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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8편 해석, 후대를 위해 부르는 신앙의 노래
LNCK
2021. 12. 11. 21:21
◈시78편 해석, 후대를 위해 부르는 신앙의 노래 시78:1~72 여러 설교 정리
*너무 길어서 녹음 안 합니다. Text로만 보세요.
◑시편 78편의 배경 이해 “역사를 통한 교훈” -이 단락 출처-
시편 78편은 시편 전체에서 두번째로 긴 시편입니다.
시편 78편이 이렇게 길게 노래하고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나열하고 서술하는 것 자체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78편은 과거의 기억을 길게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를 통한 교훈을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시편 78편의 표제어가 “아삽의 마스길”인데, 마스길이라는 단어의 뜻은 교훈이지요.
그런 점에서 시편 78편은 역사를 통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교훈을 자녀 세대에 시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이 역사를 통해 던져주는 교훈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곧 경고와 소망입니다.
먼저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부족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였지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지만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종 되었던 애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보건데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의 구원을 이처럼 누렸던 민족은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라는 그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했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목이 마르다고 먹을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였고 불평을 쏟아놓았지요.
시편 78편은 그 장면을 회상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라고 서술합니다(17절).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을 주셨고, 그들은 그곳에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시편 78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갔도다”(57절)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듯 그들의 행동은 바른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지나온 삶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 얻는 첫번째 교훈, 그것은 경고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두번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소망이지요.
시편 78편 전체는 인간의 불순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두 가지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편 78편 전체를 읽어보면 마치 시소를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 또 다시 하나님의 구원,
그러나 인간의 배신.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신앙.
이 두 가지가 반복해서 계속 등장합니다.
그 사건들의 부분만 바라보면
우리 인생의 결론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로 끝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을 전체적으로 그려본다면,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넉넉히 감싸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모자이크를 수놓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인생에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라는 조각을 놓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옆에 덧붙여져요.
이제는 바른 신앙의 모습만 붙여넣고 싶지만 그렇게 안되요.
그래서 또 다시 탐욕, 죄악, 미움, 시기, 교만 등 돌이켜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 조각을 나의 인생 여정에 계속해서 붙여넣고 있어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용서, 관용, 사랑, 은혜의 조각을 더하여 주시지요.
그 부분 부분만 바라본다면 과연 나의 죄악된 모습이 더 많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더 많은지 알 수 없어요.
▲경고와 소망, 이 두 가지가 끊임 없이 싸우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의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게 된다면
수많은 모자이크 조각은 우리의 인생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여러분, 바쁜 일상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십시오.
그리하여 역사의 교훈을 얻으십시오.
나의 죄악된 본성을 깨달아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 위해 더욱 노력하십시오.
아울러, 우리의 인생을 최고의 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은 계속 전수돼야 합니다 (1~11)
본 시편이 기록된 시기는 솔로몬의 통치시기로 봅니다.
오늘 본문의 표제는 [아삽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이라는 것은 ‘교훈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삽이 말하는 교훈은 자신의 인생 경험이나 묵상에서 나오는 교훈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과거 실패 역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교훈입니다.
사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자신이나 조상들의 지나간 치부를 들추어내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대로 내려오는 나쁜 성향을 끊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조상들의 죄를 들추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78편은 한 영적 어른이 후손들에게
인생을 왜 소망가운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비유를 통해 교훈하는 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전수해왔습니다.
특별히 출애굽 이야기와 다윗 이야기를 즐겨 해왔는데,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광야에서 훈련시키셔서
약속의 땅으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소개해왔고,
다윗을 통해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세우셨는지를 이야기해왔습니다.
1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아삽이 ‘내 백성이여’(1절)라고 이스라엘 국민들을 향해 노래한 시78편을 묵상하며,
우리는 먼저 이것이 노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래는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불러주기를 원해서 지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공적인 예배 때 이 시편을 낭독함으로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머릿속으로 묵상하는 것도 좋겠지만,
소리 내어 읽고 음을 붙여 함께 흥얼거리는 방법은
말씀이 육화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2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3절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부모 세대가 신앙을 가진 이유는, 조상들이 전해 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 세대는, 또 자녀 세대에게 신앙을 전달해 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결기를 이어지는 4절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4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5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신앙은 계속 전수 되어야 합니다.
