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갈1:13~24 박해자를 전도자로 부르시다
LNCK
2021. 10. 21. 11:46
[이상준 목사] 박해자를 전도자로 부르시다 (갈라디아서 1:13-24)│2021.10.17 - YouTube
(맨 아래 스크랩 동영상 있음)
◈박해자를 전도자로 부르시다 갈1:13~24 2021.10.17. 출처
◑본문 해석 :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 주1)
맨 아래 주1) 을 보세요.
◑본문의 적용
▲1. 과도한 열정의 사람 바울
제게 요즘 꽂힌 표현이 하나 있는데
"과도한 열정"이란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차분해 보이지만, 좀 '과도한 열정'이 있는 민족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과도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많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구원 하겠다고
애굽 사람을 쳐죽이는 과도한 열정을 보였어요.
-한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하나님께 평생 바치는
과도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다윗은 소년 목동이잖아요. 한 번도 전쟁에 나가 보지 않았던 이 소년이
최고의 적장(골리앗)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과도한 열정을 보여요.
-그렇게 보면 에스더도 그렇고, 다니엘도 그렇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다 목숨을 거는 '과도한 열정'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도한 열정의 사람이었어요!
왜 하나님은 '과도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선호하시는 것일까요?
인생을 살면서 그냥 자기 앞가림이나 하고 살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동안도 인생에서 그렇게 많이 고생을 했는데
왜 또 헌신하고, 왜 또 희생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아니면, 영적 관점으로 봤을 때,
어둠의 세력에 짓눌려 있는 이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도저히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져 있는 이 세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사람들이
과도한 열정을 쏟아 부어서, 영적인 반전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청년 사울이 엄청난 박해자였는데
도대체 이 사람을 왜 하나님은 선택하셨을까요? 굉장히 미스터리 잖아요.
그런데 뭐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 누구나 공감하는 것은
그의 '과도한 열정' 때문이었어요.
혹자는 사도바울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길거리에 가다보면 태엽을 감아서 움직이게 만드는 장난감이 있잖아요.
장난감 로봇이나, 강아지들요.
태엽을 감아서 딱 한 방향으로 놓으면, 로봇은 그 방향으로만 열심히 가요.
근데 그것을 중간에 집아서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으면,
또 반대방향으로 열심히 갑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그와 같았다는 거죠.
극렬 반대파였던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극렬 전도자로 변모를 한 것이죠.
여러분, 누가 시켜서 하는 사역 말고요.
그냥 해야 되는 일만 억지로 하는 그런 일 말고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골리앗이 쓰러지고, 어둠의 세력이 떠나가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거예요.
▲2. 모태로 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 바울
갈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울의 고백이고, 우리의 고백인데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모태로부터 있었다 하는 것이죠.
연약하면서도 질긴 인생이었던 야곱은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또 물에서 건져진 아기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백성을 홍해라는 큰 물에서 건져낼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죠.
또 다윗이 시편에 여러 번 고백했는데요.
시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여러분 한분 한분도,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최근에 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반에서 '서원'에 관한 질문들이 나오게 됐어요.
삼손, 입다, 사무엘이 다 부모의 서원에 관련된 사람들이죠.
예전에는 부모님들이 '내 자녀를 목회자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서원 기도를 하는 경우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자녀 입장에선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 있잖아요'
그래서 뭐 고민을 하고, 갈등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반대로 되었어요.
자녀가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 선교사로, 사모로 헌신을 했는데
부모가 그걸 극구 반대를 하면서
그 서원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들이 더 많아지는 추세가 되어 버렸어요.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도, 사무엘도, 다윗도 그렇고요.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모태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자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를 강건하셨기 때문일까?
물론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강권적이고, 집요한 그 콜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가도
결국에 부르심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사실 한국교회가 부흥했던 불과 30년 전만 해도
(자신의 의지에 앞서) 부모의 서원기도를 받고 목회자로 헌신해서
나중에 귀하게 사역을 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계셨어요.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훨씬 더 이기적,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시대가 되다 보니까
한편에서는 '아니 나와 상의도 안 하고 부모가 서원 기도를 하는 게 어딨냐?'
라며 원망하는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자녀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헌신했는데
'너 목사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느냐?
너는 우리 가업을 이어야 된다. 너는 선교사 나가면 안 된다.
