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K
2021. 10. 29. 15:24
◈내가 새 일을 네게 보이노니 :6 이사야48;장 출처1, 출처2
본문 사48장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책망 48:1~11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 48:12~22
◑1. 이스라엘을 향한 책망 사48:1~11
11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라는 말씀이 두 번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또한 이 말씀은 9절의 말씀과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만에 해방된 것은
그들이 무엇을 잘해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택한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벨론에서 그대로 끝나버린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게 될 것이므로,
택한 자들을 아주 사라지게 하지 아니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1절,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기서 ‘유다’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출생할 것에 대한 암시입니다. (창49:10).
즉, 그토록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백성들이 타락하였음을 강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2절,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
‘거룩한 성 출신’
‘거룩한 성’이란 곧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이곳이 그렇게 불리운 까닭은, 성전과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인
법궤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룩한 성’이라는 명칭 속에서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행실과 성품도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은 2절에서
너희들이 어떤 자인지 먼저 3가지로 깨닫게 하여주십니다.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을 부르며 살아야 할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택한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분만을 찾으며, 거룩한 자의 백성답게 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 “너희는 들을지어다” 라고 “쉐마” 로 강조하고 계십니다. :1
여러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찾고 부르짖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거룩한 자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멸하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1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책망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었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어떤 것을 말씀해 주었고 보여주었다는 것입니까?
장래에 대한 예언들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해 주었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노예 생활을 할 때에도
4백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주었고
그러한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의 우상들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알려주셨고,
그들이 우상을 숭배할 것이라는 사실도.. 그들은 미리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신30:15~20)
본절에서 하나님은, 과거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장래의 일을 예언하시고,
결국엔 그 일들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그 성취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홀연히 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써,
미래에 있을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성격도,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4절,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이마는 놋이라’
이 표현은 흔히 수치를 모르는 매춘부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렘3:3)
왜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고, 저주의 길을 택하였습니까?
4절에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였고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쇠와 놋은, 견고한 금속들로 굽혀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한 것은, 나의 죄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원래 교만한 자였고, 마음이 완악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면
날마다 예수의 피로 나의 교만과 완악함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신자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죄인의 괴수된 심령으로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귀에 들려지고, 이해가 되고
영의 눈에 그 모든 사실들이 현실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5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만약에 하나님이 미리 말씀해주지 아니했고,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이 그렇게 했다고 주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들은 우상을 여전히 섬겼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겠다는 그들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대로 세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바벨론이 왕성한 국가가 되기 전에 천하를 통일하고 멸망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대로 그대로 이루어 졌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역사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고레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보고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합니다.
특히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직도 예수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땅에 낮고 천하고 오셔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음에도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길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6절,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새 일에 대한 말씀을 세 번 언급하셨는데
42장에서 “새 일을 고하노라”고 하셨고
43장에서 “새 일을 행하노라”고 하셨고
본문 6절에서는 “그러한 새 일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본 장의 전반부가 11절까지는 '책망'이고,
후반부는 12~22절까지가 '구원' (즉 새 일)인데,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먼저 책망하시고, 회개로 인도하시는 것이죠.
새로운 여행지를 가는 것도 설레임으로 가득 찬데
하나님이 우리 앞에 새로운 일들을 행하시고 보이신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설레임으로 가득차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데
그 일은 이스라엘이 들어보지도 못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일은 1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2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구원 사역의 완성입니다.
▲7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43:16~21을 연상시키는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옛적 일’로 말하면서, ‘새 일’을 언급한 바 있으며
그 ‘새 일’을 그토록 놀라웠던 출애굽 사건마저 압도할 만한
어떤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이라면 바벨론 포로 귀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래로 말미암는, 신약의 구원 사역까지 포함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한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로 단 한사람만 구원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8절,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즉 이스라엘은, 번번이 영적 귀를 닫아온 민족이었습니다.
‘모태에서부터 배역(패역)한 자라’
4절에서도 마음의 완악함과 교만을 지적하였지만
8절에서는 궤휼하고 패역함을 지적하였습니다.
