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K
2021. 11. 20. 03:48
2009년 7월 5일 날 시작한 이사야서 설교가
1년 6개월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마치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2010년 마지막 주일에 마치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두려우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놀라운 증거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참으로 그 동안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설교의 맥을 잡지 못해 어떨 때는 하루 종일 몸부림쳤고
어떨 때는 이틀 동안 몸부림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내 힘과 내 지식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설교 준비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너무 감격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제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교회만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터넷 사이트 5곳을 통해서
전 세계에 설교를 전하도록 하셨고 일주일에 수 백 명이 이사야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올려드립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때 하나님이 가장 강조하시는 것은 예배의 회복이었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부터 예배의 타락을 지적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장에서도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는 이중 삼중 계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예배에 대한 것은
마지막 시대에 예배의 타락이 있을 것을 미리 깨닫게 해주므로
이 사실을 깨달은 자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자기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인 본문 66장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배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다가오는 2011년 새해를 준비하는 분들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예배를 회복하라 사66:1~4
하나님은 앞서 이사야 1:장 11~13절에서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가 끝나는 마지막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대 왕을 거치면서 선지자 활동을 하였습니다.
20살에 부름을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60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가
80세에 므낫세 왕에 의해 순교하였습니다.
※므낫세 왕은, 남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는데,
이때 뚜렷한 선지자의 활동이 안 보입니다.
이사야 순교 후, 예레미야의 소명(등장, 요시야 13년)까지는 약70년 되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장 60년 동안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드린 예배를 회복하지 못하고 변화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20년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회복되지 아니하고 더욱 더 타락되어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들의 예배에 대한 개념은
점점 세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일 년에 그토록 많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는 모습은 보기 힘든 시대가
마치 이사야 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예배가 왜 타락되는지 깨닫게 해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 예배를 회복하고,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1~2절>
▲1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무슨 집을 지을꼬’
성전이나 희생 제사 예식이 도무지 필요없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상황에 대한 묘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포로 귀환 후 성전 재건에 착수해야 할 유대 공동체에게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를 미리 강력하게 경고하는 내용으로 이해함과 아울러,
더 나아가서는 신약 시대와 새 예루살렘에서의 신령한 예배를
겨낭한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2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마음이 가난하고’
단순히 재산이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구주를 기다리며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동일한 용어가 산상 수훈의 한 대목에 나타납니다. (마5:3)
바로 이 같은 자의 심령의 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에 성전이란 없습니다.
그때에는 주 하나님 그분이 성전 자체이십니다. (계21:22)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려고 하느냐,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 인줄 아느냐” :1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너희 손으로 지은 곳에만 내가 있는 줄 아느냐?” 입니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1~:2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타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임재를 무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에도 계시지만, 예배를 드리는 자들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형식과 외식적인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가정에서도, 자동차 안에서도,
항상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하며,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에서 하나님은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애통하는 심령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의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자의 자세를 말씀합니다.
1장에서도 언급하셨듯이 이스라엘은 심령 같은 것 상관치 않고
성전에 제물만 가지고 나오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얼마나 가난한 심령과 애통한 심령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오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많은 자들이 이스라엘처럼 심령 같은 것 생각지 않고 성전에 나와서
헌금 드리고, 앉아 있다 설교 듣고 가면.. 예배드리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예식을 요구했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화려한 성전을 요구했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면서, 이사야서의 이 본문 말씀을 설교하고 순교하였습니다. 행7:48-51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스데반 집사는, '성전의 우상화'를 지적했습니다.
성전의 외적인 형식, 장소의 거룩함 보다는,
심령의 애통함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에는
하나님은 아니 계신다고.. 스데반 집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솔직히 예배 때마다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울보라고 할까바 참지만 참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예레미야처럼 눈물의 선지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심령이 애통할 때
진실로 예배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애통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심령으로 드리지 못한 예배는 우상 앞에 드리는 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3절>
▲3절,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유대인에게 있어 ‘개’란
추잡함이나(신23:18) 경멸스러움을(삼상17:43)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 목을 꺾어 죽여서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돼지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일 역시
이방 제사에서나 행해졌던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65:4).