너는 사모되면 안 된다. 너는 사역자 되지 마라!'
이렇게 자녀의 서원을 무효화하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자녀의 서원을 무효화 시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이, 지나친 인간 중심의 세속적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굉장히 위태로운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이 주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인도하시고 감동하실 때
우리가 인격적으로 결국에는 동의하게 되고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신앙이에요.
하나님은, 당신도 당신의 자녀들도, 모태로부터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목숨 걸고 할 것이냐?' (직업적 소명)
그것도 하나님의 콜링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방황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 끝에, 땅끝에,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까지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살 때
거기까지 찾아오셔서 그를 다시 부르시잖아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있을 때
거기에 찾아오셔서 가나안 땅에 돌아가라고 부르시잖아요.
요나가 땅 끝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했을 때
바다 한가운데서 그를 찾아 오셔서, 그를 부르셔서
사명의 자리로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무런 상관 없이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취소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을 같이 읽어 볼게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표준새번역에서는 '철회되지 않는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복될 수 없다' 로 번역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인가요?
이것이죠.
-예수의 목격자가 되게 하시고, 예수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드십니다.
내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보고 듣고 내 손으로 만진바 되는 영적 체험을 하게 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든 이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만드신다는 거에요. 할렐루야!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3. 초신자 때 빡세게 훈련해야 됩니다.
갈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 '아라비아'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그러면 그가 지금 다메섹에 있는데, 유대 북쪽 시리아 지역입니다.
거기서 더 남쪽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 멀리 갔다는 얘기일까요? 주2)
그러면 바울이 왜 이곳 (아라비아 광야)에 갔는가요?
그는 3년 동안 광야에 들어가서
전심으로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특별한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한 후에)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것처럼
바울은 광야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갈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가 지금까지 배웠던 성경의 모든 지식, 구약 성경에 대한 모든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죠.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혜의 시간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까요.
팬데믹이 작년에 시작해서 올해를 지나 2년을 경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또 1년 정도 더 경과할 것으로 다들 예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도 3년의 그 아라비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간을 지나고 있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적막하다. 쓸쓸하다. 할 일이 없다.. 언제 끝날까?'
이런 생각으로 그냥 막연히 계십니까?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체험이 있는 거예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고
그 광야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만나의 은혜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팬데믹 기간이, 이 광야의 시간이
끝나기가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요.
여러분의 골방으로 들어가셔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왜냐면 이 기간이 끝나면, 다시 허리를 동이고 달려가야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바울의 아라비아 3년을 이렇게 묵상하다가
한 가지 깨달은 통찰은 뭐냐면
놀랍게도 바울이 아라비아의 들어가서 3년 동안 진심으로 말씀과 기도에 집중 했던
그 시간이 <초신자 때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초신자가, 바울처럼 이런 시간을 갖는다면
평생 충만한 크리스천이 되지 않겠어요?
평생 예수의 증인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초신자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만 나와도 기특한 거지 뭐!' 이렇게 생각을 해요.
'믿음 생활을 천천히 시작하면 되지..'
그렇게 10년 20년 지나면, 언제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크리스천으로서, 영적 성장에 집중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갓난 아기가 태어나서 가장 발육을 많이 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가장 젖을 많이 먹고, 사랑을 많이 받고, 관심을 많이 받을 때는.. 갓난아기 때입니다.
그때 집중적으로 성장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초신자 때 성경통독을 하고
초신자 때 새벽기도를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제가 밴쿠버에서도 그랬지만
전도를 해서, 그 전도 하신 분을 새벽기도회에 데리고 나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그러니까 새신자인데
매일 새벽 예배를 함께 드리고
또 성경통독을 하는 분들은
신앙 성장의 속도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빨라져요.
근데 초대교회 때는 초신자가 된다는 거 자체가
굉장한 헌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왜냐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결단이 있어야만, 신앙을 시작하는 거 였어요.
오늘날 우리가 신앙에 대한 접근이 너무나 잘못된 것이죠.
(새신자 때 너무 약하게 신앙생활 하는데, 새신자 때부터 아주 강하게 해야 된다는 뜻)
여러분이 신앙생활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충족하게 누리는..
