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28장 예언을 무시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예언을 무시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이사야28:장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 불렸던 24~27장이 끝나고,
28~35장은 ‘화와 복의 노래’라 불립니다.
하나님께서 의와 평화가 가득한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의 악한 세력을 멸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구원의 성으로 불러 모으실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28장, 29장, 30장, 31장, 33장의 시작이 모두 ‘화 있을진저’로 시작됩니다.
29장은 ‘슬프다’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는데, 히브리어로는 ‘화 있을진저’와 같은 단어(호이)입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46번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이사야서에만 21번이나 나옵니다.
그 의미는 재앙이 내려 반드시 참상을 당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려 바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아니해도, 자연에는 귀를 기울이며, 자연의 소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자연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본문에도 그러한 자들의 무리들이 보입니다.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사24~27장까지 세상 끝 날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본문 사28장부터~ 35장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사야서 독자들(나)에게 주어지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즉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해서 멸망 받았다는 사실을
잘 보고, 잘 듣고 깨달아서
택함 받은 너희는, 저들이 당했던 그 비참한 일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면하였습니다.
마지막 때도, 세상은 참 진리의 소리에 외면할 것입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쳐도,
저들은 외면하고 무시하고, 핍박까지 할 것입니다.
예언서를 살펴보면서,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북이스라엘에게 임할 재앙 사28:1~6
이 단락의 예언의 메시지는,
에브라임(북왕국)이 앗수르에 멸망당하기 직전에 선포된 것입니다.
당시에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죽고 (B.C 745~727)
살만에셀 5세가 즉위하면서 (B.C 727~722년)
더욱 야심만만하게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서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북이스라엘은, 언제 침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북왕국의 호세아 왕을 비롯하여, 지도자들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물질적인 풍요에 젖어 방탕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무렵 북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들, 즉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그들의 타락 상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재앙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절,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찐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찐저
1절에서, 재앙의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로 시작되는 재앙의 경고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는 재앙을 당하는 데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왕국의 면류관 곧 그들이 자랑하던 성 수도 사마리아의 죄악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것은 “술취함과 교만함” 이었습니다.
‘술에 빠진 자의 성’
사마리아 성 전체가 큰 술독에 빠진 것과 같이 방탕에 젖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아합 왕의 부친인 오므리 왕 때에 세워진 사마리아 도성은
아름답게 둘러싸인 비옥한 골짜기 끝부분의 언덕 같은 봉우리 위에
건설된 성읍으로 “영화로운 관” 처럼 아름다운 성 이었습니다. (해발350m)
그렇지만 그 관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교만의 면류관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브라임=북이스라엘=북왕국
(롬8:5~8)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의 쾌락을 좇으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북이스라엘은 교만했습니다. 그 교만이, 물질의 부와 풍요 때문에 왔습니다.
세상적인 물질의 부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주1)
▲2절,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북이스라엘에 임하는 하나님의 재앙은 “쏟아지는 우박”처럼, “파괴하는 광풍”처럼,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임할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 를 통해서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주께서 보유하고 계시는'이란 뜻인데 앗수르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9년 B.C. 722년에
앗수르 공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렇게도 자랑하던 자신들의 면류관(사마리아 성, :1)은
앗수르 군대에 의해 땅에 짓밟히고, 내던짐을 당하였습니다.
▲3절, 에브라임의 (술에)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2절에는 면류관(북이스라엘)을 손으로 던지시고, 3절에는 발로 밟습니다.
▲4절,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3절에서, 그들의 부귀와 영화는 <시들은 꽃>처럼 떨어져 발에 밟힐 것입니다.
4절에서, <처음 익은 무화과>가 얼른 따먹히듯이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군대에게 신속하게 멸망 받을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더 이상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는 북이스라엘을
앗수르를 통해서 철저하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이 추구하고 자랑하던 부귀영화를,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재앙이 임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 육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그 날에 아무리 땅을 치고 회개를 해도 늦습니다.
(계18:4)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절,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두 면류관이 대조됩니다. 에브라임이 적에게 삼킴을 당하는 그날에,
교만한 면류관(사마리아 도성)은 쓰러지고,
대신 영화로운 면류관(하나님 자신)이 햇빛처럼 솟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남은 백성'에게 제한시킵니다.