그런데 본절은, 율법이 허용하고 있는 소 및 어린 양의 제사를
이방의 제사인 양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을 고려하면 이 난제는 쉽게 풀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제사의 바른 정신을 깨닫고
그 정신에 입각해 드리는 제사인데,
그 제사란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로 이 같은 내면적 자세를 무시한 채
그냥 동물만 잡아 드리는 제사는.. 이방의 제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입니다.
아무리 무수한 제물을 갖다 바치고 피를 쏟는다 할지라도
마음을 다하지 못한 예배는 개의 목을 꺾음과 같고,
돼지 피를 뿌리는 것과 같고, 우상을 찬송함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이런 예배를 드립니까?
그들은 자기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65:2절, 16절에도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를 위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드려지는 예배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면
자신들을 위해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오직 예수를 위해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닌
자신들의 교회와 자신들의 사업과 자녀와 가정을 위해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들은 개가 목을 꺾고,
돼지 피가 뿌려지는 가증스러운 예배라고 하였고,
우상을 찬송하는 예배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고, 2천년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예배가 타락하면 반드시 시대가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지막 때에 성경의 예언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자라면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타락은 곧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령한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4절>
▲4절,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유혹’
원래 ‘안달’, ‘토라짐’, ‘뻔뻔함’ 등을 뜻하나
3절의 ‘자신들이 멋대로 택한 길’(개역 성경에는 ‘자기의 길’로 나와 있음)과
대비를 이루는 용어로 볼 때
‘망상’, ‘잘못된 생각’ 정도로 의역함이 가능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본 용어를.. 망상, 잘못된 생각이 야기할 수 있는 ‘재앙’으로 번역합니다.
애통한 마음이 되지 못한 예배는
다시 말해서 심령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가 계속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혹을 택하여 주시겠다고 하였고,
그들이 무서워하는 재앙들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나님이 다시 재차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이사야서를 보세요. 1장에서 타락한 예배를 지적하였지만
60년이 지나도 그들은 듣지 아니하고 더욱 더 악을 행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이사야 선지자까지 죽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가 너무하다고 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게 임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습니까?
변화되지 못하면, 예배를 회복하지 못하면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과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사야서의 설교를 준비하고 나면 진이 빠집니다.
어쩔 때는 나도 편하게 설교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엎드려 기도하면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선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누구인가는 외쳐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도 힘들지만 감사함으로 일 년 반 동안 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깨달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망합니다. 많은 자들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노아 방주 교회는 예수님 오시는 그 날까지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그리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이스라엘의 회복 사66:5~9
▲5절,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공공 예배와 연관된 특권을 박탈당하거나, 그 공동체로부터 출교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도 공생애 동안 이것을 참 성도에게 닥치는 중요한 시련 가운데 하나로 가르치셨는데,(마10:22),
구체적으로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습니다. (요16:2)
‘여호와께서는...원하노라’
남은 자들을 향한 자신들의 포학이 하나님을 위한 열정때문에 나온 것인 양
퍼붓는 박해자들의 조롱조의 도전입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마27:42, 43)
그들의 조롱하는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그래 너희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너희들이 기뻐하기를 제발 바란다” 는 조롱입니다.
즉 이 말은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조롱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예언서를 기록한 16명의 선지자들이
얼마나 미움과 조롱과 핍박을 당하였습니까?
▲6절,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소리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들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보다는, 이스라엘 밖에 있는 대적,
곧 이방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보응을 암시합니다. (슥12:2, 3, 14:3, 19~21).
