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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6:6~8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LNCK 2021. 10. 12. 10:27

https://www.youtube.com/watch?v=3f8xQOEDb0E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미가6:6~8                      2020.04.26.출처

이렇게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또 감격적입니다. (2020년 4월 상황)
코로나 19가 우리나라에서 많이 안정세가 되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고, 또 앞으로 백신이 계발되고 
완전히 극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 더 저희가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2월 25일 공예배를 멈추고 온라인 예배를 시작했기 때문에 
오늘 4월 26일 두 달 만에 예배를 재개합니다. 

근데 이 기간 동안,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못한 기간 동안 
'과연 참된 예배가 무엇일까?' 스스로 질문하게 됩니다. 

동시에 지난 두 달은 '바벨론 포로 사건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너무나 악한 일들을, 어리석은 일들을 많이 계획하고 진행하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올 스톱, 다 멈추게 하신 시간들이었죠.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에게도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행만을 하나님이 멈추게 하신 것일까요? 
교회의 악행도 멈추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전세계의 모든 교회, 모든 공예배가 멈추게 되었잖아요. 

만약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1장에서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서 
'내가 언제 너희에게 짐승의 피와 기름을 가져오라고 하였느냐?' 
'너의 헛된 제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예배를 드리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말라기 1:10절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우리는 지난 두 달 동안 성전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이라면, 

우리가 예배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며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 하기를 원합니다. 

미가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가선지자가 갖고 있었던 고민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고민과 똑같습니다.

그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 선지자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고향 모레셋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50킬로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골 출신의 미가가 
수도 심장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피를 토하는 예언을 쏟아 놓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영적인 상태가 너무나 밑바닥이었기 때문이죠.

▲특별히 미가가 살던 당시 아하스 왕은, 
남유다 왕들 중에서 최악의 왕들 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20살에 12대 남유다 왕으로 즉위해서 우상숭배를 열심히 했습니다. 

결국엔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아람군대에게 고난을 당하죠. 
그러니까 그 해결책으로 앗수르 군대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아람을 잠재웠어요. (앗수르가 아람을 정복합니다)

그러자 아람의 주요 도시 중에 하나였던 다마스커스(다메섹)에 가서 
앗수르 왕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다메섹에서 본 이방 신전의 제단이 너무나 멋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전을 그대로 본 떠서, 예루살렘 성전 한가운데 놓습니다. 
본래 있던 솔로몬 성전의 놋제단은 옆으로 치워 버리고 
그 새로 본떠 설치한 우상의 제단 에서, 우상 숭배를 했던 왕이었어요. 

정말 미가가 살던 시대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에는 
개인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면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도 있지만 
공동체적인 차원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에요. 

내 개인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고백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를 보면 최첨단 문명을 우리가 누리고 있지만 
극도의 물질 만능주의와 기계 문명에, 사람들이 너무나 깊이 젖어 있잖아요.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무신론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 세대도 걱정이지만, 우리 자녀 세대가 더 걱정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너희는 지금 우리 세대 보다 더 문명의 최첨단을 누릴 것이다. 참 좋겠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은 
이 기후변화나, 쓰나미나, 이런 전염병의 문제, 자연재해의 문제가 
갈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신론과 이단 사이비는 더 득세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렇게 영적으로 어려운 시대가 오는데 
어떻게 이 시대를 타개해 나갈 것인가요?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그 질문 앞에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을 합니다. 

미가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악행)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 시대는 너무나 영적으로 어둡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나아갈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의 고민도, 미가의 고민과 똑같습니다. 

태양을 보고 싶지만, 너무나 먹구름이 강하게 껴 있으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것처럼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을 할 수 없고 
자녀들이 학교를 가고 싶은데, 학교를 갈 수도 없고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물론 이 시대에 예배가 많고, 설교의 홍수시대 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정말 압도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는 
우리의 존재 근본 자체를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를 체험하는 예배를 
우리가 드린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요? 

