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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2편 1~20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하소서

LNCK 2021. 12. 6. 14:50

https://www.youtube.com/watch?v=er20uhnmzNY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하소서                  시72:1~20                 출처


◑1. 아들 솔로몬에게 '공의'를 부어달라고 기도한 아버지

시72: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본문 시72편은 다윗이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후계자로 솔로몬을 세웠는데
이 아들 솔로몬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이 시편 72편 입니다. 

근데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구한 기도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오늘 그것을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판단력과 하나님의 공의를 아들에게 부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1 

이번 한 주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붙들고, 제게 계속 기도를 시키셨어요. 

이것이 오늘 제가 설교해야될 중요한 메시지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매우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특별한 케이스예요.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있으시다면 기도하시겠죠.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기도제목이 다 있으실 거예요. 

근데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부어지기를' 기도하십니까?
그것도 제일 먼저! 제1번 기도제목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여느 아버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우리 딸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부어 주세요.' 
그걸 가장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점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이 다윗도 여느 아버지처럼, 
아들 솔로몬 왕이 아주 강대한 나라를 이루게 되기를 기도했어요. :8~11

시72:8~11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정말 거대한 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는 보통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우리 아들이 엄청난 축복을 받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버지 다윗의 기도는 좀 달라요. 
이런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되게 해주시고 (먼저 의를 구하고) 
그 다음에 우리 아들 솔로몬이 광대한 나라를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뭐냐면,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에 
이 땅에 정의가 꽃피우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를 먼저 드리고 난 다음에 8~11절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 앞에 7절에 보면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7
(새번역) '그가 다스리는 동안,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주시고,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다윗은 죽음을 얼마 앞두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주 진실한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지금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거예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가식이 없어집니다. 
그때는 이제 진짜 속마음이 나옵니다. 

죽을 때 하는 말이 중요하잖아요. 유언이고, 
죽는 순간에 했다면 정직한 이야기죠. 
그것도 제일 먼저 나오는 기도입니다.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  :7(새번역)

이것은 진심이었어요. 다윗은 정말 그걸 원했어요. 

▲다윗이 이렇게 기도를 하는 이유는, 재판 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정말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예요. 

다윗은 특별했습니다. 
다윗에 마음이,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밖에 없는 마음이었어요. 

보통 왕은 최고 재판관 입니다. '짐이 곧 법이다' 
이렇게 말했던 프랑스 황제도 있었지요. 
그게 왕이에요. 절대 권력입니다. 
왕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그 맛에 왕 하는 거 아닙니까?

근데 다윗은 달랐어요. 
다윗은 왕이 되고서 정말 힘들었던 게 재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재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다스리다, 재판하다는 같은 말, 샤파트

그런데 실제로 왕이 되어서 재판을 해 보니까, 너무 어려운 거예요. 
도대체 어떤 게 옳은지/ 그런지.. 다윗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여러분 우리나라도 판사들이 있습니다만
판사가 공의로 재판하는 일이 쉽겠습니까?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혹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진짜 재판을 잘한 걸까? 
괜히 엉뚱한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거나, 
또는 진짜 죄인을 풀어서 돌아다니게 하는 건 아닐까?' 

특히 다윗이 신경을 쓴 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공정한 재판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변호사를 많이 쓸 수 있어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변호사가 없습니다. 
다윗은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아야, 이게 좋을 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재판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게 돼요. 
자기 판단으로는 잘 모르겠으니까... 

이게 다윗이 왕으로 지내는 동안에, 그가 겪었던 어려움이었어요. 
훌륭한 사람이었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면서 
그걸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예요. 

12~14절 '진실로 그는, 가난한 백성이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건져 주며, 
도울 사람 없는 불쌍한 백성을 건져 준다.
그는 힘없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건져 준다.
가난한 백성을 억압과 폭력에서 건져, 그 목숨을 살려 주며, 그들의 피를 귀중하게 여긴다' 

다윗은 생각하기를, 
왕이란.. 가난한 사람, 정말 힘없는 백성들을 위에서 존재하는 왕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에게 복을 주신 거예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으니까요! 