이 '남은 자들'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합니다.
-'도성의 파멸에서 살아 남은 열 지파의 생존자',
-멸망한 열 지파와 비교할 때 '남은 자로서의 두 지파, 왕국 즉 유다'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자 합니다.
▲6절, 그 날 살아남은 당신의 백성에게는,
만군의 야훼께서 고운 꽃관, 화려한 왕관이 되시리라. (공동번역)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화관, 면류관으로 삼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교만함과 부유함을 화관, 면류관으로 삼았다가, :1~3
그 화관은 곧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입니다.
~앗수르에 의한 심판의 날이고,
~세상 마지막의 심판의 날입니다. <이중예언>입니다.
그러나 재앙 속에서, 소수이지만,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게 ‘그 날’은 재앙의 날이지만
남은 자에게 ‘그 날’은, 주님이 임하시는 날이요, 주님께 상 받는 날입니다.
실제로 앗수르의 침략으로, 나라는 망했지만,
그들 북왕국의 ‘남은 자’들은
남유다에 흡수되어, 여호와 신앙을 계속 이어갔을 것입니다.
예언서에는 '남은 자'의 신앙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북이스라엘에도 남은 자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고, 판결하는 신이 되시고, :6
싸움을 물리치시는 힘이 되실 것입니다.
타락한 시대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타락한 시대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시대에,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 남유다에게 임할 재앙 사28:7~15
이사야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 임할 재앙에 이어서
남유다에게도 임할 재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의 타락도 안타까웠지만
그들과 똑같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더욱 안타까워했습니다.
▲7절,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들 또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유다 사람들도’ 라고 해석됩니다.
초점이 1~6절까지 에브라임에서, 7절부터 유다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7~15절은, '에브라임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에 의해서
남유다에도 그와 똑같은 술취함과 방탕의 죄가 만연되어 있다'가 나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선지자는 특별히 지도적인 두 계층, 제사장과 선지자를 거론합니다.
▲8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사마리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백성들도 술 취한 상태였습니다.
앗수르의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쾌락에 빠져 비틀거렸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백성을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
곧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역시 독주에 비틀거렸습니다.
7절에 “독주” 라는 말이 세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주 취해도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취한 상태입니다.
“옆걸음 치며” “비틀거리며” “술에 빠졌다” 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판단이 흐려져 있으니까, 리더십의 오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계속 이렇게 공박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술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술뿐만 아닙니다. 세속과 쾌락과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져서
<옆걸음 치며,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판단을 내릴 때 실수하게> 됩니다.
▲9절,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자신들의 죄가 지적당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지도자들은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며 반발했습니다.
9절을, 공동번역으로 보십시다.
“저 자가 하나님을 안다고, 누구를 가르칠 셈인가?
되지 못하게 계시를 받았다고, 누구를 깨우쳐줄 셈인가?
겨우 젖뗀 아기에게나, 금방 젖꼭지 놓은 아기에게나 해 보시라지!”
남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지도자들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의 권면을 외면하고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그들은 혀 짧은 갓난아이의 말투를 흉내 내며 조롱하였습니다. ↙
▲10절,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For precept [must be] upon precept, precept upon precept;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line upon line, line upon line;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here a little, [and] there a little:
10절을 히브리어로 그냥 읽으면
“차우 라차우, 차우 라차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콰우 라콰우, 콰우 라콰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지에이르 샴, 지에이르 샴”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라는 말로
갓난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내는 소리와 같은,
무의미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 뜻도 되지만,
문맥을 보면,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교훈을
갓난아기들이 말 배울 때 중얼거리는 무의미한 말처럼
“차우 라차우, 차우 라차우, 콰우 라콰우, 콰우 라콰우, 지에이르 샴, 지에이르 샴”
무시하며 비아냥거렸습니다.
▲11절, 그러므로 (앗수르의)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이사야 선지자의 심각한 경고를
갓난아이의 무의미한 말투로 흉내 내면서 빈정대던
교만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선지자는 가차 없는 반격을 가했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경고를 갓난아이의 더듬는 말 정도로 여기는가?
