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윗이 요나단과 눈물로 작별하고 이제 도망자가 되는 것이죠. 다윗이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가, 그리고 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그리고 이제 이 순간에 그는 한낱 지명수배자가 된 것이죠.
이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도망자'라는 TV드라마도 보고 했습니다만 그 순간 순간 쫓기는 불안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야말로 다윗이 무슨 까닭에 이렇게 도망자, 망명객이 되었는지 본인으로서는 참 기가 막힐 일이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 길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울에 의하여 왕궁에서 쫓겨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왕궁에서 왕이 되는 수업을 받을 거예요. 아버지 밑에서. 그러나 다윗은 왕궁에서 훈련받을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궁에서 훈련 받지 않아요. 재벌 2세 3세가 훈련받듯이 그렇게 훈련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 길을 박차고,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안 나가면 하나님이 (강제로) 불러내실 거예요.
모세는 어땠습니까? 바로의 양자로 입양되었지만, 그는 어쨌든 왕궁을 달아나야 하는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죠. 그도 광야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40년간 광야를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멀쩡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했고 요셉이 멀쩡이 아버지 집에서 형들에 의해서 팔려서 애굽 땅으로 종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이에요.
누가 알겠어요? 짐작이나 하겠어요? 어떻게 그 상황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 말이죠.
근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다윗은 도망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죠.
도망자가 어디로 가겠어요? 현직 왕이 지명수배 한 사람이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요?
그 전에도 다윗은 한 번 달아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마나욧에 있다가 사울 왕의 추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1. 다윗은 먼저 성소를 찾아갑니다
본문 삼상21장은 다윗이 놉 땅으로 가게 됩니다.
삼상21:1~2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놉 땅은 예루살렘 북쪽 (2Km 지점)에 있는데 여기에 지금 성막이 있었어요.
성막은 원래 실로에 있었는데, 블레셋과 전쟁 때문에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되면서, 제사장들이 에봇과 성막을 여기로 가져다 놓은 것이죠.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다윗이 성소로 간 거예요. 그가 도망을 가는데, 어디를 먼저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 그는 우선 성소로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먼저 성소로 달려가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성소, 하나님이 계신 곳, 구약에서는 이 성소가 성전을 뜻하는 것이고 지금 신약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성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당을 성소라고 생각을 하겠죠.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성소, 즉 예배당에 모이는 것 조차도 힘들어진 이 비대면 시대에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성소를 각자가 지녀야하는 하는 걸까요?
진짜 누구에게나 성소가 필요한데 여러분은 어떤 성소를 지니고 있습니까?
등록한 교회, 그곳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아침 예배를 드리러 매일 가는 곳, 그곳이 성소의 전부입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더욱더 일상적인 성소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 하루도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 성소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겠지만 만약 내가 날마다 들러야 하는 성소, 내가 날마다 무릎을 꿇고,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주님을 대면하는 그 성소가 없다면 오늘 반드시 그 성소를 하나 여러분들이 갖기로 결정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교 4년 다닐 때, 방 두 칸짜리에 애들 둘 데리고 정말 좁은 곳에 살았습니다만
그 안방에 들어가면, 붙박이 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옷을 걸고 나면, 그 중간에 방석 하나 놓을 정도의 공간이 생겼어요.
거기에 방석을 하나 놓고, 저는 그곳을 성소로 삼았습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그 방석에 제가 들어가서 앉는 거죠.
하나님과 씨름할 일만 있으면, 그 좁은 곳의 방석 위에서 엎드린 거죠. 하나님 앞에서 울 일만 있으면, 거기 가서 눈물을 쏟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울 수 있는 장소(나만의 성소)가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어떤 분은 자동차 안에 들어간다 그래요. 그래서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 운전대를 붙들고 그는 그렇게 통곡을 한다고 그래요.
새벽이건 밤이건, 그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에 들어가면 본인에게는 그것이 성소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사무실에 있는 화장실이 자기의 성소라고 말해요. 직장에서 정말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솟거나,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거기서 눈물을 쏟기도 하고 거기서 주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뭐 여유가 있어서 기도 방을 하나 조그맣게 만들어서 거기서 밤이고 낮이고 씨름을 한다는 거예요.
거기서 성경도 통독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마음껏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애지중지하는 공간이 있다는 거예요.
저는 웬만하면 여러분들이 그런 성소를 집이든, 어디든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온누리교회에 들어와서 cgntv를 5년반 섬겼는데 그때는 제 책상과 의자가 있고, 그 뒤에 책장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딱 방석 하나 놓을 공간이 있었어요.
제가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에 방석을 펴고,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응답이 올때까지 엎드린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기적적인 응답을 경험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성소, 그런 주님과 단 둘이서만 대면하는 장소가 꼭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거 없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겠어요?