그리고 다윗은, 아들 솔로몬도 
똑같은 왕으로서의 어려움을 겪을 테니까 
하나님께 구하기를, 
하나님의 판단력 과 하나님의 공의를 솔로몬에게 주시기를, 

그래서 재판할 때, 지혜롭게 정확하게, 
옳고 그른 것을 잘 판단해서 재판하게 해 달라고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 없게 해 달라고 
가난한 사람이 괜히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솔로몬이 알게 되기를 원했어요. 
왜요? 
그래야 하나님이 솔로몬을 마음껏 복을 주실 수 있으니까요. 

15~18절 '이러한 왕은 만수무강할 것이다. 그는 아라비아의 황금도 예물로 받을 것이다. 

그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가 그치지 않고, 그를 위하여 비는 복이 늘 계속될 것이다.
 
땅에는 온갖 곡식이 가득하고, 산등성이에서도 곡식이 풍성하며, 
온갖 과일이 레바논의 산림처럼 물결칠 것이다. 
그 백성은 풀처럼 성읍 곳곳에 차고 넘칠 것이다.

그의 이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그 빛을 잃기까지 그의 명성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뭇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일컬어서, 복 받은 사람이라 칭송할 것이다.'

'이러한 왕은'  :15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정의가 꽃 피우는 통치를 하는 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왕이 아니고, 우리는 재판관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무슨 그런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늘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억울한 일 당하지 않도록, 
어떻게 하면 힘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이 
공평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늘 가난한 사람이 자기 눈에 밟혀요.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게 돼요. 

'우리 사회의 정의가 꽃 피게 해 달라고..' 
그게 늘 마음에 갈망이고 소원인 것은 
왕이 아니라도 누구나 그렇게 소원, 기도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을 다 믿는데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 복을 주시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정의의 꽃을 피우게 해 주소서 (의인들이 잘 되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한 것은   :7  (새번역)
다윗이 진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다윗이 분명히 만났어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기도를 못 해요.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 공의가 하수같이 넘치는.. 
온 나라가 공의로운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던 것이 분명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게 된 거예요.


◑먼 후대에 메시야이신 왕까지 내다 본 다윗의 기도 

이 시72 편은 완전히 성령이 충만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느냐? 

시72편은 단순히 아들 솔로몬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다윗의 후손으로 나실 예수 그리스도,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에요. 

지금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기도하기를 
'세상의 모든 왕이 다 (솔로몬) 왕을 경배하게 해 주시고 
모든 백성들이 다 (솔로몬 왕을) 섬기게 해 달라고..' 

기도가 이루어졌나요?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한 가요? 

다윗이 성령에 완전히 취해 있었던 겁니다. 
그는 솔로몬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장차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나라를 본 거예요. 

세계의 모든 왕들이, 세계 모든 민족과 사람들이 
다 와서 왕께 경배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본 거예요. 
성령충만한 가운데!
본문이 그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보면서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거지요. :7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을 정말 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도 못 합니다. 

▲우리 본성에는,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의인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없어요. 
왜요? 
다 이기적이거든요.

여러분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요. 끊임없이 특혜를 원해요. 특별대우를 원합니다. 

돈을 왜 많이 벌려고 그러세요? 여러분 돈이 왜 필요하세요? 
돈이 있으면 말입니다. 기차를 타도, 배를 타도, 비행기를 타도.. 자리가 달라요.
1등석이 있고.. 다 돈으로 구분되는 거죠..
돈이 있으면 특별대우를 받아요. 

우리가 정의롭지가/공평하지가 않습니다. 
'억울해도, 조금 힘들어도, 불편해도.. 법이니까 나는 감수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정의를 부르짖어요. 
법대로 하자고... 

그런데 내 형편이 좋아지면, 
그러면 내 이익에 따라서 얼마든지 정의를 버려요. 그게 우리들이에요. 

우리는 공정하게 하기를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보면 굉장히 자기 중심적 입니다. 

그리고 법도 말입니다. 자기 편의에 따라 어기는 걸 더 좋아해요. 
나에게는 법이 적용 안 되는 특별 경우를 더 바래요. 

그러니까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 
이건 우리 스스로를 굉장히 옥죄는 거예요. 