그렇다면 좋다 이제 너희들은 생소한 말을 들을 것이다” :11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 사람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그곳을 짓밟을 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생소한 방언,
즉 앗수르 군인들의 말을 듣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12절,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우리의 안식이 되어야 하고,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기분을 변화시키는 상쾌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곳으로도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즐겨도 내 영혼의 상쾌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비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도 똑같이 그들을 13절에서 비웃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외면하고 사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비웃음을 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
▲13절,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13절은 10절의 반복인데,
다만 이전에 저들이 역겨운 소리라고 비난했던 그 소리를
이제는 앗수르인의 생소한 입술을 통해서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히브리어를, 발음 그대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차우 라차우, 차우 라차우/ 콰우 라콰우, 콰우 라콰우/ 지에이르 샴, 지에이르 샴”
즉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앗수르 군대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들으며,
철저하게 짓밟힐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들의 조롱을 맞받아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이죠.)
그래서 13절 끝에 보면, 방언이 다른 앗수르 군대가 올 때,
“뒤로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며” “잡히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디로도 이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가, 남유다에 치러 왔으나, 패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성취는, 그 뒤에 이어진 앗수르의 침입 때로 봅니다.
▲14절,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14~15절은,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예루살렘은 종교 지도자들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까지 타락하였습니다.
“오만한 자여” 라고 하였는데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고 조롱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도, 종교 지도자들처럼,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조롱하고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외치는 선지자에게
지도자들은 다음과같은 말로 비웃었습니다.
▲15절,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망과 언약” 이나 “음부와 맹약”은 같은 내용을 반복으로 강조합니다.
즉 사망과 음부의 세력이, 자신들을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정치 지도자들은, 애굽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온다 할지라도, 애굽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예루살렘은 앗수르가 침공해 올 때에 애굽과 동맹을 맺었는데
실상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과 허위(마음에도 없는 동맹, 진정성 없는 조약)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보였겠지만
그것은 거짓과 허위 속에서 나온 악한 인간들의 속성이었습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입니까?
그래도 북이스라엘보다는 남유다 백성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19대 왕조를 거치면서 단 한 명의 믿음의 왕들이 없었지만
남유다는 20대 왕조를 거치면서 그래도 4명의 믿음의 왕들이 있었고
선지자들도 북이스라엘보다 훨씬 많은 선지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습은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북이스라엘보다는 더 가르침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서슴없이 음부(애굽)와 맹약을 하며 거짓되게 살 것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고,
진실되게 살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 거짓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받기 직전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주위에는 믿음이 있다는 자들이
오히려 사탄의 조종을 받고 거짓되게 살아가는 일들이 비일비재 할 것입니다.
왜 믿음의 남유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세력을 더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외침 사28:16~22
패역한 남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십니다.
▲16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첫째, 시온에 견고한 기초석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돌은 ‘시험한 돌이요, 귀한 돌이요, 견고한 기초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이 돌이 곧 말씀입니다. 즉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돌은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통과된 검증된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수 없이 검증되고 검증된
살아계신 하나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이 돌이 얼마나 견고합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처럼 귀하고 견고한 것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세상 것보다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 이 돌은 무엇입니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을 믿지 아니할 때, 예수를 믿지 아니할 때,
환난 앞에서 사람들을 당황하고 허둥댈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굳건히 붙잡혀 있는 자는, 예수께 굳게 붙잡힌 자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17절,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시온의 모퉁잇돌로 기초를 삼고 '공평'과 '의'로 측량되어진 건물만이
영구한 견고성을 부여받는 반면,
'거짓'과 '허위'에 기초한 다른 모든 건물들은 철저하게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18절, 너희의 사망(애굽)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애굽)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9절, ‘재난이 유행병처럼 퍼질 때에, 너희가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재난이 아침마다 너희를 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너희를 엄습할 것이다.’