마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임재의 충만함을 경험 했던 것처럼
그런 충만함이 여러분에게 경험되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처럼 극적으로 변화된 교회사의 인물들
제가 바울의 회심, 바울의 변화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성경의 인물들도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많이 경험했지만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많았거든요.
1) 4세기의 성자였고,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대학 교수였지만 아주 방탕한 삶을 살던 사람이거든요.
성적타락에 빠져있었고,
그런 어거스틴이 로마서를 읽고 회심을 해서
당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가 된 거예요.
2) C. S. 루이스도 무신론자 였었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회심하고 변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하게 증거하는
20세기의 대표적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습니다.
3) 우리가 잘 아는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도
세속적이고 방탕한 인생을 살던 젊은이였어요.
그가 주님께 사로잡힌 이후에, 완전히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고아들을 위해서 남은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4) 제가 오늘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한 사람은
어메이징 그레이스 라는 곡을 작사한 존 뉴턴입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나는 정말 죄인 중에서 최악의 죄인인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
이게 바울의 고백이었고, 존 뉴턴의 고백이었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 런던의 상당히 부유한 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근데 그의 어머니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아들 뉴턴을 어렸을 때부터 앉혀 놓고, 성경을 읽어 주고 찬송가를 가르치고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어요.
근데 안타깝게도 아들을 놔두고, 뉴턴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 이후로 뉴턴이 안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그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해군에 입대했는데, 군에서 탈영해서 도망다니다가
노예상선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또 풀려나면서
결국에는 계속 그 길로 가서 나중에 노예상선의 선장이 됩니다.
당시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들을 잡아다가 유럽에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간에서 배로 노예들을 운반해 주는 일을 한 것이죠.
그 가운데 온갖 악행을 저질렀어요.
온갖 거짓이 범벅이된 인생을 살았어요.
그렇지만 어렸을 때의 신앙교육 때문에
자기 양심의 가책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막 몸부림치며 성경을 읽어 보기도 하고
근데 율법적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인생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던 중 항해 중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났는데
이 폭풍우가 11일째 멈추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의 위협 앞에서,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말씀이 떠오르면서
그 갑판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고꾸라져서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그런데 참 은혜였던 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
(정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조지 휫필드가 설교자로서 활동하고 있던 시절이었어요.
존 뉴턴은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목회자로 헌신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그 계기가 된 구절이 갈라디아서 1:23~24절 입니다.
'한때는 내가 박해자였는데
그가 핍박하던 그 도를 이제는 전하는 자가 되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보고 '이게 나의 고백을 되어야겠다'
그래서 목회자로 헌신을 하고, 39살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됩니다.
이후로 4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며 살았어요.
여러분,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사람으로 윌리엄 윌버포스를 잘 아실 겁니다.
그 윌버포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존 뉴턴 이었어요.
뉴턴은 노예 상선의 그 참상이 어떤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정치인 월버포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죠.
그가 남은 평생에 목회를 하면서, 자기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나눴던 설교는
은혜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으면,
나는 돌아올 수 없었다.. 라는 거죠.
뉴턴이 말년에 한 2~3년 동안 시력을 잃어가면서
친구들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내 시력이 점점 사라져가고, 내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내가 분명하게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한 가지는, 내가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었다면
잃어버렸던 나를 어떻게 돼 찾았을까요?
영적인 눈이 멀어 있던 내가
어떻게 광명을 보게 되었을까요?'
그 뉴턴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존 뉴턴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돌이켜 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평생에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 은혜가 흘러넘쳐서 우리의 모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은혜의 통로가 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주1) ◑본문 해석 :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
갈1:1~12에서 굉장히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던 사도 바울이
오늘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공격할 때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도권 변호는 크게 두 부분인데요.>
▲1. 자신은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갈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자신이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얼마나 기독교를 탄압 했는지..
기독교를 완전히 와해시키고 싶었다고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의 극렬주의 유대인들보다
바울 자신이 한 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해외까지 가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해내고 투옥시키고 그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는가요?
'유대인이 유대교의 할례와 절기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죠.
△오늘 날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이 샤리아법 통치를 하기 때문에
인권 말살의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슬람교의 모습이 안 좋게 비쳐 지니까
최근에 몇몇 뉴스에서 다른 이슬람 지도자들이 나와서
'원래 이슬람교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 인터뷰들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샤리아 법을 찾아 보니까,
샤리아법이 이슬람 율법에 극단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샤리아 법 그 자체가, 이슬람 율법에 가장 가까운 본 모습이에요.