우리가 때때로 정의를 외칠 수가 있지만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대부분 다, 스스로가 위선자라고 스스로 느껴요. 
왜? 자기가 정의롭지 못 하거든요. 

우리는 쉽게 거짓말해요. 
우리는 쉽게 어떤 이익에 마음이 흔들려요. 
우리 자신이 그런 걸 스스로 알지요. 

그러면서도 정의를 외쳐야 될 경우에 
얼마나 스스로 갈등이 심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의로운 자들이 번성케 해 달라)는 이런 기도를  :7
우리 속에서 자연히 나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본성에 거슬리는 거예요. 

근데 다윗은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본성과 다른 기도를 하게 됩니다. 


◑적용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된다고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욕심으로 살고, 자기 이해관계에 얼마나 빠른지 몰라요. 

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할 만큼 교회가 부흥된 나라입니다.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크게 부흥된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도 많습니다. 왜요? 

한국 사회가, 교회가 부흥을 되었는데도
달라진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저 큰 교회가 몇 개 더 생긴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부흥이 돼서, 우리나라가 더 정직해지고 
우리나라가 더 깨끗해지고, 더 진실해지고, 더 사랑이 많아졌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인격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어야 하는데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믿지 못 해요. 
신뢰와 믿음을 주지 못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들보다 
더 깨끗하고, 더 정직하고, 더 진실하다고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짓말장이 위선자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왜 그렇지요?
정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교회만 다니는 정도의 믿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살지 못합니다. 
그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 <월요일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최영수 목사님이 쓰셨어요. 
일터 사역을 하시는 분들, 직장 생활 하시는 분들, 
사업하시는 분들은 한번 꼭 읽어 보세요. 

그 책 속에서 최용수 목사님이 
큰 길가에 어느 회사에서 세운 옥외광고판 이야기를 하셨는데 
"주일은 주님과 함께" 이런 광고를 붙인 어느 회사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렇게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우리 회사는 기독교 기업이라고.. 
이렇게 자기 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영업하고 장사하는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손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공개적으로 
'우리는 주일에 영업 안 합니다. 
우리는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때문에 영업 안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라는 거죠.

교회는 그동안에 이렇게 (주일성수) 하는 것을 장려하고 
아주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칭찬해 왔습니다. 

근데 최용수 목사님은, '일터 사역(직장 선교)을 하면서 
그게 진짜 믿음이 좋은 증거일까?' 라는 회의를 품었다는 거예요. 

'정말 믿음이 좋은 건, 뭘 말하는 걸까?' 
'정말 믿음이 좋은 것은, 주일이면 반드시 교회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예수 안 믿는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 지내는 일터 현장에서, 

자기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결정 하는 것으로 
자기 믿음이 좋은 건지를 드러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분이 그 책 속에서 구구절절이 그렇게 쓰고 있어요. 

한국교회는 그동안의 주일성수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걸 믿음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많이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지 
그동안 잘 가르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교인은 많이 늘어나도 
세상은 여전히 변화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다윗이,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제발 빠지지 않고 
제사를 꼬박꼬박 잘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이렇게 먼저 기도하지 않고 

솔로몬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은 
다윗이 뭘 본 거예요. 
그냥은 이런 기도가 안 나옵니다. 

사람은 욕심이 많습니다. 
정의가 꽃을 피우려면, 왕권은 심각한 제한을 받게 되어 있어요. 
왕이 자기 마음대로 못 하니까요. 

제가 2001년 코스타 집회에 갔을 때였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이 아주 마음에 정말 아픈 강연을 하셨어요. 

한국 사회가 정직하지 못한데, 상당 부분이 기독교인들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해 전 (2000) 통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재판을 하는데 근데 위증죄로 기소 되어 재판한 케이스가 
2000년 우리나라의 1198 명이었는데 
같은 기간에 일본에서는 5명이었다는 겁니다. 

위증죄로 기소가 된 경우가, 일본에 비해 240배 차이가 났다는 겁니다.
인구를 고려해서 보면은 670배 차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증을 너무 쉽게 한다는 거죠.

근데 그때 당시 일본 기독교인은 1%도 안되고 0.7%였습니다. 
우리나라는 20% 를 이야기하던 때였어요.