논조가 본절에서 급히 바뀌었는데 이것은 이방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복수가
급박하게 이루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반드시 회복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어떤 조롱과 핍박이 와도 참고 인내하며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7~9절까지 하나님은 “아이를 낳는 여인”을 비유해서,
자기 백성을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7절,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전혀 고통없이 그것도 순식간에 자녀를 출산한다는 이 비유적 예언은,
1차적으로는 기적적 섭리에 따른 포로들의 귀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태동과 발전을 암시합니다.
본절의 예언처럼 성령 감림으로 교회가 시작된 후
이방의 개심자들과 유대의 개종자들의 수는 급속히 불어났습니다. (행2장)
특히 교회의 태동과 확장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출 경우
여기 ‘남자’, 곧 영적 이스라엘이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은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가 한 머리(메시야)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임을 가리킵니다.
혹은 ‘영적 이스라엘 복수 공동체’를 가리키는 대표 단수를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8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나라’
문자적인 뜻은 ‘땅’(에레츠)이지만, 평행구가 ‘민족’으로 되어 있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나라’로 의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땅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오랜 세월 속에서 그 소산을 내기 마련입니다. (막4:28)
이 원리는 세상 나라의 발전 속도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원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이 있게될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은 반드시 해산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출산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이러한 고통을 당하지 않고 보호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잠간의 조롱과 멸시와 비웃음 앞에 주눅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간의 고난 때문에 거짓 것들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9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나는 해산케...닫겠느냐’
8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예언이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 근거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고통 없이 출산하는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3.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 사66:10~14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심령의 성전이 있습니다.
마음의 거룩한 성전을 가진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 하나님 성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건물이 되어 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은 거룩한 말씀이 선포되고,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거룩한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교회를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인간의 생각과 수단과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신실하고 거룩한 자들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에 성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악한 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보이지 내 마음의 성전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두 성전 모두 하나님이 자신의 피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
이제 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자가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 같이 더럽고 추한 자를 하나님의 피로 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이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사실 수 있단 말입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자다가도 놀래서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10절,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본절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혹은 이방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는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의 주제의 전환은
본서 하반부(40~66장)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므로
본 기쁨의 노래는 ‘종말론적 찬양의 노래’라고 불리웁니다.
“기뻐하라” 고 4번이나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과 함께 그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기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11절에서 이 기쁨을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빠는 아이로 비유했습니다.>
▲11절,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젖을 빠는 것 같이...만족하겠고’
이사야는 ‘회복될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1) 회복될 예루살렘이 그들의 본향이며(잠27:8, 히11:14~16),
거기에는 (2) 신령한 젖이 있으며(벧전2:2),
(3) 모든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생명의 강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시73:10, 계22:1, 2)
갓난아이의 최고의 기쁨과 평안은 어머니 품 안에서 젖을 빨 때 일 것입니다.
어머니도 아이에게 젖을 넉넉히 줄 때가 가장 기쁘고 평안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과 평안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할 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14절까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자에게, 다시 재차 3가지로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평강으로, 둘째는 위로로, 셋째는 기쁨으로 다시 약속을 하셨습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주리니’
문자적인 뜻은(주먹이나 텐트 따위를 펼칠 때와 같은) ‘뻗치다’(창 12:8)
혹은 (강의 범람 따위로 인하여 없었던 지류가 새로 생겨났을 때를 가리키는) ‘뻗어나다’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강의 범람으로, 전에 강이 없던 곳에 새 지류가 생기듯이,
전에 맛보지 못했던 신령한 평안과 번영이 넘치리라는 예언입니다.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문자 그대로는 49:22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이 이방의 부요를 받아 나누게 될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모든 자가 하나님이 주는 영육간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13절,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예루살렘이 그 자녀를 돌보는 개념으로부터
여호와께서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하는 개념으로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구하시는 모든 은총의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모가 자녀를 돌보는 이상으로
그 백성을 돌보신다는 주제가 49:13~15 이후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14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문자적인 뜻은 ‘너희 뼈들이 풀처럼 번성하리라’입니다.
