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39장 자랑 끝에 빼앗기다
https://www.youtube.com/watch?v=Gi57-foOFUs
◈자랑 끝에 빼앗기다 이사야 39:1~8 2017.10.18.출처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믿음의 거인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그들의 생애를 지켜보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위대한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성정이 우리가 같아서
그들도 실족하고, 그들도 넘어지고, 그들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는' 완주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솔로몬을 보더라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도 시작은 좋았어요.
그의 기도도 좋았습니다. 사38:9~20
그러나 웬일인지, 끝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지켜지지 않았죠.
끝까지 처음에 올려드렸던 그의 기도가
자기 마음을 평생 붙들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정말로 하루 분량이구나!' (*매일 새로 충전 필요)
그런 것을 다시 한번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꼭 먹는 양식만이 아니라
믿음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루를 우리가 믿음으로 견디면 족합니다.
내일은 내일 분량의 믿음을 구할 것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살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사39: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은, (열왕기에는 브로닥발라단 으로 나옴)
바벨론은 신이 마르둑인데, 그 신의 이름이 아마 므로닥발라단에 들어간 것 같아요.
그래서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그 소문을 듣고
바벨론 왕이 축하 사절을 남유다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뭐 주변국 왕이 그렇게 죽다 살았다고 사절단까지 보내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절을 보내는 목적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개인 간에도 무슨 편지가 오가면, 그냥 단순한 안부 편지가 아니잖아요.
끝까지 읽어 보면 뒤에 뭐 약간 부탁하는 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 사람이 그냥 우연히 찾아오는 것 같아도
다 이유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정말 이유 없이 찾아오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오시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누가 찾아올 때
뭐 때문에 찾아오는지를 유심이 살핌이 필요합니다.
근데 어찌된 일인지 히스기야는, 그냥 바벨론 왕이 편지와 예물을 보내왔을 때
그냥 마냥 기뻐하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뭐가 기쁜지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즉 '나는 무슨 일로 기뻐하는가?' 그게 내 인격이고, 내 수준이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기뻐합니다.
뭐 높이 올라가면 기쁘죠. 자기가 유명해지고 알려지면 기쁘죠.
그런 차원의 기쁨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내 안에 어떤 죄가 회개 되었을 때,
내가 무릎 꿇고 정말 주님께 간절히 기도 했는데
그 사람의 구원을 두고 기도 했더니, 그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뻐하는... 그런 기쁨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뭘 기뻐하고 사느냐?' 이걸 관찰해야 돼요.
'나는 무엇에 분노하고 있으며, 나는 무엇에 기뻐하고 있는가?'
이게 내 신앙 인격의 바로미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금식을 39일만 하고, 40일째 스스로 깨버린 분이 있습니다.
내가 40일 금식을 완주했다는 자기 공로를 기억할까봐
하루 전날 그냥 금식을 끝냈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도 훌륭하고, 39일 금식도 훌륭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앗수르의 18만5천 대군을 물리치고,
자신의 죽을 병을 기도로 고침 받고,
또한 아름다운 시편을 짓고 한 것들이, 사38:9~20
본문 사39장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자신을 무너지게 하는 빌미가 됨을 봅니다.
그게 덫에 걸리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성공했던 그 성공의 경험, 성공했던 방법,
성공했던 그 자기 과거가
미래로 못 가게 막거나,
미래로 못 가도록 자기 덜미를 잡게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산업이 변하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해 왔던 이런 방식으로, 나라가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까?
과거의 해 오던 방식이, 오히려 미래로 나아가는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 완전히 턱에 찼어요. 이제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성공했던 경험에 벌써 취해버린 것이죠. 거기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미래로 나아가겠습니까?
다음 세대가 희망을 가지지 않는데,
다음 세대가 도전하지 않는데,
다음 세대가 도전할 발판을 만들어주지 않았는데
무슨 이 나라에 미래가 있겠습니까?
아이를 낳지 않는데, 가장 출산율이 떨어졌는데
정말 이게 보통 심각한 위기가 아닙니다.
