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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1장 우상숭배를 멈추면, 앗수르를 물리쳐 주신다

LNCK 2021. 10. 9. 17:35

 

◈우상숭배를 멈추면, 앗수르를 물리쳐 주신다      이사야31:장        여러 설교 정리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귀소본능을 아주 강하게 주셨습니다.

북극곰은 마취 주사를 맞은 뒤, 비행기에 실려 무려 500km 떨어진 곳에 갖다두어도,

자기 집을 여지없이 찾아간다고 합니다.

 

얼음뿐인 불모지대에서 어떤 냄새도 어떤 지형적 표식도 없고

또 빙하가 수시로 떨어져 수로가 자주 바뀌는데도

반드시 자기 집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강이나 개울까지 돌아가기 위해서

대양에서 부터 무려 3,200 km 헤엄쳐 귀향하여 알을 낳고 죽습니다.

 

남극의 제비는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북극에서 남극까지 무려 35,000km 날아서 귀향합니다.

 

동물원에 갇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알레스카 산새는

언제나 자기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앉는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인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북한 고향땅에 가고 싶어서,

미국 이민을 가서, 미국 시민권으로 바꾸어, 북한을 방문하는 실향민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동물도 인간도 강한 귀향 본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선지자들 16명을 보내면서

애타게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하나님 나라인데도,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한 오백년 살 것처럼 본향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 나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라.         사31:1~5

 

그렇게도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외쳐도

남유다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앞서 사1~10장은, 아하스 왕 때 선포된 예언으로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는 아람의 위협이 컸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29~31장은, 히스기야 왕때 선포된 예언으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때 당시는 앗수르의 위협이 컸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모습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아주 강하게 직선적으로 경고를 하였습니다.

  

▲1절,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이 제공할 수 있는 도움 가운데 

특히 ‘말’을 지목해서 거론합니다.

 

‘말’이 고대 근동에 처음 유입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전쟁 양상은 급속도로 변모되었습니다.

 

전차 부대와 기병대 등, 말이 제공할 수 있는 군사력과 기동력은

전쟁의 질을 변화시켰으며,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증강시켰습니다.

 

따라서 병거와 마병의 보유력은, 곧 그 나라의 군사력을 측정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앗수르는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수효에 관한 한, 애굽도 이에 못지않았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는, 600대의 특별 병거를 위시한 

많은 병거들을 대동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으며, (출14:7)

애굽왕 시삭은 6만의 마병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대하12:3)

 

또한 애굽은 인접한 국가들에게 병거를 수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왕상10:29)

이로 보건대, 유다가 앗수르의 위협을 당하여

애굽 특히 그들의 ‘말’에 마음이 끌렸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애굽과 그 말을 의지한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애굽을 의지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애굽의 많은 병거의 말을 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그들이, 애굽을 바라보고 의지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 있는 자들이 어떻습니까?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특히 마지막 때에는 예언서에 기록된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유다의 멸망 같은 사건이 다시 재현될 터인데

그때 얼마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마지막 때에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비진리에 미혹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24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세상에 미혹이 난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에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을 의지한 남유다에 하나님의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악행하는 자’는 남유다를 가리키고.

‘행악을 돕는 자’는 애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엉뚱한 짓을 하는 자의 편에 서는 자도 치시리라 : 공동번역)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들의 꿈과 소망이 영원할 것처럼 알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순식간에 그들을 찾아 올 것입니다.

    

애굽의 병거 말처럼, 세상 것들이 아주 보기에 좋고 강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을 것입니다.

  

3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영적인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남유다가 애굽을 의지한 것은 그들이 육적인 자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어있고,

육적인 자는 세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숨길 수가 없는, 영과 육의 참모습입니다.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적인 자가,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들을 탓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 있는 자들도 이러한 육적인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육적인 자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모두 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계속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한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육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의 온전하신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에서 온전히 거할 때 진실로 영적인 자의 모습을 가지며

예수의 마음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남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까? 육신을 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남유다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두 가지 비유를 들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첫 번째 비유가 4절에서 말씀하신 젊은 사자의 비유인데,

하나님 자신을 젊은 사자로 비유하였고, 목자들을 앗수르 세력들로 비유하였습니다.

  

백수의 왕인 사자 중에서도 젊은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움켜잡고 으르렁거릴 때

그 누구도 그 강한 이빨과 발톱으로부터 먹이를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혹 여러 목자들이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소리를 내지름으로써

사자를 겁주어 쫓아내려고 할지라도

젊은 사자는 조금도 놀라거나 겁내지 않고 더 우렁차게 포효함으로써

오히려 목자들을 쫓아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한 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어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하여 주신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에 세상에 임할 환난은 창세 이래로 찾아볼 수 없는 환난입니다.

그러한 환난 속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예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뿐입니다.

 

그러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은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젊은 사자처럼, 택한 자들을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5절,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두 번째 비유도 “둥지 속의 새끼를 보살피는 어미 새의” 비유입니다.

4절에서 묘사된 '젊은 사자의 비유'가, 보호의 강력함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어미 새의 비유는 보호의 자상함을 강조합니다.

  

둥지 속의 새끼들을 보살피는 어미새의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어미새는 새끼들을 품어 따뜻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물어다 주고,

해로운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방을 부지런히 살피면서

둥지 위를 이리 저리 날개 치며 지킵니다.

