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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29장 남유다의 심판과 회복

LNCK 2021. 10. 7. 16:30

 

◈남유다의 심판과 회복           이사야29:장               여러 설교 정리

 

눅19:장 41~44절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곧 다가올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이사야 선지자도 소명과 역할을 상실한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 슬프다 아리엘이여 (심판)          사29:1~4

 

▲1절,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아리엘은 다윗의 진 친 성읍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절, 내가 필경 너 아리엘 lion 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  furnace 과 같이 되리라

 

북왕국 사마리아를 가리켜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 이라고 칭하면서  (사28:1, 3)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남왕국 예루살렘을 가리켜 ‘아리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왜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아리엘’로 불렀을까요?

 

‘아리엘’의 뜻은

1) ‘하나님의 화로 furnace’ 라는 뜻으로서

    ‘성전 번제단의 바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사자’ Lion of God 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맥을 따라서 해석하자면, 위에 ‘아리엘’이 4번 나오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 아리엘은 ‘하나님의 사자 lion’라면,

   2절의 4번째 아리엘은 ‘하나님의 화로’가 맞습니다.

 

‘네가 ...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희생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자랑을 삼는 네가 바로

아리엘(화로)과 같이 될 것이다.'

 

즉, 희생 제사의 피로 둘려있고,

그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불로 태우는 그러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이 장차 변할 것이다...

임박한 재앙이 예루살렘에 몰고 올 고통은 '슬픔과 애통'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해마다 3대 절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냈습니다. 

  

그렇게 해마다 절기를 지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괴롭게 하고,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라’고 세 가지를 선포하십니다. 

  

아마도 이사야 선지자는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무리들을 향하여

성전 뜰에서 불타고 있는 번제단(아리엘)을 가리키며, 이 메시지를 외쳤을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형식적이고 의식적이었습니다.

 

(사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너희의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3절,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이 공격은 앗수르인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4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

 

    *4절, 네 목소리는, 네가 죽어서 묻힐 땅에서부터 들려오는 유령의 소리처럼

       희미한 속삭임 같을 것이라./ 쉬운 성경

 

앞에서 언급된 장기간의 포위의 결과로 그들이 극도로 쇠약해질 것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땅에서 말하는 소리' 와 '티끌에서 나는 소리'로 표현합니다.

 

언급된 '땅'과 '티끌'은 더 이상 낮아질 데가 없는 수치의 극한

혹은 주검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다시 한 번 ‘아리엘’ 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리엘’은 번제단 중에서도, 제단 아래로 떨어진 희생 제물의 피가 한데 모아져

불타도록 만들어진 (화로)부분을 가리킵니다.

 

희생 제물의 피가 기름과 한데 섞여 불타는 것처럼

적군의 공격을 받은 예루살렘은, 성읍 전체가 화로처럼 활활 불타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땅에 이러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 우리 교회에서 이런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배도하고 타락한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에서 만큼은, 배도하고 타락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른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만큼은

죄와 함께 드려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러운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뻔뻔하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짐승의 피만 흘리면 하나님이 제사를 다 받으실 줄 알았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라고 해서 다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임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한 예배입니다. (요4:23)

 

우리 교회 예배 때 먼저 회개 기도를 통성으로 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짐승의 피만 드리고, 자신들의 죄는 회개하지 않는 모습처럼

오늘날도 성전에만 나와서 자신의 죄는 회개하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 곳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가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마당만 밟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길 뿐입니다.

           

 

◑2. 아리엘을 도우시는 하나님 (회복)        사29:5~8

 

▲5절,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이라.

 

앞에서 금방이라도 심판하실 것 같았던 하나님은, 갑자기 상황을 돌변시켜서

예루살렘을 공격한 자들을, 즉 앗수르 군대를

티끌과 겨처럼 날아가버리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무대의 무리 ... 강포한 자의 무리’

문자적으로는 '너의 이방인들의 무리.. 잔혹한 자들의 무리’입니다.

