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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0장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

LNCK 2021. 10. 8. 16:59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    이사야30:장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 28장에서 35장까지 이어지는 화와 복의 노래 중에

오늘 본문 30장은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의 영적 타락을 책망하며

죄에 대한 징계를 경고함과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며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은 신흥강대국인 앗수르의 서진 정책으로

민족들이 서로 동맹을 맺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친 앗수르정책이 그들의 살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유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왕이 된 히스기야와 일부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처음에 애굽과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BC 701년, 산헤립이 앗수르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을 때,

애굽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애굽은 앗수르를 상대할 힘이 없었습니다.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애굽을 의지했던 유다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이라고, 이사야는 책망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문 30장

1~17절까지는 유다가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것에 대한 책망과 징계의 경고를,

18~26절까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복에 대한 약속을,

27~33절까지는 민족들을 위협하던 앗수르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1. 애굽과 동맹하지 말라     사30:1~7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자

당시 유다 왕 히스기야는 반 앗수르 정책의 일환으로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심히 큰 죄로 여기십니다(1~2절).

애굽을 의지하면 오히려 수치스럽게 되고(3~5절).

유다 사신들은 여러 선물을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애굽으로 갔지만

아무 유익이 없었습니다(6~7).

 

▲1~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패역한 자식들이여’

'패역'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동물에 대해, (호4:16)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패륜아에 대해 주로 사용되었는데, (신21:18, 시78:8) 

이사야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적용하였습니다. (1:5, 23)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굽과 어떠한 종류의 동맹이나 결속도 체결하지 말  것을  엄중히  명하셨습니다. (출13:17, 신17:16 참조) 

 

▲3절,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남유다가 애굽으로부터 기대하였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애굽은 그들에게 ‘힘’과 ‘그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수치’와 ‘수욕’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애굽은, 앗수르의 랍사게가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무력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사36:6)

 

▲4절, 그 방백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본문만 가지고서는 언급된 ‘그 방백들과 그 사신들’이 애굽 사람을 가리키는지, 

유다 사람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할 때,

2절에 남유다 사신들이 이미 애굽으로 내려간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방백(대신)들로 봅니다.

 

‘소안’(타니스)은 애굽 북부 델타 지역의 동쪽에 자리한 도시(19:11;민 13:22)이며,

‘하네스’는 중앙 애굽의 나일 강 상류에 있는 도시로, 

후에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라 불렸습니다. 

  

▲5절, 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는 민족을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그렇습니다. 오늘날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도움’이라는 것.. 다 헛된 것들입니다.

도리어 내게 수치가 되고, 수욕이 되게 할 뿐입니다.

 

막다른 길에 봉착했을 때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도움은.. 빨리 단념할수록, 내게 이익입니다.

 

왜 빨리 단념하는 것이, 내게 이익인가 하면,

내가 인간적 도움을 의존할수록..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본문의 경고처럼 오히려 ‘수치’와 ‘수욕’을 (하나님이 내게) 얻게 하실 것입니다. :3

 

▲6절,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 보물을 약대 제물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

 

애굽으로 파송된 사절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키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남방 짐승’은 '남쪽(애굽) 방향으로 짐을 싣고 가는 나귀와 약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 남방으로 향하는 짐승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이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네겝(유대 남쪽 사막)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고 번역했습니다.

 

7절,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가만히 앉은 라합’

‘라합’은 창조 질서에 대적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을 뜻하는데,

   ※여리고성의 라합과 자음이 같습니다. 기생 라합은 넓다wide는 뜻. (비슷한 뜻이네요.)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애굽 군대를 바다에서 물리치신 사건과 관련하여

애굽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51:9, 욥9:13, 26:12, 시87:4, 89:10).

 

이 괴물은 지금, 태만함에서건 무력함에서건,

바다에서 꼼짝도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유다를 도울 수 있겠는지요?

 

 

◑2. 예언을 무시해서, 남유다가 심판을 받다  사30:8~14

 

왜 남유다가 심판을 받게 됩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9절)

또한 선지자에게,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10절)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반드시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예언)에 불순종함.. 그 다음 수순은, 심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들을 때

‘듣기 싫다. 좋은 말만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게 다 멸망의 징조인 것입니다.

 

▲8절,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 (글을 쓰는 돌판 또는 점토판)과 책에 써서,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글로 남겨서

그들의 불순종과 패역함에 대한 증거를 삼으려 하십니다. 