우리가 살다보면, 정말 매일 기도해야만 되는,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펼쳐지잖아요. 그때 늘 다른 사람한테 가서 기도 부탁 하겠습니까? 그 전에 내가 직접 달려가야 할 성소, 내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 수 있는 나의 기도처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2. 다윗의 '땅의 영성 earth's spirituality '
다윗은 도망다닐 때, 제일 먼저 놉 땅의 성소로 갔어요. 거기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납니다.
아히멜렉은 엘리 대제사장의 증손자 예요.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가 아히멜렉 입니다. '아히야' 와 같은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삼상14:3
아히멜렉이 깜짝 놀랐어요. 아니 다윗이 왕의 사위인줄 다 아는데.. 또 사울 왕과 관계가 안 좋다는 것도 아는데.. 왜 이렇게 나를 찾아 왔지? 갑자기 두려워하며 긴장하게 되었어요. '떨며' 영접했다고 했어요. :1
그는 어쩌면 다윗의 행색과 얼굴을 보고 섬짓 했을 수도 있겠죠.
아히멜렉이 '왜 여기로 왔느냐?'라고 물으니 다윗은 '왕의 비밀 특명을 받고 왔다'는 거예요.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2
이게 거짓말이죠. 다윗은 왕의 특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삼상20장에서도 다윗의 거짓말을 살펴보았습니다만
믿음의 사람들에게 원칙적으로 거짓말은 허용되지 않지요. 사실 자세히 우리가 이렇게 행간을 살펴보면 '다윗이 거짓말에 꽤 능숙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사실 요나단 하고 비교하면, 요나단보다도 인격은 좀 떨어져요. 요나단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 인간적으로 많이 들어요.
그가 아버지 사울이 아니었다면, 정말 왕이 되고도 남고, 국민적인 지지나 환영을 받을 만한 인물인데 아버지로 사울을 만나는 숙명적인 관계 때문에 그는 아버지하고 생사를 같이 하는 존재가 되고 말죠.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다행히 쫓겨났단 말이에요. 여러분, 엉뚱한 사람 옆에 잘못 있다가, 그를 따라 같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다행히 왕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다윗이 왕의 사위가 되고 거기서 왕궁 생활에 젖어들고 익숙해지면 다윗이 금방 나태해지지 않겠어요? 거기서 영성이 자라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광야로 지금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교회들을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좋지요. 바람직하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뜻을 갖고 계시며 어떤 계획을 펼쳐가고 계시며, 무슨 일이 지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예의 주시 해야 될 때입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사회가 적대적인가? 왜 이렇게 오늘날 예배 드리는 이것조차 이렇게 잘 못 하게 하나?'
이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고,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이곳(예배당)을 성소로 삼는 어떤 종교적인 패턴에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여러분들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성소를 갖기를 하나님께 소원하고 계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주일예배를 교회에서 못 드리는 겁니다)
▲다윗은 어쨌든 아히멜렉을 속이는 바람에, 나중에 아히멜렉은 목숨을 잃게 돼요. 다윗이 거짓말 하는 바람에!
그러면 우리가 다윗의 거짓말에 대해서 비난을 해야 하나요? 성경에 다윗 얘기는, 우리가 그 다윗을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지금 들려주는 이야기입니까? (일면 그렇지만, 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한 통찰 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어요. "성경은 다윗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윗이 삶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는 거예요.
그는 이런 글을 남겼어요. "다윗은 우리가 그 행동을 본받고 싶은 사람이 못 된다. 다윗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다윗 만큼 잘 할 수 없음을 알고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 없다.
사실은 그 반대다. 다윗은 우리처럼.. 혹은 우리보다 더 나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는 사람! 결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는 않는 사람이다. 다윗의 삶은,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삶이다."
다윗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것은 성경에서 그가 이상적인 삶, 바람직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 냈는지를 우리에게 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 현실을 어떻게 이겨 낼 건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영성은, 현실적인 삶 속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를 우리에게 보다 더 일깨워 주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자기 책에서 '땅의 영성 earth's spirituality' 이라는 말을 해요.
우리는 '하늘의 영성'만을 자꾸 생각을 해요. 우리는 거룩하고, 그냥 침묵 가운데 깊이 침잠하는 그런 영성을 생각해요.
그래서 이 시끌벅적한 세상을 떠나서, 조용한 곳에 가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아주 조용한 분위기 가운데 하루 종일 기도하는
그런 기도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다윗은 그런 기도처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이에요. 저와 여러분은, 그런 기도처를 찾아다닐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혹자는 뭐 대담하게 1년씩 안식년을 가지면서 어디를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나 다 그럴 수 없는 직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영성을 가지고 이 현실의 거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요?