인간의 신체 중에 뼈를 소재로 한 이미지는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몸의 활력이 사러질 때, 많은 고통을 받을 때
‘뼈가 약해졌다 혹은 말랐다’ 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주1)
반면 번영, 건강, 혈기왕성 등을 나타낼 때는
그 뼈가 살찐다거나, 혹은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58:11).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인해 바짝 타버린 뼈와 같은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은
이제 다시 생기를 회복할 것입니다. (잠3:8, 15:30)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진노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위로와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 재림(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사66:15~17
항상 회복과 심판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될 때,
바벨론은 바사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세상 종말에도,
택한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신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위 66:1~14절까지가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관한 내용이라면,
이 단락은 <불신자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15절,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불에 옹위되어’
‘불’은 그의 대적들을 심판하고 징벌하기 위한 주의 강림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전사(戰士)로 비유한 본 이미지는
바벨론 군대의 당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바 있습니다. (렘4:13)
▲16절,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원문에 뚜렷이 나타난 평행법을 살려 상반절을 재번역하면 이와 같습니다.
‘불로 여호와께서 심판을, 그의 검으로 모든 육체를 (그가 심판하시리라)’
심판의 도구인 불과 검이 강조되었습니다.
‘모든 혈육’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대상자들을 가리킵니다.
경건한 자들은 주님에 의해 심판의 장소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숨겨질 것입니다.
(26:20, 21, 시31:20, 살전4:16, 17)
▲17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가증한 물건’
식용이 금지된 부정한 짐승들을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에 나온 용어입니다.(레 11:10~45)
‘쥐’ .. 레11:29에서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야만 합니다.
초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는 약하고 비천한 곳으로 오셨고 조용히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재림 예수는 구원자가 아닌 심판주로 이 땅에 강림하실 텐데
그 모습이 불같은 진노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불 심판을 당할 자들이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7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거룩히 구별한 자들” “스스로 정결케 하는 자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 거룩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행위로 스스로 거룩하게 하고 정결케 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교회를 다니고 믿음이 있다는 자들이
교회의 주의 종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거룩해지고자 합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이 시대에 자행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오직 예수 신앙이 되지 못하면 그 어떤 믿음도, 그 어떤 가르침도,
그 어떤 종교도, 그 어떤 교리도 모두가 다 헛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인간 스스로가 거룩케 질 수 있습니까?
인간 스스로 아무리 도를 닦는다 해도 정결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없이는 결코 거룩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 재림하실 때 인간 안에 예수의 의가 없는 자는 모두 다 불의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교회도 예수의 의가 없는 교회는 모두 다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벧전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여러분! 그 날에서야 오직 예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신앙은 단 시간에 주어질 수 없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자나 깨나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온전히 받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5. 새 하늘과 새 땅 사66:18~24
하나님이 임재(또는 재림)하셔서,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되지만,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8절,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8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그들의 소위와 사상을 알고 있다” 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행위와
스스로 자기들의 사상을 가진 자들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18-19절에 보면 때가 되면 열방의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9절,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 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징조’(오트)
문자적인 뜻은 ‘깃발’, ‘표시’, ‘표적’입니다.
본서에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7:14),
애굽 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해 세워질 제단 (19:19, 20)
혹은 잣나무와 화석류가 가시나무와 질려를 각각 대신하게 될 것(55:13)
등을 ‘오트’(징조)라는 말로 표현한바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이 지칭하는 것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1) 이곳 저곳 멀리 흩어졌던 유대인들의 귀환의 예비 작업으로,
모임 장소를 알리기 위해 높은 장소에 세울 물건.
(2)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마12:38~40),
(3) 하나님이 파송하실 자에게 길을 알려 주시기 위해 세운 이정표.
본 문맥에서는 (3)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들 중 도피한 자’
(1) 유대인들 중 남은 자
(2) 열방들에 대한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
여기서는 이방인들 중 여호와 신앙에 복종하며
열방에게 임할 심판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다시스’
오늘날의 유럽 서부 스페인의 어느 지방인데,
여기서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가장 먼 곳에 있는 항구로 알려진 곳이었기 때문에
거명되고 있습니다.