 

한편, 서판 혹은 책에 기록하고자한 내용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 이사야30장입니다.

 

이사야가 한 번 외치면.. 그 외침은 사라져 버리지만,

서판(오늘날의 책)에 기록해 두면,

두 번, 세 번, 열 번도 넘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읽게 되고, 듣게 됩니다.

 

여러분, 기록의 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성경도, 누가 기록해서 전파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다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렵고 힘들게 수고하며 기록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그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기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성경 필사원 수도사들의 노고      

 

▲9절,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선지자가 지적한 바, 남유다 백성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마음 자체가 이미 패역해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듣기 싫어할 뿐 아니라, 거짓말을 능사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역한 백성’은 문자적으로는 ‘반역의 백성’인데,

모세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할 때

저들이 상습적으로 나타내었던 그 불순종과 완악함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민 17:10)

 

▲10절,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하나님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백성들은

바른말 하는 선지자의 입을 막고

오히려 자기들의 뜻에 맞는 ‘부드러운 (미끄러운) 말’과

‘거짓된 (속이는) 말’만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11절,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여지는 교훈과 훈계를, 제발 그만 듣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악으로 치닫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오하며,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협박하고 방해합니다. 

 

이러한 예에 대하여는 왕상22:8~13, 렘11:21, 암2:12, 7:13, 미2:6 등을 참조하십시오.

 

▲12절,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압박’은.. ‘억압’, ‘상해’를 뜻하니,

애굽에 보낼 재화(財貨)를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취한

강제적인  수탈을 가리킵니다. (왕하15:20)

 

‘허망’은.. ‘왜곡됨’, ‘뒤틀어짐’, ‘사악함’을 뜻하니,

애굽에 의존하는 외교정책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본문 여호와의 말씀이요, 이사야의 예언인데,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3절,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

 

‘이 죄악’은, 12절의 ‘이 말’과 대조되는데

구체적으로는 애굽과의 동맹을 지칭합니다. 

애굽과의 동맹은 유다를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의 전조로 작용하게 됩니다.

 

▲14절,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 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움이, 

그릇을 깨뜨리는 토기장이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13절에, ‘무너지는 벽’의 비유에서

14절은, ‘파쇄되는 토기 그릇’의 비유로 재차 강조됩니다. 

 

‘무너지는 벽의 비유’에서, 그 초점이 멸망의 급속함에 놓였다면,

'파쇄되는 토기 비유'는, 그 초점이 멸망의 철저함에 맞추어집니다. 

 

 

◑3. 영혼이 쉼을 얻는 길    사30:15~17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유다 백성들이 마땅히  취했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는

‘돌이킴’과 ‘안연히 처함’이었습니다. 

 

‘돌이킴(슈브)’은 보통 회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유다가 애굽에 대하여 취하고 있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회개였습니다.

 

‘안연히 처함(샤캍)’은 인간의 조바심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차분함을 의미합니다. 

 

동일한 메시지가 아하스 왕에게도 주어졌었습니다

사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샤캍)

위기에 처했으나, 안절부절 하지 말고, 차분하라는 뜻입니다.

 

▲16절,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남유다는, 하나님의 구원과 힘 대신에

애굽의 말과 기병을 선택하였습니다(31:1). 

 

선지자는 ‘말을 되받아 치는 기법’(언어 유희)을 이용하여

악인들이 의지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올무에 빠짐을 재치 있게 묘사합니다.

 

▲17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충실했을 때,

그들은 ‘한 사람으로 천을 쫓으며, 두 사람으로 만을 쫓을 수' 있었습니다. (레26:8, 신 32:30, 수23:10). 

 

그러나 이제 하나님으로 힘을 삼기를 거부하고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 백성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경험을 겪게 됩니다.

 

‘너희 남은 자는 ... 영(嶺)위의 기호 같으리라’

전쟁의 참화에서 겨우 살아남게 될 패잔병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산꼭대기의 깃대’와 ‘고개(嶺)위의  기호’에 비유합니다. 

아주 조금 남았다는 뜻입니다.

