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God standeth in the congregation of the mighty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he judgeth among the gods.
절대적이시고 영원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재판을 여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신들의 모임’ 가운데 계신다고 하십니다.
‘신’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통치자들’, ‘재판장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1)
그들을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권력과 권한이
‘신’에 비유될 만큼 크고 많기 때문입니다.
또는 세상 재판관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재판하라고
바로 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그런 재판을 너희들이 대신하라고
'신들'이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신이신 하나님의 재판을 대행하기 때문이죠.
이어지는 2절 이하의 문맥을 보면, 이들이 어떤 '이방 신'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세상 권력자를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삼권 분립이 없었고, 세상 권력자가 사법권, 재판권까지 동시에 가짐)
하나님께서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감사(監査)하시기 위해서 재판을 여셨습니다.
권세자들은 이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들이 판결을 굽게 하면,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재판의 모습에서, 재판장은 앉아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 간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재판 때도 앉아 있었고,
드보라 사사가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녀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서서’ 계신다고 하십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말할 때에,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단을 묶었는데,
요셉이 묶은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요셉의 권위에 굴복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시편76: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하나님께서 일어서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어섬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재판장들을 향해
심판을 행하시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권한을 행사하여,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신들과 동일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재판장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2
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1절의 '신들'을 혹시 영적 권세들, 이방 신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더라도
(일단 이 글은,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을 의미한다고 가정합니다)
이 세상의 신들이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든, 인간 통치자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상관 없이 이 세상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이
‘불공평한 판단(재판 판결)’을 하고,
‘악인의 낯을 보는 행위’, 즉 ‘악인의 편을 드는 일’을 한다며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권한을 부여받은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은 언제나 공평해야 합니다.
또한 ‘악인의 낯을 보는 일’ 즉 악인의 편을 드는 일 뒤에는
뇌물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약함과 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반복해서
뇌물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평한 재판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인 아삽은 반복해서 사회의 가장 연약한 사람들,
즉 가난한 자, 고아, 곤란한 자, 빈궁한 자, 궁핍한 자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들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럼 나머지 국민들에 대한 역차별은 아닐까요?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사회의 저변층을 이렇게 언급한 것은,
만약 이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으면,
나머지 사회 전체는 당연히 공정한 대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이 바르게 재판하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도움을 줌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내용 중에,
“그 나라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인 노약자와 어린이, 장애인, 극빈자 등이
얼마나 인격적인 대접을 받고 살고 있느냐”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공생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력자들은, 자신의 통치권, 재판권이
국민이 자기들에게 위임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위임해 주셨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뒤따른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히9:27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5~8절)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서
시인 아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만약 어떤 사회가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면
그 사회의 기초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지진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회에 공의가 무너질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의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지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1 :10에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초를 두어 견고하게 하신 땅이 왜 흔들립니까?
인간이 불의하고 공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땅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가 될수록 공의가 무너지고 세상이 악해져 가기 때문에,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4:7
‘흑암 중에 왕래하니’ ‘흑암’은 불의, 또는 도덕적인 어두움을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의 도덕적인 기준을 상실하여 사는 모습을 뜻하는데, 문맥상 1~4절에 나온, 재판을 불의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터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사6:4절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면, ‘불의한 사회에 심판하시러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터가 흔들린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 불감증’을 많이 얘기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안전사고는 반복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 입니다. 비슷한 말로 ‘도덕 불감증’입니다. 여기엔 교회의 책임이 큽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나 나라의 존립 기반을, 아예 밑바닥에서부터 흔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가 도덕적으로 불감증 상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덕적 흑암 속에 살면서, 도덕적 불감증이 심각한 수준으로 점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터가 흔들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지키는, 교회의 사명은 어느 시대든지 매우 중요했습니다.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I have said, Ye are gods; and all of you are children of the most High. KJV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향해 ‘신들_gods’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해서 정의롭게 재판하고, 공의롭게 행하여,
함께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의한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에게 말씀하십니다. :7
7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사람처럼’의 문자적인 뜻은 ‘아담처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사람을 뜻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이중적으로 쓰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어김으로써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시인 아삽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통치자들과 재판장들도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관의 하나’에서 ‘고관’은 거의 왕(prince)에 준하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어느 순간에 호흡이 멈추고 말았듯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통치자들과 재판장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8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인 아삽은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재판)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힘을 쥐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서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사람을 섬겼듯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낮은 자리로 내려가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통치자들과 재판장들에게 가난한 사람, 고아, 곤란한 사람,
빈궁한 사람, 궁핍한 사람 등,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정의롭게 재판하며,
공의롭게 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눌림을 받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찬송가 563장은 ‘예수 사랑하심을’인데, 3절 가사가 이러합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또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을 지라도,
또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우리를 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혹 우리 중에 실제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큰 힘을 쥐고 있다면,
우리가 늘 의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분이심과
그 자리와 그 힘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위에서 우리를 심판(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혹 나는 높은 자리에 있지도 않고, 힘이 될 만한 무엇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조)부모입니다.