후손에게 신앙이 전수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➀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 위함입니다.
➁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기 위함입니다.
➂오직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마음으로만 믿는 게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행위로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8절에서 시인은, 그가 이 글을 쓰는 분명한 이유를 밝힙니다.
조상들과 같은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8절 이하에 보면, 신앙의 역사를 잊어버린 세대들은
"반역하며 고집만 부리는 세대"
"올바른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세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세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과 그 구원의 역사를 올바로 전하여
그것을 기억하고 그 계명을 지키게 하므로
이 잘못된 세대의 본을 따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그 역사를 알지 못하면 타락하게 되고
그 본래적 사명을 잊어버리고 다른 길로 나가게 되기 때문에,
신앙의 전통을 이어 가는 일은 오늘의 신앙을 바르게 세우며,
하나님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게 하는 길입니다
9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10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11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9~11절은 에브라임의 실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의 자손들로서
여호수아로부터 사울 왕이 등극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브라임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부분을 예로 들어 전체를 가리키는 일종의 ‘제유법’으로
단순히 한 지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범한 죄는 두 가지입니다.
1)그들은 병기를 갖추었어도 전쟁에서 물러갔다는 것입니다(9절).
이 말은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게셀에 거한 가나안 거민을 충분히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게 도망을 친 것입니다.
삿1: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지 않고 대신 그들의 협력을 받아서
쉽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날이 물러가면서
굳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빨리 가나안 족속들에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2) 그들이 저지른 두 번째 죄악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한 죄입니다(10절).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대로 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과 여러 가지 일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보고도 못 믿는 불신앙 (12~22)
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소안 들'은 애굽에 대한 별명입니다.
13 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6절 끝에 보면 “하셨으나”라고 했는데,
애굽 땅에서, 홍해 바다에서, 광야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게 하셨으나
‘그러나’ 이스라엘은 배반했다는 말입니다.
17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이스라엘이 지존자를 배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원인은 탐욕 때문입니다. (민11:4)
18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19절에서, 시인은 오늘 후손들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광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결핍입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야라는 단어의 뜻도 ‘텅 빈 넓은 들’입니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식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풍성함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회복입니다.
즉, 결핍과 불안을 상징하는 광야, 이 공허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식탁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은혜, 채워주심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완고하며 패역하며 정직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했습니까? 광야 같은 인생살이 속에서
식탁을 베푸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향해 광야를 가는 동안
식탁을 베푸셨습니다.
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집과 아집과 완고하고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식탁을 베푸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배반한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손수 조반을 만들어 주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면서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양을 먹이라’ ‘식탁을 베풀라’고 명령하셨을까요?
(35절에 답이 나옵니다.)
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22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그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과 능력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어차피 한 번은 죽어야 할 목숨들이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장 큰 복이 하나님을 한번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홍해와 불기둥과 구름기둥 등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면,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자신 문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해야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더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때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영원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23~33)
23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25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26 그가 동풍을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의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27 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 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 같이 내리셨도다
28 그가 그것들을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
29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30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31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범죄하여 그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날들을 헛되게 보내게 하셨습니다. :33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였더라면 약속의 땅을 취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32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33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민 14: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기억과 인간의 망각 (34~55절)
34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6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하나님의 심판은 일종의 영적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34절은 주님이 그들을 죽음으로 심판하셨을 때,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라고 했는데 이것은 회개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이킨 것은 진정한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바위와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다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입술로만 아첨했을 뿐입니다.
“기억하다”라는 말은 그들이 깨달은 것을 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곧 그들이 자신들의 반석과 구속자에게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신뢰한다고 말하면서 그 속에 진정성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입으로 아첨하며 자기 혀로 거짓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정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9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40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쏟아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39
이처럼 하나님은 연약하고 잘못을 범하기 쉬운 인간들을 동정하셔서 오래 참으시고
진노 대신에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인간을 지나가는 바람으로 묘사한 것은 생명의 짧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죽을 인생이며, 잠깐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 죽는 것에서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을 수 없고 반역하는 사람을 다룰 때 오래 참으며 이해해주시는,
선하신 그분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하심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세대가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였습니다.
43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44 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45 쇠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46 그들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47 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48 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
49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시편 78편 전체를 읽어보면 마치 시소를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 또 다시 하나님의 구원,
그러나 인간의 배신.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긍휼, 그러나 인간의 불신앙.