나의 간절한 마음,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면 나아갈 수 있을까?' 
이 간절한 마음을, 수천 마리의 숫양과 수만 마리의 짐승의 강같은 기름을 드리는 
물량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아니면 내 맏아들을, 내 몸에서 난 자식을 하나님 앞에 불태워 드리는 
가나안 종교의 관습대로 극단적인 헌신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하고 미가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절대자 하나님께는, 우리가 물량적으로 최선을 다 하고, 극단적인 헌신을 한들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기준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 잖아요. 

게다가 하나님이 만약에 그러한 물량공세로 감동을 받으시고 움직이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샤머니즘적인 신앙인 것이죠.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가 그동안 이런 감각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실제 삶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 전 세상적으로 꼭 성공해야 합니다! 
내 자녀는 꼭 출세해야 됩니다. 
좋은 대학에 가야 되고,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관점과 기준의 욕심들을 내려놓지 못할 때가 참 많았잖아요.

▲'그렇게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느 분께 이렇게 권면 드리면, 

'그래도 목사님, 저는 이 기도 제목은 내려놓지 못 하겠어요!'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우리가 포기할 수 없었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 이만큼 드릴 수 있고, 이만큼 봉사할 수 있지 않은가... 

수천의 숫양과 수만 마리의 기름(고기 중 가장 좋은 부위)으로 
이런 물량으로 하나님을 감동 시키려고 했던 우리의 잘못된 신앙,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앞에 큰소리를 치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했던 
우리의 그릇된 신앙, 

그것이 각 개인의 신앙만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 안에서, 내 의견과 다른 사람이 있으면 싸워야 되고 
내 사역이 다른 사역보다 더 중요하고, 
내 모임이 다른 모임 보다 더 중요하고, 

서로가 세력다툼을 하고,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성공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성적인 타락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신부된 교회를 더럽힌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그래서 혹시 하나님은 예배당 문을 닫게 하신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세상에서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억울하다. 이건 편견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스스로 쌓아 온 것이에요. 

우리 자신이 너무나 세속화에 썩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의 영성이 사라지고 
정복자의 영성만 살아 있지 않은지요? 

인격적인 신앙이 사라지고 
자극적인 신앙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이런 그릇된 사생아로 '신천지' 같은 이단이 나온 것입니다.            주1)

하나님, 교회를 교회되게 하옵소서. 
성도를 성도 되게 하여 주시고 
목자가 목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영혼들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줄로 믿습니다. 

첨단 기기와 풍요 속에서도 
고립과 허무감에 허덕이고 있는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신앙을 이젠 내려놔야 돼요. 
기복주의 신앙을 내려놔야 됩니다. 

'한 영혼을 살릴 수만 있다면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한 영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나도 한 영혼을 살릴 수 만 있다면, 십자가 라도 지겠습니다.. 
땅 끝이라도 가겠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세 가지

자 그래서 미가 선지자가 8절에 마지막 답변을 내놓습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미가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선한 것이 무엇임을'
여기서 선하다, 좋다..는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때의 같은 토브 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선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공의, 

-긍휼,

-동행 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8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공의, 정의 (미쉬파트)
첫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공의'는 자기 기준에 따른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의 공의입니다. 

오늘 날 사실 개인주의와 상대주의가 팽배하다 보니까 
크리스천들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민감성이 굉장히 많이 떨어졌어요. 

'내가 이 정도면 괜찮게 사는 거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세상에서 죄짓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나는 나름 그래도 깨끗하게 살고 있다. 
나는 나름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의, 즉 올바른 삶은.. 상대적 개념이 잖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의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 인데 
이것은 세상에 인간적인 상대적 기준의 '의' 가 아닙니다. 

선과 악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서의 판단과 정의!
저스티스 justice 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논리 빠져서,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나는 그래도 의롭게 살고 있지!' 
아니요. 그런 의를 본문이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5편에 누가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수 있겠는가? 
누가 여호와의 장막에 머물 수 있겠는가? .. 에 이렇게 답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는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시15:2~3

이런 공의를 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악의 기준을 그대로 순종하며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요즘 세상에서 사업하려면 그렇게는 못합니다'
아니요, 성경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서 
편법과 탈법과 불법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거예요. 