 

♣설교/ 영혼이 힘을 얻는 길                     주1)

 

 

◑4.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의 복        사30:18-22

 

▲1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한 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인간은 하루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하나님께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유다 백성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셨던 것처럼

남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하나님이 기다리시니 나도 기다린다  (강추)

 

▲19절,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부르짖으며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19절)

어떤 고난 앞에서 슬퍼하지만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렘33:3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기다린다는 나의 신앙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건만

그들은 그렇게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자신들의 생각대로 뜻대로 애굽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응답이 늦을지라도 인내하며 부르짖어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기다림입니다.                              ☞기도 -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기  

 

▲20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절,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스승'은, 말씀을 가르치는 선지자 입니다.

한 때 핍박을 당하여 몸을 숨겨야 했던 선지자들이

다시 세상에 나와,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뒤에서 말하는 이’는 선지자입니다.

그 앞에서 듣는 이는 백성들입니다.

가르치는 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것과 관련하여,      

선지자들는 양무리의 뒤를 따라가며, 갈 길을 인도하는 목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치는 목자가, 앞서 갈 때도 있지만, 머리양이 앞서가고, 목자가 뒤따라가기도 합니다.)

 

‘우편’과 ‘좌편’은 인간 생활의 모든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며(신5:32, 17:20),

이로써 선지자는 우리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참된 인도자로 삼고,

그의 말씀에 따라 우리의 행위를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려면, 말씀에 순종하며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20-21절)

앞서 9절에서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환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의 인생들이 살아가는데 정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인생이 아무리 좌로 우로 치우치며 몸부림치며 살아보아도

그 길은 절대로 바른 길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말씀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말씀을 너무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아는데 하나님의 숨소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했던 것처럼 이 시대 믿는 자들도 똑같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내 지식과 내 형편에 맞추어서 내 호흡에 맞추어서 전하는

인간의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도 글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씀을 보아야

하나님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말씀만 듣는 것으로 읽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숨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깊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몰라서 패역한 민족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소리며 호흡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날도 온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고 호흡이라는 것을 믿는 자에게

지금도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그 말씀이 살아서 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히4:12)

 

▲22절,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상의 파기로 이어집니다.

 

말씀이 고갈되고 불신앙이 팽배한 시대에 우상숭배는 큰 유행이 됩니다만, 

그러나 선지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힘 있게 선포되고

백성들의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리게 될 때,

우상은 그 즉시로 존재 가치를 상실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려면, 우상을 버리고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22절)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우상을 버려야만 합니다.

  

오늘날도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사탄의 숨소리와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우상은 꼭 금이나 은으로 조각한 것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우상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가장 무서운 우상이 무엇일가요? 돈과 자기 자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상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런 자들에게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호흡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런 자들에게 성령의 음성이 들리겠습니까?

 

 

◑5.  하나님을 기다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실 것이다    사30:23~33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의 생활이 풍요로움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같이 물질적인 풍요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단순히 물질적인 축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남유다에게 부르짖고, 말씀에 순종하고, 우상을 버리면

이러한 회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이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후에도 남유다는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 약 115년을 더 기다리시다가, BC 586년에 바벨론을 통해 남유다를 멸망시키셨습니다. 주2)

  

▲23절,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의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메마름'과 '비옥함'은 하나님을 의뢰함과 관계가 깊습니다.

 

▲24절, 밭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육지창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맛있게 한 먹이’  

문자적으로는 '발효된  혼합물'이니, 귀리,보리 등 여러 곡식들을 섞은 혼합물'에다

소금 혹은 향료를 조미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심은 

1) 때를 따라 비를 주시는 복입니다.(23-24절)

비도 너무 많이 오면 농작물의 풍요로움을 해치게 됩니다.

적당한 비가 농작물을 풍요롭게 하고 들판에 푸른 초장을 만들어

가축들이 풍성한 풀을 먹고 자라듯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은 사람들에게 적당히 주시는 복입니다.

 

이 복이 곧 스스로 자족하며 살아가는 복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만족하고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족을 누리며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4:11-13)

 

있는 바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 형편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온전히 깨닫고 살고 있다면

진정코 '하나님의 호흡'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비극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속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를 생각하며

하루 하루 만족하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어떤 형편에서든지, 반드시 만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25절, 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각 고산, 각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크게 살륙하는 날..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물의 공급'과 '망대의 붕괴'라는 두 주제가 혼합되어 나타납니다.

 

'망대'는 유다 백성들의 자기 교만을 상징하는 요새를 의미합니다.

이 망대가 무너질 때, 즉 남유다의 교만에 찬 무리들이 제거된 후에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풍성한 축복의 날이 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심은 

2) 환난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5절)

“크게 살육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남유다에 전쟁이 있을 때에도

높은 산 준령에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남유다에게 찾아오는 환난은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남유다에게 주어지는 환난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환난이었습니다.

