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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0장 1~5 서두르소서 하나님이여

LNCK 2021. 12. 2. 18:10

 

◈시편 70편 해석, 서두르소서 하나님이여!     시70:1~5      여러 설교 정리, 출처

 

본문 시편 70편은 '구원과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기도시'입니다. 

그런데 본 시편의 내용은 시편 40편 마지막 다섯 구절과 똑같습니다.

 

시편 70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로, 기념식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윗의 시로, 기억을 떠올리며'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의 내용상 무슨 '기념식'에서 부른 노래 같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다윗이 옛날 자기가 기도했던 내용을, 다시 기억해서 적은 것 같고, 

그걸 찬양인도자가 불렀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표제에 '다윗의 시' 말고는, 별 다른 의미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 70편은 71편과 원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유명한 구약학자 조셉 알렉산더같은 분은 시편 70편을 가리켜 

69편의 부록이고, 동시에 71편의 서문이라고 보기도 하였습니다.

 

71편의 표제가 없고 서로 비슷한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등이 그렇습니다.

 

다윗은 본 시편에서 그 자신과 하나님을 바라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만이 진정한 도움이 되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도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시의 배경 정황

이 시의 저자인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시편의 구체적인 상황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절에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은 어려움 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고,

2절의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나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그 어려움이 원수들로 인한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5절에서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필요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 상황을 이겨낼 자원과 힘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자인 다윗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니 항상 그런 상황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러했고 왕이 되고 나서도 평안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다윗의 시편의 배경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시편 70편은 어떤 특수한 상황, 특정한 고난을 강조하려는 목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1절은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서두르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시고 서둘러 나를 도우소서”입니다.

 

1절에 나오는 첫 단어(강조)는 '서두르소서'라는 동사입니다. 

즉, 시인이 구하는 기도의 핵심은 “서두르소서 (개역에 속히)”에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도 “하나님이여 서둘러(속히) 내게 임하소서”라고 하여

다시 한번 “서두르소서(속히)”가 나옵니다. "지체치 마소서"라고도 했습니다.

 

즉, 이 시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지금, 즉시,

가능한 빨리 응답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시편 70편은 어떤 상황이든 긴급한 상황에서

마치 119 긴급구조요청을 드리는 듯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아서, 굳이 내용을 구분할 필요 없지만, 그래도 구분해 보면

-1절과 5절, 자신을 위한 기도

-2절과 3절, 악인을 향한 기도

-4절, 의인을 향한 기도

 

▲1절,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마치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어느 동굴에 피신해 있을 때,

사울의 일행이 그 동굴로 들어온 것과 같은 상황을 '가정,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매우 급박한 것입니다. 소리는 낼 수 없고, 마음으로 간절히 부르짖었을 겁니다.  

 

1절과 5절(처음과 끝이) 자신을 위한 기도로 마무리가 되는 것을 보면,

70편은 전체적으로 다윗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자체보다는 그 일을 언제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즉, 타이밍에 대한 기도입니다.

 

E. M. 바운즈(E. M. Bounds, 1835-1913)는 기도에 관하여 좋은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 중에 「기도와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인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히스기야,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삶의 특징들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의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지도자가 된 것은

사고의 훌륭함과 무궁무진한 창의력과 뛰어난 교양이나 타고난 자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기도의 힘 때문이었다."

 

실제로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과 만나 교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그 분이 통치하시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시고, 온 세상을 경영해 나가십니다.

여기에 기도자의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은 그 강도보다, 길이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언제 끝날지 모를 때.. 아주 절망적이 됩니다.

 

등산을 할 때도, 이정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얼마 더 가면 정상이다’ 이러면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끝이 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정표가 하나도 없으면, 무척 힘듭니다.

끝이 어디인지, 언제쯤인지 모르기 때문이죠.

 

고통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의 크기가 우리를 압도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사람은 어느 정도 익숙해집니다. 견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더 큰 문제는 ‘언제 그것이 끝나느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시편을 보면 “어느 때까지 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묻는 구절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거죠.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긴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1절처럼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은 기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 또한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 등이

보통 기도에 있어서 간구보다 선행되는데요.

 

그런데 1절의 표현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서의 기도라는 것이죠.

다윗은 어느 단어 하나 뺄 수 없이 간결하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구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하고 절망적이었던 것입니다.