궤휼은 거짓을 의미하고, 패역은 반역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한 것은
거짓됨과, 반역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소경이고, 영적으로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도.. 보지 못한 소경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한 것은.. 그들 마음속에 거짓과 패역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택한 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거짓과 패역함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왜 말씀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거짓의 영이 택한 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왜 자꾸만 말씀의 가르침이 아닌, 반대편의 길로 가는 패역함을 보이는 것입니까?
말씀의 다스림이 아닌 거짓된 악한 영의 세력을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자꾸만 반대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거짓의 악한 영의 줄을 끓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말씀 쪽으로 방형을 전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의 참 모습입니다.
▲9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택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쉽게 진노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참고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고, 쉽게 멸망시켜 버리면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가 이방인들에게 놀림이 될 것이므로,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기다리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10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0절,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은을 제련할 때는, 7~8번 제련 과정을 반복해서 거친다고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을 은처럼 하나님이 연단(제련)하셨다면, 그들은 없어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하셨습니다.
즉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그들을 연단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힘들고 괴로운 것이었지만, 은을 제련하는 만큼 극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죠.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무지 때문에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현재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상 때문에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신다면
이방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神)의 승리로 착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및 이방이 전혀 알지 못한 ‘새 일’(6절)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단은 택한 자를 위한 것도 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고난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 사48:12~22
▲12절,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하나님은 완악하고 교만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그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벨론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2절에서 “쉐마(들으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누구이신지 다시 한 번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다시 말한다면 “택한 자들아 잘 들어라 내가 곧 창조주이시며
내가 부르면 온 세상이 내 앞에 굴복 하느니라.
오직 나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사실을 믿어라” 입니다.
▲13절,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문자적인 뜻은 ‘내 오른손이 하늘을 재었다’입니다.
40:12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
그리고 그 능력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만물을 창조, 보존하시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자신이 만물의 흥망성쇠를 쥐고 있음을 강조하여, 이스라엘의 관심을 집중시키신 후
하나님께서는 시야를 좁혀 이스라엘 영역 속에서 되어질 일을 소개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으십시다.
-온 세상이 하나님 말씀 앞에 굴복한다는 사실도 믿으십시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믿으십시다.
이러한 세 가지만 택한 자들이 확실하게 믿는다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외면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 말씀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살아서 현재 역사하고 계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못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불신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14절,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벨론에 시행할 고레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이란 표현이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도덕적 품성을 기뻐했다거나
그가 경건한 자였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도구로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고레스에게만 적용하기에는 너무 강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온전히 적용할 대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뿐입니다.(눅3:22).
그렇다면 이 표현은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로서의 고레스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습니다.
14절에도 또 “쉐마” 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들으라는 것입니까?
누가 바벨론을 멸망시켰고, 누가 이런 일을 예언하였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때는,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앗수르의 속국에 불과한 나라였고
어느 누가 생각해도 그런 작은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고 믿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강대국 바벨론을, 고레스를 통해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도
누가 계획하였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15절,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본절의 특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
‘나’가 세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특징은 이방 왕 고레스를 선택하고 그로 흥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임 받게 만드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 되어지는 일임을 드러냅니다.
15절에도 고레스를 부르고 택하여 인도하였고,
고레스 가는 길이 형통하도록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고레스 자신은 바벨론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똑똑하고 잘 나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레스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대에 너희 택한 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보고, 잘 듣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지 깨닫고 살아갈 때
내가 믿고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이신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기다리는 길이 아직도 보이지 않고 멀고 험할지라도
성령님의 온전하신 인도하심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6절,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영을 보내셨느니라.’
본 구절을 기점으로 화자(話者)가 하나님에서, 본서 저자인 이사야로 바뀌고 있습니다.