몇 가지 착시 현상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냥 그럭저럭 살겠거니.. (뭐 죽겠나)' 하고 이렇게 넘어가고 있지만
(성공해온 과거를 생각하며 지금 현실에 만족하는 방식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히스기야가 죽다가 살아났으면
오직 하나님께 대한 기쁨 밖에 없어야 돼요.
죽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 밖에, 더 이상 인생에 기뻐할 일이 없어야 됩니다.
근데 그는, 바벨론에서 예물을 가지고, 편지를 가지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다는 거예요.
아무 목적 없이 왔겠습니까?
그 당시 앗수르의 침공이 사방으로 펼쳐지면서
반 앗수르 전쟁에 선봉에 섰던 나라가 바벨론이에요.
아버지 아하스는 앗수르에 기대었다가 앗수르에 된통 당하는 꼴을 당했고,
이제 아들 히스기야 시대는, 그 신흥국 바벨론이 이제 막 치고 올라올 때
그래서 바벨론의 왕이 앗수르에 의해 쫓겨납니다.
처음에 십몇 년 다스리다가 쫓겨났다가, 다시 또 왕위를 되찾았다가 다시 밀려나는...
그런 엎치락 뒤치락하는 국제정세 가운데 있을 때
지금 바벨론이 남유다에 사절을 보냈다는 뜻은
반앗수르 전선의 선봉에서 있던 바벨론이
지금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는 뜻이고
'남유다 너희들도 같이 한번,
우리가 앗수르와 전쟁할 때, 힘을 보태 달라'는 얘기거든요.
그런 의미를 깔고서, 사절단을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내왔는데,
히스기야는 자신을 칭송해 주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그냥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기뻐한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칩시다.
자기의 모든 걸 다 까발려 보여 줬어요. 사절들에게 모든 걸 다 보여 줬습니다.
무기고에 있는 무기까지도 다 보여 줬어요. 왜 보여 줬을까요?
'바벨론 너희들이, 우리를 우방으로 택할 만한 국력이 우리도 있다'는 것을 자랑한 거죠.
◑3절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지난 번에 죽을 병에 걸렸을 때는,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기도해 달라고요.
이번에는 이사야가 직접 히스기야를 찾아왔어요.
4절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왜 바벨론에게 이걸 다 보여 줘야 합니까?
▲자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정직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게 살게 됩니다.
그럼 정직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서 보여줘야 합니까? 다 말해야 합니까?
솔직하게 때문에 우리는 숨기는 것 없이,
남김 없이 다 우리를 드러내야 합니까?
그런 식으로 투명한 걸 하나님이 원하시는가요?
오늘 이 히스기야 사태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정직한 겉과, 속을 다 까발리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정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정말 정식하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속에서 소중히 지켜야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사생활 같은 것은 소중한 거예요.
부부관계는 소중한 얘기입니다.
왜 그런 얘기까지 우리가 사방에 까발릴 게 뭐가 있을까요?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 또 내 자녀가 허물이 있는 것,
그걸 왜 다 공개해야 됩니까?
우리가 가져야할 프라이버시, 그런 것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쉽게 남에게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을을 보니까, 정신없이 그걸 다 보여 주는 거예요.
그냥 자기가 외국에까지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가지고
히스기야는 정신 없이 자기 비밀을 다 보여주었는데요...
◑5~6절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BC 598년에 결국 이 예언이 성취되는데,
여호야긴 왕과 모든 궁중 소유가 바벨론으로 다 옮겨지게 됩니다.
결국은 그가 자랑하며 보여 준 것들이, 다 빼앗기고 끌려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 보여 줬더니, 다 자랑했더니.. 자랑했던 그 모든 것이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러시아와 공식적으로 수교하기 전에, 거기를 이제 방송 취재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모스크바에 갔는데, 저를 인도한 사람이 KGB 요원이에요.
그때만 해도 외국 언론인이 오면, KGB가 안내 겸 감시하러 늘 동행했습니다.
차 운전을 시켜도 KGB가 다 감시할 때인데, 늘 붙어다니다 보니 둘이 너무 친해진 거예요.
그 때만해도 제가 술이 너무 세 가지고, 술을 한 사흘 같이 먹었더니
이 친구가 제 주량에 감동해 가지고, 자기 집에 저를 초청을 했어요.
