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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3장 해석

LNCK 2021. 11. 13. 05:34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님            이사야63:장         여러 설교 정리

 

이사야서 끝 부분에서도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64장부터 66장 끝 장까지 “강림” 이라는 말씀이 세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63장에서는, 세상 끝 날에 있을 심판 앞에

이사야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가 64장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63:7~64장끝절)

 

이 마지막 때를 위해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하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심판주 예수님            사63:1~6

 

종말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악의 세력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1절,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주1)

 

‘에돔...보스라’ 

에돔은 유다에 근접해 있는 까닭에 유다와 끊임없는 적대감을 가졌던 국가이며.

보스라는 에돔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이 두 곳은, 본서 저자가 세상의 모든 유다의 대적을 의미할 때 언급한 곳입니다. (34:6)

 

‘홍의를 입고...오는 자’

뒷 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하는 큰 용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용사의 정체에 관한 견해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중의 대표적인 견해는, 메시야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1)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상황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마지막 보응의 날과도 관계됩니다.

이런 점에서 에돔 등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은 물론이고

나아가 메시야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까지 상징합니다.

 

2) 피 묻은 옷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암시합니다. (계19:11~14)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을 파하신 승리의 십자가였습니다. (골 2:15)

 

‘화려한 의복’

문자적인 뜻은 ‘그 의복에 있어 영광스러운’입니다.

이것은 고위직에 있는 고대 용사들의 영예롭고 눈부신 군복을 가리킵니다.

 

‘큰 능력으로 걷는 자’

이 표현은 그의 대적을 완전히 섬멸한 사실을 드러내듯

승리의 정복자로서 당당한 보무로 입성하는 용사에서 따온 이미지입니다.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화자(話者)였다면,

본 구절부터는 메시야 자신이 화자가 되고 있으며, 

본 화자는 앞선 화자의 의문에 대답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 ‘의’는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 화려한 의복이 피로 물들어 있고 큰 능력으로 걸어오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가 누구라고 밝히고 있습니까?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의로운 자” “구원자” 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로운 자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 악의 세력을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분의 옷이

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2절,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본절은 메시야가 그 대적을 진멸하신 사실을 포도즙 짜는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포도즙을 짤 때에는 먼저 큰 통에 포도를 넣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밟았습니다.

 

본 절은 이같이 포도즙을 짤 때,

그 즙이 튀어 옷에 묻은 어떤 사람을 연상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피를 포도즙에 비유해 언급하곤 합니다(신32:14).

 

이사야 선지자는 왜 그분의 옷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의문처럼 우리에게도 의문이 있습니다.

 

왜 마지막 때에 세상을 조용히 끝내버리지 아니하시고

무섭게 끝을 내시는지 의문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 세상을 피 바다로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없으십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3~6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3절,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심판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세상을 무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찾아 볼 수 없는 무서운 환난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무서운 환난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환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택한 자도 불택정된 자도 모두 다 이 무서운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를 얼마나 진실 되게 믿었는지 그 날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자는, 대환난이 닥쳐도, 성령의 인을 받아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형식과 외식으로 교회를 다니고 종교적으로 예수를 믿은 자들은

그 날에 자신의 추한 모습이 환난의 바람 앞에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심판주로 임하실 주님은, 노함과 분함으로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4~6절까지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노하고 분한지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원수 갚는 날’

여기 ‘원수 갚는다’는 표현은,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사단의 세력)이 징벌 받는 이 날은

역으로 이스라엘(모든 성도)의 구원의 날입니다. (34:8, 61:2 참조)

 

예수께서 영적인 원수를 갚아야 만이 구속의 날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원수 마귀는 반드시 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원수 마귀에게 속한 자들도, 같이 멸망 당할 것입니다.

 

▲5절,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도와주는 자도 없고...없으므로’

아무도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조력하지 않으며

조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메시야께서 감당하시는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은

메시야 자신의 대속 사역으로써 충분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이 표현은 59:16의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를 연상시킵니다.

 

그 날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분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2천 년 동안 참으셨던 예수님의 분노가

악한 사탄과 사탄의 미혹에 빠진 자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그들을 취케 하고’

본문은 메시야의 진노의 공포 아래 있는 자가, 만취한 자처럼

자제력을 잃고 땅 위에 엎드러져 있는 상황을 연상케 합니다.(시75:8 참조)

 

사탄에게만 분노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임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후 3년 반에는 더 이상 세상에서 구원받을 자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분노 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피가 땅에 쏟아지고 강을 이룰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 날에 대해 더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14: 19~20)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혀서 흘러나오는 피의 높이는

말굴레까지 닿을 것이고

1600 스타디온은 340km에 해당하는 길이입니다.

