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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6장 1~6 하나님이 권고 하시는 자

LNCK 2021. 11. 19. 20:24

 

◈하나님이 권고 하시는 자               사66:장 1~6              출처

 

◑1. 본문에 나오는 두 그룹

 

본문에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다른 두 종류의 집단을 대상으로 예언한 것을 봅니다.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집단입니다.

종교를 믿기는 믿되 거짓된 종교, 형식적인 종교, 명목상의 종교를 믿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집단입니다.

 

이사야 66장 3절에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절 후반에도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66:장 2절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권고한다는 것은 NIV 영어성경에 ‘esteem'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 평가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집단과 권고하시는 집단

즉, 다른 두 종류의 집단에 대해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집단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로 동족들입니다.

그리고 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동일한 성경을 보는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육신적으로나 외형적으로는 전혀 구별되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철저히 구별되는 집단입니다.

 

이사야 66: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5절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단과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집단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집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단'을 미워하며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희를 기뻐하신다면 증거를 보이라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집단'은 권고하시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집단'에게는 수치를 주시고 보응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자 대 비신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 거짓된 종교인 과 참된 신자가 있다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신자는, 기독교를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와도 싸우지 않고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 집단'은 참된 신자들을 핍박하고 미워하며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사야 선지자 시대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문제였고

사도시대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종교인이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며 조롱했던 것입니다.

 

▲2천년 교회역사를 보면 거짓종교는 끊임없이 참된 종교를 몰아내고 핍박했습니다.

1415년에 콘스탄스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Constance

 

이 회의에서 중세기 유명한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가 존 후스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후스는 오로지 성경만을 사랑하고, 그것을 가르친 사람으로

베들레헴 채플에서 교황의 가르침과는 다른 성경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교황과 신성로마황제가 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며

그를 불러내서 그가 믿는것을 얘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회의는 이미 후스에 대해 결론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후스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처형하고 시신을 불로 태웠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에 항변하자

신성로마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이단자에게는 약속을 안 지켜도 된다는

대단히 교활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영국의 종교개혁가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던

존 위클리프도 끔찍하게 다뤘습니다.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는 시신을 끄집어내

그의 뼈를 화형시키는 극악무도한 짓을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라는 매우 부유한 집안의 딸 이였습니다.

그의 아들 찰스9세가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이 되자, 어머니인 그녀가 섭정을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그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위그노 개신교도를 핍박했습니다.

1572년 8월 24일, 무려 7천명의 위그노 지도자들이 모여 있을 때에

국왕을 시해하려한다는 모함을 해서 하루에 그들을 다 살해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무려 7만 명을 살해하였습니다.

 

한 명의 악독한 여자가 이런 못된 짓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성 바돌로뮤 날의 대학살(the Massacre of Saint Bartholomew's day)'

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핍박과 순교의 이야기는 책으로 엮어도 수십 권이 될 것입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이방 종교가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보다도

기독교 내의 거짓된 종교가 참된 종교를 핍박하는 것이 더 큰 영적전쟁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거짓된 종교인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종교를 거짓되게 믿으면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는 것이고,

또 참된 종교인은 비록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의는 불경건에서 나오며,

불경건은 거짓된 종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거짓된 종교의 특징을 찾아 경계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심령,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거짓된 종교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차이점

 

거짓된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까’하는 

‘인간의 활동’에 중점을 둡니다. 

거짓된 종교인들도 이처럼 인간의 활동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분주합니다. 

 

이사야 66:장 1절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 드릴까'에 관심을 두고,

또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짐승을 잡아 드릴까, 소를 잡을까, 양을 잡을까,

어떤 예물을 드릴까, 어떤 분향을 할까'에 관심을 둔다고 말합니다.

 

1절의 종교는 ‘건물 중심의 종교’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면

중세기부터 로마 가톨릭의 종교가 얼마나 건물 중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관광만 예로 들어도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성 마가 성당이 대표적인 관광 명소입니다.

이처럼 유럽여행은 마치 성당관광 같습니다.

 

이 성당은 몇 백 년 동안 지었다, 이 성당은 높이가 몇 미터다, 돈이 얼마가 들었다,

기둥이 몇 개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또한 유리도 금과 은을 섞어 색깔을 내는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것을 만들어

햇빛을 쐬는 방법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난다고 자랑합니다.

그리고 성당 안에 온갖 동상을 세우고 그림을 걸어 놓았습니다.

 

이런 건물 중심의 종교에 대해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의 거할 처소를 짓겠다고?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66:1

 

하늘은 하나님이 앉는 의자요, 땅은 하나님이 구두 닦을 때 올려놓는 받침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은 크고 위대한 존재이므로

당신이 거할 집을 몇 평짜리에 짓겠다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건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할 수 없다고,

건물 중심의 종교에 대해서 하나님이 거부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절의 종교는 ‘의식 중심의 종교’입니다.

이사야 66:장 3절에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대교, 동방정교, 로마 가톨릭은 이처럼 무슨 짐승을 잡느냐, 무슨 제사를 드리느냐,

무슨 향을 피우느냐를 중요시하는 의식이 중심이 된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사제들의 옷과 모자

그리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색이 휘황찬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러한 의식 중심의 종교에 대해서도 거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참된 종교는 건물 중심이나 의식 중심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지하고 영적으로 어릴 때에

성전도 짓게 하셨고 제사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할 곳이 필요해 성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시고,

소고기 냄새를 맡으려고 소를 잡아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시고 인간은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림책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책은 영원하지 않고 예수님이 오시면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반면에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심령’에 중점을 둡니다.