'목사님, 요즘 시대에는 뭐 남녀노소 다 그냥 오락거리로 즐깁니다.' 
아니요, 세상이 아무리 성적인 탐닉을 오락거리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악하다 하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아~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죄를 졌습니까, 우리가 무슨 악을 행했습니까?' 

이 시대가 쾌락주의 시대가 되었고, 물질만능 시대가 되었잖아요. 
이 쾌락주의 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말씀 보다
쾌락이 더 상위적 개념이 된 거예요. 절대 선이 된 거예요. 

물질만능주의 라는 것은 물질이 만능 신이 된 거예요. 
물질이 상대적 개념이 되고, 그것이 절대 선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의 이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주의가 
얼마나 우리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거기서부터 죄와 악이 분출되는 거예요. 

우리는 쾌락이나 물질이라는 만능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신 전능자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신앙인 인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첫 번째 원하시는 것은
'예배자들이여 바르게 사십시오! 평소 삶에서 바르게 사십시오. 
선과 악을 분별하십시오.' (미가 선지자의 외침)

하나님은 예배와 악행을 동시에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숱하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은, 
'악을 행하면서도 예배를 드린다고 나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누가 좀 성전 문을 닫아줬으면 좋겠다.  *말1:10
나는 이것을 동시에 받을 수 없다. 
더 이상은 내가 받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인자, 긍휼 (헤세드)

두 번째,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웃을 돌보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인자를 사랑하며'                     *헤세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내 것을 나눠주고, 
내가 쓸 것도 나눠주고 하는 그런 삶 자체를 사랑한다고요. 

여기서 '인자, 긍휼'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이 헤세드 는 내가 하나님께 긍휼을 받겠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저 사람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타인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는 게 긍휼(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보실 때 안타까워 하시면서 
그들을 꼭 건져주시고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로 놓고 보면 
외국인노동자들, 미혼모들, 버려진 아이들, 방황하는 청소년들, 노숙인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인 것이죠.
그 긍휼의 마음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죠. 

▲이번에 '공감소비운동'을 하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21세기 사회를 소비주의의 사회다.. 컨슈머리즘 이라는데
'소비주의 사회'라는 것은 소비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 된 것입니다.

근데 이 소비는, 너무나 지극히 이기적인 소비가 된 것이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 처하든/ 말든 
나는 파티를 벌이고 나는 과소비를 하는 소비주의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근데 그 '소비' 라는 단어 앞에 '공감' 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나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정말 어려운 사람을 위해 공감하기 위한 소비 운동입니다! 

여러분,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지금 사업이나, 자녀들 양육이나,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려움이라는 것은 늘 상대적인 것이잖아요. 

나는 하루 세 끼 먹는 것을 걱정해도 
누군가는 하루 한 끼 먹는 것을 걱정하는 분이 있고요. 
그 한 끼조차 없어서 이제 생을 마감해야 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세상 어딘 가에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붙잡아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의 손길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코로나) 시절에는 누군가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겼다가도 
스스로 마음을 절제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아휴 내 앞가림이나 잘 해야지.. 나도 살기 힘든데..'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웃 사랑에 대해서 강조했던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여기서 '닫으면'이란
'자물쇠를 가지고 잠궈버린다'는 뜻입니다.     *shut up, 클레이오

내 마음에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살짝 생겼어요. 
그런데 문을 쾅 닫고 잠궈버리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이번이 이 '공감소비 캠페인'에 참여하시면서 
'내가 누구를 도와 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나시면 꼭 도와주세요. 

근데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데 
누구는 빼고, 뭐 그러지 마시고 
거기에 더 필요하면, 감동을 받은 분들이 더 기부할 수도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을 
아낌없이 베푸시고, 닫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의가 직선 이라면, 긍휼은 곡선입니다. 
직선과 곡선이 어떻게 함께 가겠는가요? 
하나님 안에서 늘 함께 갑니다. 놀랍게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은 공의와 긍휼이라고 표현했지만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성품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과 공의의 하나님! 
은혜와 진리!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는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우리의 삶에 적용해도 조화를 이룹니다. 

