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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69편 해석,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LNCK 2021. 12. 1. 17:18

 

◈시69편 해석,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시69:1~35        여러 설교 정리, 출처

 

※본문의 표제어에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춘 노래>

소산님은 ‘수산’(백합화 같은 들꽃)의 복수형입니다.

그래서 성경 아래에 보시면 ‘백합화 곡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산님’이 시편의 표제어로 3번(45, 69, 80편)이 나옵니다.

‘백합화 모양의 악기’들의 합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이 기록된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8절의 ‘내가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며, 
가족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부터, 이런 따돌림과 배척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본문은 그런 심경 가운데서 지은 시인 것입니다. 

 

※혹자는 이 시의 배경으로, 사무엘하 15장에 나오는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나, 
열왕기상 1장에 나오는 넷째 아들 아도니야의 반역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나

전체 문맥상 그런 추정은 무리가 많습니다. 

 

본 시편은 시22편 다음으로 신약에 많이 인용되고 그 횟수는 17회에 달합니다. 
그래서 본 시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시로 취급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며 이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시편도 68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합니다.

 

68편은 축제로 들뜬 분위기에서 그렇게 했다면

69편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무겁게 가라 앉아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탄식하고 간구하면서 결국 찬양과 기대로 나아갑니다.

 

의로운 동기로 행한 의로운 일이 결국 삶의 고난으로 돌아올 때,

다윗은 탄식했고, 간구했고, 그리고 찬양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을 함께 살펴봅니다.

 

 

◑ 의인의 탄식 (1~12절)

 

마치 물에 빠져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다급하게 외쳤던 것처럼, 다윗도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시를 시작합니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4,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40:2,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다윗은 실제로 물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깊은 물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상황이 절박함을 표현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다윗도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윗을 구할 수 있는 구조요원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한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했다는 것을

3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다윗은 피곤할 정도로 소리를 질렀고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말라버릴 정도였어요.

구원해 줄 하나님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봐서 눈도 아플 지경입니다.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자면 눈이 빠지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물에 빠져서 죽음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습니다.

다윗의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그런 상황들을 한두번씩, 혹은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됩니다.

자연재해나 개인의 질병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특정하고 있는 상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4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다윗은 “까닭 없이”, “부당하게”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 쪽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저 그를 미워하는 자가 머리털보다도 많고, 또 그의 원수가 되어

그를 끊으려고 하는 자, 즉 그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적으로도 많고 힘도 강합니다.

다윗이 그들의 공격을 ‘큰 물’로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느끼기에 거대한 홍수, 강한 파도와 같았습니다.

 

다윗은 빼앗지도 않은 것을 물어주어야 하는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지도 않은 일, 하지도 않은 말에 대해서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혹은 실제 사실에 대한 왜곡된 오해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구원을 구합니다.

 

요15: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5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다윗은 참 정직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대적들 앞에서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르고,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인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반복했던 주장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죄악된 책임이 나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여 오해를 풀고 하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시편 7편에서도 다윗은 억울함에 이렇게 기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7:3~5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5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로 인해서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절박한 심정의 기도입니다.

   

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7

그로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되었고 또한 그 수치로 인해

그의 형제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이요, 따돌림이었습니다.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9절 서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두어가 있습니다. 
즉 다윗이 가족들로부터도 외면과 배척을 당했던 것은 
‘주의 집’, 곧 ‘하나님’을 위하는 열성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족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성전을 그렇게 짓기를 원했던 그 마음을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윗만큼 주의 집, 즉 성막과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예배와 삶의 중심으로 다시 가져왔던 사람이 다윗이었고,

그런 예배의 장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를

임시 장막이 아닌 영원한 집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도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의 마음만 받으시고 성전을 짓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을 때, 다윗은 그 말씀에 순종했지만

성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스스로 했습니다. 건축 재료를 준비했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드려질 예배를 위해 사람들도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 열심에 다윗은 사로잡혀 있었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비방을 그 스스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 9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서, 처음 성전으로 올라가셨을 때,

성전을 시장통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다윗의 이 고백,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을 기억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다윗이 가족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금식하면, 사람들은 금식한다고 망신을 주고, 

다윗이 베옷을 입고 슬퍼하면, 사람들은 청승스럽다고 수군거리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빈정거림을 당했는데, 

그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10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기 곡하고 금식하는 것, 굵은 베로 옷을 입는 것은 모두 예배의 행위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바탕에 있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주로 회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5절 참조

   

9절 말씀이 신약에서 예수님께 적용되었을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해지던 잘못된 예배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아마 다윗이 여기서 언급하는 회개의 예배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가 그의 통치 아래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심이

자기에게 가득했기에, 그는 잘못된 예배, 예배자들로 인해 슬퍼하며

하나님께 예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그의 대적들은 이용했고 조롱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이 어떤 ‘죄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는 식으로 그를 비방했을 것입니다.