      남유다는 환난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끝 날에 있을 대환난은 이미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 계획된 날입니다.

7년 대환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땅은 새롭게 될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고서는 이 땅은 새롭게 될 수 없는 땅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가능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수님이 이 땅을 새롭게 하시려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그 어떤 환난의 바람을 불어 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도 힘든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악한 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분이 나고

불평이 나오지만 그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고

하나님의 호흡을 느끼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한 자들은 머지않아 반드시 만군의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불처럼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아질 것입니다.

힘들다고 절대로 예수를 떠나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나를 구원하셨는지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 붙들고, 말씀 붙들고, 예수님 붙잡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이겨나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6절,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일곱 날의 빛'은

'일주일의 빛이 하루에 집중됨'을 의미하니,

최고의 밝기로 빛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 강조점은 눈을 멀게 할 정도의 빛의 강렬함에 있지 않고

상처 입은 당신의 백성들을 치유하는 빛의 영화로움과

그들이 누리게 될 축복의 영속성에 놓인다. 

 

여호와의 치유하심에 대하여는 사1:6, 욥5:18, 겔34:16, 호6:1, 말4:2 등을 참조하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심은 

3) 고치시고, 소망을 주십니다.(26절)

 

하나님은 세상 끝 날이 아니어도, 지금도 개인적으로 고난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상처를 싸매주시고, 고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나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소망의 줄을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라는 말씀처럼

우리들을 새롭게 소망 차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사실은 믿고 소망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날, 또한 세상이 끝나는 그 날에

천국에서 해처럼 빛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27절,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 나듯하며,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이사야 선지자는 27절에서 “보라” 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를 괴롭힌 앗수르의 세력들이 어떻게 멸망 받을지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25~26절이, 남유다가 받은 징계인데,

     27~33절은, 남유다의 징계로 쓰인 앗수르(바벨론)이 하나님께 심판 받는 예언입니다.

 

27절은,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맹렬함을 표현합니다.

 

▲28절, 그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은즉

그(하나님)가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미혹되게 하는 자갈을 여러 민족의 입에 먹이시리니

 

28절에서도 “그의 호흡은” 무서운 진노로 임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들’ 곧 이민족들로 구성된 앗수르 군대를

타작용 키를 흔들듯이 해서, 열방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마3:12),

 

또 마부가 자갈을 눌려 야생마를 제어하듯이,

열방(앗수르 연합군)을 인도하여 파멸의 심연속으로 몰아넣으실 것입니다.

 

▲29절,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와 같이 노래할 것이며

저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앗수르 군대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기쁨과 환호를 가져다 줄 것인데,

선지자는 이 기쁨을, 절기를  맞이하여 저(피리)를 불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순례 길을 떠나는 자들의, 가슴 벅찬 희열에 빗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절기’는 아마도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밤에 시작되었고(출12:42),

‘대적으로 부터의 구원’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30절,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앗수르에 대한 심판 묘사가 계속됩니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팔은”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처럼 임하신다고 했습니다.

 

▲31절,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인데

 

31절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막대기가 되고 몽둥이가 되어

앗수르를 멸망케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2절,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

 

하나님이 몽둥이를 들어 앗수르를 치실 때마다, 그것에 맞추어 음악이 연주됩니다.

2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다 백성은 즐거운 방관자입니다.

 

원수와의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으로 돌려지는데,

이 사실이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는 말씀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칼과 창 같은 무기들을 쓰지 않으십니다. 

단지 팔을 들어 흔드시는 것만으로도 그는 능히 대적들을 제압하십니다. (사19: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전쟁을 수행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즐거이 찬미하고 노래 부를 것입니다.

 

▲33절, 대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앗수르)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

 

도벳은, 

예루살렘의 남서쪽 힌놈 골짜기에서 불타고 있는 화장터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이전에 어린아이를 불태워 몰록신에게 제사를 드린 곳으로 유명하였는데

(왕하  23:10, 렘7:31, 19:6, 11),

여기에서 자행되었던 끔찍한 살륙으로 인하여

신약시대에는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마5:22, 10:28)란 이름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이 '도벳'은 이제 '몰록신' 대신 앗수르 왕을 위해

'이미'(옛적부터) 마련되었습니다. 