여러분, 바르게 산다는 게 무엇일까요?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가장 바르게 가는 길은 
진정성 있게 사랑하며 사는 거예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해서 위증 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게 다 바르게 살라는 얘기를 하는 거잖아요. 

근데 바르게 살라고 말씀 해도 
사람들이 바르게 살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 법치국가로, 이렇게 첨단 문명을 누리고 살아도 
흉악한 범죄가 급증하는 이유는 
사랑이 식으면, 공의도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사랑이 식으면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남을 해치지 말아야지' 이게 안 돼요.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되고 
그 사랑으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이웃을 사랑해야만 
공의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이죠. 


▲3. 세 번째,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긍휼을 앞서 미가는 이야기 했어요. 

근데 이 두가지를 사실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겸손'이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 저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루시는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과연 나에게 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은혜와 진리가 단순히 악세사리처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외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내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서 피와 살이 되었는가요? 

▲어떤 선교사님이 필리핀에서 오랫동안 선교 사역을 하셨어요. 
근데 그 마을을 위해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참 많은 일들을 한 것이죠.

마을까지 들어오는 길이 없어서 포장도로를 닦아주고 
우물을 파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학교를 세우는 등 정말 많은 일들을 했어요. 

근데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 날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 화가 나고 또 절망감이 들고 
'내가 이 사역을 이제 그만 둬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러는지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는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을 예배당에 초대해서 앉혀 놓고 

'여러분, 지난 세월 동안 제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습니까? 
근데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도대체 여러분이 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죠. 
'Christlikeness! 그리스도를 닮은 삶과 인격을 우리에게 보여 주세요! 
물량공세 말고요.' 

천천과 만만의 제물 말고요.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신앙의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약 두 달 동안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에 못 나왔지만 
우리가 예배를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멀리 하고, 교회를 멀리 하신 분들도 있었잖아요. 
('가나안 성도' 라고 하죠.)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요?
1년에 두 세 차례 명절에만 찾아가는 부모님처럼 
아니면 주말에만 만나는 주말 부부처럼 
아니면 집에 들어오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안 나오는 그런 자녀들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소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요? 
요즘 모두가 이제 집에 머물러 있어야 되는 시간들을 지내다보니까 
각 가정마다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러 나라에서 코로나19 로 인해서 통금이 생기기도 하고 
다 집에 머물러 있어야 되니까 가정폭력 건수가 증가했다는 겁니다.

이거 왜 그런가요? 
그냥 한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지, 행복한 동행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저 우리가 공간 안에 같이 머물고 있는 물리적인 집, 하우스 개념이 
인격적인 나눔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던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그냥 들락날락하는 그런 관계인지 
겸손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 돕는 것을 그냥 가끔 내가 이 정도면 잘 하고 있지..'가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것, 사랑하는 삶,
하나님의 그 선악의 기준에 맞춰서 사는 사람! 

그걸 완벽하게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도록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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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런 그릇된 사생아로 신천지 같은 이단이 나온 것입니다.
그이 신천지 같은 이단이,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갑자기 솟은 게 아니잖아요. 
거의 대부분 교회에서 나간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신앙 행태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너무나 충격을 받습니다.

 그 교주의 거짓과 탐욕과 독재를 
그저 아무런 질문없이 떠받들고 있는 사람들의 맹신, 

그리고 천국에서 제외 될까봐, 축복에서 제외될까 봐 
거짓말과 술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보면 상상할 수 없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그러나 그런 모습들이 우리 안에도 고스란히 다 있다는 거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안에도 그런 모습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기성교회에서 배운 것들을, 더 극단적으로 극대화 시킨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달 동안 성전문을 닫으셨던 그 하나님의 경고에도 
우리가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런 이단들이 앞으로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