 

340km 팔레스타인의 전 길이로서

이것은 곧 전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전 세계에 즉 만민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노가 상상이 가십니까?

그 어떤 동정도 사랑도 없는 예수님의 분노가 세상 끝 날에 임할 것입니다.

 

 

◑2. 이사야의 기도        사63:7~19

 

이방이 심판을 당하는 날은, 동시에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날입니다.

 

▲7절,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내가’ 

본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1~6절) 화자가 주로 메시야이셨다면

이제부터는 대적의 진멸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이며

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직접적 화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진실로 예수님의 자비의 손길에 구원의 손길에 붙잡히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자비와 구원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의 손길을 내밀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손길을 수없이 뿌리쳤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이것은 시내산 언약 관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킵니다.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기대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신실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아울러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반역과 거짓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총을 따라 택하신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이 회복시키시리라는 암시도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거짓을 행치 아니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 되기를 거부했고 거짓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 없이 용서하시고

자비의 손길로 안아주셨습니다.

 

▲9절,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주2)

 

‘자기 앞의 사자’

이 사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출32:34, 33:2, 민20:16)

따라서 천사로 봅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오실 메시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실제로 메시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부분에서

이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출14:19, 23:20, 21).

 

따라서 본 용어는 1차적으로는 천사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예표하는 용어로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드시며’ 

그의 양떼를 모든 목자 혹은 그의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혹은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독수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출19:4, 신32:11, 12).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의 연단 중에서 보존하시고

결국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신 것을 가리킵니다.

 

▲10절,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성신’(루아흐 카데쇼)

그러나 물론 이사야 당시 히브리인들이, 이 용어를 하나님에게 적용시켰다는 사실과, 

오늘날의 성도들과 달리 삼위의 독립된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성부, 성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령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데

거짓과 타협하며 세상 것을 쫓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도 한계가 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혜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은혜의 시대가 끝나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시고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11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주3)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입니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습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바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이 탈출하여 나왔던 애굽을 가리킵니다.

홍해 사건은 12절에 나옵니다.

 

‘성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궁극적 목적은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승한 거룩한 민족이 되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출19:4~6).

 

그런데 그 목적에 도달하게끔 역사하는 힘은

그들 가운데 보내신 성신으로 말미암았습니다.

 

▲12절,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만이 참신이신 것을 이스라엘과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있었습니다.

 

애굽은 당시 세계에서 모든 과학,  문명의 중심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되어진 혹은 발생되어진 사건, 결과 등은

쉽게 온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13절,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여기 ‘광야'는 그 여러 특성 중 그 여정에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14절,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높은 언덕 위로부터 비옥하고 물이 많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의 떼를 연상케 하는 표현입니다. (시23:2)

 

이들 가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성령은 지친 광야의 방황 이후

이스라엘을 약속하셨던 땅에 들여보내사 그들로 하여금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본절은 과거의 회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통 중에 있는 그 후손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합니다.

 

11~14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그 날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 성령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였다고 11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출애굽 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출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마지막 때도, 성신/여호와의 신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며,

 

또한 그 신의 감동을 받은 종들이 일어나

자기 백성을, 그 마지막 심판의 재앙에서, 출애굽하듯이 인도해 낼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가 64장까지 이어지는데 기도 내용을 볼 때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환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는 바벨론에게 위협 받지 않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약 100년 후에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 받은 것을 볼 때

이사야는 영적으로 먼 훗날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환난의 날을 내다보고

기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3장의 시작도 예수님의 심판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도 마지막 날에 대한 기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세상 끝 날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사야 같은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5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이 비참하게 악의 세력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15절,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여 하늘에서...보옵소서’

본절에서부터 현재의 재난과 역경의 문제에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기를 원하는 이스라엘의 탄원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탄원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과

과거 그의 조상들을 동일한 어려움에서 구원하셨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그쳐버린 세상 속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시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6절,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아브라함은...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대비적 표현입니다.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야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자들입니다.