 

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는 지도자들입니다.

독주에 취한 무리는 술을 마시면서 가십거리를 나누는 일반 사람들입니다.

다윗을 비방하는 자들이 많고 강하다는 4절의 말씀처럼,

다윗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던 것입니다.

 

다윗은 확실히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있었고, 어쩌면 넓은 의미에서는

그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회개의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돌아오고 있었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비방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 자신이 그의 원수들처럼 되거나

혹은 그의 원수들이 그와 같이 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던 말씀도 같은 이치다.

 

제자들이 세상과 같이 되거나 세상이 제자들과 같이 되지 않는 이상,

고난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구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1절),

자신처럼 주를 향한 열심이 가득한 자들의 구원도 있습니다.

 

시 69: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다윗이 가장 원하는 것은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구원하시고 원수들은 심판하시는 일입니다.

 

 

◑고난 중에 구원을 호소함 (13~21절)

 

앞 단락 1~12절에서는 다윗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물이 가득한 수렁에 빠져서 도저히 자기가 헤쳐나올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다고 묘사를 했었습니다. :1~2

 

그리고 거기서 이제 오직 자기를 구원해 주실 그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죠. 목이 마르게 불렀고,

눈이 빠지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렸다고 표현을 했었습니다.

 

그 다윗이 처한 수렁의 상황은, 어떤 질병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난과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다윗이 그들 무리 가운데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이 맹탕인 그들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하는 의로운 신앙인으로서의 고난이었습니다. :6~12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렇게 살다보면

고난이라는 것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정상이다' 라는 말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고난 받기를 간절히 원해야 된다' 라는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과적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 라는 얘기는 맞는데,

'우리가 고난을 원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

 

바울이 이제 디모데에게 '너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8, 2:3

라는 말을 몇 번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고난 자체가 굉장히 고귀해서 네가 그것을 꼭 받아야만 돼!'

라고 말을 한 게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난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너는 고난을 받게 될거야'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는 얘기이지, 그것을 소원하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만약에 그런 고난 없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었다면

사도바울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죠.

근데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 하나님에게 기도 하시면서

'저는 고난을 너무나 당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셨나요?

 

안 그러셨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주님도 기도하셨읍니다.

 

그러니까 이 고난 자체가, 우리가 원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살 때,

고난 자체를 피할 수는 없으며, 결과적으로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도, 그런 고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의를 위한 고난을 받더라도

또는 다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난이 가져오는 그 고통 때문에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정상인 거고요,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정상인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경건한 성도님들 가운데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마치 이기적인 것 같아서

그런 기도 드리기를 망설이는 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과 마찬가지로

먼저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탄식하며 아룁니다. :1~12

 

그러고나서 곧바로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13~36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서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의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자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거예요.

 

괴로워하고 그 안에 탄식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것이 의인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겁니다.

 

13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새번역) 그러나 주님, 오직 주님께만 기도하오니, 하나님,

주님께서 나를 반기시는 그 때에,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주님의 확실한 구원으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성경을 읽어 보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

항상 하나님의 공의와 연결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롬1:17절에도 ‘복음(구원)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씀했죠.

 

여기서 ‘의’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있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죄값을 치르셨죠.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의’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항상 하나님의 공의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반기시는 때’ 응답하십니다. :13

그렇다면 하나님이 반기시는 때 즉 하나님의 타이밍이 언제일까요?

이때는 악인의 죄가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기에 적절하고

의인의 아픔이 극에 이른 때를 가리킵니다.

 

즉 이때는 성도가 악인에게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며

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고 호소할 때

비로소 당신의 도움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15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다윗은 1~2절에서 언급했던 물과 수렁을 다시 언급하면서,

자신을 거기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위에 언급된 내용을 이미지로,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다윗이 산 채로 (사람들에게) 생매장을 당하는.. 그런 그림이 나옵니다.

 

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

 

지금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이 자기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까이 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18절.

 

실제로 하나님이 다윗을 멀리 하신 게 아니고, 자기가 고난을 당하니까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다든지 어떤 고통을 당할 때는,

가만히 있지 말고, 부모를 찾고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까이 와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이여, 제 가까이 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이 가까이 와주시고, 주님이 임재하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죠.