악인들이 불바다에 서 쓰레기더미처럼 태워질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과 더불어

본장은 마감합니다.

 

33절에서도 하나님의 호흡은 분노와 진노의 호흡이 되어

앗수르를 유황불로 태워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곧 하나님 말씀으로 앗수르 세력을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 말씀에 기록되어진 대로 행하여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앗수르 세력들은, 도벳(예루살렘 성밖 불타는 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세상의 악의 세력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예리한 검으로 즉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계19:15)

 

그래서 본문 사30장의 주제와 결론은,

힘센 사람(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네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입니다.

 

..................

 

♣설교/ 영혼이 힘을 얻는 길                     주1) 

세상은 늘 문제와 문제의 연속입니다. 삶은 늘 안절부절합니다.

이때 내 영혼이 힘을 얻으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첫째, 회개(슈브)가 필요합니다(15절).

영혼이 소생하는 힘을 얻는 첫 번째 길은 돌이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회개는 모든 상황을 극적으로 바꾸는 모멘트입니다.

회개가 시작되면 문제해결도 시작되고, 역전인생도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이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둘째, 차분함(샤캍)이 필요합니다(15절).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침착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쉴 때..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성도에게 쉼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다시 조율하는 것입니다.

                                         ☞<침묵> 관련글 모음

셋째, 신뢰가 필요합니다(15~17절).

특히 15절에 나오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한다.”는 말은

신뢰의 한 가지 중요한 표시가 잠잠하게 있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성도는 때로 입술을 꾹 닫고 침묵해야 합니다.

입술에 담긴 많은 말이 때로는 영혼을 크게 손상시킵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는

현명한 사람이 10분이라도 더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면 내면의 깊이를 소유한 뿌리 깊은 영혼이 됩니다.

 

외적인 것은 재미를 주지만, 내적인 것은 깊이를 줍니다.

세상은 깊이보다 재미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재미보다 깊이를 중시합니다.

세상은 겉이 큰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속이 큰 것을 좋아합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교계도 못 생긴 목회자들이 지키고,

교회도 못 생긴 성도들이 지킵니다.

 

외적인 화려함이나 인기에 이끌려 발 빠른 존재가 되기보다는,

내면을 잘 가꾸고, 내면을 잘 살펴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힘쓰십시다.

 

<진리는 평범함에 있습니다.>

 

성경의 4복음서를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홀로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오늘날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텔레비전에 나오기를 좋아하고,

무대 체질이고, 대중성을 좋아합니다. 대중의 시선을 끌려고 “나는 다르다!”고 하다가

“나는 틀리다!”로 끝난 분들도 있습니다.

 

진짜 진리의 99%는 평범한 것에 숨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에는 대중성은 많아도 건강성은 적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이끌어 가는 손길은 99% 자연적인 것을 통해 이끌어 가십니다.

균형 잡힌 사람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라는 (특이한) 말을 들을 때,

“특이하다! 기적이다!”라고 하며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초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것, 대중적인 것,

화려한 것, 특별한 것을 열심히 쫓아다니면 열심히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간증집회, 찬양집회, 영성집회에 찾아다니고,

가정 세미나와 교회 성장 세미나를 찾아다니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앞에 앉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별로 없다면

영혼은 점차 힘을 잃습니다.

 

‘무대 앞에 서기’보다 ‘하나님 앞에 앉기’를 힘쓰십시오.

때로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떨어져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며,

평범한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평범한 것에서 감사거리를 발견하는 삶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이단락, 출처

 

 

주2)

여러분!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자에게는

오늘날도 이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복이 물질의 복으로만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이 주신 복에는 반드시 영육간의 복이 함께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졌을 때

물질의 복도 임하였고, 영적인 복도 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그 복이 물질적인 풍요를 통해 표현되었고

신약에서는 영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신약에서 결코 물질의 복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의 복도 받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물질의 복도다 더욱 중요한 것이

영적인 복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기 바랍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의 복이, 생활의 풍요로움 복만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26절에 보면 영적인 복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하나님의 진정한 복은 생활의 풍요로움과 영적인 복이 함께해야

온전한 복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생활의 풍요로움이라고 해서, 반드시 돈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은 돈으로도 생활의 풍요로움은 얼마든지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활의 풍요로움은 기쁨이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으로 생활의 풍요로움을 느끼며 산다고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풍요로움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분문이 3가지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