 

▲2절,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3절,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나의 영혼(네페쉬)을 찾는 자'라는 말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자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라는 뜻은 

다윗이 상처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3절의 '아하 아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의성어인데, 기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시편 40:15에서는 '하하 하하'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더 잘 된 번역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해하려는 사람들,

우리의 인격에 자존감을 상하게 만들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람들,

우리가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당하였는데, 함께 아파하는 척 하지만

자기 집에 돌아가서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기뻐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살피지 아니한다"(시10:4) 

"하나님은 없다"(시14:10) "네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시42:3, 10) 

등으로 조롱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친한 친구들이 조롱하기도 하고(시55:13, 41:9), 친척들이 조롱하기도 하며(시38:11), 

이웃이 조롱하기도 합니다(시44:13).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무시하고, 기회만 있으면 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1절과 5절이 ‘자신을 위한 기도’라면

2절과 3절은 ‘대적을 위한 기도’입니다.

 

‘대적을 향한 기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다윗의 기도는 대적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구원이, 대적에 대한 심판이 전제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대적과 관련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대적들에 대해 3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 그들은 다윗의 고통을 즐겼습니다.

다윗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들은 “아하, 아하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조롱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시편 35편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시 35:21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

 

시 35:25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아마 다윗의 영혼을 찾고 그의 상함을 기뻐하던 자들은

고통 받는 다윗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와~ 위대한 다윗 왕이네. 저 초췌한 모습 좀 봐.”

 

마치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손에 들려주고 경배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했던 로마 병사들처럼,

또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서 자기를 구원하라고 조롱했던 유대인들처럼

다윗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의 악한 계획이 다 무너지고

그로 인해 그들이 수치와 무안과 수모를 당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이 뒤로 물러가서 더 이상 이런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악한 자들에게 있어 최선은 그들이 악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구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 대한 적대 행위가 

곧 하나님을 향한 반역 행위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저주와 분을 품을 때

항상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4절,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그러면 다윗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였을까요?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를 보편적인 상황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기록한 시가 시편 70편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아주 의미있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다윗의 이 기도의 핵심은 그 상황에서 다른 어떤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찾았고, 주님이 구원해주실 것을 간절하게 사모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광대하심을 증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를 찾는 자'라는 표현이나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을 볼 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믿는 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고, 
"아,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는 역시 광대하시구나!"하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2절은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4절은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그래서 2절과 4절은 악인과 의인의 행동을 비교하며

우리가 어떤 신앙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악인들과 원수들은 오직 의인 다윗을 찾으나,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을 찾습니다.

찾아야 할 대상이 바로 서 있어야

그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해지고 보배로워집니다.

 

앞에서 그의 대적들을 3가지로 다양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다윗은 여기서 의인들에 대해 2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주를 찾는 자들”이고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영혼을 찾고 그의 상함을 기뻐하던 자와는 상반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합당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4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모두는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항상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지금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위대하지 않게 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기뻐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다윗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데,

내 삶에서 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나타나 주시기를, 역사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찬양이 되고 예배가 됩니다.

 

즉,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들의 악한 계획이 무너짐으로 수치를 당하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해달라는 것이

다윗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했던 기도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다시 자신의 상황으로 돌아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며 본 시편을 마무리 합니다.

 

▲5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관련설교 : 다윗의 거지 의식

 

1절은 정말 꼭 필요한 단어만을 통해 자신의 상황의 긴급함을 표현했다면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간구한 믿음의 기초를 표현합니다.

 

첫째는 그는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원하지 않은 외부 환경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받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궁핍하다는 것은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뜻합니다.

즉,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다윗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그의 도움이시고 그를 건지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살면서 정말 다윗처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준비해서 강단 앞에 설 때도 그렇습니다.

 

또한 주의 종의 길을 가다보면, 가끔은 다윗 같은 심정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한다고 했을까?’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찾아오기도 합니다.

‘내 가족들도 내가 제대로 돌볼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만 아니었으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내 부모님이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집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업을 해서 원하는 대로 일자리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훌륭한 상담자였으면 좋겠다. 내가 엄청난 전도자였으면 좋겠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건 뒤집어 생각해 보면 결국 ‘내가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좌절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도울 수 있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도움이시고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냐 하시지 않을 것이냐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언제 하실 것이냐가 궁금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 가운데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그러면 다윗이 왜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5절에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는 믿음대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는 믿음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지 않거나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의 기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믿음보다 과학(의학 포함)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에 
과학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주1)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고,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성격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면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세우고 가르쳤던 에바브라가 

"에바브라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골4:12)

 

여기서 '애쓴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아고우니조우' 라는 말인데,

'씨름한다,' '고통한다,' '고민한다,' '괴로워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영어가 애거나이즈(agonize)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신약성경을 보면 힘을 다하여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골1:29)

경기장에서 싸우는 사람, (고전9:25)

생존을 위하여 싸운 군인을 묘사할 때, (딤전6:12)

위험으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요18:36)

 

이 단어가 가지는 이러한 용법을 볼 때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거죠.