본문 2절 후반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참된 종교는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입니다.

참된 마음이 신앙과 종교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할 때 무슨 건물을 지었느냐, 돈이 얼마나 많으냐,

의식을 얼마나 행했느냐로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될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종교인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고 마음은 참된 종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 첫 말씀인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포한 구원의 도리도 이러한 것입니다.

로마서 10 :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아무리 입술로 “주여”하고 떠들고 다닌다 해도

마음에 믿음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입술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영혼을 상대하십니다.

믿음의 자리(seat of faith)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으로 예수님이 내 죄 값을 갚으신 구주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18 :9~14절은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1~12

 

바리새인이 내가 한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걸 아십니까?

즉,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 저한테 뭘 좀 줘야 될 거 아닙니까?

라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고 싶지 않다며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차원이 다릅니다. 13절에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리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몇 가지 잘못된 행동으로 조금 오염됐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지류의 근원, 샘의 원천인 마음이 오염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본질상 죄인이로소이다’라며 세리는 가슴을 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슬픕니다.

내가 바르게 살고자 해도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이 슬픕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이는 내가 변화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날 좀 변화시켜 달라고

이처럼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14

이처럼 우리 마음이 신앙의 근원입니다.

행위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없는 행위는 가증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과 헌신이 있으면 행위는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 종교는 건물이나 의식처럼 외형적인 것을 강조하지만

참된 종교는 사람의 심령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심령은 하나님이 권고 하는 심령인지

여러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3. 거짓된 종교와 참된 종교의 두 번째 차이점

 

거짓 종교는 하나님 말씀에 최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하나님 말씀을 신앙의 최고 중심에 둡니다.

 

기도원에 다니는 것도 좋지만, 말씀 없이 체험만 하게 되면

잘못된 신비주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권고하시는 올바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인지 개신교 교회인지

교회건물 자체의 모습만 가지고는 도무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면 확연히 들어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강대상 중앙에 성경책이 놓여 있으면 개신교 교회로 루터교회, 개혁교회

그리고 복음교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강대상 중앙에 성경이 없으면 가톨릭 교회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1229년 툴루스(Toulouse) 종교회의에서 두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로 평신도는 성경을 읽지도 가지지도 말라 이고,

둘째로 라틴어로 기록된 제롬의 라틴벌게이트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이 툴루스 종교회의의 결정을 바꾼 것은 8백년이 지난 최근의 일로

1960년대 후반에 '바티칸 2차 공회'를 거치면서

성경공부의 필요성으로 평신도도 읽으며 공부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된 종교는 성경을 무시하지만

참된 종교는 그 신앙의 중심에 성경이 있습니다.

 

비록 기독교라 불릴지라도 성경이 아닌 다름 경이 있으면 거짓된 종교입니다.

이사야 66:장 2절에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또한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5절에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믿지 않고 성경을 믿게 하려고 심히 떨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말씀 앞에 떠는 것이 참된 종교의 목소리입니다.

 

19세기 말부터 독일에서 일어난 역사비평방법론(Historical Criticism)은 고등비평이라고도 합니다.

말씀 앞에 떨림 없이 역사 문헌으로만 보고 비평한 후,

믿을 것과 안 믿을 것을 구별하는 것이 이 고등비평의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이 고등비평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문은 발전시켰는지 몰라도 교회와 영혼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고등비평은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백여년이 지나 후세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거짓 종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도무지 떨지를 않았습니다.

이사야 22:장 12~14절에 보면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들에게는 마이동풍입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라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소와 양을 잡고 포도주를 먹으며 즐거워하고 하나님 말씀에 도무지 떨지 않습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도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거짓된 종교는 사람의 지혜와 계명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사람을 높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높이고 떨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된 종교와 참된 종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길은 명백합니다.

내적으로 통회하며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통회하며 가난하고 겸손해 지시길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뭘 했는데 날 몰라주느냐며 다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영혼을 배척하고 거부하며 존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떨며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시편 119편에 ‘내가 주의 말씀을 헐떡거리며 사모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길에 등이요 내 발에 빛이 되나니이다

주의 말씀을 내가 사모하되 꿀 곧 송이꿀보다 더 사모하나이다

금 곧 정금보다도 내가 주의 말씀을 더 사모하나이다’라고 기록했듯이

말씀에 떨고 말씀을사모하는 영혼을 하나님이 권고하고 축복하십니다.

 

이런 두 가지 조건 즉,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 중에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하나님이 권고하시질 않습니다.

 

민수기 22:장 18절에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거짓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가나안 땅에 가려고 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사주를 받았습니다. 발람이 참된 선지자였다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왕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이 가는 길을 터주고

양식도 주어 복을 받으시오.”라고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왕의 사주를 받아 저주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겉으로는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 채워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칼빈이나 루터도 이처럼 훌륭한 신앙적인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속으로는 은, 금 도 아닌 다이아몬드를 욕심내는 거짓된 심령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발람 선지자는 성경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의 대표인물이 된 것입니다.

 

천 길 물속은 들여다보아도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시고

‘내 영혼은 하나님이 권고하시고 기뻐하시는 영혼인가?

나는 마음이 가난한가? 나는 심령에 통회하는가?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떨며 말씀을 사랑하는가?’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축복하는 영혼이 됩니다.

그리고 심령이 겸손하고 낮아져 ‘아버지 내가 바르게 살고자 해도 안 됩니다.

불쌍히 여겨 주셔서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권고하고 축복하며 돌보시고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떨어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