이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오히려 두려움이 될 것이다. (새번역)
둘째. 공평의 줄과 의의 추로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17~19절)
하나님의 공평 앞에 하나님의 의 앞에 거짓과 허위는 우박으로 무너질 것이고
숨는다 할지라도 물로써 떠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로(애굽과) 세운 언약도, 넘치는 재앙으로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살길을 찾아도 (애굽과의 조약)
하나님은 공평과 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면,
아무리 인간적 도움을 강구해도.. 그것은 우박과 홍수에 다 떠내려갈 것입니다. :17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우신 심판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19
▲20절,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나니
셋째. 이 말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준비한 정책과 모략이
전혀 쓸모없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침상이 짧아서 ...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유다 백성들이 처한 곤고한 상황이 속담투의 말로 기술됩니다.
그들은 눕기 위해서 침상을 조달했으나 너무 짧아서 적당치 못하며,
또 덮기 위해서 이불을 재단했으나 너무 좁아서 불충분합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그들의 측정이 그릇되어서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과의 동맹으로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보려는
그들의 인식과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꼬집은 말입니다.
오늘날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운 대책이
어떤 고난 앞에 “짧은 침상” 이나 “좁은 이불” 처럼
판단의 착오로,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21절,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시리니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
브라심 산은,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친 장소입니다.
기브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다섯 왕들의 연합군을 물리쳤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적해서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심판하시기 앞서 무엇을 외치십니까?
▲22절, 그러므로 너희는 경박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
22절에서 하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경박한 자가 되지 말라’
즉 하나님 말씀을 입을 삐죽거리고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 판에 새기고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즉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살면 너희의 결박이 더욱 심하게 조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덫에 걸린 짐승이 빠져나오려고 하면, 더욱 덫이 조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편안한 인생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살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작정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오직 예수 신앙과 오직 말씀 신앙과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 속에서 살아가는
귀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의 모략과 지혜 (에 대한 이사야의 외침) 사28:23~29
23~29절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씨뿌림과 추수에 비유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농부라면, 땅을 갈아엎지 않고 맨 땅에다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 씨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 씨가 아무리 튼튼하였다할지라도 새들이 와서 다 먹어버리거나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해 말라 죽을 것입니다.
또한 제대로 된 농부는 땅을 갈아엎고서 씨를 뿌리지 않는 농부도 없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농부가 밭(땅)을 갈아엎었다고 해서 아무 곳에나, 아무 씨를 막 뿌리지 않습니다.
농부는 갈아엎은 밭에 소회향과 대회향을 뿌린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미나리과의 식물인데, 일종의 ‘깨’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도리깨나 수레바퀴로 타작하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것들은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짓이겨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맥은 밀을, 대맥은 보리를 뜻하며, 귀리도 볏과의 식물입니다.
이것들은 수레바퀴를 굴려서 타작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타작하기 위해서는 여러 식물을 섞어서 심지 아니하고,
각자의 자리에 심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농부가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9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학문적으로 깊지도 않고, 세상의 물정도 잘 모르는 농부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땅을 어떻게 기경해야 하는지도 알고,
여러 씨앗을 어디에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도 알고,
추수하는 방법을 달리하여 거둘 줄도 아는데,
유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영적인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만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믿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마리아와 유다의 지도자들의 영적으로 우매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망하는 길로 몰고 갔던 사람들이 농부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삶으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던 것입니다.
▲23절,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외침에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2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일을 행하시며, 그 일이 기이한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일이 무엇인지,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24절,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절,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26절,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첫째. 농부는 땅을 갈고, 고르고..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24~26절)
농부는 땅을 갈아엎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땅을 고르게 합니다.
고르게 한 다음에, 씨를 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천박한 땅과 같은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갈아엎으시고
그것을 고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택한 자를 이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임하는 이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앗수르를 통한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땅을 갈아엎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갈아엎으신 후, 땅을 고르게 하십니다.
즉 회개 후에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십니다. 그 평안한 마음에 말씀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목할 것은 곡식 종자를 뿌릴 농부는, 아무렇게나 뿌리지 않고
반드시 씨앗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파종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마찬가지로 택한 자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6절,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하나님이 농부에게 이러한 농사짓는 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자기 백성을 가장 좋은 적당한 방법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7절,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둘째. 농부는 곡물을 타작합니다. (27~29절)
곡물이 성장해서 결실을 맺게 되면 농부는 적당한 때에 타작할 것입니다.
농부가 어떻게 타작 합니까?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고 작대기로 타작합니다.