   

19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다윗이 비방과 수치와 능욕 당하게 된 시발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순간부터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헌신한 종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은 그것을 보고 그냥둘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비방, 수치, 능욕이었습니다.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기 친척과 동포, 특히 자신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버림을 당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절망적인 상황을 예표한 것입니다.

 

마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19~21절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을 아신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19절.

우리가 어떤 의로 인한 고난을 당할 때, 자기 사정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것 따위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신다' 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죠.

 

20절에 보면, 지금 다윗의 억울함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자기 주변에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없고.. 찾지 못하였나이다'

 

도리어 자기에게 쓸개와 초를 마시게 하는 자들만, 자기 주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20

그러나 다윗은, 자기만 하나님 앞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 대적들도 모두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9

 

그래서 '하나님이 내 사정도 아시고, 나의 대적들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면' 다 된 것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온갖 비방과 수치, 능욕을 당하셨고 기댈 곳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무리는 식초를 들이대며 마시라고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요19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악인에 대한 심판 간구   (22~29절)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 때문에,

악인에게 임할 심판을 기대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주시>가 등장합니다.

<저주시>를 읽을 때, 우리는 3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 저주시는 이것을 ‘개인의 복수심’으로

이러한 것들을 썼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동기에 있어서

그것은 개인의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그 죄에 대한 증오입니다.

 

2) 그 저주나 보복의 방식에 있어서는

내가 가서, 내가 당한 대로 그대로

나의 대적에게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복하여 주시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3) 저주시의 그 목적에 있어서는

나의 억울함을 풀어 내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이 저주의 시편은 읽어보면

시인의 개인적인 그러한 내용처럼 읽혀져요.

개인적으로 아파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싶어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처럼 읽히는데

 

사실 정확히 그 반대라는 거죠.

이것을 아주 공적인 시 이고요.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읽어야 되는 그러한 시입니다.

 

22절부터 다윗은, 회개하지 않는 그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22절은, 악인들이 자기들이 행했던 그 악한 일에 대해서, 회개하기 보다는

서로 축하하면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밥상(잔치상)'과 그런 평안(즐거움)이 덫 trap 이 되어서.. 심판을 내려달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이 악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죄와 악을 행하면, 회개해야지.. 그걸 자랑하고 떠벌이면.. 하나님의 심판이 급속할 겁니다.

 

24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노, 진노를 간구하는 겁니다.

하나님보고, 일방적으로 자기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25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렇게 해서 악의 대 generation 가, 세상에서 끊어지게 해 달라는 겁니다.

 

26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지금 문맥상 다윗은 '의로운 성도(자신)의 고난'을 노래하는 중입니다.

본 절에서 '주께서 치신 자,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란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사야53장도 그렇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도 그렇고,

 '주께서 치신 자,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였습니다.

 

실제로 지금 다윗을 치는 자는, 대적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군병 같은 역할이죠.

그 예수님도, 그 다윗도

'주께서 치신 자,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였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악한 것이, '깐 데 또 깐다'는 말이 있듯이,

본 절에서 그렇게 자신을 '주님이 까신 데를, 악인들이 또 깠다'는 것입니다.

 

27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8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위 구절은 롬1:28절처럼 '하나님이여, 저들을 유기하소서' 라는 간구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사적 감정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찬양    (30~36절)

 

슬픔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부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자기 연민과 상처, 두려움, 시샘 등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죄다 기존의 세계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받아들이길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고난까지 아우르는 인생관을 가진 덕분에

그런 슬픈 감정과 괴로운 생각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 하기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 역경을, 도리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자기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지 마십시오.

오히려 밖으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편이 좋지 않은 이들을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역경과 고난을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는 일이 가장 큰 사람의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내하며 어려움을 이겨내는 특권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고통이나 환경이 바뀔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편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폭발적인 찬양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32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3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35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36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마치는 말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우리 삶의 결국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결국 승리할 것이고,

주께서 그 승리를 바라보시며 고난을 견디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참된 평안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를 행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다윗과 같은 경험,

즉 의가 고난으로 돌아오는 일을 가장 극한으로 경험했던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던 예수님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상황처럼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좇아 다녔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정말 기운이 빠집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쉽지 않은 일을 했을 때

그 결과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내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내로서 남편을 더 존경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상대방은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것 같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자녀가 어떤 긍정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힘들고 귀찮은 일은 먼저하고, 정직하게 주께 하듯 최선을 다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순진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