 

한편, 본문은 49:15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날 환난 날에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야곱도

환난 속에서 건질 수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설사 그들과의 관계가 끓어질지라도, 오직 하나님만 믿겠다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육신의 조상, 육신의 아버지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때에

‘오직 예수’ 신앙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3) 다시 한 번 긍휼하심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17절)

 

▲17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어찌하여...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인간이 냉소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는 일을 멈추고 그들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올 수 없게 되는데, 

이 경우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으로 판단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본 구절은 바로 이스라엘의 그 같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 구속자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사실을 고백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64:5)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강퍅한 자들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기도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기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도 심판받을 자들의 죄를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이사야 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자신의 죄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호6:1-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여러분! 진실로 예수의 마음을 가진 자는 이 민족의 죄가, 내 가정의 죄가,

나의 자녀와 내 형제 이웃의 죄가 나의 죄인처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에도 “우리” 라는 말이 6번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만 거룩하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으로 기도하지 마시고

저들의 죄가 곧 나의 죄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하심이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당하는 것을 기도하였습니다.(18절)

 

▲18절,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주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었습니다. (62:12, 신7:6)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소가 이미 유린당하였다는 과거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반드시 하나님의 성소가 유린당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의미로

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언적 완료시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소는 사탄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성전들이 유린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때는 더욱 더 비참하게 유린 당 할 것입니다.

 

마치 B.C 168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를 죽여 피를 흘리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경건한 유대인 650명을 전차로 갈아서 죽이기는 악한 짓을 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성전들이 사탄과 거짓 선지자들의 손에 유린당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온 세상에 선포할 것입니다.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런 날이 우리 시대에 안 온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맘대로 읽지 못하고, 기도와 찬양을 맘대로 하지 못하고,

예배를 맘대로 드리지 못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이사야처럼

기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5)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19절)

 

▲19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본절은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핵심은 개역 성경의 ‘우리는 ...같으며’ 부분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인데

이것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당신은 그들(대적)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입니다.

 

바로 앞절에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언급 후 바로 이어지는 ‘영원 전부터, 곧 옛적부터 우리는 당신의 것’이라는 고백은

대적이 그들의 본토를 점령한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가능한 추론은 옛적부터 하나님이 택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이니,

그것을 근거로 그 대적을 본토로부터 몰아내달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고백은

자신들의 본국 귀환의 근거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그들을 다스리지 않았다’의 ‘그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본국 귀환의 또 다른 근거로서, 

그 대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같은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은 당연합니다.

 

정리하면 본 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사실과

그의 대적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민족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의 본토로의 귀환을 호소하는 탄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자처럼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그 날에 반드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성령의 다스리심을 반드시 받아야

이 무서운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환난이 시작될 즈음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인을 치고 다스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령의 다스리심이

주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어떻게 임하겠습니까?

 

초대 교회 때 마가 다락방에 성령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행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또한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500명이 보았습니다. (고후15:6)

그런데 마가 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120명이었습니다.

380명은 약속하신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20명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약10일 동안 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120명은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에 성령의 다스리심과 성령의 인을 받고 싶으십니까?

받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이 땅에 오십니다.

그 날이 언제 일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마24장에서 가르쳐주신 징조를 볼 때

너무나도 가까이 예수님이 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 날 갑자가 기름 준비하려고 했던

마25장에 나온 미련한 다섯 처녀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오늘부터라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살아간다면

마지막 날에 반드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초림 예수는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 땅에 오셨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심판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계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어느 세력이, 어느 누가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이 왕이요, 만주의 심판주가 되심을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이 믿어진다면 세상 속에서

어떤 어려움과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참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날에 우리의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예수께서 닦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승리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잠간 있는 고난의 시간을 참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찾아오는 고난을 이기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름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신앙을 간직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역사의 끝 날은 반드시 이 땅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가 이 땅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들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귀하고 복된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주1) 이사야서에 나오는 3종류의 ‘종’     사63:1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교회에 대한 비전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이, 이사야 하반부(40~66장)이다.

 

아시다시피 이사야 하반부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성경이다.

 

그래서 이사야 40~66장 사이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유다 백성들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회복될 것을 예언한다.