이 두 가지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 사건들의 부분만 바라보면
우리 인생의 결론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긍휼로 끝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78편을 전체적으로 그려본다면,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넉넉히 감싸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노예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양떼 같이 인도해 내시고
광야에서 지도하셨던 일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42).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게 하셨고(44),
그곳으로부터 개구리와 쇠파리 떼를 보내셨으며(45),
그들의 토산물을 메뚜기에게 주셨고(46),
전염병과(50)
우박과 서리와 번갯불과 장자를 죽일 정도의 재앙이 있었습니다(48~51)
하나님이 서커스를 하듯, 내릴 수 있는 재앙들을 모두 펼쳐두시며 자랑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협하는 모두를 적으로 여기사, 꺼낼 수 있는 무기들을 모두 펼치셨던 것이었습니다.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을 이렇게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타내실 것입니다(43).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44).
누군가를 보내주실 것입니다(45).
빼앗아 주실 것입니다(46).
죽이실 것입니다(47).
넘기실 것입니다(48).
하늘에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이 내려올 것입니다(49).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를
노예처럼 착취하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목자 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배우며 살아가는 이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 특별한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54 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55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버리심과 택하심 (56~72절)
56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56~5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 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형태야 말로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실패하는 전형적인 패턴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인류를 그릇된 길로 빠지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인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배반과 실패의 역사로 점철되자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59~64절입니다.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61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62 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63 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64 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
광야를 지나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이 ‘성소의 영역’이었다고 노래합니다.
성소의 영역,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줄을 쳐서 분배해주셨고 살게 하시며’
우리가 예배자 다운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55).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반항했습니다.
지키지 않았습니다.
배반했습니다.
빗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닌 ‘자기 산당’과 ‘조각한 우상들’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58).
우리는 항상 말씀 앞에서 자기객관화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함은 당연히 여기면서,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든지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오늘 걷고 있는 길의 끝이 ‘성소’인지,
자기 신당과 조각한 우상처럼 하나님 아닌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았는지,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는지,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지,
배반과 거짓과 빗나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지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행동에 대해 결과를 물으실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것 같고, 미워하시는 것 같고, 떠나시는 것 같고,
적의 칼에 넘겨주시는 것 같고, 불타는 것 같고,
슬픔만 가득한 상태로 울지도 못하는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문을 노래 부르며 자녀 세대만큼은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유다 지파와 다윗을 택하시다 (65~72절)
65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66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67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0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사무엘이 기름을 붓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으로 갔을 때,
다윗은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모두 선지자 앞에 기름 부음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다윗은 들판에 홀로 남아 집안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은 우리를 정말로 흥분시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다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베들레헴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훌륭한 가문과 학벌과 조건을 갖춘 사람을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양의 우리에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이새의 집에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다윗의 형들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들판에서 종처럼 양을 치는 다윗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대 위를 보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무대 뒤를 보고 있었습니다.
71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마음의 완전함이라 번역했는데,
이것을 NIV 영어 성경에서는 “Integrity”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진실함, 성실함, 순전함, 온전함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보다 더 깊은 의미로 볼 때, Integrity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잘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멋지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심의 진실함(마음의 완전함)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잠에서 깨어난 것과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실 것입니다(65).
대적들을 영원히 욕되게 하실 것입니다(66).
요셉의 아들이었던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은혜로 유다 지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양을 치던 다윗을 택하시고, 취하시며, 이끌어 내사,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종’을 보내셔서 우리를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시다고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시작점에 하나님이 계셨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날에도 모든 것을 지켜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하나님의 종이 구원자 되셔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점을 찍으실 날을 소망합니다.
아삽은 자신이 역사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고민했고,
이를 후대에게 전하기 위해 노래를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고 노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곳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가정, 교회의 시작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아닌지 막막한 날이라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이 참으시면서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 당한 어린양이 되사 세상을 회복시키셨으며,
‘주님 마음의 완전함으로 우리를 길러주시고
주님 손의 능숙함으로 우리를 지도해 주실 것을’ 감사하며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도, 명예도, 인맥도 아닙니다.
바로 신앙의 노래입니다.
앞으로 후대에, 자녀들에게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불러 줄것인가요?