그게 우리가 성경에서 다윗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3. 다윗이 성소에서 얻은 떡과 검
삼상21:3~6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지금 다윗은 성소에 가서 떡을 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다윗은, 떡을 달라는 거예요.
이 떡은 다윗이 먹을 수 없는 떡입니다. 달라고 해도 안 되고, 혹시 받아도 먹어서는 안 되는 떡이란 말입니다.
레위기 24: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진설병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 제사장만 먹는 떡이에요. 이건 성소에서만 먹어야 되는 떡이에요. 외부로 반출이 안 되는 떡입니다.
이 진설병은 무교병이라서 맛이 없는 떡이에요. 안식일 날에 새 무교병을 만들어서 여섯 개씩 두 줄로 떡상에 쌓아 진열하는데 새 안식일이 되면, 그 전 안식일에 진설했던 것을, 물려둡니다. 즉 치워둡니다.
그걸 다 먹으면 되는데, 다 먹지도 못하면 어디 보관해 두는 거죠.
오늘날에도 성찬식 하고 난 떡과 포도주는 함부로 못 버리잖아요.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 신부가 그걸 다 먹다가 취하기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됐건 그 진설병을 먹으면 안 되는데, 다윗이 그걸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다윗의 요구는, 신앙심이 없는 행동입니다.
아니 신앙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성소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들이 먹는 무교병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받아서 밖에 나가서 먹겠다고 들고 나가도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태연하게 그걸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중에 1천 년 뒤에 이렇게 해석해 주십니다. 왜냐면 제자들을 데리고 안식일 날 밀밭사이로 걸어가시다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손으로 비벼서 먹었지요.
그때 바리새인들이 목격하고는 욕을 한 거죠. 예수의 무리들은 도대체 안식일을 어기질 않나 그 다음에는 음식 먹기 전에 손 씻지도 않았는데.. 정결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관행이나 보편적인 삶의 기준에 안 맞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당연히 비난할 만 하죠.
그랬더니 뭐라고 예수님께서 답 하십니까? 마12: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다윗이 한 무식한 행동을, 예수님께서 완전히 정당화 해 주신 것이죠.
아히멜렉은 규례에 묶이지 않았고, 율법에 묶이지 않고 떡을 줬단 말입니다. '다윗 일행이여, 정결하게 행동하고 살았냐? 오늘 부정한 행동이 없었냐? 그렇다면 가져가라' 하고 떡을 내주었습니다.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다윗이 여기 성소에 골리앗의 칼이 있는 줄 몰랐을 리가 없어요. 당시 성소에 칼이 진열된 까닭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서.. 그 당시에는 성소가 박물관 같은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칼을 기념품처럼, 성소에 보관, 전시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뻔히 거기에 칼이 있는 걸 알았던 거죠. '내가 무기를 두고 왔습니다. 칼이 없습니까?'
그랬더니 아히멜렉은 '그 칼을 가지려면 가져라' 그래서 다윗은 그 칼을 가져서 스스로 무장했습니다.
놉 땅의 성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주 쉽게 그러면 비유를 한번 봅시다. 만약 지금 이게 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라고요.
한 성도가 찾아와서 목회자에게 '내가 지금 굶어 죽게 생겼어요. 나는 당장 지금 먹을 양식이 없어요.' 그랬을 때
목회자가 '평안히 가라' 이렇게 말만 하고 내보내서 되겠습니까. 그가 지금 죽게 생겼습니다.
그때 목회자는 떡만 아니라, 칼을 줘서 보내야 된다는 말이에요.
물론 우리는 뭐 총이나 칼같은 무기가 교회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성소에 있는 칼, 다윗은 그 골리앗에게 빼앗은 칼을 요구했지만 우리 모두는 여기 교회에 와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칼을 받아 가지고 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성소에 들어오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 이 땅에 생명의 양식으로 오셨어요.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 I am the bread of life' 그 떡을 우리가 받고 나가야 된단 말입니다.
오늘 날 성소에 (교회에) 오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뭘 받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검을 받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야 세상에 나갈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늘 날, 너무 거룩한 의식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드리는 의식과 절차에 너무 묶여서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듣고 다 하는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얻지 못하고 교회를 빠져나가서는.. 세상에 나가서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이 당장 나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하룻만에 해결되지 않아요. 사울의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라' 이런 일 없습니다.
그는 앞으로 계속해서 10여년간 쫓겨 다닐 거예요. 그러나 그 때 성소에서 빵을 받았고, 칼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얻었기 때문에
그 이후, 그는 칼만 보면, 골리앗이 생각날 것이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 물맷돌과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할 거 아니겠어요.
그는 성소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배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 와서 예배 드리고자는 이유와 목적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면 어떤 성소이건, 성소에서 그분을 만나야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야 하다는 말이에요.
