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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8편 해석,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
LNCK
2021. 11. 30. 18:17
◈시68편 해석,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 시68:1~35 여러 설교 정리, 출처
본문의 표제어에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한 시가 노래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인도자(성가대 지휘자)를 따라서 불렀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통의 고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68편은 역사적인 배경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바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올 때입니다.
1절 말씀은 모세가 언약궤가 출발할 때 했던 말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민10: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그리고 16절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시는 산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24~25절은 하나님께서 성소로 행차하시는 모습과
그로 인해 기쁨의 축제가 벌어지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무엘하 6장과 역대상 15장에 기록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할 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35절에서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의 삶과 예배의 중심에 놓으면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특별히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가기까지
그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되돌아 보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68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핵심 내용은 7~31절에 있고 앞뒤로 서론과 결론이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분해하면
1~6절 :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악인들을 치시고, 의인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7~18절 :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19~31절 :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에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행하시는 일을 노래합니다.
32~35절 : 그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서 원수들을 치시니, 의인들이 기뻐한다 (1~6절)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 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1절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세가 언약궤가 움직일 때 했던 말을 인용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 발생하는 일을 묘사하는데,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1, 2, 3절에 한번씩 언급된 같은 의미의 표현이 있는데
바로 “주 앞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악인들은 주 앞에서 멸망하고,
의인들은 주 앞에서 기뻐 즐거워합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1절).
그들은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는 것처럼 사라지고
밀랍이 불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질 것입니다(2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1절, 다윗은 원수들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주의 미워하는 자들’이란 뜻이죠.
영어성경에는 His enemies, 즉 ‘하나님의 대적들’ 이라고 번역합니다.
즉 다윗이 지금 싸우는 싸움은 자기 욕망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싸움, 영적인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 앞에서’는 원어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연기처럼, 밀(양초)처럼 사라지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뛰어 놉니다.
의인(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3~6절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4절, ‘하나님을 맞이하고 찬양하며 그 임재 앞에서 기뻐 뛰놀라’는 다윗의 말이고,
실제로 언약궤를 그들의 삶의 중심지로 가져오면서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5절, 당시에 고아와 과부는 이방인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아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부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또한 당시는 가부장제 사회라 남편이 아내의 보호자였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자신을 보호해 줄 남편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일에 판결자(변호인)가 되어주셔서
억울함을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5절에서 말하는 ‘거룩한 처소’는 성전보다는
하나님이 계신 장소로서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늘에만 계셔서 우리에게는 관심 없는 분이 아니시죠.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 또 광야의 긴 여정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라고도 표현합니다.
6절, ‘고독’의 문자적인 뜻은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입니다.
대가족으로 살던 시대에 부모가 없고, 자식이 없는 것은 정말 큰 외로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독한 사람, 외로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처방전은
‘가족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즉,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오직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예를 통해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억울한 자들, 압제 당하는 자들, 연약한 자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봐도
그런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힘 있는 자들, 부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지만,
진정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4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 하나님을 미워하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돌아봄 (7~18절)
7~18절은 과거에, 특히 광야를 지났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다윗은 하나님이 광야의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셨던 일부터 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시면서,
그들만 내보내시거나 그들을 앞서 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앞서 가셨다고 하십니다.
민수기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먼저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셨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인도하셨다고 하십니다. 민1:33
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여기서도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있음이, 땅이 흔들리는 등의 자연 현상을 통해서 나타났죠.
특히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해서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고
그 음성을 직접 듣는 것도 거부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하신 분은
바로 그들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9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이 말씀이 실제로 어떤 일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그 땅에 충분한 비를 주셔서
그들로 그 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은혜를 베푸신 것을 말합니다.
농경 사회에서 흡족한 비는 풍요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도착한 후에도 하나님의 변함 없는 돌보심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
그 땅에 살고 있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9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때를 맞추어서 내려주심으로
농사도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흡족한’의 뜻은 ‘풍성한, 아낌없는, 자발적으로’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에 먼저 가셔서 준비해 주신 하나님이셨고,
늦은 비와 이른 비의 은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말라 비틀어졌을 것입니다.
11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새번역 : 주님이 명을 내리시니, 수많은 여인들이 승리의 소식을 전하였다)
12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여자들이 나와서 환영하며 다윗의 공을 높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을 때,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고대에 전쟁에서 열심히 싸웠던 것은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큰 승리를 하게 하셔서, 군인들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인들도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좋은 예가 바로 가나안 정복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착하게 잘 살고 있던 민족을 약탈하고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죄가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신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13~14절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의 결과를 묘사합니다.
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 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13절은, 평화롭게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땅에 살던 왕들은, 눈이 날리는 것처럼 흩어졌습니다.
여기까지 다윗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시면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음을 묘사했습니다.
1~6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속성, 성품)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충분히 증명된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15~18절에서는 그 하나님이 지금은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 가운데 계심을 말씀합니다.