이것이 이사야 하반부가 말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배경이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예언서가 다 그렇듯이, 그 당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여기에 같이 (이중예언으로)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한

인류의 구속의 예언이 함께 동시에 예언되어져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류의 구속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회복이며, 그 구속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회복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 이사야 하반부에서는, 신약성경이 없이도 예수님을 통한 구속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사야 하반부를 ‘구약의 복음’ ‘고대인을 위한 복음’, ‘제 5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행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국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 그 내시가

구원 받게 된 가장 핵심적인 계기가 바로 이사야53장을 읽으면서 길을 가다가,

빌립 집사의 설명으로, 거기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구원받게 된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사야53장을 읽으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특별히 오늘날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구원받게 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 성경구절이 이사야 하반부이다.

 

이처럼 이사야 하반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을 말씀하면서,

그 바벨론의 압제가 아닌, 죄와 사단의 노예와 압제를 받고 있는 인류를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구속하시고, 회복시키길 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중예언으로 둘 다 예언되어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사야 하반부에는 교회의 회복과 부흥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다.

어떻게 교회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느냐

우리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종에 관한 내용(종의 노래)’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3종류의 ‘종’이 나온다. 그 종은

 

1.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렇게 써있다.

사41:8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41:1~2, 45:4에 보면, 종은 이스라엘인 것을 직접적으로 말씀한다.

 

2.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

이사야 하반부에는 ‘종의 노래’라고 부르는, 네 구절이 있다.

여기서 ‘종’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성경에 보시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종인 이스라엘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로 오실 것이다.

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완성자, 대표자로 오실 것이다.

 

3. 그런데 이사야 하반부에는 또 다른 종류의 종이 나온다. 즉 신약 교회이다.

이 종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메시야도 아니다.

이 종은, 복수로 나온다. ‘종들’로.

 

이사야 53장 이후로는, 종이 한 번도 단수로 나오지 않는다.

이사야 53장 이후로는, 종이 반드시 복수로 나온다.

 

이 ‘종들’은,

<영어NIV 주석성경>에, 성경 하단에 간단한 주석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사야 53장 이후에는 ‘종들’(복수)로만 나온다고 말하면서

63:1, 7, 17, 65:8, 9, 13, 15, 66:14

 

이들은 주님께 대한 신실한 자들인 참된 신자들이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한다. 55:6~8절을 보라

그들은 그 종(메시야)의 후손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야의 후손들로서,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이들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망라한다. 즉 신약의 교회들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하여, 한 새 백성을 만드신 것이 교회인데,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한 한 새 백성, 혹은 새 이스라엘,

이들이 교회인데, 바로 이 종들의 정체가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이사야 하반부에서 <부흥의 본질>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이 ‘종들’의 실체를 교회로 보고, 말세에 이 교회의 부흥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 예언되어 있는 것과 동시에,

거기에 메시야를 통한 인류의 구속이 예언되어 있고,

이게 거기에 교회에 대한 예언이 나옴으로써, 여기에 교회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

 

주2)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짧지만 번역하기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not’의 뜻을 지닌 ‘로’ 때문입니다.

‘로’를 생략해버릴 경우,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부합하는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들의 모든 고통의 때에 하나님도 고통하였습니다.’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KJV, RSV). 위 개역도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단어 자체를 생략하는 이같은 번역은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로’를 그대로 두고 문자적 번역을 하면

‘모든 그들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고통하지 않으셨다’라는

다소 애매한 내용이 되어버립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뒷문맥을 고려하고

본 구절 자체에 어떤 용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일입니다.

그 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합니다.

‘모든 그들의 빈궁(환란)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그의 선하심에 있어) 빈궁하지 않으셨다‘

 

여기 ‘빈궁’은 ‘고통’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번역이 가장 무난하다고 봅니다.

 

주3)
‘백성이 옛적 모세의 말을 추억하여 가로되’ 

원문 직역은 ‘그가 모세와 그의 백성들, 옛날을 기억하셨다’입니다.

‘기억하셨다’(이즈코르)는 3인칭 단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인칭 복수로 바꾸어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는데(NIV),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 시도의 이유는 이어지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원(의문)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백성의 탄원(의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탄원(의문)을 그대로 묘사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의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기억하셨다(이즈코르)’의 인칭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즈코르, 곧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징벌을 받아 마땅한, 

심지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으셔도 될 만한 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계속 그 약속에 신실하셨던 것입니다.

 

이 신실함은 모세와 그의 백성의 시대, 곧 광야 시대 때 나타났었습니다.

이제 그 후대 이스라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의 결과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동일한 신실함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본절에서 14절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의문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현실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결과를 알려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