하여서
조금도 스스로 비굴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실 것입니다.
▲22절,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2~24절은, <엘리아김을 통하여 메시야를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22절은 엘리아김에게 주신 권한입니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둔다'는 말은
위정자의 책임의 무거움을 강조하는 비유적 표현인데
무겁고 긴 열쇠를 어깨에 둘러메었던 고대의 풍습이 반영됩니다. (9:6)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했을 때도
이와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마16:19)
열쇠를 가진 자는 집 안의 출입을 비롯해서,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합니다.
이 열쇠는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엘리아김이 신임을 얻고, 국고성의 열쇠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합니다.
계시록3:7~8절에 보면, 모든 권한을 가진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나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권세를 지닌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습니다. 엘리야김처럼!
주님께서 열면 열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닫으시면 닫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 아래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역을 감당합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바벨론/로마를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23절,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새로이 공직에 취임한 엘리아김의 위치가 확고부동할 것을
선지자는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 국가에 관한한, 그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목처럼 흔들림이 없이 견고할 것입니다. (슥 10:4 참조)
둘째, 가문에 관한 한, 그는 그 아비 집에서 온 가족이 의지하는 보좌 같이 될 것입니다.
즉, 영광이 될 것입니다.
▲24절,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그 가문에 속한 모든 이들이 견고한 못 같은 엘리아김에게 의지함을 말합니다.
15~19절은 셉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집안이 무너지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다면
24절은 엘리아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집안의 모든 자손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모습입니다.
첫째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고전15:22)
더 확대 적용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가 입은 자라면
우리 또한 엘리아김처럼, 잘 박힌 못이 되어서,
내 가족 모두가, 내 형제 친척 모두가, 내 민족 모두가, 내 못에 걸려서(의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입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5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절은 해석자들에게 큰 어려움을 줍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엘리아김이 친족을 등용하여 족벌 정치를 행사하다가(24절),
그로 인하여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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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상의 골짜기'
'이상 골짜기'라는 이름에는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면 이는 '이상 vision' 과 '골짜기 valley'의 대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상'을 보려면, 산의 높은 곳에서 먼 데까지도 보는 전망이 가능하나,
어두운 골짜기에서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상의 산'이라 말해야 정상적이나
'이상의 골짜기' 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상'에 관한 한, 예루살렘은 골짜기와 같다.. 전혀 보지 못함을 비꼬는 말이다.
선지자가 그 이름을 통해서 풍자하고 있는 바, 미래를 예측하는 시력을 상실한
예루살렘은 임박한 재난 앞에서도 회개하기는커녕,
기쁨으로 소동하며 분요하는 모습만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