소회향은 미나리과의 1년생 식물로 주로 맛을 내는 조미료나 약제에 사용됩니다.
소회향처럼 쉽게 떨어지는 열매를 도리깨로 세게 두들겨 타작할 경우에
그 알갱이는 너무 멀리 튀어나가거나 깨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회향을 타작할 때는, 가는 작대기로 약하게 톡톡 두들기며 타작합니다.
-대회향은.. 수레 바퀴로 굴리지 아니하고, 막대기로 타작합니다.
대회향은 소회향보다 굵고 강한 식물로서 음식의 맛을 돋구는데 사용됩니다.
대회향도 소회향처럼 섬세한 곡물이므로
밀이나 보리를 타작할 때 사용하는, 타작용 수레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회향보다는 굵은 막대기를 사용하여 타작하였습니다.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타작할 때 보다 가벼운 농작물은 알갱이가 깨어지지 않도록 막대기로 두들겨 탈곡합니다.
반면에 보다 단단한 곡식은 수레바퀴와 말발굽을 이용해 타작합니다. (41:15, 신25:4, 미4:12).
즉, 농사를 지어본 자라면 각 곡식에 따른 적절한 타작법 정도는
이미 지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농부가 이처럼 지혜롭게 곡물을 타작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택한 자들을 다루십니다.
택한 자가 소회향 같은 연약한 자일 때는.. 가는 작대기를 사용하시고
대회향 같은 직분자일 때는.. 굵은 막대기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나 사명자들은 어떻게 타작하시겠습니까?
소맥이나 대맥 같은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은, 수레바퀴로 타작하듯이
사명자들에게는 그만큼 더 많은 연단과 시련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28절,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하나님도 택한 자들을 알곡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타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작대기로, 어떤 때는 막대기로,
어떤 때는 수레바퀴로 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알곡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깐 애굽을 통해서, 블레셋을 통해서, 앗수르를 통해서,
바벨론을 통해서, 로마를 통해서 타작하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깨뜨리고 부수기 위한 목적이 타작이 아니라
택한 자로서 알곡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모 저모로 타작을 하신 것입니다.
타작을 할 때 쓸모없는 껍질을 떨구어 내듯이
하나님의 타작도 모난 것들을 부수고,
필요 없는 것들을 떨구어 내기 위한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님의 타작이 올 때 “나에게만 왜 이런 고난이 옵니까?” 하지 말고
감사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9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나를 타작하시는 하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그 지혜는 높고 위대하십니다.
“나를 왜 이런 고난 가운데 두고 계실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침묵하고 계실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을 보이시지 아니 하실까?”
라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돌아보고 계시고
나를 지켜주고 계시고 나를 한 알의 알곡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가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농부 되시는 하나님 손에 잘 가꾸어져서 큰 나무들이 되시고
많은 열매를 맺는 귀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는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북왕국은.. 교만과 술취함의 방탕한 삶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남유다는.. 술취함과, 특별히 말씀과 예언을 조롱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을 보고 참으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렇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저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저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믿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회복>이라는 영화를 보고, 유대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유대인 랍비가 하는 말이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우리들이 버린 쓰레기를 너희들이 신으로 만들었다” 는 말을 듣고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 패역하고 완악한 이스라엘 땅에도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는
“메시아닉 쥬”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땅에 약 5천명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처럼,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의 패역함과 완악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목이 터져라고 외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
허공을 친 것처럼, 오늘날도 세상의 끝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인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는 말씀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적용은 ☞ 창조적 파괴 를 보세요!
.................
주1)
최근에 오스트리아 백만 장자인 “카를 라베더”(47) 씨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작은 오두막집 단칸 셋방으로 이사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더 많은 부와 사치가 곧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한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치와 소비를 멈추고 진짜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한 척하는 직원들도, 중요한 사람인 척 하는 손님들도
모두 배우 같았고, 진짜 사람 같은 사람은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영혼도 없고 감정도 없는 5성급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나를 망하게 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치와 소비를 멈추고 진짜 삶을 시작’ 하십시다.
왜냐하면 ‘사치와 소비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하나님께 영광과 자기 삶의 만족)를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