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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5장 9~20 원초적인 영성

LNCK 2021. 10. 31. 05:55

https://www.youtube.com/watch?v=u9Z36ZSB1fY

◈원초적인 영성             막5:9~20, 고전14:15          출처

현대인은 자기 속에, 
초현대적인 마인드와 원시적인 마인드가 공존합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느낄 때가 있습니까? 

학교에서는 첨단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직장에서는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첨단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또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고 
스타벅스 앱으로 커피를 주문해서 마시고 
앱으로 투자를 합니다. (초현대적 마인드)

그러나 동시에 같은 사람이, 어머니가 만들어 준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고 

그리고 애정운, 재물운, 타로점을 보러 다니고 
또 밤에 꾼 꿈의 뒤숭숭 함에 번민하고, 운과 재수를 따집니다. (원시적 마인드)

이렇게 한편으로는 첨단의 초현대적인 사고를 갖고 살지만 
동시에 원시적인 사고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아직 옛 것이 남아있는 중에 
새 것이 들어오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문화재'란, 사람에서 사람으로, 
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아주 오래된 기술인데 
만약에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않으면 
인간문화재가 죽었을 때, 그 기술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을 보존하고자, '인간문화재'를 지정하고, 
그의 장인기술과 정신을 후대로 전수하고자 힘씁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도, 
한때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었던 영성의 유산 중에 
소실이 되고, 상실되어서 
후대가 더 이상 그것을 온전히 전수 받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레고리오 성가 라는 것입니다. *Gregorian chant
여러분 그레고리오 성가를 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남자 수도사들이 단선율로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 
이게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냐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영으로 찬양을 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바울이
'우리가 영으로 찬양하고 마음으로 찬양한다' 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전14:15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감동하시면
누가 지휘하는 사람이 없어도, 악보가 없어도 
회중이 즉흥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는 노래를 부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기독교인들은 영으로 노래 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과거에 불렀던 유산이 악보로 기록이 돼서 남아있을 뿐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납득했던 것들이 
현대화 되고, 그 사고가 전문화 되고, 
또 과학화 되고, 이성적, 합리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전의 원시적인 영성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방언입니다. 
방언에 대한 논란이 많지요. 

-방언을 모든 성도가 다 해야 되느냐? 
-방언을 받아야 성령 충만한 것이냐? 
-방언과 구원의 관계가 무엇이냐? 
-방문을 못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방언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방언이라는 것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저절로 할 수 있었던 원초적인 영적인 언어입니다.

아기들이 말을 배우기 전에, 아기들이 신나면 랄랄랄라 말을 합니다.
언어는 아직 배우지 않았지만, 
그러나 아기들도 그 마음 속의 감흥은 어른과 똑같기 때문에 
그 감흥을 표현하기 위해서, 배운 적이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스터 액트' 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우피 골드버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입니다. 

'시스터 액트 2' 편에 가톨릭 고등학교의 성가대 경연대회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부유한 백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합창단이 나와서 
찬송가 9장 '거룩 거룩 거룩'을 아주 클래식컬하게, 아주 멋지게, 
규범에 맞게, 아주 모범적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가난한 흑인들로 구성된 학교 합창단은  
똑같은 곡을 
춤을 추면서, 랩을 하면서, 신나고 기쁘게 부르는 장면이 나오죠. 

하나님은 둘 다 받으십니다. 
둘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시대에 
아는 것은 많고, 머리에 많은 것이 차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갈급해 하는 오늘날 이 세대에
두 성가대 중에, 어떤 스타일이 더 어필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은 '거라사인 지역'이라고 했어요.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 가셨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고,

그리고 이 지역이 유대인들로 구성된 것인지 
이방인들로 구성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유대인이 안 먹는) '돼지를 치고 있었다'는 말은 
이들이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변방이고, 가장 낙후된 지역이고 
가난하고, 상당히 뒤떨어진 지역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거라사 지역은, 아주 낙후되고 변방이고, 변두리고 
예수님도 배를 타고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에 가장 적나라한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군대 귀신'이 한 사람 속에 들어 갔다가 나오니까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물속에 뛰어들어가서 몰살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 구절이 우리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인간의 사고가 발전하고, 문화의 옷을 입고, 
또 그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원래 인간이 갖고 있었던 원초적인 영성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서두에 말씀드렸는데요.


본문은, 마귀가

현대사회에서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원시적인 사회에서만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귀가 21세기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만

1~2세기에는 함부로 나타났다.. 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의식이 현대화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해서

그런 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게 될 수록

원래 인간이 갖고 있었던 원초적인 영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간문화재 처럼, 그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죽어 버리면

더이상 그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없어지는 것처럼

 

그레고리오 성가가, 초대교회 때는 모든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것이 악보 상으로만 유물이 된 것처럼

 

인간의 사고가 현대화되고, 초현대화 될수록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영적인 유산을 잃어버려서

 

우리가 이런 본문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이 구절을, 가장 자연스럽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이런 흉악한 귀신이 있었고, 예수님이 그것을 쫓아내 줬더니 돼지떼 속에 들어갔다'

이렇게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이것을 교훈적으로 읽고 (사실 여부에 관계 없이 그 속에 담긴 교훈만 얻으면 된다는 입장)

-또 비유적으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왜냐면 자기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거든요.

이런 일이 설령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느니..

-또는 구조적인 사회악을 보여주는 것이라느니..

-인간의 구원을 모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느니..

이런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할지언정

 

진짜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갔다가 나갈 수 있다는..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쫓겨나갔다.. 라는 것을

가르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믿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냉장고가 있고, TV가 있는 시대에 그런 것을 믿을 수 없다.'

 

왜 독일과 유럽이 후기 기독교 사회(포스트 크리샌덤)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유럽이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된 것은

이들이 교육과 의식이 발전하고, 문명과 과학이 발전했다는 명분으로

원초적인 기독교 영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냉장고가 있고, 텔리비전이 있고, 컴퓨터도 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으니

'성경을 영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라고

원초적이며 영적인 유산을 떼버린 것입니다.

 

'이거 필요. 없다. 이거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윤리 도덕이요, 종교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전통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영적인 유산을 떼어 버리려고 한 것인데

 

문제는, 떼 버리고 나니까.. 이제 기독교에 남는 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가 남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지도 못하고

기도의 응답 조차도 믿지를 못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기독교인이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저렇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윤리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기쁘면 춤을 추게 되어 있어요. 

그러냐 사람이 교양을 얻고, 또 사람을 의식하고, 예절을 배우게 되면서

이제 그런 것은 당황스러운 것이 되고

그건 점잖치 않는 것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절제해야 되고, 자기 통제해야 되고,

점잖아야 되고, 예절 발라야 되고..

 

그러는 중에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라든가

예수님 안에서의 즐거움 등은.. 완전히 나와 거리가 먼 것이 되어버리고만 것입니다.

현대화된 것입니다.

 

'현대화! 이걸 버리자' 하는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되돌릴 수가 없어요.

그것도 우리의 삶에 일부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제는 정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정비합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한다'

'마음으로 찬양하고 영으로 찬양한다.'

 

고린도전서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겸비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도 기도하고, 즉 우리의 머리로도 기도하고

또한 영으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하나님은 영이시니 사람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즉 영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이 있어요)

 

우리가 동일하신 예수님을 믿었고, 경험하고 있고,

그 예수님을 온 땅에 증거 해야 될 사명이 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