  

하나님도 어미새처럼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미새 처럼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어미새의 품을 떠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애굽의 430년의 노예생활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그들을 자상하게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구름으로 가려주시고

밤에는 추운 광야의 기온을 불로써 따뜻하게 하여주셨습니다.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시고

신발과 옷도 헤어지지 않도록 돌보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손 하나 까닭 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갔고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상을 섬기고 세상과 손을 잡았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십니까?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확증이 곧 이 땅에 예수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런 크신 사랑을 받았음에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 사랑을 받기 싫다고 뿌리치고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있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이 사랑 뿌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뿌리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나를 어미새처럼 어떤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비록 내 앞에 죽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품으로 안아 주시어

편안한 가운데서 이 땅을 떠나게 하실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성도들이나, 이 땅에 믿음의 선진들이, 순교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품으로 안아주지 아니했다면 순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세상의 그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그 환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보호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명예, 권세, 물질이 나를 보호하여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나의 보호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영원한 피난처이시며 안식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사31:6~9

 

6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7절, 너희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범죄한 은 우상, 금 우상을

그 날에는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며

 

이사야 선지자는, 젊은 사자의 강력함과 어미새의 자상한 보호를 받기 원한다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돌아오지 아니하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곧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버리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 돌이키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비우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먼저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까?

우상입니다. 우상은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죄악은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죄악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합니까?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지어서, 교회에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왜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악한 원수 사탄의 세력들에게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죄악 때문입니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여러분! 내가 그 죄악을 버릴 자신이 없고 용기가 없다면 그냥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세요. “하나님 저는 이 죄악을 끊을 힘이 없습니다.

내 안에 이 죄악의 사슬을 끊어주시옵소서” 고백하세요.

  

그리고 외치십시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안에 더러운 죄악의 사술은 뿌리채 뽑아질지어다”

  

우리 안에 수많은 죄악들이 있는데 가장 큰 죄악이 있습니다.

회개할 때 집중적으로 회개 기도할 것은

나의 가장 큰 죄악이 무엇인지 깨닫고, 가장 큰 죄악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가장 큰 죄악의 뿌리가 뽑아지면, 다른 죄악들은 맥 없이 뽑혀져 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가장 악한 원수 마귀를 무너뜨리면

다른 악한 것들은 무서워서 함께 떠나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죄악이 우상이었듯이

나의 가장 큰 죄악이 무엇인지 회개하여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가장 강한 마귀를 쫓아내어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만약에 이러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유다는 앗수르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칼처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패역한 예루살렘을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것은 세상의 세력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표현을 9절 끝에서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할 때

지금은 불로 즉 능력으로 함께하고 있지만 돌아오지 아니하면

풀무불처럼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유다가 돌아왔습니까?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B.C 586년에 바벨론 세력에 의해 완전히 멸망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남유다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약 11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남유다의 모습뿐입니까?

  

오늘날 이 시대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세상에만 죄악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교회 안에 죄악이 가득차고 있습니다.

성도들 마음 속에 죄악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와 별로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 말라버린 강물

예수를 믿고 있는 자들과 불신자들의 마음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크리스천들은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합니다.

가장 큰 죄악이 무엇인지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와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 받을 때 여호와의 불의 성령의 역사가 다시 임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일까요?

나의 가정의 가장 큰 죄악은 무엇일까요?

 

이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건물의 중심인 주춧돌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벽을 구멍 내고 벽을 뜯는다고 해서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장 큰 죄악을 무너뜨리고 쫓아낼 때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쫓겨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비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더러운 것들, 악한 것들, 추한 것들, 세상적인 것들 다 비우고

그 자리에 예수의 보혈로, 말씀의 능력으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너무나도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너무나도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고 싶어도 비우지 않기 때문에 채울 수가 없습니다.

비우되 깨끗한 그릇으로 비우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불의 역사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와 우리 노아방주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절, 앗수르는 칼에 엎드러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칼에 삼켜질 것이나,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닐 것이며

그는 칼 앞에서 도망할 것이요, 그의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9절, 그의 반석(왕)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겠고,

그의 고관들은 기치(여호와의 깃발)로 말미암아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앗수르의 멸망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신약에는, 계20장에, 마귀의 세력이 멸망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시온에 불을 장만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예루살렘에 가마를 마련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멈추고(7절), 주께 돌아오게 될 때 (1, 6절)

하나님께서 유다를 치는 막대기로 사용하신 앗수르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4, 5, 8, 9절) 

-이것이 사31장의 전체 주제가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떤 기도였을까요? 성경에는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회개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모두 심령을 비우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세상적으로 믿고 따른 것에 대한 마음을 비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추하고, 악하고,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분명한 것은 성령이 소멸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 성도들의 마음에서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소멸되어가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세상적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도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예수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건물을 보고 신앙생활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성령의 진정한 다스림을 받기 원한다면 세상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님을 찾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책망을, 우리도 받을 것입니다.

 

(사29:13)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어다”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떤 시점에 있는지

잠깐 신앙의 걸음을 멈추고 내 신앙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앗수르가 당했던 그 심판을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마18: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름다운 이 봄에 우리 모두 오직 예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