먼저 ‘영’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데
이 용어가 나온 것은, 저자의 사역이 자신이 아닌, 성령에 의해 되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화자가 바뀜으로써, 이어질 예언의 내용,
곧 17~22절이 몹시 중요한 내용임을 기대케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택한 자들에게 “쉐마” 라고 하시면서 가까이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 일을, 비밀스럽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공개적으로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제 그러한 새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시어서
새 일을 더욱 분명하게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한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이스라엘을 각별히 생각하신다면
“왜 자신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택하셨다면, 왜 편하게 살지 아니하게 하시고
고난 속에서 살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의문이 있지 않습니까?
나를 택하셨다면, 왜 세상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하시지,
아니 남부럽게 살지는 않게 하더라도
왜 숱한 고난 속에서 살게 하시는지.. 의문 같은 것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분명하게 답변하십니다. 17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7절,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가르치고...인도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각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너무 간단합니다. 유익하고 마땅한 길을 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생활 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었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마땅한 길로 인도하셨음에도.. 백성들이 순종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문에도 답변이 되십니까?
물론 고난당하는 사람이 모두 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해서
고난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택한 자들에게 찾아온 고난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해서 찾아온 고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찾아온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고난으로 볼 수 있겠지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바벨론의 고난 속에서도 다니엘과 에스겔은
오히려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를 받았고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며 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고난 속에서도, 마지막 때에 되어질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말씀으로 만나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18절,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얼핏 보면, 본절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백성에게 의도한 하나님의 축복의 풍성함을 역으로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절이 지닌 시적 성격을 드러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본절에 드러난 하나님의 축복 부분만, 시적 구조에 충실하게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너의 평강이 강과 같겠다. 그리고 너의 의가 바다 물결 같겠다.’
본절의 주안점은 무한한 평강과 의에 있는 바,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즉, 평강과 의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분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에서 나타나는 축복입니다.
18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온 고난이, 왜 왔는지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해서,
바벨론의 포로라는 고난이 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19절,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18절과 본절 상반절에는 축복이 기록되고 있는데,
전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내적 축복인 반면
후자는 외적 축복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후자의 내용은 낯익은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축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여기에는 혈통적, 민족적 개념의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로 대치시키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렴풋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쥐고 있던 그 영광스러운 신정 체제는
이제 망각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그림자와 모형의 시대가 지나가고, 왕되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이 넌지시 예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평강이 강처럼 흘렀을 것이고
의가 바다의 물결처럼 같았을 것이고, 네 자손이 모래처럼 번성하였을 것이고,
택한 자들의 이름이 끓어지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모든 삶에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시1:2~3)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부터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20절)
▲20절,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압제하는 민족으로부터, 온갖 수단을 다해 탈출해 나오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온자들은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땅 끝까지 그 사역을 선포할 것입니다.
바벨론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70년 동안 살아온 바벨론을 떠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알게 모르게, 바벨론 이방 문화에 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을 떠나라는 것은, 땅만 떠나라는 의미가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세상 것에 물들어 있는
나의 생각과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세상 것을 벗어 버리지 아니하고서는
말씀에 절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마음이 세상 것을 너무 의지하고, 마음을 뺏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2:2)
▲21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본절에는,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이 나옵니다.
저자가 그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20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보증물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본서 저자는,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이미 발생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서 있는 시점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시대의 사람인 1차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 기간 이후 귀환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준하는 실제적인 보증물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본절이 제시하는 사건은, 광야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모든 사건을 망라해서 대표적으로 제시된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본절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근거로 하여
20절에 나타난, 앞으로 있을 구원 사역을 튼튼하게 제시하고자 의도된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여호와의 위대한 구원 사역의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본서가 암시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사역이란
옛날 출애굽으로 대표되는 구원 사역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랍고 새로운 구원 사역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구원 사역은
천지를 처음 창조한 하나님의 사역에 필적한 것이며,
그 창조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 주며,
그 목적을 완성시켜 주는 새 창조의 사역임을
이미 40장 이후부터 저자가 계속 시사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49~53장에 서술되고 있는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내용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2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실 때
두 부류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부류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받느냐/ 안 받느냐로 갈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