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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3장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LNCK
2021. 10. 12. 16:08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이사야33장 출처1, 출처2
33장은 히브리어 어순으로 “화 있을진저”로 시작됩니다.
매우 안타까워 슬퍼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32장을 제외하고 28~33장까지 제일 첫 단어가 동일하게 “화 있을진저”입니다.
33장에서 ‘화’의 대상은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위협하는 앗수르입니다.
2차적으로는 학대하고 속이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1. 앗수르의 패망을 노래하는 이사야 (1~6절)
▲1절,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학대나 속임을 당해도 상대를 학대하고 속이면 안 되지만,
학대나 속임을 당하지 않고도, 상대를 학대하고 속이는 행위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앞에서 앗수르를 의지하는 유다에게 내려진 ‘화’가
본장에서는 ‘유다를 학대하며 속이는 자’, 곧 앗수르에게 선고됩니다.
이것을 구체적인 역사의 배경 속에서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쳐, 그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왕하18:16)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산헤립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깨고,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왕하18:13~17)
이러한 때에 히스기야 왕은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 자신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으며
하나님은 그 종 이사야를 보내어 응답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언약을 파기한 앗수르에 대해 재앙을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악인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한마디로 요약 가능합니다.
부탁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는데
그 기도 내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앗수르 세력들을 저주하였습니다.
앗수르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것만큼 학대를 당할 것이며,
속인 것만큼 속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는 이 예언이 선포된 후로 1세기도 안되어
신흥 세력인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학대와 속임 속에서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2절,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에 대한 깨달음은, 기도를 통해서 주어질 수 있으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문득 예언을 중단하고, 자기의 기도(2절)를 삽입시킵니다.
첫째. 주는 아침마다 팔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2절)
팔이 되어달라는 것은, 곧 도움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움이 어려운 위기 때만이 아니라
“아침마다” 즉 하루 하루 도움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려운 때에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십니까?
주기도문 중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달치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치 양식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매 순간에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아침에 눈 뜨자 마자 소변이 마려어도 참고
하나님께 먼저 기도부터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잘 때도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을 내가 경외하고 있다는 나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째. 환난 때에 구원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2절)
개인이나 국가나 반드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 위기 때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경외하지 않는지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자는, 위기 때, 오직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어떤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요란한 소리’와 ‘주의 일어나심’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으로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묘사한 말입니다.
본문은 산헤립의 군대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하룻밤에 궤멸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37:36)
‘나라들’이라고 한 것은, 앗수르의 군대가, 주위 국가들과 합한 연합군이었기 때문입니다.
▲4절,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황충’은 메뚜기의 일종입니다.
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면서, 곡식을 남김없이 갉아먹습니다.
메뚜기 떼가 들판을 휩쓸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군의 노략물들을, 그처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노획할 것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승리의 결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실 것을 찬양하는 말로,
본장의 서론부(1~6절)는 일단락됩니다.
▲6절,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선지자는 계속해서, 히스기야 왕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평안함’을 잃지 않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리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는 결론적인 말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같이 영적으로 깨어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이지 않을뿐더러
금과 은 같은 보물 대신, 하나님 경외함을 그 즐거움으로 삼게 됩니다.
본 구절을, 사11:2과 비교해 보세요.
◑2. 경외하는 자를 위해 일어나시는 하나님 사33:7~16
7절부터 9절까지는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앗수르에 의해 짓밟히게 됨으로
절규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될 때에
앗수르에게 형식적으로 평화협정을 위한 평화를 내세우지만 실제는 굴욕적인 항복입니다.
이 때 사신들은 마치 항복조인서에 서명하는 사람들처럼 슬퍼 애곡할 것입니다.
7~9절까지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에게 나타나는 모습이라면
10~16절 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십니다.
▲7절,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선지자는 앞(1~6절)에서, 간략한 형태로 본장의 주제를 소개한 뒤에
다시 그것을 세부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술합니다.
그는 먼저 아무데서도 도움 받을 길 없는, 남유다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합니다(7~9절).
‘용사’는 ‘평화의 사신’과 평행합니다.
평화 협상을 위해서, 앗수르가 내세운 평화의 조건인 금과 은을 가지고 간
용사요, 평화의 사신들입니다. (왕하18:14)
‘슬피 곡하며’
그러나 그 용사들이 슬피 통곡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조약에 응하지 않자,
‘이제 우리 남유다는 죽었구나’ 하면서 슬퍼한 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면서 평화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습니다. ↓
▲8절,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유다의 형편을 묘사합니다.
대로가 황폐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기고
여행객도 보이지 않으며
장사하는 이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삿5:6)은
전쟁 상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9절,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유다의 참상이 땅에 반영됩니다.