또한 작은 모임에서 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연악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맡기신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가정에, 일터와 학교에,
삶의 자리에 심으심은 거기를 사람들을 섬기는 현장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 사람을 섬기고 세우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16: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레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시편 82편의 묵상 및 적용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전할 때에 이 세상에 재판관들을 향하여 경고하신 말씀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사5:23등
▲1.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시편 82편에 등장하는 신들은 그것이 이방의 신이든, 세상의 권세와 주관자들이든, 인간 통치자들이든 누구에 상관 없이 대체로 다 불의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을 행하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바로 그때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게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배웠는데, 왜 나에게 억울한 일이 많이 찾아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불의하다고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82편을 보면 하나님은 불의한 신들을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어요.
▲2. 세상은 불의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호소하십시오.
세상의 모든 신들은 하나같이 불의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의 신(재판관)들은 단 한명도 없어요.
그러므로 내가 이 사람에게 불의를 당했다고 저 사람에게 가면, 그 사람에게 또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억울함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 8절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8
◑베어드의 역사관
유명한 세계적인 역사가인 찰스 베어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평생 역사를 연구 하면서
역사 연구를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그는 간단하게 4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국가를 심판하실 때, 혹은 멸망시키려고 할 때는
권세욕에 날뛰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교만 하면 망해요.
교만해지기 시작하면 "아하! 끝났구나!" 그렇게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 깨달은 거예요. 그걸 꼭 잊지 말아야 돼요.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이에요.
▲둘째, 하나님의 맷돌이라고 하는 것, 심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천천히 돌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돌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악과 선, 불의와 의를 아주 고르게 골라주시고,
세밀하게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외 없이. 절대 숨길 수도 없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밀하게 역사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 벌이 꽃 속에 들어가서 꿀을 빨아내는데 마치 강도질하는 거와 같죠.
이 꽃, 저 꽃 다니면서 들어가서 꿀을 빨아내는 것,
허가도 받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꿀을 도적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묘한 진리가 됩니다.
이렇게 벌이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면서 꽃가루를 옮겨 놓는단 말입니다.
결국은 도적질하는 것 같으나, 벌은 꽃을 위해서 심부름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악도 있고 도적질도 있고 강도도 있다 말이에요.
수탈하는 일도 있고, 많은 침략도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더 귀한 일,
더 큰 일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전쟁과 재난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어요.
그것을 역사에서 보았노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넷째,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 별빛도 보이지 않고 아주 어두워지고 말 것 같지만
저 앞에 소망의 별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다 망하는 것 같은데 망하지 않아요.
소망의 별이 나타나는 것을 역사에서 보았노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중국 선교도 1966년 문화혁명과 더불어 선교사 추방, 교회 폐쇄로
다 망하는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일을 통해 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
주1)
1절에 등장하는 “신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요? 성경은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과연 다른 신들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1) 이방의 신들 입니다. 세상에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이방 민족이 섬기는 신들이라는 설명이지요.
2) 두번째 가능성은 영적 권세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바울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들을 언급하지요. 엡6:12 바로 그들의 존재라는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3) 세번째 가능성은 인간의 통치자들입니다. 인간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으로 시편 82편을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4) 네번째 가능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들의 불의를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입니다.