그래서 그의 집에 가 보았는데, 집 입구는 초라하고, 겉으로는 볼 품이 없는데,
집 안에 들어가 보니까, 냉장고가 3대 있었고, 그 속에 식료품이 가득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가 그렇게 잘 살지 못했거든요.
겉보기와는 달리 너무 너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얘기를 쭉 들었는데
거기서 잘 사는 티를 내면 큰일 난다는 겁니다.
그 당시는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이죠.
그래서 절대로 잘사는 티를 못 내는 겁니다. 티 내면 고발 당하니까요.
옷은 다 그냥 허름하게 입었고요..
근데 우리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집에 가면 아무 것도 없는데, 옷은 너무 잘 입는 거예요.
어떻게 사는 게 이렇게 다를까요.
왜냐면 그쪽은 자랑하면 다 뺏앗기는 겁니다.
공산주의니까, 자랑하면 고소당하고, 결국은 다 뺏기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자랑하다가 빼앗기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가 자랑하다가 완전히 거들났어요.
뭐 전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교회가 몇 개니 하다가
아주 우스꽝스럽게 되고 만 것이죠. 자랑하다가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자랑을 싫어하실까요?
첫째, 자랑은 과장입니다.
자랑은 대부분이 거짓이에요. 뭔가 실제보다 부풀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 자랑 속에는 반드시 교만이 감춰져 있습니다.
왜 자랑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걸 너무 싫어 하신다는데
히스기야가 그냥 정신없이 자랑했다가
그 자랑하던 것들을 바벨론에게 장차 다 뺏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엄청난 예언을 듣게 됩니다.
◑8절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히스기야가 어떻게 이렇게 자기밖에 모르나..
아니 지금 나라가 곧 망한다는데,
'내가 재위 시절에 안 망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신앙인의 자세가 맞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사람이 맞습니까?
저는 지금 히스기야를 뭐 비난할 생각이 없어요.
그게 아니라 히스기야일 망정, 15년을 덤으로 인생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런 사람도.. 넘어지는 게 한순간이구나!
우리가 이걸 보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로 나라를 구했고,
기도로 자기 인생을 바꿨던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느냐는 거예요.
예,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게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작년까지 그렇게 신앙이 좋던 사람이
올해 교회를 안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뭐 집안은 삼대 째 예수를 믿는다는데,
본인은 정작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우리 신앙이 절대로 자랑할게 없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굳게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신앙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좋으신 하나님을 잠시 붙들고 있는 사람과, 놓친 사람이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과 지금 동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엊그제까지 동행 잘하다가, 오늘 그냥 그 손을 놓쳐버린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3대, 4대 신앙.. 이런 말은 잊어버리세요.
본문의 이스라엘은 지금 40대, 50대 신앙인들이에요.
우리나라는 기껏 130년 믿은 신앙의 족보가 뭘 그렇게 대단하다고
우리 집은 3대째, 4대째 입니다.. 그런 얘길 하겠어요?
본문의 유다인들은 다 1천년~ 1500년 내려오는 신앙인 들인데요...
▲그러므로 신앙은 첫째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쌓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성전을 봉헌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를 드렸습니까.
'저희가 지은 이 성전에, 여기 계시겠습니까,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만든 이 건물 안에 계시겠습니까?
그러면 여기를 불쌍히 봐 주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드리는 사람을 쳐다 봐 주시고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십시오.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 드리는 것을
주님 기특하게 봐 주세요..' 그런 진정어린 기도를 드렸지만
그러나 그 솔로몬이 결국 여자한테 빠져서
왕비를 300명, 후궁을 700명 씩이나 들이더니
그 여인들이 가지고 온 온갖 우상을 다 받아들이고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만신전이 되더니,
결국 만신창이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게 나의 신앙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오늘 잘 믿는 것으로, 내일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히스기야를 우리가 비난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신앙이 한 순간에 자기 자랑과 교만에 빠지면
본문의 히스기야와 같은 이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갈수록 신앙은 사실 더 어려운 것 아닙니까!
