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오늘 시편이 기록된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8절의 ‘내가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며, 가족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부터, 이런 따돌림과 배척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본문은 그런 심경 가운데서 지은 시인 것입니다.
※혹자는 이 시의 배경으로, 사무엘하 15장에 나오는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나, 열왕기상 1장에 나오는 넷째 아들 아도니야의 반역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나
전체 문맥상 그런 추정은 무리가 많습니다.
본 시편은 시22편 다음으로 신약에 많이 인용되고 그 횟수는 17회에 달합니다. 그래서 본 시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시로 취급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며 이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시편도 68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합니다.
68편은 축제로 들뜬 분위기에서 그렇게 했다면
69편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무겁게 가라 앉아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탄식하고 간구하면서 결국 찬양과 기대로 나아갑니다.
의로운 동기로 행한 의로운 일이 결국 삶의 고난으로 돌아올 때,
다윗은 탄식했고, 간구했고, 그리고 찬양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을 함께 살펴봅니다.
◑ 의인의 탄식 (1~12절)
마치 물에 빠져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다급하게 외쳤던 것처럼, 다윗도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시를 시작합니다.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4,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40:2,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다윗은 실제로 물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깊은 물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상황이 절박함을 표현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다윗도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윗을 구할 수 있는 구조요원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한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했다는 것을
3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다윗은 피곤할 정도로 소리를 질렀고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말라버릴 정도였어요.
구원해 줄 하나님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봐서 눈도 아플 지경입니다.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자면 눈이 빠지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물에 빠져서 죽음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습니다.
다윗의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그런 상황들을 한두번씩, 혹은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됩니다.
자연재해나 개인의 질병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특정하고 있는 상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4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다윗은 “까닭 없이”, “부당하게”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 쪽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저 그를 미워하는 자가 머리털보다도 많고, 또 그의 원수가 되어
그를 끊으려고 하는 자, 즉 그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적으로도 많고 힘도 강합니다.
다윗이 그들의 공격을 ‘큰 물’로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느끼기에 거대한 홍수, 강한 파도와 같았습니다.
다윗은 빼앗지도 않은 것을 물어주어야 하는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지도 않은 일, 하지도 않은 말에 대해서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혹은 실제 사실에 대한 왜곡된 오해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구원을 구합니다.
요15: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5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다윗은 참 정직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대적들 앞에서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르고,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인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친구들에게 반복했던 주장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죄악된 책임이 나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여 오해를 풀고 하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시편 7편에서도 다윗은 억울함에 이렇게 기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7:3~5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5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로 인해서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절박한 심정의 기도입니다.
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7
그로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되었고 또한 그 수치로 인해
그의 형제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이요, 따돌림이었습니다.
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9절 서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두어가 있습니다. 즉 다윗이 가족들로부터도 외면과 배척을 당했던 것은 ‘주의 집’, 곧 ‘하나님’을 위하는 열성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족들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성전을 그렇게 짓기를 원했던 그 마음을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윗만큼 주의 집, 즉 성막과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예배와 삶의 중심으로 다시 가져왔던 사람이 다윗이었고,
그런 예배의 장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를
임시 장막이 아닌 영원한 집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도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의 마음만 받으시고 성전을 짓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을 때, 다윗은 그 말씀에 순종했지만
성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스스로 했습니다. 건축 재료를 준비했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드려질 예배를 위해 사람들도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 열심에 다윗은 사로잡혀 있었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비방을 그 스스로 받았던 것입니다.
이 9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서, 처음 성전으로 올라가셨을 때,
성전을 시장통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다윗의 이 고백,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을 기억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다윗이 가족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금식하면, 사람들은 금식한다고 망신을 주고,
다윗이 베옷을 입고 슬퍼하면, 사람들은 청승스럽다고 수군거리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빈정거림을 당했는데,
그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10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기 곡하고 금식하는 것, 굵은 베로 옷을 입는 것은 모두 예배의 행위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바탕에 있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주로 회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5절 참조
9절 말씀이 신약에서 예수님께 적용되었을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해지던 잘못된 예배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아마 다윗이 여기서 언급하는 회개의 예배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가 그의 통치 아래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심이
자기에게 가득했기에, 그는 잘못된 예배, 예배자들로 인해 슬퍼하며
하나님께 예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그의 대적들은 이용했고 조롱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이 어떤 ‘죄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는 식으로 그를 비방했을 것입니다.
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는 지도자들입니다.
독주에 취한 무리는 술을 마시면서 가십거리를 나누는 일반 사람들입니다.
다윗을 비방하는 자들이 많고 강하다는 4절의 말씀처럼,
다윗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던 것입니다.
다윗은 확실히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있었고, 어쩌면 넓은 의미에서는
그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회개의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돌아오고 있었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비방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 자신이 그의 원수들처럼 되거나
혹은 그의 원수들이 그와 같이 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던 말씀도 같은 이치다.
제자들이 세상과 같이 되거나 세상이 제자들과 같이 되지 않는 이상,
고난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구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1절),
자신처럼 주를 향한 열심이 가득한 자들의 구원도 있습니다.
시 69: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