 

'티끌'과 '겨'는 '나약한 것'혹은 '무력한 존재'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6절에 보면 6가지로 앗수르 세력을 징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벽력, 지진, 큰 소리, 회리바람, 폭풍, 맹렬한 불꽃’ 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벽력과 .. 맹렬한 불꽃’ 그 외 나열된 여러 현상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고전적인 표현에 속합니다. (출19:16-19, 왕상19:11-13, 겔 20:47, 48).

    

실제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

앗수르 군대가 그 밤에 18만 5천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왕하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7절,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앗수르의 계획이 꿈같이 허무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8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앗수르의 계획은, 7~8절의 말씀처럼 밤의 꿈처럼, 밤의 환상처럼 허무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가, 꿈에 아무리 먹고 마셔도 여전히 그 속은 비고 갈증을 느끼듯이

그들의 악한 계획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시는 데에도 불구하고

저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이렇게 분명하게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데도

저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고

형식과 외식에 잡혀 하나님을 건성으로 섬겼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날마다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지켜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형식과 외식에 잡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형식과 외식을 싫어하셨는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마태복음 23장에서 7번이나 저주를 하셨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받은 자는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사모하면서

다스리심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형식과 외식으로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수 없이 많은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공허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는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 아리엘의 영적 무지          사29:9~15

 

무서운 앗수르 재앙의 메시지를 외쳐도 회개하지 않고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도 감사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해

심판이 또 다시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줄 모르는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와 무감각은

술에 취해 감각을 상실해 버린 자와 같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욱 심한 어둠과 무지를 선포합니다.

 

▲9절,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이 말은 풀어서 해석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의심하고 믿지 못해 머뭇거려 보아라.

그러면 그 결과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눈을 감아 보아라.

그러면 그 결과로 눈이 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신’ 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남유다의 영적 무지에 대해> 이사야는 계속 이렇게 지적합니다.

  

▲10절,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첫째. 눈을 감기게 하시고, 머리가 덮히게 하십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 부어 주사’

백성들의 술 취함(소경됨)의 원인이 하나님께로 소급됩니다.

'깊은 잠의 영을 부어주신 분은 바로 여호와시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은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는 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눈을 감기게 해버렸으니 소경의 인도를 받은 백성들 역시

소경처럼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눈은 선지자요 ... 머리는 선견자라’

눈을 가리고 머리를 덮음은 전혀 볼 수 없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선지자 혹은 선견자는 백성들의 '눈'과 '머리',

즉 지도자로서 올바로 보고, 바르게 생각하여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스스로가 눈이 멀고, 소경이 되었으니,

누가 누구를 인도할 수 있겠는가요! 

(마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영적으로 무지한 자는 자신만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자를 따르는 자들 까지도 불구덩이 속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11절,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기록된 문서는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로서

당시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그러니 유식한 자가 읽지 않는 것은, 봉해져서 못 읽겠다는 것인데.. 핑계일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12절,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둘째, 하나님 말씀에 이래 저래 핑계를 대며 무관심해 합니다.(11~12절)

 

유식한 자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지도자들인데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닫혀져(봉해져) 버렸기 때문에 읽지 못하겠다고 핑계를 댑니다.

봉인을 열어서 보면 될 것인데 말입니다.

  

무식한 자들은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무식해서 하나님 말씀을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식하다는 핑계로 하나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13절,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셋째. 입으로만 신앙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13절)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계명을 가르침 받을 때

이런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히스기야 왕 주도 하에 남왕국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종교개혁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교도의 관행들과 우상들은 여지없이 척결되었고,

모세 때의 고유한 예배 의식이 부활되었습니다. (왕하18:4)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되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내면까지 바꾸는 데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참종교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참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과 '경외심'은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입술의 종교를 혐오하십니다.

신약에서 이 말은 입술과 혀로 그들의 경건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마15:7~8)

    

▲14절,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넷째. 지혜와 총명이 사라질 것입니다.(14절)

 

마치 '빈곤의 악순환'처럼

백성들이 무관심하고 냉담하니까, 하나님도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15절,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자기의 도모를 ...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이 백성이 징벌 받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제시됩니다.