예루살렘은 남아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외적의 침입으로 황폐해졌을 것입니다.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컬어지던 대표적인 네 곳들, 즉 레바논, 사론, 바산, 갈멜이
하나같이 황폐해집니다.
백향목과 전나무로 꽉차 있어서 언제나 울창한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은
바짝 말라 볼품 없는 모양이 될 것이며(2:13),
사론은, 갈멜 산 남쪽 기슭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넓은 평원으로서
아름다운 들풀과 목초지를 자랑하던 곳인데, (대상27:29)
이곳도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바산과 갈멜도 비옥하고 기름진 땅들로서
과일 나무와 삼림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도 메마를 것을 예언합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10절에서부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11절,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여기서 ‘너희’는 앗수르처럼 사람들을 학대를 하고 속이는 나라들과 민족들입니다.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치 없는 결과물을 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호흡이 불이 되어 자신을 삼킬 것이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인 신진대사조차 자기생존을 위협하는 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12절,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세력들은 겨처럼, 짚처럼, 불에 굽는 횟돌처럼,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처럼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13절,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앗수르를 파멸시킨 하나님의 권능이,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는 말입니다.
강력한 앗수르 군대가 작은 남유다의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는 것은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14절,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시온의 죄인들’ 곧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하면서도 그 행위와 습성이 앗수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불법하고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앗수르를 삼킨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그들 또한 삼킬 줄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이 남유다에 임한 것은, 결코 남유다가 경건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남유다가 S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이라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앗수르를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유다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은 앗수르를 멸망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약 115년을 기다리시던 하나님은 돌아오지 않는 남유다를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처참하게 멸망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한 자들을 세상 끝날 까지 보호하여주시지만
경외치 아니한 자들은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15절,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15절은, 앞 절(14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선지자는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이러한 7가지를 멀리하며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확실하게 믿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생활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은, 높은 곳에 거하게 해주시며,
그의 보호가 되어 주시며,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16절,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높은 곳’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킵니다.(25:12).
‘양식과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6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입니다.
시편 18편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는지 보여주는 고백의 시인데
그 고백 끝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18:31~34)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질, 미래의 약속 사33:17~24
▲17절,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이사야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합니다. (17~24절)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된 ‘왕’이 히스기야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37:1)
위기가 끝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낼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히스기야 왕은, 미래의 메시야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이중예언’으로 보아야 합니다.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귀로만 들었던 예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영광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을 체험하고 싶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18절,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어디 있느냐?’
(고전1:20, 15:55 참조)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과
탑(망대)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어떤 괴로움도,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19절,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 곧 앗수르 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20절,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6)의 처소는,
영원히 옮겨지지 아니할 곳이며 영원히 뽑히지 아니할 곳이 될 것입니다.(20~21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
예루살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광야의 ‘장막’(성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옮겨지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안정된, 하나님의 다스리는 나라가 되면.. 옮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덮으심
그런데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에게 초토화된 후에 70년 후에 다시 회복하지만
다시 예루살렘 성은 A.D 70년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무너져 버렸습니다.
위 예언이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나온 영원히 옮겨지지 아니할 예루살렘 성은
세상 끝 날에 있을 하늘 예루살렘 성을 의미합니다. 2중예언입니다.
히스기야 때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안정되었습니다.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절,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참으로 ‘권능 있는 자’는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시46:4~5, 겔47:1~12, 슥14:8).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이나
나일 강에 둘렀있던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면서,
시온성이 그렇게 안전하게 보호 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22절,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집니다.
1)우리의 재판장
그는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공평하게 판단하십니다.(11:3, 4).
2)우리의 율법 수여자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십니다. (신33:21)
3)우리의 왕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십니다. (삼상12:12).
그에게 현대적 의미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습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23절, 그리로 들어오는 배마다, 돛대 줄이 느슨하여 돛대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돛을 펴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탈취물을 얻을 것이다. 다리를 저는 사람들까지도 많이 탈취할 것이다. (새번역)
세상의 왕들이 다스리던 나라는
돛대 줄이 풀린 것처럼 나태하고 안일해서,
그래서 연약해서, 예루살렘을 침입하지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탈취물을 얻고, 승리할 것입니다.
▲24절,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새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이 진정한 통치자가 되실 것입니다. (22~24절)
예수님이 세 가지의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재판장으로, 율법을 세우신 자로,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22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사실 그들은 솔직히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저하게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그 분을 두려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은 두려운데 하나님은 두렵지 않다면
우리들 또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당한 심판 받지 아니하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모두 받는
보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경외함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언서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여 멸망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경외함이 무엇입니까? 한자로 공경할 敬 자에 두려울 畏 자입니다.
즉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함입니다.
진실로 이 시대에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알고 있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 경외함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귀한 보배가 될 것입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