기독교인이 전국민 중에 5명 중에 1명이데 
위증 죄로 기소된 경우가, 일본보다 670회 나 많다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역할을 제대로 한 거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뭐 그런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15년이 지났어요.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만큼 많이 달라졌을까요? 

그건 여러분들이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기도하고 계세요? 
여러분은 왕도 아니고 판사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무슨 유력한 정치인도 아니고.. 그렇지만 기도는 해야죠.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주십시오!  (의인들이 흥황하게 해 주십시오) :7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다면..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희는 새벽기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먼저 하시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래서 새벽기도 순서를 바꿨어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부터 드리고
그리고 민족을 위한 기도, 
한국 교회를 위한 기도부터 먼저 드리고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 하고 
개인 기도를 하는... 
지금 새벽기도회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 하고 계세요?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기도만 하고 있어도 
우리는 세상을 바꿀 거예요! 
왜?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기도를 안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시겠어요?
우리가 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역사 하시겠어요?


◑그런데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는 기도는 
사람의 본성으로는 못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불의합니까?
다 경험 하시잖아요.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는 기도를 자꾸 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순교 각오도 해야 돼요. 

우리 자신도 손해 볼 것이 많다고 생각 되니까 
굳이 그 기도부터 안 하려고 하지요. 

근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게 확 뒤집어져 버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이 달라져 버려요. 

시편 72편 마지막 부분에 
다윗이 18절, 19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이 이제 나옵니다. 

'홀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스러운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송합니다. 
그 영광을 온 땅에 가득 채워 주십시오. 아멘, 아멘.'

지금 다윗은 완전히 사로잡혀있는 순간이에요. 무엇에?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영광을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는 겁니다.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처음 가 보았을 때 
그때까지 그렇게 큰 폭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그 폭포 앞에 까지 갔다가 돌아오는데 
제 속이 완전히 뒤집어져 버리더라고요.

뭐 여러 가지 생각도 많았고, 뭐 걱정하는 것도 있었고 
뭐 신경 쓰는 것도 있었고, 뭐 좋은 일/ 나쁜 일도 많았지요.. 

근데 그 폭포 밑에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오는데
세상의 여러 생각들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아무 생각이 없어져 버렸어요. 
압도당해서 그런 것입니다.

정말 엄청난 자연을 한 번 이렇게 보는 것도 
사람을 확 뒤집어 엎는데.. 
아마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 모양이에요. 

근데 여러분, 나이아가라 폭포 한번 보고도 그 정도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 속이 완전히 뒤집어져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3층천에도 올라가 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 거예요.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자기의 야망, 자기의 꿈, 그동안 자기가 배웠던 모든 지식 
자기가 누렸던 모든 특권... 다 버렸어요. 배설물처럼! 

그리고 결혼도 안 했어요.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의 길, 
결국은 순교하는 그 길을 갔습니다. 결국은 목베임을 당해서 죽었잖아요. 
그 길을 갔어요. 죽는 것도 무섭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3층천을 보고 나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면, 의를 행하는 자이지만 
실제로 의를 행하며 살려면
이건 진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책을 읽었다거나, 강연을 들었다거나 
뭐 누구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나타나야 성령의 역사

저는 성향적으로 분배, 평등주의적 성향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게 제게는 성향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학시절에 운동권에 빠지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한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외친다고, 꼭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마음에 회의가 들어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없어요. 

우선 나 자신이 뭔가 바로 서고, 
그래야 '당신은 나쁜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나도 내 죄 때문에 지금 죽겠는데 
'사람이 다 죄인이지 뭐..' 내가 이런 형편이니,  
내가 도무지 앞장서서 누구를 정죄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할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 죄가 해결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 뜻대로 살 수는 있는 걸까? 
주님은 진짜 계시기는 한 건가?' 
이런 문제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동권에 가담하는 일에서 멀어진 거예요. 

지금도 제게, 사회에 대해서, 공의에 대한 설교를 좀 많이 해 달라는 
요청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세요.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가진 자, 위정자들의 잘못을 분명히 비판하는 설교를 좀 해 달라... 
그래야 교인들이 바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요청하는데)
제 고민이기도 합니다. 