그것은 애굽과 동맹을 체결하려는 자들의 음모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지적해 왔습니다. (20:5-6)

 

따라서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 몰래 은밀하게 이 일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그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어둠 속으로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안다고 스스로 공언하는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영적 무지를 증명해 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다섯째.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만하려 (속이려) 합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시고, 모두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시139:3~4)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알랴’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까지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몰랐습니다.

(렘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우리의 생각까지도 알고 게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것은 ‘누가 나를 보랴’ ‘누가 나를 알랴’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무지하면 이렇게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이상 기후가 일어나도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그냥 짐승처럼 하루 하루 먹고 마시고 즐기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기이하고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들은 그러한 기이한 일들을 깨닫고 살아가지만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은 손에 쥐어줘도 모르고, 눈에 보여줘도 모르고,

가르쳐 주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무감각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4. 토기장이 하나님의 주권적 회복         사29:16~24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6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예루살렘 거민들은 토기장이와 진흙을 혼동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토기 그릇을 빚는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토기장이에 의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빚어지는 진흙은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조물주를 피조물로 곡해한 것입니다.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질그릇이,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고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그들은 또한 자기를 빚은 자에게 ‘그가 총명이 없다’ 하는데

이 말은 곧 ‘그가 무식하다’ 말하는 것인데

피조물이 창조주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요!

  

우리 주위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그들이 부인하고 무시해도

인간은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손에 지음을 받은 나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토기장이로 비유한 다른 예는 45:9, 64:8, 욥10:9, 렘18:4-6 등을 보세요.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에게,

<하나님은 또 다시 한 번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17절부터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죄로 인해 지금 즉시라도 심판받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도 참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17절, 미구에(오래지 않아)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레바논의 삼림'은 권세자들의 표상으로 (2:13, 10:34, 33:9, 35:2, 60:30),

또 그 삼림을 자르는 것은 비천하게 됨의 상징으로 (10:34, 37:24)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삼림은 경작된 평원이 될 것이며,

반면에 경작된 평원은 삼림이 될 것이다.'

즉, 권세자들은 낮아질 것이요 반대로 억압받던 백성들은 높아질 것이다.

 

한편, 본절 이하로부터 24절까지는 메시야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18절과 연결해서 볼 때, ‘미구에’는 ‘그 날에’란 뜻입니다.

그 날은, 이사야 당시로 보면, 앗수르에 의한 심판의 날이요,

이중예언으로 보면,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날입니다.

   

▲18절,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그 날에 영적인 대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체적 치유만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이제 그토록 단단하게 굳었던 백성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변화될 날이 오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여 무지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어주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도 마지막으로 성령의 대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19절,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겸손한 자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즐거워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19~21절)

 

비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20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19절과 반대로 포악한 자는 사라질 것입니다. 비웃는 사람은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죄 지을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모두 끝장 날 것입니다.

 

▲21절,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그들은 말 한 마디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을 올무에 걸리게 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의로운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날에 어떤 모습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 영적의 무지함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지혜로 충만하고, 성령의 다스리심 속에서

겸손하면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2절,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남유다를 징계하셨지만, 완전히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2~24절)

종말론적으로, 메시야는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얼굴을 실색하지 아니하게 하실 것입니다.

실색은 창백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믿는 자들이 온갖 수모와 천대를 받았지만

그 날에는 조롱한 그들이 수모와 천대를 받을 것입니다.

 

▲23절,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하다’ 말이 세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앞서 13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하였는데,

 

토기장이 하나님의 새롭게 지음받은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24절,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앞서 14절에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고 하였는데,

토기장이가 고치시고, 빚으실 새 백성들은,

총명하게 되고, 교훈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토기장이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자신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어가듯이

지금도 이모저모로 우리들을 만들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 사랑의 손길을 매일 매일 깨닫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