말씀을 받는 게 중요하지, 이 예배당 자리를 사모하는 것은 대단히 귀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받은 '말씀의 검'이 없다면 세상에 나가서 뭘로 싸우겠다는 말입니까?
이 시대가 얼마나 험악한 데.. 뭘로 우리가 하루하루 버티겠습니까?
그냥 교회를 갔다 왔다 마당만 밟는 것이 뭔 소용이 있겠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을 쫓겨서 어디로 갈 바를 몰라서 일단 성소가 있는 놉 땅으로 갔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성소에서 빵을 구하고 칼을 구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시대에 다윗과 동일하게 우리도 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우리도 다 무엇엔가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들 그냥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자기수준에선 다 죽을 만큼 힘들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배를 사모하는 이유가 뭐예요? 예배에서 뭘 얻어야 되는 겁니까?
그냥 형식적으로 거룩한 예배, 은혜로운 예배 그 1시간 남짓한 예배 가운데서 내가 그냥 위로받고 회복되는 그게 전부일까요?
그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은 생명의 빵이신, 생명의 떡이신 그 분을 만나야 할 것이고 그 분이 주시는 말씀(의 검), 언약, 약속이 있어야.. 우리는 산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하루하루 죽을 것만 같은 세상, 포기해버리고 싶을 것 같은, 죽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까닭은
그분이 함께하시기 때문이고, 그분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거란 말입니다.
▲저는 한 성도가 '목사님, 저는 더 이상 여기 예배당에 안 나와도 좋습니다.
(비대면 예배로 본당 인원수 제한이 된 상황)
저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날마다 말씀을 먹습니다.'
이 예배 장소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도, 자기는 안타깝지 않다는 거예요.
그 말 끝에 '저는 더 이상 이제 목사가 필요 없습니다.' (물론 목사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이 말도 맞습니다.)
이런 말 들으면, 사실 목사 입장에서는 한 편으로 섭섭하죠. 그렇게 막말하면 안 되죠.
'저는 목사님이 꼭 필요해요!' 이렇게 말해 주기를 목회자는 원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훌륭한 겁니까? 여러분, 주님께서는 3년 만에 말씀과 성령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다닌지 30년이 지나도 아직까지도 그 빵과 칼을 얻지 못해서 자기 스스로는 날마다 불안해 하는 그런 현실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4. 다윗 뿐만 아니라, 도엑도 성소에 출입했습니다.
삼상21:7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도엑'이란 이름의 뜻이 '불안, 걱정'입니다. 이름이 이러니, 자기도 불안한 사람이고, 남도 불안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인데, 사울이 에돔을 정벌했을 때 귀화한 거죠. 개종했겠죠. 그가 왜 여기 나타났을까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제사를 드리러 왔나 봅니다.
그런데 도엑은 성막에 와서, 제사에 집중한 게 아니라 다윗에게 눈을 반짝거리고 지켜본 것입니다.
결국 삼상 22장에서 사울 왕에게 고발해 가지고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놉의 아히멜렉과 85명의 제사장들이 다 죽게 됩니다.
그는 제사드리러 와서 자기 죄을 사함 받은 게 아니라, 거룩한 삶의 모습을 회복한 게 아니라 이권과 자기 생활에 보탬 되는 정보를 하나 얻어 가지고 사울 왕 앞에 갔습니다. 그는 벼락출세를 꿈꾸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다 도엑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 교회에 와서, 누군가로부터 다른 데서 듣지 못한 투자 정보라도 듣고, 다른 데서 얻지 못할 것들을 내가 얻고..
그래서 교회 활동을 통해서
내게 뭔가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이루어 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도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성소에 그 시간에 동일하게 다윗도 들어왔고, 도엑도 들어왔지만 다윗은 신앙이 회복되어 나간 반면에 도엑은 단 한 번도 신앙적인 초점에 맞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도 성소에 왔다가 쓸만한 정보만 하나 건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요나단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삼상20장 설교 참조 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 다윗을 부르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 성소를 사모하는 사람이에요. 성소에 어쨌거나 발길을 들여놓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엑처럼, 도엑과 같은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성소에 출입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란 것을 기억하십시오.
의외로 뜻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엑처럼 이 성소를 왔다 갔다만 하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사람들이 주는 정보, 사람들 간의 동정이 더 궁금해요.
그는 교회 다니는 목적이 '나한테 조금이라도 이로움이 있다면..' 그 이득 때문에 다니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10년을 다녀도 결코 변화되지 못하는 거지요.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이 교회에는 누가 오나? 어떤 사람하고 친해야 되나? 어떤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될까?' 이게 늘 관심이니까 여러분, 그게 도엑이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