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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1장 해석

LNCK 2021. 11. 2. 17:22

 

◈예루살렘은 구원을 받는다 1     이사야51:장         여러 설교 정리

  

◑1.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        사51:1~8

 

악몽처럼 뼈아팠던 지난 날을 생각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몽 갔던 날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은 “의를 좇으며 하나님을 구하는 자” 라고 칭하고 계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사람에게는, 반드시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는데,

이때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이 없는 자가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은 택함받은 자들이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주의하라고 하십니까?

 

<첫째로, 너희를 택한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2절)

 

▲1절,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

이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본국으로 귀환할 때를 고대했던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포로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이들은 ‘의를 따르는’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너희를 떠낸 저 바위와 너희를 파낸 저 구덩이를 바라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답은 2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바라보라.

내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혼자였지만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서 그 자손을 많게 했다.”

 

‘떠낸 바위와 구덩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2절,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사야는,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되어 많은 수의 민족으로까지 불어난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택함을 받은 자들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택하시지 아니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존재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혈혈 단신” 이라는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열국의 아비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어느 누구도 장차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유랑하는 나그네였고

더욱이 나이 들어 단산한 늙은 노부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약속하셨고,

훗날에 그의 후손들은, 말씀대로 하늘의 별과 같이 창성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너희가 의지하고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바벨론과 이스라엘의 회복’은 반드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는지 잊지 마시고 생각하며 살 때

하나님의 위로가 나에게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3절)

 

▲3절,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이 있으리라" 

귀환하는 날이 올 때 "그 가운데"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감격적으로 터져 나오게 될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방학을 하게 되면 공부에서 해방되었다는 그 즐거움 때문에

교문 밖으로 나오는 그 발걸음이 정말 가볍지 않습니까?

 

청년들이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자유로운 사회로 나오게 될 때

그 안도감과 행복감은 마치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한 민족 전체가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서 종살이 하다가

해방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 감격적인 마음을 어떠하겠습니까?

 

정말 곁에 있는 그 누구라도 다 부둥켜안고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은 구원의 감격을

그렇게 모든 성도들이 서로 나누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광야로 에덴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게’

‘에덴’과 ‘여호와의 동산’은 동격입니다.

출바벨론은, 가장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회복을 뜻합니다.

 

그런데 종말론적으로 볼 때, 

본절은 메시야를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까지 그 시야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6절)

 

▲4절,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4~5절 내용은

여호와의 날에 되어질 상황을 그린 42:3~4절과,              

이방에 공의를 베푸실 ‘종’의 노래에 해당하는 42:1절 내용과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본문의 예언 역시

바벨론 포로 귀환뿐 아니라, 메시야 시대에 되어질 일들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5절,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계속해서 이중 성취적인 성격의 예언이 나오며, 

특히 종말론적 색채가 짙은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와 이스라엘의 죄의 해결을 동시에 만족시킬

대속주이신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암시합니다.

 

한편 메시야의 대속 사역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2차적으로는 이방의 택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6절,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만물의 일시성,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묘사이지만

종말에 되어질 어떤 징조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통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의 선택받은 자의 구원은

결국 성취되고 말 분명한 사실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시102:26, 히1:11, 12)

 

본문 속에 율법, 공의, 의, 구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로 비롯될 구원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만민의 빛” 으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뿌리치고

사람들에게나 세상에서 위로를 받겠다고 고집하며 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6절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연기같이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도 연기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옷처럼 헤어지게 될 것이고, 하루살이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한 불신앙의 인생의 끝은 이처럼 비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6b

 

<넷째로,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7~8절)

 

▲7절,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1절에서 메시지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7절에서도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알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훼방과 비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특히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산다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경과 찬사가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24:9-10)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8절,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그러므로 그런 훼방과 비방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절, 8절의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훼방하고 비방하는 세력들이

하나님께 좀처럼 벌레처럼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훼방과 비방 소리를 마음에 담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데 전심 전력을 다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선지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사51:9~16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가 9~11절까지 나오고

하나님의 응답이 12~16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의 기도는, 곧 이스라엘 민족들의 마음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여도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실지 다 아시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되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주소서” 

"나의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의 기도 후에 하나님의 응답이 나오지만 이 응답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약 150년 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가 빠르게 응답되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그 옛날에 애굽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9절,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깨소서 깨소서’

하나님의 과거의 전능 사역을 회고하며 아뢰는 이 호소는

‘공동체적 애가‘의 특성을 보여줍니다.(시44:1~3, 23, 80:2)

 

하나님의 구원을 재촉하는 듯한 이 호소는,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긴박한 현실 상황으로부터 한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말입니다.