이것이 이슬람교에서도 그렇고, 유대교에서도 그렇고,
극단적 율법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는 '꾸란이 아니면 칼을 받아라' 하는 것이고요.
또 바울도 한때 그랬지만,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토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하고 나선 것이지요.
제가 과거에 한 달 동안 아부다비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중동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거기는 이슬람법에 따라서 사람들은 처형받는 겁니다.
도둑질을 하면 팔을 자르고, 성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에 처합니다.
이렇게 서슬퍼런 율법을 적용하는 데도
그런데 사람들의 죄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서구 사회보다 사실은 사회 저변에
굉장히 심각한 성범죄가 범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율법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의 요람 역할을 한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기독교를 또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의 무덤이 되었던 곳이죠.
유대 지역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시리아가 나오고,
이렇게 돌아가면 거기가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갈라디아는 유대의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이방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가장 먼저 전해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의 공격도
가장 먼저 받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으니까요.
그 율법주의의 전선의 전사로 활동했던 게
사실 과거의 사도 바울이었던 거죠.
그가 가졌던 유대인으로서 열심을 14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한 마디로 유대교에 매우 열성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시리아 지역에서 좌측으로 돌면 남쪽에 길리기아 땅의 다소가 나오는데
그러니까 길리기아 출신으로서 바울은 해외파 1.5세 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본토 출신들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던지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에 와서, 당대의 최고의 율법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그가 바리새파에 소속되어서, 랍비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에 대해서
엄청난 그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자기가 기존 사도들의 연줄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갈1:18~20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만났어요.
베드로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첫 번째 수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박해가 집중되면서 베드로가 그곳을 떠나서 순회전도사역을 가게 됩니다.
그 이후에 수장 역할을 한 사람이 '주의 형제 야고보' 였습니다.
바울은 이 두 분을 만나서 교제를 하면서
자기가 한 때는 박해자 이었지만
이제는 분명한 회심자가 되었고,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19절 하반절에 보면 '그 외에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를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도를 개별적으로 다 찾아가서
'저에게 한 표 지지를 해 주십시오' 이런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아서 사도가 된 게 아닙니다'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20절에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 이것을 강조할까요?
거짓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 바울이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서,
지도자들에게 잘 보여서, 정치적인 로비를 해서
그래서 권리를 받아서 사도 행세를 하는 것이다! .. 이렇게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21절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연대순으로 보자면 사실 순서가 바뀌어야 되는데
시리아(수리아)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쓴 것입니다.
그가 그 이후에 길리기아 다소, 자기 고향으로 가서 지내다가
자신에게 멘토 역할을 해줬던 바나바가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 와서 같이 사역하자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는 담임목사 그리고 바울은 부목사
그 두 사람이 교회 목회를 열심히 동역했던 거예요.
바울이 이 이야기를 굳이 한 것은
'내가 잠시 사도들과 교제를 했을 뿐
예루살렘에서 아주 먼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했던 것이다'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얼굴이 유대의 교회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22
갈1:22~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22절에 얘기한 것처럼, '유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내 얼굴을 알지도 못 한다'
그래서 사도권 시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핍박하던 자가 지금은 그가 박해하던 믿음의 도를 전하는 사람이 됐다.'
예수를 믿게 전후 비포앤애프터 가 명확하게 다른 사람인 거죠.
이 바울의 변화의 소식은
박해를 받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는 굉장히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2)
그 당시에 '아라비아' 라는 지명은, 굉장히 광범위한 지역을 커버했습니다.
예를 들면, 캐나다 밴쿠버는 로키산맥이 시작되는 지점인데,
거기에도 사막기후가 있어요.
재밌는 것은 멕시코 사막이 거기까지 연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기후에요.
무슨 얘기냐면 멕시코에 있는 사막이
미국 땅을 지나서
캐나다까지 그 사막기후가 연결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이 말은, 아라비아도 마찬가지 라는 거죠.
아라비아도도,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유프라테스강 이남까지
사막 기후가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동편 이 지역을 '아라비아 지역'이라고 또한 동일하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가 본문에 바울이 갔던 '아라비아'란,
다메섹 동남쪽으로 나바티아 왕국으로 갔다고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