 

이러한 성경의 사상을 종합하여 J. H. Jowett는 기도에 대하여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생명력있는 기도는 사람의 체력을 소모시킨다.

참된 중보의 기도는 헌신이며, 피를 흘리는 희생이다."

 

기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체력을 소모시키기도 하고, 희생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주님은 다윗이 믿고 기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는 우리의 도움이시요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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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설교 / 오늘 시편을 통해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구하는 기도에 있어서, 성도들은 두 극단 중에 한쪽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아요.

 

-지극히 나 중심의 기도를 하거나

-반대로 지극히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하는 것이죠.

둘 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먼저 "나 중심의 기도"를 하는 경우, 하나님은 그저 자판기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시험을 보면 잘 봐야 하고 면접을 봐도 잘 봐야 합니다.

나는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계획하는 일이 다 되어야 합니다.

차가 꽉 막혀 있어도 내가 있는 차선은 빨리 가야 합니다.

 

내 배우자는 나를 왕처럼 혹은 왕비처럼 항상 대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 해야 합니다.

돈 때문에 걱정하는 일도 없고요..

 

열거하자면 끝도 없는 이런 나의 기대, 나의 바람을 채워주는 존재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특히 기도를 열심히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하고 그러면 더욱 그렇게 됩니다.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었는데, 음료는 나오지 않을 때와 같습니다.

자판기가 내 돈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자판기를 때리고 발로 차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한가지나 두가지일 수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에는 “이것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것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정확히 ‘종교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종교 생활입니다.

 

이럴 때 '속히 도우소서, 지체하지 마소서!'는  :1

어린 아이가 욕심을 부리면서 떼를 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기도"도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 중심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죠.

 

앞에서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여겼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을 냉혈한으로 여깁니다.

은혜로운 왕이 아니라 무자비한 독재자로 여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기도해 봐야 하나님 뜻대로 되는데, 기도할 이유가 어디있느냐고 묻습니다.

비슷하게 하나님은 나의 사소한 기도 같은 것은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죠.

기도의 경중을 나누는 것인데, 결국 이 경우도 기도를 하지 않게 됩니다.

 

기도할만한 큰 일이 없고, 그래서 막상 큰 일을 만나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기 때문이죠.

사실 이것 역시 표현만 달라졌을 뿐, 앞서 말한 나 중심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은 둘 다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어야 하는 분으로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에서 우리는 균형잡힌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먼저는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 살면서 그런 기도를 한번씩은 해봤을 것입니다.

여기 다윗처럼 '하나님 지금 정말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라는 식의 기도를 해봤을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들었던 간증에서도, 그 자매님은 북송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다윗과 같은 기도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드렸던 것입니다.

자매님은 정말 다급한 마음으로 '지금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드리는 그런 다급한 기도에 비해서, 

내가 다급한 마음에 드렸던 기도가 뭐였는지를 생각해 보니까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을 다 계산하고 하나님께 “속히 도우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때는 계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 필요합니다.

진실되게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시편 70편의 시작이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한 말이나,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부분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속히 도와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그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느끼기에 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지체하지 마소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생각해야할 부분입니다.

정말 죄악된 것, 야고보의 말처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실지 아닐지, 하나님께 기도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이 아닌지

등에 대한 생각은 일단 내려놓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것은 5절 말씀처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고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때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죄송하든 염치가 없든,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만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기도일 수 있지만,

결국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십자가를 앞두셨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 아버지 하나님께 세번이나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마 26:39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을 모르셔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이해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밝히신 것처럼 구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기도를 하셨을까요?

그 결과를 생각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기도를 통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에서도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셨고,

그 죽음에서도 그러함을 이 기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신 모든 구원의 일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괴롭지도 않은데 괴롭다고 하셨을까요? 

그냥 말로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괴로우셨고, 할수만 있다면 그 잔을 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영원 전부터 누려왔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의 즐거움이 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역사상 가장 말도 안되는 역설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를 만든 유일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과에 관계 없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나의 고난 중에 나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곧 내가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고난 중에, 어려움 중에, 어떤 상황이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우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구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이 잘못되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놓치셔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일들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좀 더 고난을 견뎌야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진실함으로 기도하며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밖에 할게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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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러면 기도의 결과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기도의 결과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검증한 논문이 Southern Medical Journal에 
실린 일이 있습니다. 

심장학자 랜돌프 비드 박사가 1982년부터 83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제너럴 병원에 입원한 192명의 환자들과 
비교 그룹으로 201명의 환자를 구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비드 박사는 192명의 환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해 줄 
그리스도인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드 박사의 보고에는 기도그룹에 있는 환자가 치료가 
훨씬 빠른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사실 기도는 과학적인 실험으로 검증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초자연적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비롭고도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임상적인 결과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