 

‘라합’ 

‘애굽’의 시적인 이름입니다. 이미 본서 저자가 사용한 바 있습니다. (30:7).

 

‘용’ (탄닌)

문자적인 뜻은 ‘악어’인데, 악어는 아우구스투스가 애굽 정복 뒤에

애굽의 동전에 새겨진 그림을 통해 확인하였듯이, 애굽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특히 바로 왕을 가리킵니다. (27:1, 시74:13, 14, 겔32:2).

 

선지자는 여기서, 기적적인 출애굽 사건 중 바로의 항복 기사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10절,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기서 ‘바다’는 홍해를 가리킵니다. (43:6, 출14:21).

‘당신은 홍해 기적 사건을 일으키신 바로 그 전능자가 아니십니까?’라고 묻고 있지만

이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의 질문입니다.

 

10절에 나오는 바다는 그 옛날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0절 관련 설교  추천                      주1)

 

▲11절,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1차적으로는 넓게 펼쳐진 광야를 지나,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귀환민들에게 찬양과 감격이 가득할 것을 서술한 것입니다.

  

11절에서 이사야의 기도는 확신으로 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을 드리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실 것입니다. (막11:24)

 

▲12절,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나 곧 나이니라’(아노키 아노키)

보기 드물게,  ‘아노키’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참 위로자, 구원자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반복되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그의 백성에 대한 답답한 심정의 표출이기도 합니다.

 

12절부터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지는데,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과연 그런 능력이 있는가 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고 싶어도, 그만한 능력이 하나님께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대적이 어떠한 존재이며

또한 자신은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적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12절에 “죽을 사람” “풀 같이 될 인자” 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강한 자들일지라도 그들은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며

잠시 잠간 있다가 시들어지는 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같은 세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3절,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표적을 정하고 활시위를 뒤로 잡아당긴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7:13, 11:2, 21:12)

 

사실 이와 같은 상태 속에 있다면,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그와 같은 상태 속에 있더라도, 

우주 안에 되어지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더 의지할 것인가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며 날마다 부딪혀야 하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대적의 실체를 밝힌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실체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은혜가 없어질 때

인간은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고 세상을 의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만큼 세상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비율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30%라면,

70%는 세상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70%라면

세상적인 마음이 30%뿐이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적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으로 나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14절,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

  

이제 그 포로 상태에서 속히 놓인다면 본절의 시점은

포로 시대 말기 쯤이 될 것입니다.

 

이 표현은,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승리할 신약 교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14절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들에게 또 다시 약속을 하여 주십니다.

“결박이 풀릴 것이며, 결코 죽지도 아니할 것이며,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지 아니할 것” 이라는 것입니다.

 

▲15절,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

원문 직역은 ‘그 물결이 뛰는 바다를 나눈자’입니다.

‘꾸짖어 뛰는 파도를 잠잠케 한 자’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습니다.

 

이 같은 번역들을 종합할 때, 본 구절은

파도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흉용한 바다를 명령하셔서 잔잔케 하시고

둘로 나누어 그 사이에 길을 내심으로써

이스라엘로 무사히 건너게 하셨던 홍해 도보 사건을 암시합니다.

 

▲16절,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이 표현은, 그를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렘15:19

 

본문이 세 번째 종의 노래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때(49:2), 

이는 본서에서 줄곧 암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을 통한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고 추측합니다. (49:2, 50:4, 5, 59:21, 신18:18, 요 3:34)

 

16절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입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보호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자연을 다스리시고 만군의 여호와이시라는 것입니다.