◑관련설교 :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출처-
19절에서, 시인은 오늘 후손들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광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결핍입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야라는 단어의 뜻도 ‘텅 빈 넓은 들’입니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식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풍성함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회복입니다.
즉, 결핍과 불안을 상징하는 광야, 이 공허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식탁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은혜, 채워주심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완고하며 패역하며 정직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했습니까? 광야 같은 인생살이 속에서
식탁을 베푸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광야 같은 인생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란 질문은
매번 우리가 하는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외딴 마을에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고,
순결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온 늙은 두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1871년 한 폭풍이 치던 날 밤, 도망자 행색을 한 프랑스 여인이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이 ‘바베트’라는 이름의 여인이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무급 하녀처럼 시골 노인들을 섬기며 스스로 하녀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12년이 지난 어느 날, 청교도 목사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
꾸준히 프랑스 복권을 응모했던 ‘바베트’가 1등 당첨으로 1만 프랑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바베트’는 그 기념식을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최고급 식재료가 집으로 배달되기 시작하고,
목사의 두 딸은 순결과 금욕의 삶이 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드디어 만찬 날이 되어 12명이 초대되어 식사를 하게 되는데,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단 한사람 외엔 아무도 얼굴에 변화가 없습니다.
감동도 없습니다.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 자매 중 언니를 사랑했으나 끝내 떠난 근위대 소속 로렌스장군이였습니다.
그 장군만 음식이 나올 때마다 극찬과 감동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한 사람 한사람의 얼굴에 미소와 기쁨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최고의 만찬을 접대한 바베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나는 카페 엥글레의 수석 요리사였습니다.
오늘 음식에 내가 가진 1만 프랑을 다 썼지만 나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깨뜨려 식탁을 차린 바베트의 희생을 통해,
목사가 죽은 후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싸웠던 사람들은
화해의 음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치고 서로 용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했던 ‘카페 엥글레’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그 음식들이
노르웨이 한적한 시골에 등장한 것입니다.
지루함, 지나친 금욕, 소찬으로 우울하기 그지없던 마을에
작은 빛이 이 식탁을 통해 비추기 시작합니다.
사실, 바베트의 삶이 프랑스 혁명에 동참함으로 남편도 자녀도 다 잃고
도망 나온 광야의 길이였습니다.
또한 훌륭한 목사의 삶을 이어 살아가느라 사랑도 하지 못하고,
나누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경건의 모양만 유지하며
아무런 능력을 경험하지도 베풀지도 못했던 두 자매의 삶이 또한 광야였습니다. 결핍 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의 희생과 나눔으로 광야에 식탁이 베풀어집니다.
그 결핍의 땅, 노르웨이의 한 시골 마을에 풍성함과 회복의 식탁이 마련됩니다.
그리고 바베트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여전히 무급하녀처럼 살아갑니다. 겉은 변한 것이 없으나,
다만 그들의 일상이 더 이상, 결핍이 아닌, 나눔과 함께함의 식탁이 그들의 삶에 중심이 되었습니다.
▲강원도 태백은 강한 추위와 거친 산세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거친 땅에 하나님의 식탁이 마련되었습니다. 바로, 예수원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의 사모님 되시는 현재인 사모님이「예수원이야기-광야에 마련된 식탁」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33년, 이 모든 세월을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광야에 마련해 두신 식탁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이 어김없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쓸쓸한 바람과 거친 산세로 유명한 태백의 산골자기,
마치 광야 같던 그 땅에 예수원이 세워지고,
하나님께서는 대천덕 신부님의 기도와 희생으로 태백 땅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운데 따뜻한 식탁, 영성과 노동의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두 번에 걸쳐 광야 같은 사람들의 심령에
따뜻한 식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5병2어를 통해 5천 명이 훨씬 넘는 인파속에서 아무것도 없이
결핍만 가득한 그들에게 식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디베랴 호수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 도마, 나타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과 두 제자가 함께 물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물을 끌로 육지로 향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광야와 같은 결핍의 바다에서 예수님께서는 식탁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죄책감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인해 광야와 같은 심령으로 살아가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주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지금 현실에서나
항상 우리에게 풍성한 식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40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우리 생각에는 광야에서 만나만 주로 먹어서 부족함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너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탐욕이 있어서 그렇지, 탐욕을 회개하면, *민11:4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식탁을 날마다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 식, 주, 및 영적인 필요를 포함해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