▲근데 한 가지 제가 물어 보고 싶어요. 
여러분, 제가 설교 안 해서 지금 공의롭게 안 사시는 거예요?

정말 몰라서.. 
어떤 게 정의이고, 어떤 게 의로운 건지를 몰라서 
그래서 여러분 그렇게 정의롭게 살지 못하는 겁니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아는데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부르짖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더 역작용만 생겨요. 

정의를 부르짖을수록, 저 자신의 죄성이 더 드러나요. 
스스로가 위선자라고 하는 좌절감에 더 빠져요.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나중에 불의한 자가 되는 경우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에요. 

'세상이 이렇게 불의한데, 언제까지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세요. 

제가 그분에게 묻고 싶어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서, 불의한 세상을 뒤집을 수 있겠나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불의한 세상을 뒤집을 수 있겠냐 말이에요. 

이 불의한 세상 뒤에는,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데 
불의한 세상을 향해서,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누가 있어요? 있으면 한번 나와 봐요.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 힘으로 노력하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어요. 

먼저는 우리 심령을 뒤집어 놓는 거예요. 
우리 심령이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죄를 은근히 사랑하고, 욕심 투성이고 
이중적이고, 위선자였던 내 중심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한 사람이 생기고, 두 사람이 생기고, 
열 사람이 생기고, 백 사람이 생기면서 
결국은 사회도 뒤집어져요.

사람이 뒤집어 졌습니까?
그렇게 뒤집어진 (변화된) 사람이 생겼나요? 

제가 24시간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영성일기를 쓰자고 
그렇게 호소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뒤집을 수 있는 준비를 하잖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뒤집기를 원하셔도 
어떤 사람들은 전혀 주님 바라보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말씀을 주셔도 깨닫지도 못해요. 
말씀을 주시면 반응해야 되잖아요.

말씀을 들어도 반응도 안 해요. 
그러면 별 소망이 없는 거거든요. 

▲24시간 주님을 바라보고 영성일기를 쓰면, 
그 다음에는 뭐 하냐고 묻더라고요. 
순종하는 거죠.

정말 주님을 바라봄이 되었다면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이제 순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 힘 없는 사람, 구질구질한 그런 사람들과 얽히기 싫어요..' 생각하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강권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점점 하나님이 나를 보여 주세요. 
주님이 이끄시는 데로 안 갈 수 없어요. 

▲성탄 점등식을 했습니다. 
예쁜 트리가 길가에 쭈욱 늘어서서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졌는지요!

그런데 그 불빛 하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뒤에서 고생했는지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빛 되심을 몰라요. 
그래서 일단 전구 빛으로, 트리로라도 
예수님이 빛이심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어요. 

근데 그 일은, 엄청난 희생과 작업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아름다운 불빛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아름다워요. 
그러나 그것은 준비된 자를 통해서만 행해지는 겁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 

여러분,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이 되는 겁니다. 

절대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은 것만으로는 아직도 몰라요. 

불법을 행한다면..
그런 은사가 일어나도 불법을 행한다면 
그건 아직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나타나요. 

공의와 사랑은 서로 반대 개념 같지만
성령의 역사로 서로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한다면서
비판하고, 정죄하고,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싸우는 분위기로 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 진정한 공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대립하고 있어요. 
근데 사랑과 공의는 서로가 필요를 하는 겁니다. 

보수주의 교회는 진보주의 교회를 필요로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진보주의 교회는 보수주의 교회가 필요해요.
사랑과 공의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거예요. 

만약에 사랑 있는데, 공의가 없다면.. 아직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공의는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아직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하루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예수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들고 던지려는 사람들에게 말했어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돌을 내려놓고 가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했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투명한 공의가 드러나고, 또 놀라운 사랑이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 지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면 
이건 너무나 놀라운 것이에요. 

다윗이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어요 
그래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판단력이 주어졌어요. 

그 사례가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이죠.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서,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솔로몬은 칼을 가져와서 아이를 갈라서, 두 여인에게 나눠주라고 했어요.
이때도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나타난.. 명 판결이었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