49장에서도 자신의 택하신 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여러분!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우리 앞에 생긴다 할지라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사51:17~23

 

▲17절,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

왕이 내리는 잔은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받아 마셔야 합니다.

옛날에 왕이 사약을 내리면 반드시 받아 마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잔은, (사약은 아니고) 분노의 잔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분노하시게 해서, 그 벌로 받은 잔입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은 머나먼 낯선 땅에 끌려가고

남은 백성은 가난과 학대와 수치와 울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잔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이미 다 마셔버렸고 더 이상 마실 분노의 잔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깨어 일어나야 하는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예루살렘이 마실 하나님의 분노의 잔 즉 징벌의 잔, 고난의 잔을

다 마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견책을 받을 만큼 받았고 하나님의 분노가 그쳤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의 포로로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상태를

분노의 잔을 마신 자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담긴 잔을 마신 자는, 전적으로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비유는 그리스도에 대속적 죽음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바 있습니다. (막10:38)

 

한편 9절에서 사용된 ‘히트오레리’ 곧 ‘깰지어다’가 여기서도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1차적으로 진정 깨어나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회복될 것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이후로 하나님의 진노의 큰 잔을 마신 예루살렘의 모습을 3가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을 인도하고 양육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18절)

 

▲18절,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영적 지도자의 부재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후에 바벨론은 왕족들과 귀족들과 유력한 자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간신히 포로로 잡히지 않는 자들은 애굽으로 도망쳤습니다. (렘43:4~7)

 

오늘날도 이 땅에 영적 지도자 부재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이 민족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신구약 중간사 400년 동안에 모든 악이 세상을 점령한 것은

영적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 날에도 하나님은 14만 4천 명을 통해서 마지막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곧 두 증인이 될 것이며 그들이 계시록 11장에서 순교한 후에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악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 소망이 있는 것은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이들도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올 것입니다.

 

<둘째로, 황폐와 멸망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19절) 

 

▲19절,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이 두 가지 일’

정확히는 ‘이 두 가지 일들’입니다.

말하자면 두 쌍,  곧 네 가지 일들을 가리키는데, 

 

먼저 한 쌍은 땅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황폐와 멸망이며

또 다른 한 쌍은 사람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기근과 칼(전쟁)입니다.

 

한편, 이를  

'기근으로 인한 황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멸망'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바벨론에게 3차의 공격을 받은 예루살렘은 황폐와 멸망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예루살렘을 보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어느 누가 이 고통을 감히 위로할 자가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으나

예루살렘이 마신 그 분노의 잔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린 것이었기에

예루살렘의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찾아온 이 고통의 시간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70년이라는 긴 세월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하나님께 회개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이러한 고통의 시간이

마지막 날에 이 땅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할 때 믿는 자들은 마음을 겸비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지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이 아니더라도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어떤 고난과 환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 고통의 시간이 길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곤비하여 쓰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20절)

 

▲20절,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여기 ‘모퉁이’란 그 문자적인 뜻이 ‘머리’, ‘꼭대기’인데

거리의 ‘머리’(꼭대기)란 당시 한 도시의 모든 거리와 도로의 출발점이자

중심지였던 성문을 가리킵니다.

 

당시 성문은 밤이 되면 폐쇄되었는데

문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자로서 밤이 되어 그 문이 폐쇄되면

그 문 앞에 모여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모습, 곧 여럿이 성문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을

저자는 ‘그물에 걸린 영양 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쩔 도리 없이, 그 발이 묶인 나그네와 같이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곤비한 모습은 “그물에 걸린 영양”에 비유되었습니다.

사냥꾼이 설치해 놓은 그물에 걸려든 영양이 빠져나오기 위해

계속 발버둥치고 허덕이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지쳐버린 채 땅에 드러누워

숨만 헐떡거리듯이 예루살렘의 신세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깨우실 것입니다. 17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다 죽어가는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깨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의 말씀을 21절부터 3가지로 주고 계십니다.

 

▲21절,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외적의 침입으로 비틀거리고 쓰러진

이스라엘의 형편을 지적한 표현입니다. (29:9, 애3:15)

 

들으라는 것입니다.