솔로몬이 점점 갈수록 더 좋은 신앙이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점점 그는 내리막 길을 걷는 신앙을 보여준 것이죠.
우리가 나이 든다고 저절로 신앙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 든다고 저절로 인격도 좋아지지 않아요.
나이 들수록 어떻게 보면 더 어린아이 같이 유치해지고
사실은 더 사람들한테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날마다 붙드는
그런 믿음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저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신앙이면 족해요.
오늘 아침에 우리가 자기 믿음을 한번 굳게 확인하고
그리고 오늘 하루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러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주님 오늘 하루 지켜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내일은, 다시 오늘처럼 반복하는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신앙이 있겠어요?
오늘 대단한 신앙도, 그렇지 않으면, 내일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 39장으로 일단 하나의 큰 단락이 끝나는데 (1~39장)
근데 그 마지막은, 히스기야가 이런 모습으로
그 신앙을 고작 지켜내는 것을 보는 것이죠.
내 당대에 침략 받지 않고, 내가 포로로 끌려가지 않는 것, 그걸로 족하다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잠시 묵상하면서
우리만 지금 신앙 잘 지키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국가 전체적으로도 위기지만
정말 신앙적으로도 보면, 우리 다음 세대를 완전히 놓지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의 히스기야가 유치하다고 우리는 판단하지만,
오늘날 우리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나마 그래도 이 교회에 젊은이들이 오는 걸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보석처럼 여러분들이 보둠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젊은이들이 와야 돼요.
젊은 사람들이 신앙에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젊은이들과) 같이 예배 드리고
같이 정말 주님께 부르짖는 젊은이들이 없다면
그냥 우리만 그냥 곱게 늙어가는 사람들이 될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가 곱게 늙어가서 곱게 죽은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식을, 자녀 세대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 못하고 간다면..
자녀들이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옛날에 <삼국지> 소설을 읽어 보면
밖에 나가서 열심히 전쟁 해서 이기고 돌아왔더니
두고 갔던 성이 불에 타고 약탈 당해 버렸어요. 그래서 망연자실 하는 장수들...
맨날 나는 그 그림이 생각이 나요.
밖에 나가서 우리는 열심히 전도도 하고, 열심히 우리는 선교도 했는데
정작 와 보니까 집에 불이 나고, 우리 교회는 사람이 텅텅 비어 버렸네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세대의 신앙을 지키는데 급급할 게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을 지켜주는데 급급하면
우리 신앙은 자연히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이들 신앙을 어떻게 하면 내가 붙들어 줄 것인가?'
'아이들이 우리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들 앞에서 어떤 믿음을 보여줄 것인가?'
그거 하나 여러분이 분명히 결심하면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존경하는 부모가 되면
우리 신앙은 가장 아름다운 신앙이 되는 것이죠.
자녀들이 경멸하는 신앙이 되면
세상에서 존경 받으면 뭐 합니까?
자기 자녀들한테도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가 되는데
남한테 존경받아서 뭐 할 건데요? 무슨 득이 있는데요?
가까운 사람한테 손가락질 받고서
멀리 있는 사람한테 존경받아서 뭐 할 건데요?
우리가 정말 오늘 이 아침에,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나가고, 성공하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하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그러나 세상에서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
세상에서 자녀들이 유명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이 정말 진실한 신앙인이 점점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가장 큰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줄도 믿으십시오.
우리가 다음 세대를 놓치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놓치면, 미래를 놓친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자녀 세대에게 신앙을 넘겨주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대학가에 크리스천 비율이 3% 안 됩니다.
거의 선교지나 마찬가지 비율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그냥 우리가 아침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그냥 우리 신앙을 지키고 붙드는 것으로,
그것 마저도 잘 지키지 못해서 허덕거리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히스기야처럼!
제가 아침마다 신사동을 위해서 기도하며 유심히 살펴봅니다.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어요. 술집 오는 젊은이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습니다.
'저 술집 가는 발걸음들을 정말 교회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세상을 향해 줄달음치는 저 발걸음들을, 하나님을 향해 줄달음 치게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도 하나님 안에서 성공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가치를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한번 그렇게 오늘 기도하십시다.
오늘은 정말 사랑하는 자녀들과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