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바산을 가리켜 ‘하나님의 산’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산’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높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산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산맥을 가리키는데, 북쪽에 헐몬 산이 있습니다.
그 높이가 2814m입니다. 2744m의 백두산보다 70m정도 높습니다.
바산이 ‘하나님이 계시는 산’인 ‘시온산’에게 시기심(적개심)을 품고서 본다고 합니다.
시온산은 높이가 765m로 바산에 비하면 아주 낮습니다.
그런데 시기심을 품는 것은, 그 언덕과 같이 낮은 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시온산은 영원히 높은 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낮아보여도,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무리 높아보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결코 낮지 않은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리 높아보여도 그 인생은 결코 높지 않습니다.
근본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는 연기와 같고, 불에 녹아사라지는 밀(양초)와 같습니다. :2
오늘도 우리의 삶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높은 바산과 같지 않고,
마치 아담한 언덕과 같은 시온산과 같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화면으로 살아가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7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작은 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두시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시내 산 성소에 계셨던 하나님, 그들이 두려워했던 하나님은
이곳에서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대군을 거느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그 장소를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궁극적인 승리자로 묘사합니다.
높은 곳에 오르시고 포로와 전리품을 취하며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모습입니다.
그 승리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십니다.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는 언약궤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작해서 지금 그들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고
그들을 위해 일하셨음을 다윗은 분명히 하고,
19절부터는 이제 그들의 현재로 옵니다.
◑현재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19~31절)
7~18절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돌아보았다면,
19~35절은, 현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증거합니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절은 전체 시의 전환점이 되는 구절이고,
특히 “날마다”라는 표현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줍니다.
19절이 본 시편의 핵심 구절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항상 하신 일이었고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신 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관계된 일을 다윗은 언급합니다.
위 구절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꼭 영혼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2차적 의미이고요, '구원'의 1차적 의미는 '현실 문제 해결'입니다.
19절에 나오는 바 그대로 '짐을 져 주시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들이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를,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대신 져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짐을 대신 져 주시지만
사 46:1-5절에 보면, 우상은 도리어 사람들의 등에 짐이 됩니다. 비교가 되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좀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라고 정말 믿고 살아가고
그분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내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죄에서, 죄의 영향력에서 건져내고 계심을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삶의 문제는 그냥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0절이 '구원'은, '구조, 구출'의 뜻인데, 영혼 구원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망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짐을 지시는 여호와 덕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원수를 하나님은 완전히 패하게 하십니다.
이들은 죄를 짓고 다니는 하나님의 대적들이고 이들의 머리를 하나님은 깨뜨리실 것입니다.
창3:장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왕으로서 다윗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원수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바산은 15절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높은 산입니다.
즉, 높은 곳이든 깊은 곳이든 어디든 도망하려고 해도, 원수들은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22절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승리를 말씀하셨습니다.
23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네 집 개는 그 피를 마음껏 핥을 것이다.. 라는 뜻)
23절에서 묘사하는 이미지는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좀 섬뜩할 수도 있지만,
시편 58:10절과 비슷합니다.
승리자의 모습을 당시의 상황에 기초하여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2절이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표현했다면,
23절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승리를 직접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4회 나옴).
그냥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셨대..' 라고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 백성이 직접 경험하고,
그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5 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26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 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약궤, 성소, 예루살렘 등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들을 보면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면서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그 자신도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췄고, (삼하 6:14)
25절 말씀처럼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며 함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그들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환영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라고 불렀습니다.
12지파의 시초가 되었던 이스라엘, 즉 야곱을 언급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27절은 남쪽의 두 지파인 베냐민과 유다,
그리고 북쪽의 두 지파인 스불론과 납달리를 언급하여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이 축제에 함께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이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더욱 기대하게 합니다.
28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 때문에 확신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자기 백성을 이끌며 앞장 서서 싸우는 장수와 같았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들에게 힘을 명하시고 함께 싸우십니다.
골딩게이는 여기서 다윗이 전제로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냥 힘만 주시고,
싸우는 것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전쟁에 함께 나가서 그들 가운데서 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대한 것 이상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심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분으로서 그렇게 관계 속에서 일하십니다.
어떤 대단한 능력만 주시고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29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여기 왕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왕들입니다.
다른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실 때 그렇게 됩니다.
30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여기 등장하는 들짐승, 수소, 송아지는 분명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우리가 알기는 어렵습니다.
앞뒤의 문맥을 고려하면 애굽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강국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다윗이 기대합니다.
31절은 부한 나라 백성들도 하나님께 나아올 것을 말씀합니다.
31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 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즉, 힘 있는 자든, 부한 자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 부분적으로 이런 모습들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 성취될 기대입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0)
◑결론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2~35절)
32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지금은 성소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십니다.
날마다 그들의 짐을 지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감사와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68편에서 다윗은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펴보며 이야기했습니다.
그 핵심은 19절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고 그래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일을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