“쉐마” 즉 “들으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백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 말씀 한 번 듣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다면 하나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내 영혼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4:12)

 

▲22절,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

예루살렘이 정복자 바벨론에 의해 많은 억울함을 당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는 분노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문자 그대로는,  다시는 바벨론 포로와 같은 시련과 재난을 허락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 후에도

로마의 침공으로 동일한 시련과 재난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경건한 참이스라엘 백성, 곧 남은 자들은

세상에서는 시련과 재난을 겪으나, 결국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결코 동일한 고통을 겪지 않고 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세상 끝 날 까지 내가 나와 함께하리라”

“너는 내 것이니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니라”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라는 말씀은,   49:16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가능한 약속이지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과 짝하고 말씀을 떠나 사는데도..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님을 깨닫기 바랍니다.

 

▲23절,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잔혹하게 대하였던 사실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이방의 정복자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길거리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엎드리게 하고

그들을 짓밟으며 그 위를 지나가곤했다는 것입니다.

 

정복자들이 문자 그대로 그 피정복 국가 왕의 목을 밟았던 관습은

성경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수10:24, 66:11, 12).

 

하나님은 대적자들에게 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23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바벨론이 예루살렘보다 더 의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이 주인인양 이스라엘 민족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교만하게 행동한 바벨론에게, 분노의 잔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세상의 조롱과 모욕을 당한다 할지라도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훼방하는 세력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의 권세와 부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이 징계(교정)의 손이었다면

바벨론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손은 심판(처벌)의 손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이후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민족이 되었습니다.

 

세상 끝 날에도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세상을 쥐고 흔들었던 악한 세력들이

산채로 유황 불속에 던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하나님의 택하심 받은 자들에게 때로는 하나님의 분노의 잔이 임할지라도

그것은 깨닫고 돌아오기 위한 징계의 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올 때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더욱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3:11-12)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 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 속에

깊이 임재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주1)  사51:10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 나오는 예화        *이 단락 출처

지방에 있는 어느 기독교 계통 고등학교에서 3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 거창고

 

이 학교에 부속된 교회가 있었숩니다.

시월 마지막 주일이 되어서 이 교회에서 종교개혁기념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부 예배와 2부 예배가 있었는데

1부 예배에서는 20대 후반의 국어교사가 설교를 했고

2부 예배에서는 50대 후반의 교장이 설교를 했습니다.

 

1부 예배 설교를 맡은 젊은 교사는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인데

한국 교회는 이렇게 타락했고 이런 점을 고쳐야 한다고 열을 올려 설교했습니다.

 

이 젊은 교사는 교회와 교파 안에서 비합리적인 일들로 어려움을 겪고 실망을 하고

지방에 내려왔기 때문에 교회의 타락을 공격하고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좀 높았고 흥분 속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2부 예배 설교를 맡은 교장은 종교 개혁의 기본정신은

"오직 믿음으로!"인데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차분하게 설교했습니다.

 

이 교장 선생은 일제 시대에는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했고

해방 뒤에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신학을 공부한 분인데

소속한 교파의 인사들과 갈등이 있어서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평신도의 신분으로 기독교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두 예배가 끝난 다음에 몇 명의 교인이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데

이 자리에는 1부 예배 설교를 맡았던 교사도 참석했습니다.

 

예배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교인들이 대부분 동료 교사들이어서 흉허물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1부와 2부 예배에 다 참석한 한 교인이 말하기를

1부와 2부 예배 다 좋았는데

1부 예배에서는 외과 수술을 받았고

2부 예배에서는 내과 치료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교인은 말하기를 1부 예배에서는 충격을 느꼈고

2부 예배에서는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한 교인이 그 말을 이어받아 1부 예배에서는 아픔을 느꼈고

2부 예배에서는 시원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교사는 말하기를

1부 예배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고

2부 예배는 나를 향한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의 이와 같은 반응은 1부 예배 설교를 맡았던 교사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교사의 종교개혁 기념주일 설교는

밖의 개혁보다 안의 개혁을 강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이 교사가 누구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아마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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