‘뿔’ ..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지방으로 애굽과 에티오피아 국경 지방입니다.
‘룻’ .. 소아시아의 리디아 지방을 가리킵니다.
‘두발’ .. 흑해와 아락세스 사이 코커서스 남부 지역에 위치한
티발레니안스를 가리킵니다.
‘야완’ .. 성경에 나오는 야완의 모든 후손들을 포함하는 ‘이오니아인들’로 불리우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열방의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두 가지를 통해서 나타낼 것입니다.
첫째는 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4장에서 마지막 때에 약10가지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징조를 보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징조가 “Sign” 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Sign”을 보내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심판 당할 때 아무런 변명도 불평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세계 곳곳에서 지진과 가뭄과 폭설로 전쟁 소식이 있는데도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을 믿고 있는 자들은
징조를 보고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마지막 때 종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실 것입니다.
그 주의 종들이 곧 마지막 때 활동하는 14만 4천명이 될 것입니다.
14만 4천 명은 이 땅에서 마지막 주의 종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주의 종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7년 대환난 기간 동안에 땅 끝까지 마음껏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 핍박이 시작될 즈음에 목베임을 당하고 순교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택함 받은 자들은 후 3년 반 동안 예비처에서 하나님의 양육을 받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를 드리며 휴거될 준비를 할 것입니다.
▲20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그들이...드릴 것이요’
문자 그대로는 이방인들이 흩어진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으로 데려온다는 것인데,
영적으로는 이방 세계로부터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행렬이 이어질 것을 뜻합니다.
‘교자’ (轎子)
‘마차’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자세하게는 낙타 따위가 이끄는 유개차(有蓋車),
말하자면 바람이나 비를 막기 위하여, 마차 위에 덮어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21절,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중에서...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이란, 직접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메시야의 시대가 오면, 이방인들이
직접 하나님을 예배하는 부류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2:9)
지금 이방인인 우리가, 바로 그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1절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라고
22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2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바로 앞 문맥에서 언급된 바, 이방인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상황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인간들이 믿지 못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까지 하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23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매 안식일에’
‘한 안식일에서 또 다른 안식일이 되는 것만큼 자주’란 뜻입니다.
이것은 메시야의 시대가 오면, 안식일 규례가 영원한 규례로 정착될 것을 의미합니다.
▲24절,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그들이...볼 것이라’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진멸당한 애굽 군대의 시체를 목격했듯이 (출14:30)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악인들의 멸망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예루살렘 남부 힌놈의 골짜기를 연상케 하는 표현입니다. (30:33)
경건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에,
이어지는 불의한 사단의 세력에 대한 심판으로
본서는 끝맺고 있습니다.
23~24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와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못하고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무엇이고, 어떻게 드리는 것인 줄 모르는 자들은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수단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그 날에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신령과 진정한 예배에 생명을 거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새로운 날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 다음 주면 2011년이라는 대망의 새해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지금의 이 땅은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창조될 것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이사야서는 끝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예언서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지막 시대에는 예배의 타락(=신앙의 타락)이
분명하게 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66장이라는 긴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세요. 이사야 선지자 이후 약 700년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예배가 회복되어져 있었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도록 심판하셨습니다.
2011년이라는 대망의 새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지 아니하고서는
2011년이라는 새해도,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마다 심령의 애통함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회복된 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회복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말씀을 두렵게 아는 자들이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축소한다면 오직 예수 신앙입니다.
반드시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질 때, 즉 오직 예수 신앙이 될 때
우리 시대에 7년 대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지켜주실 것이고
예수님 재림하실 때 휴거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생애에 예수님의 재림을 못보고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두 만나 영원히 함께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66권 설교를 마치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
............
주1) ‘뼈가 약해졌다’
시6:2, 22:14, 17, 38:3, 51:8, 잠14:30, 17:22, 애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